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43
외전 193화. 자줏빛 벼락 속 (3)
파팡!
주먹이 허공을 때릴 때마다 매서운 파공성이 터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하는 유상천에게서 거무튀튀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흑고루마공이었다. 백골신마가 자랑하는 절기로, 팔대마공에 올라가 있진 않지만 그 위력과 심오함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조금은 불안정해 보이는 마기.
진신마공을 운용하며 수련하지만, 막상 천마백골수는 구사하지 않았다. 지극히 실전적인 투로로 주먹을 뻗고 움직이지만 그뿐이었다.
파앙!
사납게 뻗은 마지막 일권이 허공에 떠오른 마른 나뭇잎을 가루로 만들었다.
“후욱.”
숨을 고른 유상천이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탓에 등판으로 흙이 스며들었다. 순간적으로 찝찝함이 느껴졌지만, 한숨과 함께 무시했다.
‘아름답다.’
야외 곳곳에 켜 둔 화등이 밤의 분위기를 한층 고상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늘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별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의 별 무리는 달빛조차 압도하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조부의 거처로 들어왔지만, 유상천이 쓰는 곳은 객당이었다.
조부가 쓰는 방 옆에도 많은 방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객당으로 들어갔다. 조부도 그것을 책하지 않았고 그 역시 당연한 듯 행동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 말을 못 하지?’
유상천이 이를 악물었다.
‘왜 당당하게 묻질 못하는 거냐. 치기 어린 반항심도 정도가 있지, 백골수 수련은 왜 또 빼먹는 거야.’
그는 자신의 상태를 냉정히 보았고 나아가 부끄러운 자신을 받아들였다.
정말이지 몸부림을 치고 싶은 부끄러움이랄까. 만약 흑고루마공이 내공의 근간이 아니었다면 그조차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골수를 연마하지 않은 것은 조부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화도 났다. 오랜만에 손자를 봤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는 못 해 줄지언정 형식상으로나마 차 한잔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백골신마는 한 번도 객당 거처로 찾아온 적이 없었다. 처음 이곳 거처로 들어온 이후 얼굴도 보지 못했다.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하기 싫고, 정말이지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유상천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각주님은 괜찮으시려나.”
“괜찮다.”
“컥!”
깜짝 놀란 유상천이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이천상이 객당 마당에 고즈넉하니 뿌리를 내린 커다란 나무에 기대서 있었다.
“각주님!”
“감이 무뎌졌구나.”
“예?”
“이각 전부터 와 있었다. 수련에 집중하나 싶었더니, 주먹질이 너무 난잡하더군.”
유상천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못 봐 줄 만한 수련이었다. 훨씬 고수인 이천상이 보기에는 애들 장난처럼 보였을 것이다.
“각주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아.”
“다행입니다.”
유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내전에 오셔서도 위험천만한 생활을 하고 계셨군요. 광마대주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즉, 네가 나의 목숨을 살린 것이로군.”
“……!!”
“아닌가? 네가 도 대주에게 찾아가 병력을 끌고 온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아셨…… 아, 아니 그럼 아무 대책도 없이 놈들과 부딪쳤단 말입니까?”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도 대주가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남들보다 늦을 줄 알았다. 오히려 형법당주 쪽에서 움직이리라 보았는데.”
“형법당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더군.”
이천상이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유상천은 그가 사령을 떠났을 때보다 많이 말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싸움에서 피로가 컸을 테고, 거기다 며칠 동안 누워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백골 장로님께 들어 보니 광혈 쪽에서 수작을 부렸다고 한다. 형법당주를 빼내기 위해 제법 독한 수를 썼다던데.”
유상천의 표정이 다소 어색해졌다.
“그, 그렇습니까.”
“본디 공무외는 질투가 많고 허영이 강하며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도 대주를 신뢰하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언제든 버릴 수 있어.”
“버리다니요?”
“백골 장로님께 도 대주를 소개해 준 사람이 그다. 도 대주 역시 백골 장로님을 존경하는 기색이었다. 와중에 형법당주가 줄을 바꿔 쥐었다면, 도 대주는 절대 그를 따르지 않을 거다. 아마 그건 형법당주도 알고 있겠지.”
“…….”
“본인이 가지지 못한 걸 가만히 놔둘 성격이 아니다. 아마 어떤 방식으로든 도 대주를 축출하려 들 것이다.”
제 생각을 쭉 풀다 말고, 이천상은 유상천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저…….”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 봤자 부끄러울 뿐이다.
하지만 유상천의 입은 자동으로 열렸다.
“조부님과 많이 가까워지신 것 같아서요.”
“백골 장로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 아마 나름의 쓸모가 있어 이러한 관계를 용인하신 거겠지.”
유상천이 고소를 지었다.
“거 보십시오. 조부님이 워낙…….”
“하지만 괜찮다.”
“예?”
“나 역시 백골 장로님 덕을 보고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끝까지 밀고 가도 될 만한 관계다.”
유상천의 눈이 흔들렸다.
차라리 조부가 각주님을 진심으로 총애하거나, 각주님 역시 그 마음을 알고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 말했다면 씁쓸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각주님은 조부가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한다. 동시에 자신 역시 조부에게서 받아먹을 게 있으니 괜찮다고 한다.
‘그릇이 다르구나.’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저 이천상이라는 남자는 신교 최고위 인사인 마왕조차도 이용하려 들고 있었다. 그에게 잘 보이려 하지도 않았고, 상대가 자신을 이용할 걸 알아도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사람이 냉정해서일까?
유상천은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저것은 이천상만의 도(道)였다. 비리가 판을 치고 힘없는 자가 죽어나는 지옥 같은 신교에서, 본인만의 기준을 잡고 미래를 그려 내는 방식이었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혈육지간의 사정이란 남들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아니라면 누구도 이 관계에 대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이천상이 자신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마인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주님은 역시 각주님입니다.”
“음?”
“여기서도 저에게 깨달음을 주시는군요.”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대목에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깨달음을 얻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라.”
그런 깨달음이 아니었지만, 유상천은 웃으며 답했다.
“예. 꼭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유상천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광마대주님과 끈끈한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이 정도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말을 들려준다면 도헌이 얼마나 기뻐할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유상천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도우러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형법당주가 어떤 식으로든 광마대주님을 축출하려 든다면 많이 힘들 텐데요.”
“그래, 도와야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힘이 없다.”
“예?”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다. 내공이…….”
그때였다.
“여기 있었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백골신마가 유상천을 잠시간 보다가 이내 이천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이 터졌네.”
“무슨 일입니까.”
“도 대주가 형법당 뇌옥으로 끌려갔어.”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유상천도 깜짝 놀랐다.
“죄목은 무엇입니까.”
“상부의 명령 없이, 사사로이 부대를 운용하여 내전에 혼란을 유도했다는 걸세. 그걸 다르게 풀이하면…….”
유상천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내란죄.”
백골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란죄로 처형을 당할 수도 있네.”
잡아 온 명분치고는 지나치게 과격했다. 이천상의 눈에 벼락이 쳤다.
“아주 빠르군요. 보통 단호한 결단이 아닌데.”
“의외야. 공무외는 생각이 많은 녀석이지, 이렇게 추진력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어. 아무래도 깊게 신뢰한 만큼, 빠르게 관계를 정리해야 본인이 잡은 줄에 탈이 없다고 보았겠지.”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일전에 폭혈마공의 비급을 들고 장로님을 찾아왔듯, 공무외는 고민하는 시간이 길 뿐 결단을 내리면 언제나 빨랐습니다. 그리고 과격했지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건가? 도 대주를 향한 신뢰가 대단했거늘.”
“그만큼 그에게 건넨 꿀이 달콤했다는 겁니다. 동시에, 도 대주를 대신할 만한 사람을 벌써 얻었다는 뜻이겠지요.”
“도 대주를 대신할 사람?”
“공무외에게 도 대주는 오랫동안 이기고 싶어 했던 경쟁자이자 본인에게 없는 경륜과 경험, 나아가 인기를 지닌 자입니다. 그렇게나 반목했던 도 대주를 제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그간 분노했던, 혹은 질투했던 만큼 더더욱 도 대주를 아꼈을 겁니다.”
유상천이 묘한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은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깊게 이해하고 관계를 유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냉정하게 사태를 보고, 사연 따위는 제쳐 둔 채 목적만을 따지며 움직이는 이였다.
못 본 새 이렇게나 달라졌을 줄이야.
“다른 관점으로 말하면, 도 대주는 공무외에게 전리품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마음대로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지요. 도 대주를 많이 위했으니, 그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네 말이 맞네. 내 앞에서 도 대주를 그렇게 칭찬하더군.”
“더 높은 직위로 올라간다면 눈치를 보는 수하가 아니라 어떤 일을 던져 줘도 훈련받은 개처럼 움직일 수하가 필요할 겁니다. 적어도 도 대주는 아니지요.”
백골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광마대주직에 다른 누군가를 앉히겠다는 뜻인가?”
“꼭 광마대주직일 필요는 없지만, 도 대주를 내란죄로 엮을 수 있는 명분으로 체포했다면 사실상 대주직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공석이 된 육대의 수장 자리를 본인의 사람으로 채울 수 없었다면 이런 강수는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음, 자네 말이 맞네.”
유상천은 두 사람의 대화를 제대로 쫓아갈 수가 없었다. 배경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덮어놓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수준이 높았다.
“혹시 지금 광마대가 어떤 상태인지는 들으셨습니까?”
“상태라고 할 것까지도 없네. 광마각에서 전원 대기 중이니까.”
“……대기 중?”
“그렇다네. 대주가 잡혀갔으니 일단은 부관이 대주 대리로 앉아 있겠지.”
대주 대리.
대주를 대신한다면, 훗날 대주가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도 대주를 향한 광마대원들의 충성은 대단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들 성격이라면 형법당으로 몰려가 시위를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한데도 대기 중이군요.”
“……!”
“장로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무슨 일을 벌일 참인가?”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내 사람의 목숨을 건드렸으니, 그쪽 심장에도 칼을 겨눌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