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Of Witches RAW novel - Chapter (935)
EP.941 #203_교차로(10)
#935
1.
단언컨대.
많고 많은 공적 중 에아 사달멜리크만큼이나 티페레트의 두려움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존재는 몇 되지 않는다.
한순간의 유혹에 혹해서 한 견습마녀를 죽인 이래 에아의 인생은 대차게 꼬였다.
미친 복수귀가 되어 쫓아오는 티페레트 탓에 지닌 능력에 비해 변변한 사업을 일구지도 못했다.
어느 한 곳에 공방을 두지 못하고 일평생 떠돌며 도망쳐야 했다.
이 지긋지긋한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에아 나름대로 힘써왔던 일도 있다.
죽은 척 위장을 해봤다.
인질을 잡으려고도 해봤다.
허나 기만 작전은 무의미했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집념 앞에 얄팍한 눈속임은 의미가 없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쥐어짜 세력을 규합했다.
용병으로 활동하던 공적들을 고용해 티페레트를 역으로 사냥하려고도 해봤다.
허나 계약 마법은 일대 다수에 약하다는 통념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을 때의 이야기였다.
진노와 함께 휘둘러지는 검은 티페레트를 사냥하기 위해 모인 십수 명의 공적을 모조리 도륙 냈다.
에아는 나름 악명을 떨치던 마녀들이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던 악몽을 똑똑히 기억한다.
막을 수도, 멈춰 세울 수도, 피할 수도, 기지를 발휘해 간극을 극복할 수도 없는 압도적인 무력.
실로 공포스러운 존재.
그게 엘로아 티페레트였다.
“역시. 그 정도는 해줘야 당신이지.”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다 죽어가던 티페레트 공작의 몸에 갑작스럽게 마력이 차오르는 것을.
숨겨두었던 최후의 한 수를 내보이는 것을.
“이제야 발악할 생각이 든 거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재회한 엘로아에게 에아는 내심 허탈함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힘이 빠져있었다 한들 마주하는 것만으로 다리의 힘이 풀리던 독기는 어디 갔는가?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시선은 무엇인가?
플레이타임 내내 집중하던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맥거핀 덩어리만 남기고 끝난 기분이었다.
목숨 구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오랜 원수에게 최후를 능욕당하며 굴욕에 젖은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숨을 헐떡이는 엘로아를 바닥에 눕혀둔 뒤 그녀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견습마녀가 어떤 식으로 최후를 맞았는지 들려주고 싶었다.
빈 껍데기 같은 티페레트를 죽이고 싶던 게 아니란 의미다.
“제대로 된 클라이맥스네.”
달갑다.
싱숭맹숭했던 이 복수극에 마지막 한 스푼의 조미료가 더해진 것처럼.
허나 두려울 건 없다.
최후의 발악이라 한들 결국 회광반조.
촛불은 전부 타오르기 전 가장 밝게 빛나며 그 순간은 덧없이도 짧다.
“당신이….”
에아의 말이 중간에 뚝 끊어졌다.
-철퍽
기묘한 정적 사이에서 울린 물이 찬 장화로 고깃덩어리를 밟는 소리.
에아는 멍하니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보았다.
가로로 갈라진 살갗의 균열로 주르륵 내장이 흐른다.
한참이나 뒤늦게 퍼지는 통증.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에아는 엘로아를 보았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초연한 두 눈동자.
결연한 의지로 다 물린 입술.
가시화될 만큼 격렬하게 타오르는 마력의 여파는 마치 그녀의 주위에 벚꽃이 나부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마도 검을 휘둘러 에아의 배를 갈라냈다.
에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장면을 보고 있었음에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발.”
쭈뼛 소름이 돋았다.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선다.
두려움에 대한 오한이었으며, 동시에 바라마지 않던 클라이맥스에 대한 전율이었다.
이 모습이야말로 바로 에아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티페레트, 무신이다.
“난 당신을 죽이고, 더욱 높은 자리에 오르겠어.”
티페레트를 죽이고 비참했던 과거를 청산한다.
무슨 짓을 해도 도달할 수 없던 24 위계라는 위대한 경지로 도약한다.
그 순간 엘로아의 모습이 에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2.
-퍼석!
에아의 머리가 금속배트에 얻어맞은 수박처럼 폭발한다.
아무리 마녀라도 즉사를 의심치 못하는 부상.
정면에서 엘로아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건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럼에도 에아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이 ‘피안화의 들판’이 있기 때문.
21 위계부터 22 위계까지, 22 위계부터 23 위계까지.
에아는 2단계의 등위에 해당하는 능력을 모조리 피안화의 들판을 구축하는 것에 투자했다.
일신의 전투력은 21위계에 그칠지라도 엘로아 하나를 확실하게 봉쇄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었다.
즉, 두 단계의 위계를 오직 ‘대 티페레트 마법’으로 투자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로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양자 간 계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단일 대상에게 무시무시한 화력을 퍼부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만약 피안화의 들판이 그저 ‘회복’ 마법이었다면 계약은 영구히 유효하겠지.
부상을 회복한 에아는 결국 연속적인 개체이니 계약의 강제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허나 연속성을 포기하면 경우가 다르다.
한번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육신을 써내려간다면 계약은 종료된다.
시체에 맺어진 계약을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뿐만 아니다.
단순한 회복과 달리 부활은 ‘연꽃’에 저장된 마력과 영혼을 활용해 모든 마력과 마력 회로의 피로도까지 복구한다.
이 역시 장기전에 약한 엘로아를 위한 공략법.
필승을 장담할 수밖에 없는 철두철미한 덫.
이게 사냥꾼 에아 사달멜리크의 사냥법이다.
“죽어…!”
따라서 에아는 두렵지 않았다.
사방에서 꿈틀거리는 리본의 대공세.
융단폭격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각양각색의 십자 포화.
어차피 금방 쓰고 죽어버릴 육신이다.
한번 쓰고 버려버릴 육신에 뒷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모든 마력을 쥐어짜고 제 신체를 박살 낼 수준으로 무리하게 구사한 마법은 통상적인 21위계보다 분명 강하다.
올가미처럼 엘로아를 옭아매고 끝내는 지쳐 쓰러지게 할 필승의 계책.
-휘리리릭!
수백 가닥의 리본 중 절반가량은 ‘촉각(觸角)’으로 배치했다.
설령 에아가 시인하지 못했다 한들 촉각의 감지 범위에 들어선 순간 자동으로 반응하게끔 배치했다.
그러나.
-퍼석!
닿지 않는다.
마치 허깨비처럼, 빈틈을 찾는 게 더 어려운 공간을 단숨에 주파한 엘로아의 강권이 에아의 심장을 터뜨린다.
에아는 자신의 심장이 터져나가는 마지막 순간 간신히 옷자락 정도를 보았을 뿐이다.
원래 이만큼이나 강했던가?
이토록 까마득한 벽을 느낄 만큼 엘로아 티페레트는 두려운 인물이었는가?
“크윽…!”
의문 속에서도 에아는 해야 할 일을 했다.
부활이란 곧 무수한 코인이 있음을 뜻한다.
한번 삐끗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전장 속에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사기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새로이 부활한 신체에 정신이 깃들자마자 전략을 수정했다.
제대로 시인할 수 없다면 무차별 난사를 하면 되는 노릇이다.
-기이이익!!!
허공에서 꼬아지는 리본.
여리여리한 모양새로는 예측할 수 없는 무식한 장력과 탄성.
한껏 꼬아져 나팔꽃의 봉우리처럼 변했던 리본 가닥이 스프링처럼 사방팔방으로 쏟아진다.
-쾅! 콰광! 쿠과과과!!
하나는 얻어걸리겠지.
이런 식으로 부상을 축적한다면 지금보다야 엘로아의 움직임을 늦출 수 있겠지.
라는 발상의 전략.
“시발…! 이게 도대체 뭔 말도 안…!!!”
그럼에도 닿지 않는다.
술자인 에아조차 예측할 수 없는 종횡무진인 궤적도 다가올 죽음을 멈춰 세울 수 없다.
-콰직!
마치 낫처럼 에아의 목에 걸린 계약검의 검 끝이 핏빛 분수를 뿜으며 스쳐 지나간다.
대응하는 방식을 바꿔도.
전략을 새로이 수립해도.
목숨을 동전 삼아 시행착오를 거듭해도.
마치 그런 운명이라는 것처럼.
두 사람이 존재할 때부터 그럴 수밖에 없게 정해진 것처럼.
티페레트는 반드시 접근한다.
티페레트는 반드시 벤다.
“그래…! 니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에아는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과정 중 하나이다.
결국 회광반조는 화려하게 타오르는 최후일 뿐.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고통은 한순간뿐이다.
부활을 파훼하는 방법 중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 정신붕괴인 만큼, 에아는 전생의 정신적 후유증이 환생한 육체에 도달하지 않게끔 방비했다.
엘로아가 발악을 하면 할수록 힘이 빠지는 건 그쪽.
피안화의 들판은 연꽃에 축적된 생명력을 동력으로 삼는다.
에아가 축적해 둔 횟수는 총 1,129회.
그리고 지금 남은 건….
“…언제 이렇게까지….”
고작 599회.
에아는 숨을 삼켰다.
그제야 주위가 눈에 들어온다.
끝이 없을 것 같던 피안화 중 절반이 듬성듬성 시들어 있다.
그 대신 잘려나가고 신체 어딘가가 터져나간 에아의 시신이 폐허 곳곳에 나뒹군다.
덜컥 불안감이 번졌지만 냉정한 이성이 그것을 다잡는다.
이 잔혹한 세계에 기적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궁지에 몰린 선이 정의의 힘을 빌려 악에게 멋진 역전승을 거두는 건 낙천적인 환상이다.
고작해야 발악할 힘만을 남겨두었던 티페레트다.
시간은 에아의 편이다.
아니.
에아의 편이어야만 했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포착할 수 없었던 엘로아.
에아는 엘로아가 멈춰 서고 나서야 그녀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너, 뭘 한 거야….”
그만한 소모를 했음에도 사그라지기는 커녕 더욱 활활 타오르는 분홍빛의 불꽃.
제 모든 것을 연료 삼아 불태우듯 일렁이는 마력을 휘감은 엘로아를.
그 중압감을 마주하기만 해도 심장이 죄어온다.
그저 비스듬히 검을 든 채 깨끗한 눈동자로 올곧게 에아를 보고 있을 뿐인데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까마득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그제야 에아는 엘로아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힘’을 움켜쥐었다는 걸 느꼈다.
“위계는… 위계라는 건 그렇게….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지금의 에아로서도 짐작할 수 없는 경지.
그녀와 대적한 그 어느 순간보다 까마득히 벌려진 격차.
에아는 피안화의 들판을 얻게 된 이후 처음으로 뒷걸음질쳤다.
“더 보여줄 것은 없는 겐가?”
엘로아는 새파랗게 질린 에아를 증오도, 원망도, 분노도, 경멸도 덜어낸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 없는 망설임과 배회 끝에도 결국 부러지지 않았던 신념이 이 두 손에 있다.
그렇기에 엘로아의 눈에 에아는 원수가 아니었다.
증오해야 할 대상조차 아니었다.
너무나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그저 제 목숨을 부지하며 욕망을 채우기 급급한 가련한 인생.
그저 툭 튀어나온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본래 더는 살아날 수 없을 때까지 죽일 심산이었으나 굳이 드잡이할 필요 없어졌다.
엘로아의 눈은 에아의 부활마법에 근간까지 꿰뚫고 있었으니.
죽여도 죽여도 부활한다면 해결법은 심플하다.
에아 사달멜리크라는 존재 자체를 베어내면 된다.
“그렇다면 지긋한 인연도 끝을 내지.”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던 마력이 한 자루의 검에 오롯이 집중된다.
거기에 요란함은 없다.
언뜻 보기엔 거창한 힘도, 묘리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마법일 뿐이다.
그러나 에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건 위험하다.
안일하게 마지막 즈음 도주할 생각 따위를 해서는 안 됐다.
당장 등을 돌려 도망쳐야 했다.
“자, 잠깐…! 제안이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제안, 제안이라.
이런 순간에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으며 또 살아가고자 했을까?
교활하게 혓바닥을 놀리며 동요를 유도하려는 에아의 다급함은 엘로아에게 닿지 않는다.
“이 연꽃, 이 연꽃이 뭔지 알지?”
“알고 있네.”
“좋아, 일단 사과할게. 무릎이라도 꿇을까? 구두라도 핥아? 다 좋으니까. 이 연꽃으로 당신 제자를….”
알 필요는 없다.
지금은 그저 의무를 행해야 할 때.
“그대의 죄. 단죄해야 할 악. 그뿐이네.”
피할 수 없이 다가온 결착의 순간.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리본을 뽑아내며 악을 지르는 에아.
“시바아알!!! 내가 이렇게 죽을 것 같아!!!”
추할 정도로 일그러진 삶을 향한 집념.
목젖이 드러날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녀에게.
“그래.”
엘로아의 검이 비스듬한 사선을 그리며 침묵을 고했다.
“그대는 여기서 죽을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