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49
제 49 화
“……하하하, 잘 계셨어요? 선…… 배?”
유림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머쓱한 태도와 불안한 시선 처리. 코니룸은 그런 유림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글쎄, 어떤 친절한 후배 덕분에 잘 지내지 않았을까?”
그냥 못 지냈다고 그래, 이 좀팽아.
얄미움이 가득한 말에 불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하하하 소리를 내며 어색하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코니룸은 유림의 예상과 달리 별다른 피해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클레이즈의 학생들은 의외로 이런 사건에 무심했고, 별생각이 없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도박장의 사건보단 ‘대단한 후배, 한유림’이 더 중요해져 이제는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유림만 쫓아다니게 되었다. 뭐, 이런 태도에 코니룸의 자존심이 살짝 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근데 너 여기 왜 있냐? 도박장을 여는 시간도 아닌데.”
코니룸이 느릿하게 하품을 하며 유림에게 다가왔다.
“어……. 그, 그게…… 무슨 일이냐면…… 그니까…… 음…….”
도박장 때의 그 뻔뻔함은 어디로 갔는지, 유림이 심하게 자신 없고 떠듬거리는 말로 답했다.
유림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아 그저 뒷목만 연신 긁적였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유림을 부르는 거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
“어디 있냐, 한유림!!”
“헉!”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 미친놈들,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이제는 끔찍하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유림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이 게임을 했던 테이블 밑으로 잽싸게 들어가 몸을 숨겼다. 다행히도 어두운 데다 얇은 테이블보가 쳐 있어 제법 자연스럽게 숨을 수 있었다.
코니룸은 그런 유림을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숨은 유림과 그녀를 찾는 사람들. 순간,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파악한 코니룸이었다.
그는 여유롭게 입꼬릴 만 뒤, 유림을 어찌할지 고민했다. 그런 그의 뒤로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유림, 여기 있……! 얼레, 코니룸?”
“안녕.”
예상치 못한 코니룸의 등장에 두 눈을 깜빡이는 세 사람. 그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이내 유림을 떠올리곤 어두컴컴한 실내를 휙휙 둘러봤다.
도박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모든 테이블은 테이블보로 덮였으며 의자와 각종 게임 도구 또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코니룸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코니룸, 혹시 한유림 못 봤나?”
“한유림? 흐음…… 글쎄?”
코니룸은 가볍게 턱을 쓸며 유림이 숨은 테이블을 흘겨봤다. 기척과 숨까지 죽이고 있는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났다.
어떻게 한담. 이걸 넘겨 말아?
흐음- 그래. 이런 상황에선 모른척해 주는 게 더 재밌겠지?
코니룸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못 본 것 같은데?”
“정말? 숨겨주는 거 아니지?”
“내가 걜 왜 숨겨줘. 안 그래?”
“…….”
사내들은 미심쩍다는 듯 코니룸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확실히 유림을 숨겨줄 이유는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도박장 사건만 봐도 알지 않은가. 자존심이 그렇게 센 그가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후배를 도와줄 리 없다.
그들은 코니룸이 좀 더 큰 재미를 위해 유림을 숨겨뒀다고는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은 채, 짧은 인사와 함께 도박장을 빠져나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타닥타닥하는 뜀박질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코니룸은 그 소리가 귓가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 층계를 올라갔다는 것을 확인하곤 입구로 다가가 그들이 박차고 간 문을 닫은 뒤 걸쇠를 걸어 굳게 잠가 버렸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실이 돼버린 도박장. 코니룸은 문에 가볍게 기댄 뒤 유림을 불렀다.
“이제 나와도 돼, 아무도 못 들어오니까.”
코니룸의 부름에 유림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테이블보의 자락을 잡은 채,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잔뜩 겁을 먹은 거북이 같아 코니룸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나 못 믿어?”
“네…… 가 아니라, 그냥 제가 좀 이런 데 소심해서… 하하하.”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속마음을 삼킨 유림은 다시금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그러다 그의 말대로 정말 도박장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한숨과 함께 테이블 밑에서 빠져나왔다. 어찌나 급히 숨었는지 치마는 구겨지고, 비녀로 고정한 머리는 반쯤 풀려 뒷목에 걸쳐 있었다.
유림은 무릎을 털고서, 코니룸에게 고갤 숙여 인사했다.
“후우…… 감사합니다.”
“재밌게 사네.”
“하하하하하으으흐흐흐흑, 살려줘요, 선배.”
“이봐, 후배님. 날 죽여놓고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하는 말과 달리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유림은 그 모습이 제법 얄미워 쳇 하고 입을 삐죽였다. 코니룸은 그 모습이 또 웃겨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좀 더 있다가 나가. 지금 나가면 또 잡히니까.”
“아, 감사합니다.”
코니룸은 유림에게 앉으라며 소파를 권한 뒤, 시원한 음료 두 개를 챙겨서 그 맞은편에 앉았다.
“자, 우선 마시면서 숨 좀 돌리라고.”
유림은 뜻하지 않은 호의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음료를 받았다.
코니룸이 병의 뚜껑을 따며 능글맞게 웃었다.
“여전히 재밌게 살고 있네.”
“으…… 싫어요. 끔찍하다고요. 아니, 나 왜 이렇게 유명해진 거야?!”
“날 팔아서?”
“……선배, 지금 돌려서 저 욕하는 거죠?”
“칭찬하는 거야.”
그러면서 웃지 마! 얄미워!
유림은 받은 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며 속을 달랬다. 차가운 음료가 마치 그간 쌓여 있던 갈증과 울분을 싹 다 씻어주는 것 같았다.
“천천히 마셔. 체한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시는 속도를 늦추지 않던 유림은 결국 음료를 다 비우고 나서야 숨을 골랐다.
“하…… 이제 살 것 같네.”
진짜 말 그대로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유림이 크게 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파묻자 코니룸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동아리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알고 계셨어요?”
“뭐, 시기가 시기니까.”
당연한 거 아냐? 라는 코니룸의 말에 유림이 푸념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죽겠어요. 어찌나 독한지…… 그냥 어느 정도 하다 말 줄 알았는데 떨어질 생각을 안 해요. 정말 생각할수록 열받는다니까요. 선배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죠? 잠도 못 자고! 젠장!! 난 귀가부가 하고 싶다고!!”
“클레이즈에 동아리는 의무야.”
그 말에 유림이 쓰게 웃었다. 사실 교칙을 지킬 필요가 없는 이상 동아리에 의무적으로 가입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마다 그 말을 설명해 주기도 귀찮고, 또 그렇게 떠든다고 해서 딱히 바뀔 선배들도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그저 도망치는 짓만 무한 반복하는 중이었다.
뭐,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무리겠지.
유림은 코니룸이라면 뭔가 해답을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죠? 선배들이 어떻게 해야지 떨어질까요?”
“음…… 다른 동아리에 가입하면 그만두지 않을까?”
“헐, 그게 싫어서 도망치고 있는데 가입하라고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그냥 아무 데나 가입해.”
음료를 마시며 가볍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유림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 데나 가입하라니. 자기 일 아니라고 정말 가볍게 말한다.
사실 코니룸의 말대로 정말 어딘가에 가입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의욕이 없어서 그런지 어딜 들어도 귀찮단 생각만 들었고, 이거다, 하는 곳도 없었다.
답답함과 암담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동아리 같은 거 진짜 하기 싫은데. 선배 말대로 정말 어디라도 들어가야 하는 걸까? 근데 그럼 어딜 들어가? 그냥 애들 있는 곳으로 할까?
현재 유림의 친구 중 동아리에 가입한 사람은 학생회에 들어간 데몽과 악단에 들어간 테오가 전부였다.
학생회는 귀찮아질 것 같고…… 아니, 그걸 떠나서 나 가능하나? 음…… 악단은 나 음치, 박치라 무리인데…….
“어디 들죠? 뭐 좋은 곳 없어요?”
유림의 질문에 코니룸이 턱을 쓸며 짧게 고민했다.
“흠- 아, 한곳 있군.”
“어디요?”
“도박장.”
엥? 유림이 두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인간이 뭐라 떠드는 거야?
“도박장이요?”
“그래, 우리 동아리 도박장. 네 입장에선 가장 좋은 곳 아닌가?”
그가 농으로 한 말인지 진담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악단이나 학생회보단 낫고, 다른 곳보단 재밌어 보이니 말이다.
유림이 시선을 위로 올리며 곰곰이 생각하자, 코니룸이 피식 웃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잠깐 기다려 봐. 우리 동아리 소개서랑 가입서가 있을 거야.”
라면서 소파 옆에 있던 수납장을 뒤적이는 코니룸. 그러더니 얼마 안 돼서 무언가를 꺼내 그대로 유림에게 건넸다. 특별할 것도 없는 새하얀 종이였다.
유림은 코니룸에게 받은 종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굵은 글씨로 크고 선명하게 적힌 ‘신체 포기 각서’란 글이 보였다.
“…….”
신체 포기 각서…….
“…….”
신체 포기 각서…….
“…….”
“음? 아, 미안 실수. 종이를 잘못 줬군.”
진짜?! 정말 잘못 준 거 맞아?!
코니룸은 유림이 쥐고 있던 것을 뺏다시피 가져가 서랍 안쪽에 쑤셔 넣은 뒤 동아리에 대한 종이를 찾아 넘겨주었다.
그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만 뻐끔뻐끔거리는 유림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실수, 실수. 방금 건 잊어.”
잊으라고? 잊는 게 가능해?! 거기다 왜 동아리실에 그런 살벌한 종이가 있는 거야?
“뭐,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지. 안 그래?”
실수. 세상에 이보다 의도적인 실수가 또 있을까.
유림은 등 뒤로 주룩주룩 흐르는 식은땀과 파리해진 안색을 숨기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코니룸 또한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 저 왠지 모르게 조금 무서운 사람한테 덤빈 거 같은데…… 제 콩팥 괜찮겠죠?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연신 오가는 어색한 웃음 속에서 꽃피는 불신. 유림은 엉덩이를 뒤로 슬금슬금 빼며 쓰게 웃어 보였다.
젠장, 나 아무래도 자퇴해야겠다.
유림이 도박장의 소개서와 가입서를 읽어보겠다며 가지고 나간 뒤 코니룸은 작게 흥얼거리며 음료를 마셨다. 지금 클레이즈의 가장 큰 이슈는 다름 아닌 ‘한유림 쟁탈전’이었다.
그리고 한유림을 가입시킨 동아리가 가장 능력 있는 동아리라는 되먹지도 않은 소문이 돌아 학생들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현재, 의도치 않게 가장 유력한 후보로 자리에 올라가고만 그였다.
‘괜찮군.’
유림과 코니룸의 관계가 썩 좋다곤 말할 순 없으나, 적어도 경쟁 때문에 그녀를 쫓아다니는 이들보다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더욱이 도박장은 유림이 원하는 ‘놀 수 있는’ 동아리였고, 이미 서로의 밑바닥(?)을 깠기 때문에 눈치 볼 일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해 나름 미안함과 친근함을 느끼고 있는 유림에게 있어 코니룸이 존재하는 도박장은 꽤 매력 있는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코니룸은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이 분위기로만 간다면 며칠 안에 가입 서류를 들고 자신에게 올 것이다.
‘음- 그럼 이 학교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은 내가 되는 건가?’
도박 땐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러한 상황을 위해 일어난 일이 아닌가 싶다.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 참으려 해도 헤픈 웃음이 퍼져 나왔다.
코니룸은 왠지 모를 승리감에 피식피식 웃었다. 그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환한 빛과 함께 그의 사촌인 미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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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