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117
“숙부.”
“숙부님.”
싸늘한 음성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수와 완이었다. 가히 지옥 귀신이 따로 없었다. 음산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는 아이들을 보며 화령군은 제 심장이 무섭게 뛰는 걸 느꼈다. 주체할 수가 없다.
“너, 너희들이 어찌…….”
“아우들이 깨 버려서 말입니다.”
“두 녀석이 나란히 울어 대더군요.”
“유모가 아무리 달래도 계속 울어 댑니다.”
“하여 어머니가 직접 달래느라 정신이 없으시죠.”
한층 더 매섭게 저를 노려보는 수와 완의 눈빛에 숨이 턱 하고 막혀서 어쩔 줄 모르는데 어느새 다가온 원우가 다시 화령군을 살려 주었다.
“하, 어쩔 수 없지. 꼬맹이들, 너희도 포구에 같이 갈 테냐?”
“정말 우리 데려갈 거야, 삼촌?”
“우리 포구에 데려가 줄 거야?”
아이들의 눈동자가 단박에 반짝거렸다. 떨떠름한 표정의 원우가 수와 완에게 다짐했다.
“지난번처럼 말썽 피우면 안 된다.”
“삼촌, 그건 말썽이 아니었는데.”
“가짜를 가짜라고 말한 게 왜 말썽이야?”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조카들을 보며 원우가 짐짓 눈을 부라렸다.
“그러다가 너희 큰일 날 뻔했잖아.”
“괜찮아. 아버지가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하는 거라고 하셨어.”
“사내가 옳은 일을 행하는 데 두려워하는 건 비겁한 거라셨는데.”
지난번 큰 배가 들어왔을 때 원우는 오늘처럼 제 어미 품을 갓 난 아우들에게 빼앗기고, 외조모도 신열로 누워 있는 탓에 심통이 난 수와 완을 데리고 포구에 간 적이 있었다. 온갖 나라의 사람과 각양각색의 신기한 물건이 모이는 포구는 두 아이에게 신나는 놀이터와 같았다.
그러나 위험한 일도 많아서 어린아이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었다. 또한 호기심 많고, 거침없는 아이들이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람파국(覽波國)에서 들어온 상인들이 포구의 상가에서 가죽신과 가죽으로 만든 갑주를 잔뜩 사고는 그 나라의 은화 한 자루를 지불했는데, 늙은 갖바치가 나중에야 그 은화가 가짜라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그들을 쫓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선선히 인정할 리 만무했다.
어린 손녀딸을 키우며 근근하게 살아가던 갖바치 노인은 사납고 거칠기로 이름 높은 람파국 상인들을 찾아가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람파국 상인들은 오히려 갖바치 노인이 자신들을 모함했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노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거칠게 주먹을 휘둘렀다.
평소에도 람파국의 상인들은 무시무시하도록 큰 칼을 차고 다니며 사소한 시비라도 붙었다 하면 상대방을 반쯤 죽여 놓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자들이라 주변의 누구도 감히 나서서 말릴 수가 없었다. 또한 갖바치 영감의 말대로 은화가 가짜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여 지켜보는 이들 모두 안타까워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수와 완이 톡 튀어나와서는 그 은화가 가짜라는 걸 입증했다.
그 가짜로 의심되는 은화를 잡고 모양과 빛깔을 살펴보더니 다른 은화로 그 테두리를 두들겨 보기도 했다.
얼마 전 마을 상인 몇몇이 여락재로 시중에 유통하는 가짜 은화를 가져와서는 아버지에게 보이고 대책을 의논한 적이 있었다. 그때 곁에서 어른들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귀동냥한 까닭에 아는 것들이었다.
람파국 상인들은 즉시 아이들을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수와 완은 태연하게 말했다.
람파국 상인들이 칼을 들어 보이며 무섭게 윽박을 지르는데도 수와 완은 눈도 까딱하지 않았다. 조금도 기죽거나 물러섬이 없었다.
아이들은 주변에 서 있던 상가의 주인에게서 은화 하나를 빌려서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각각의 은화를 긁어서 흠집을 낸 후 거기에 초산과 염산 섞은 것을 떨어뜨렸다. 상인들 돌아간 후에 아버지가 몇 날 며칠을 골몰하여 발견해 낸 방법이었다. 그때 수와 완도 수십 권의 온갖 책을 뒤지거나 이런저런 실험하는 일을 도왔다.
그 순간 본색을 드러낸 람파국의 상인들이 수와 완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 하였다. 때마침 제가 물건을 흥정하는 동안 아이들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깨닫고 찾아 헤매던 원우가 그 광경을 목도하였다.
하여 람파국 상인들을 향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들고 휘둘렀으나 아무래도 수적으로 열세였다. 어린 청년 혼자서 예닐곱 명의 거친 해적을 어찌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원우는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지만, 흠씬 두들겨 맞고 급기야 칼에 찔릴 위기까지 몰렸다. 그때 홀연히 한 사내가 나타나 삽시간에 그 해적들을 홀로 제압하였으니, 바로 수와 완의 아버지이자 여락재의 가주였다.
그때 다친 자리가 아직도 쑤시는 원우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 매형이 제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물론 어린 조카들이 큰 봉변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 사정을 다 들은 매형은 어린 아들들을 나무라지는 않았으나, 안채 출입 금지에 이어 포구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호기심 왕성하고, 특히 이국의 낯설고 신기한 문물을 좋아해서 포구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쌍둥이들에게는 퍽 효과적인 벌이 되었다.
“하아, 이놈들! 오늘은 아무튼 너희 아버지 안 계시니 경거망동 말라고. 알았어?”
원우가 다시 한 번 경고하자 수와 완은 저희끼리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때도 아버지 화 안 내셨지.”
“어, 의도는 좋았다고 하셨어.”
“맞아. 방법이 서툰 건 우리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고 하셨지.”
“그러다가 우리 다치면 어머니가 엄청 슬퍼하실 거라고 하셨고.”
“아버지도 마음이 매우 아플 거라고 하셨어.”
“그날도 우리 안고 아버지 퍽 놀란 표정이셨지.”
그러더니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삼촌, 그래서 우리 앞으로 많이 조심할 거야.”
“맞아. 우린 이제 어린애 아니야, 삼촌.”
그런 조카들과 입씨름해 봤자 저만 손해라는 걸 잘 아는 원우는 못 말리겠다는 듯 짧게 웃고 말았다. 화령군이 옆에서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여 아이들을 앞세우고 걸어가면서 지난번 일을 들려주자 화령군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보통 녀석들이 아니로세, 저놈들은. 그래 형님이 제때 안 오셨으면 정말로 큰일이 날 뻔하지 않았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한데 형님이 녀석들의 포구 출입을 엄금하라 하셨는데 이리 데려가도 되겠는가?”
“저희들도 조심하겠다고 약속했고, 얼마 전에는 매형이 직접 녀석들 데리고 포구에 다녀오시기도 했으니까요. 오늘은 제가 더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죠, 뭐.”
“사돈도령은 참으로 좋은 외숙이로구먼.”
어린 조카들 마음 헤아려 주는 원우를 보며 화령군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수와 완이 고개를 돌리며 원우에게 물었다.
“삼촌, 그런데 파사국에서 들어오는 과일 이름이 뭐야?”
“거기서도 복숭아나 그런 게 들어와?”
“석류라고 하더라.”
“석류? 그 작고 빨간 알갱이 많은 거?”
“시금털털해서 맛도 없던데.”
“파사국의 석류는 아이 머리통만 하게 크고 안에 든 알갱이가 붉은 유리구슬처럼 고운데 달고 즙이 많다 한다.”
원우의 설명에도 아이들은 작은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알갱이 일일이 까서 먹으면 불편하지 않아?”
“나는 작은 씨 뱉어 내는 것도 싫은데.”
그러나 이어진 제 삼촌의 말에 아이들 표정이 확 달라졌다.
“그 석류가 말이다. 여인네들 몸에 특히 좋은 과일로 유명해 예로부터 바다 건너 대륙에서는 왕실에만 진상하던 귀한 과일이라 하더라.”
“아, 그렇구나. 여인의 몸에 좋구나.”
“그래서 아버지가 구해 오라 하셨구나.”
“어머니 드시면 좋겠다.”
“맞아. 어머니 몸에 좋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