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02
제 202 화
세룬이란 이름에 덴 케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강한 울림이 땅을 뒤덮었다.
덴 케이는 제 앞에 적이 있단 사실도 잊고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서늘한 기운에 뒷목이 선뜩선뜩했고, 땅이 점점 거세게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4층 탑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한 그가 이를 악물며 진유를 노려봤다.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글쎄요……. 이즈네와 해우가 움직이고 있으니, 성격대로 깔끔한 처리를 하려는 게 아닐까요?”
“진유!”
케이의 외침에 진유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당신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오랜만이네요. 역시 제가 온다 하길 잘했어요.”
마치 재미난 것을 본 듯한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그는 그렇게 작게 웃더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케이를 노려봤다. 눈동자로 날카로운 이채가 감돌았다.
“제가 온 이유를 물었죠?”
“…….”
“경고를 하러 왔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모두 다 얻었어요. 더 이상 숨어 있을 이유도 없죠.”
진유가 오른쪽 팔을 가볍게 뻗은 뒤, 가슴 쪽으로 끌어모으며 인사했다. 신하가 주군께 바치는 인사와 비슷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충성과는 달랐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신의 존재는 참으로 불편하고도 거치적거리죠.”
차분한 목소리가 온실에 퍼졌다.
“그러니 옛정을 생각해 말씀드립니다.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클레이즈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대한 게 밝혀지면, 아니, 우리가 밝혀낸다면 이 학교는 존재 자체가 무너지게 될 테니까요.”
“…….”
“모든 것은 늄의 숭고한 진리를 위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유는 허리를 편 뒤, 케이를 응시했다. 곧이어 눈매를 옅게 휘며 웃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 미소에 케이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그럼, 이만.”
가벼운 묵례와 함께 진유가 몸을 돌려 온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케이는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분을 삭였다.
지금 당장 저 목을 비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진유의 말대로 케이는 그 어떤 힘도 쓸 수 없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 학교를 지키기 위해, 이 학교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늄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움직인다는 건 클레이즈의 붕괴를 의미했다.
“늄의 숭고한 진리…….”
여럿의 인생을 무너트린 그것이 이제는 이 학교의 존망을, 역사가 숨기려 했던 진실을 건들려 하고 있다.
그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가 상처를 만들었다. 붉은 핏줄기가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유독 도드라지게 떠오르는 한 사람.
케이는 생애 처음으로 신을 찾으며 유림이 그리고 클레이즈의 모두가 무사하길 빌었다.
***
채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일으켰다.
유림은 이를 악물고 팔을 휘둘렀다. 한쪽 검으로 이즈네의 검을 막은 채 반대쪽 검으로 목을 겨냥했지만, 그녀가 유림의 배를 걷어차는 것이 좀 더 빨랐다.
“컥!”
날카로운 구두의 굽이 명치를 파고들었다.
유림은 턱 하고 막혀오는 숨과 거센 토기에 저도 모르게 고갤 숙였다.
이즈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파고들었다.
“한눈팔 여유가 있나 보죠?”
“윽!”
유림은 황급히 몸을 옆으로 피했다. 날카로운 검날이 코앞을 스치고 허공을 갈랐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대로 땅을 구르며 검을 놓치지 않게 고쳐 잡은 뒤, 팔로 바닥을 밀어 그 반동으로 몸을 멈췄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유림은 손등으로 턱을 타고 흐른 땀을 닦으며 호흡을 골랐다.
이즈네가 5형에 직접적인 전투를 하는 걸 본 적이 없기에 이렇게 공격적인 검법을 구사하는 사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저렇게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이다지도 빨리 움직이다니.
“하아…… 미치겠네…… 정말이지 뭐 하나 쉬운 게 없다니까…….”
쉽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분위기에 유림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곤 검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킨 뒤, 중심을 잡았다.
그때 웅장한 소리와 함께 탑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웅-!
연이어 일어난 굉음과 땅의 울림이 꼭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균형을 잃은 유림이 신발에 늄을 부여하며 자세를 고쳤다. 그 순간, 날카로운 검날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한눈팔지 말라 했을 텐데요.”
이즈네가 낮은 경고를 지껄이며 검을 겨냥했다. 유림은 반사적으로 몸을 젖히고 검을 높이 들어 그녀의 검을 쳐냈다.
채앵!
다시금 검과 검이 맞닿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아찔한 상황에 유림이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막았는데 검날이 제 목을 파고든 것처럼 목이 화끈거리며 환통을 만들어냈다.
“하…….”
짧게 숨을 고르는 것도 잠시, 매섭게 파고드는 검에 유림도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챙- 채앵-
검과 검이 부딪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설픈 방어, 그리고 연이어진 공격에 자세가 무너진 유림이 이를 악물었다.
아까부터 반쯤 꺾인 팔목이 비명을 내질렀다.
기사도 아닌 사람의 검이 뭐 이리 무거운 건지.
“윽!”
유림은 검을 교차해 막은 뒤, 자세를 고칠 틈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이즈네를 뒤로 밀쳤다. 그러나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자신이 뒤로 밀리고 말았다.
결국, 몸을 낮춘 후 땅을 굴러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확연할 정도로 거칠어진 숨이 계속 내쉬어졌다.
최근 디하르와의 훈련으로 잊었던 감각들도 살아나고 체력과 힘도 제법 붙었다 생각했는데, 상처 하나 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진급시험 초반부터 이어진 안 좋은 몸 상태가 점점 최악을 찍고 있었다.
등을 적신 땀이 과격한 움직임에 의한 건지, 식은땀 때문에 그런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니 오죽할까.
‘젠장……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다면…….’
그녀는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치며 이즈네를 노려봤다.
이젠 머리도 무거운 거 같았다.
내 몸 상태가 이 정도로 안 좋았나? 왜 하필 아파도 오늘 이렇게 아픈 거냐.
“하아…… 하아…….”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울려오는 탑.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분위기에 몸이 한층 더 긴장되었다.
이즈네는 마치 평평한 평지에 있는 것처럼 차분한 모습으로 유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다 중간중간 큰 울림이 나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상황에 그녀가 관여된 모양이었다.
실로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즈네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네요. 좀 더 천천히 했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소리예요?”
“당신과 느긋하게 놀 시간이 없단 뜻이에요.”
이즈네는 들고 있던 검을 가볍게 돌리더니 이내 허리춤의 칼집에 꽂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유림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이 검을 거두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제길……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이즈네 교수님, 아니, 당신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죠? 지금 이 탑에 얼마나 많은 애가 있는지 잊은 거예요?”
유림의 질문에 이즈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죠. 그래서 이런 겁니다. 인명 피해만큼 클레이즈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클레이즈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애들을 다 매장하겠다, 이거예요?”
유림을 말에 이즈네가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더 큰일을 위한 발판이죠. 무릇 대를 위해서 약간의 희생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태연하게 내뱉는 그 목소리에 유림이 작게 움찔거렸다.
문뜩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히야스 교수님께 했다는 그 말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웃기지 마. 당신들의 목적을 위해 왜 멀쩡한 애들이 죽어야 하는데! 애당초 그런 희생이 필요한 대의는 없어! 사람 목숨은 남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유림의 외침에 이즈네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며 열을 내니 뭔가 이상하네요.”
“뭐?”
“멀쩡한 사람이 왜 죽어야 하냐느니, 사람 목숨은 남이 함부로 할 수 없다느니. 적어도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그게 무슨…….”
“당신도 타인의 생명을 앗아갔잖아요.”
유림이 눈을 홉뜨며 숨을 삼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연구실의 사고. 당신이 낸 거잖아요. 그 때문에 그곳에 있는 대부분이 죽었고요.”
비수가 되어 파고든 말에 유림은 혓바닥이 굳어버린 것처럼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갈색 눈동자가 혼란을 담은 듯 크게 흔들렸다.
유림은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당신이 받은 내 기록에…… 그 이야기도 있었나 보지?”
“어머니는 그때 그 연구실에 계시지 않았죠. 그래서 제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어요. 당신의 분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처형당하게 되었다고. 글 곳곳에 비통을 담아 제게 전하셨죠.”
이즈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내 어머니는 당신 때문에 산 채로 타 돌아가셨어요. 팔다리가 잘리고 탑과 함께 불탔죠.”
“자업자득이지…… 그러게 누가 멀쩡히 잘살고 있던 애들을 납치해 가래?”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이 만든 자업자득이겠군요.”
그 순간 유림은 이즈네가 왜 4층 탑에서 이 일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진급시험이 적기여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이곳이 그녀의 모친이 죽은 곳과 같은 ‘탑’이기 때문이었다.
“검을 가져온 것도 내 팔다리를 자르기 위해서였던 건가…….”
“그러려 했는데, 아쉽게도 그건 포기해야겠네요.”
유림은 검을 꽉 쥐었다.
그래, 이건 이즈네에게 복수였다. 자신과 아무 죄 없는 레이먼네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 실험도 숭고한 희생과 대의로 보고 있으니 오죽할까.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실험체였고,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인 것이다.
“하…… 내가 봐도 최고의 상황이네. 루아네들도 때마침 탑 안에 있고…… 내 소중한 사람들도 여기 있으니까…….”
유림이 입술을 비틀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가만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만일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이 때문에 정말 자신들이 탑 아래 깔리게 된다면 적어도 그냥 죽진 않을 것이다.
유림은 이즈네를 향해 검을 겨냥했다. 서슬 퍼런 칼날이 마치 유림의 각오를 대변하듯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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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