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86
무자리의 손에서는 뚝뚝 붉은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젊은 장번내관은 곤란하여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처마 그늘에 조용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상선을 쳐다보았다. 상선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 젊은 내관은 허둥지둥 달려갔다.
“별운검, 이리 오라.”
그러나 그새를 못 참은 무자리는 지근에 서 있던 별운검을 불러다 대련을 하기 시작했다. 가슴속에 쌓인 울화를 풀려면 아직도 멀고 멀었다.
휙! 즉시 손날이 날아오자 별운검은 빠르게 몸을 숙이며 피했다가 팔을 들어 올려 막았다. 퍽퍽! 탁! 감히 지존의 옥체를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제 기량을 전부 발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별운검은 곧 제가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전력을 다해 상대한다 해도 임금을 이길 수는 없었다. 지난번 임금과 검을 들고 대련했던 다른 무관의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헉헉!”
젊고 강인한 별운검은 곧 비 오듯 땀을 흘렸다. 두 다리가 무거웠다. 그러나 성후가 미령하여 행궁으로 피접 온 임금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매서운 기세가 변함없었다. 결국 별운검은 풀썩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다.
“되었다. 말을 준비하라!”
그러자 임금이 당장에 소리쳤다. 내관이 말을 끌고 오자 땅을 박차고 가볍게 휙 올라탄 임금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 달리면서 별운검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능숙하게 말을 몰아 달리는 임금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 뒤를 따르기도 버거웠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저, 전하! 홀로 급히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전하!”
삽시간에 시야를 가리는 빗줄기에 별운검이 다급하게 불렀으나 임금은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말을 몰아 행궁 뒤 숲의 가팔막을 올라섰다.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에 이미 산길은 감탕밭이었다. 그러나 곤죽 같은 진흙탕을 거침없이 달렸다.
“전하!”
내금위의 군사들도 미처 따라오지 못했다. 내관은 일찌감치 멀어지고 없었다. 하여 별운검이 필사적으로 말을 몰았으나 끝내 임금은 검은 어둠과 빗줄기 사이로 멀어져 버렸다.
* * *
며칠을 거듭해서 내리는 장맛비가 사방을 에워싼 밤, 온양행궁의 내정전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은밀하게 빠져나왔다. 왕의 침소 바로 곁을 지키던 상선도, 별운검도, 행궁을 지키는 군사들도 그 그림자의 움직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몇 각이 흘러 이내 빗발이 수굿해지고, 주변이 흐릿하게 밝아 올 무렵 다시 내정전으로 숨어드는 그림자의 기색을 별운검이 눈치챘다.
“누구냐!”
별운검은 그림자를 쫓았으나 찰박찰박 물 고인 땅을 딛는 소리가 가볍다. 그만큼 몸이 빠르고 날래다는 의미였다. 그림자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별운검 또한 무공이 고강하였으니 능히 비바람을 뚫고 그림자를 뒤쫓았다. 그러다 진흙이 되어 버린 행궁의 행랑 앞에서 별운검은 이윽고 그림자를 향해 표창을 던졌다.
“네놈이 감히 주상 전하가 거하시는 궁에 침범하다니!”
쉭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단검을 손쉽게 칼로 쳐 내는 그림자. 그러나 별운검은 연달아 표창을 던졌다. 비록 그림자를 맞히지는 못했으나 그림자의 발을 묶어 둘 수 있었다. 이내 행궁을 호위하던 군사들까지 별운검의 외침을 듣고 달려오니, 그들까지 합세하여 그 그림자를 에워싸기 직전이었다.
“저놈을 잡아라!”
순간 홱 하고 몸을 돌린 그림자가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놀라울 정도로 큰 물보라가 일었다. 검기로 물을 퍼뜨린 것이다. 단 한 순간, 별운검과 군사들의 시야가 가로막혔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눈을 들었을 때, 검은 그림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읏! 제길! 놈을 쫓아라! 분명히 궁 안에 있을 것이다!”
군사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보던 별운검은 문득 회랑의 지붕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곧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 * *
밤새 쏟아지던 빗줄기는 어느덧 그보다 가늘어졌지만, 검회색 하늘에서 비는 여전히 우릉우릉 울어 대고, 바람은 구름 속에 숨어 듣그럽게 흐느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깨어 있던 서현은 내정전 뒤편의 이슥하고 좁은 뜰에 나와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궁이라면 번을 도는 내관이나 궁녀에게 들켜 눈치를 보았을 것이나 행궁은 그보다는 자유로웠다.
서현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갈마들고 있었다.
‘그니가 나를 미워함은 당연하다.’
또다시 탕실에서 내쫓긴 이후로 임금은, 아니 무자리는 다시는 서현을 찾지 않았다. 다만 궁과 달리 행궁의 내정전은 같은 처마 아래 임금의 처소와 그녀의 처소가 있는 탓에 간혹 문풍지 너머로 오가는 임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처마 아래라도 어디 궁이 초가삼간이던가.
서현은 그저 나인들 떠드는 소리로 오늘은 임금이 탕실에 들었는지, 아니면 인근 고을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과시(科試)를 열고 효자와 효부에게 상을 내렸는지, 혹은 인근 산야에 나가 말을 탔는지 귀동냥할 뿐이었다. 매일 밤 술상이 침소로 들어간다는 말도 들려오곤 했다.
한 번은 내정전 뜰로 나갔다가 새벽 어스름 속에서 칼을 휘두르며 몸을 움직이는 임금을 먼발치에서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으나 우연이라도 마주치거나 스치는 법이 없었다.
서현은 홀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해서 무자리가 임금인 것인지 서현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처럼 간교한 대비의 계략에 빠져 끌려온 것일까? 그러나 마땅히 계신 금상과 어찌 맞바꿀 수 있었으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좁은 소견으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임금이 무자리임은 분명했다.
세상 어느 계집이 저와 몸을 나누었던 사내를 착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몸에 있는 그 수많은 상처를 그린 듯 부러 아로새길 수도 없다.
‘그 몸짓이, 그 체취가, 그 열기가 모두 나의 착각이라 하여도 나는 안다. 그니가 맞아. 분명히 맞아.’
하지만 무자리는 제게 드러낼 생각이 없는 것 또한 분명했다. 그러니 서현이 먼저 무자리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나와 저 깊은 산골 오두막에서 살던 그 백정이 맞습니까. 나와 봄꽃 피는 마당에서 혼인하자던 그니가 맞습니까, 라고.
서현은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비꽃을 제 손바닥에 그러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빗물이 다시 댓돌에 떨어져 내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낙숫물에 검은 그림자가 어렸다가 흐트러지더니 불쑥 아래로 떨어졌다.
첨벙! 물보라를 일으키며 서현의 눈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복면의 사내. 그러나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무자리였다.
그 역시 당황한 듯한 눈길로 서현을 응시했다.
“어찌…….”
무자리가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내 빗소리를 뚫고 웅성거리는 군사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서현은 무자리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늘어진 눈매가 그녀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가요.”
그러나 서현의 말에 그대로 따랐다. 서현은 즉시 전각 뒤편으로 돌아가서는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자신의 처소와 연결되는 좁은 툇마루가 드러났다. 평소에는 막아서 그 출입을 금하는 문이었으나 새벽에 드나드느라 서현이 몰래 열어 둔 것이었다.
다행히 복도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인 서현은 곧 제 침소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무자리에게 말했다.
“벗어요, 어서.”
무자리가 검은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그는 이내 말없이 제가 입고 있는 검은 옷과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도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비단으로 지은 하얀 저고리와 바지가 드러났다. 임금의 옷이었다.
문득 침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서현은 무자리가 벗은 옷과 칼을 재빨리 병풍 뒤로 숨기고는 즉시 제 옷도 벗기 시작했다. 당의와 치마를 벗고 머리에 꽂은 옥비녀를 서현이 뽑자마자 문밖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원마마님, 대령상궁이옵니다.”
“무슨 일인가?”
“기침하셨으면 안으로 들어도 될는지요?”
“아니 된다. 아직 곤하구나.”
서현이 힘주어 말하면서 다시 무자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행궁에 변고가 생겨서 그런 것이니 잠시 안으로 들겠사옵니다.”
“네 어찌 그리 방자한 것이냐! 분명히 아니 된다 하였다!”
“제 잘못은 나중에 벌하시고, 일단은 마마님을 뵈어야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문이 활짝 열렸다.
“방금 나인 아이 하나가 보았다고 하온데, 마마님께서 어떤 사내를 끌고 안으로 드셨다고…… 헉!”
기세등등하게 들어서던 대령상궁은 서현을 부둥켜안은 채 보료 위에 누워 있는 무자리를 보고는 기함해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네 감히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무자리가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자 대령상궁은 물론 그녀에게 제가 본 것을 고해바치고 뒤를 따라 들어온 아지가 대경실색하여서는 즉시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저, 전하! 주,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당장 물럿거라. 방약무도한 너희들의 처벌은 내 잠시 후 숙원과 논의하여 내릴 터이니.”
벌벌 떨면서 대령상궁과 나인들이 물러가고 난 후, 곧이어 상선이 방문 앞에 와서 소란이 있었음을 알렸다.
“알았다. 내 숙원의 침소에 있을 것이니 내금위와 장용영에 일러 궁의 주변을 샅샅이 뒤진 차후에 보고토록 하라.”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나자 무자리의 가슴에 안긴 채 엎드려 있던 서현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무자리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전하, 이만…….”
서현이 막 몸을 일으키려 하자 더욱 바짝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본래 하나인 것처럼 두 몸이 포개졌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것은 얕은 숨결뿐이었다. 뜨거운 눈길로 서현을 응시하던 무자리가 느닷없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서현에게만 겨우 들릴 만큼 나지막하나 뚜렷한 음성이었다.
“답하라. 너는 누구냐?”
“신첩은…….”
당황한 서현은 머뭇거렸다.
“똑바로 답하라. 너는 누구냐?”
거듭되는 무자리의 질문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서현은 곧 깨달았다. 그러나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전하, 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고 담에도 눈이 있다 하였…….”
“다시 묻겠다. 내 앞에 있는 너는 누구냐?”
무자리가 단호하게 서현의 말을 잘랐다. 그것은 경고였다. 또한 서현은 이것이 그가 제게 주는 단 한 번의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하여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저를 무섭게 노려보는 무자리를 향해 답했다.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가냘픈 음성은 마치 한숨처럼 들릴 정도였다. 울음 같기도 하였다.
“저, 저는 문…… 가 서현이옵니다.”
잃었던 제 이름을 제 입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무자리 앞에서 밝히노라니 서현은 그만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솟았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서현은 제 눈물이 무자리의 뺨에 떨어질세라 고개를 돌리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무자리도 막지 않았다. 그러나 곧 다시 그녀의 허리에 억센 팔을 휘감아 왔다. 다시 두 몸이 겹친 듯 맞닿았다. 무자리가 서현에게로 바짝 고개를 기울였다.
“전하…….”
무자리의 질문은 끝이 아니었다. 그가 새로이 물었다.
“하면 나는 누구더냐?”
서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가슴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단 한 번도 부른 적 없던 애달프고 그리운 이름을 서현은 처음으로, 바로 그 사람 앞에서 제 입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서현은 지금도 방문 앞에 대령상궁이, 혹은 대비의 사람 중 그 누군가가 바짝 귀를 대고 있으리란 걸 충분히 알았다. 과연 무자리의 어깨 너머를 재빨리 바라보자 내관이 앞을 지키고 서 있을 텐데도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니, 그 내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