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92
제 92 화
테오는 발을 까딱이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근데 왜 감감무소식이란 말인가. 결국, 참지 못한 그가 요한을 불렀다.
“야.”
요한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 그 녀석들 정말 오긴 하는 거야?”
“어.”
정말이지 뭐 하나 느껴지는 게 없는 짧은 대답이었다. 한편으론 꼭 인형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테오는 그 느낌이 싫어 괜히 더 화를 담아 말했다.
“위험한 장소라며. 샨인지 뭔지도 위험할 수 있잖아.”
“…….”
요한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것이 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그가 짧게 말했다.
“오고 있어.”
“뭐?”
“근처.”
“그게 무슨……?”
그때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림과 데몽이었다, 그리고 샨과 은하도.
“유림!!”
“데몽!!”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 안도가 내비쳤다.
루아는 그대로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 마치 군기를 잡는 군인처럼 힘을 줘가며 버럭 소리쳤다.
“뭐하다 온 거야! 걱정했잖아!”
“미안…….”
“잘못했어.”
저들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은하에게 들은 두 사람이 쓰게 웃었다.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친 곳은?”
“괜찮아.”
“얘가 치료해 줬어.”
정말로 괜찮아 보이는 몰골에 루아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와 륜도 마찬가지였다.
데몽은 두 친구에게 다가가 걱정 끼쳐 미안하다 말한 뒤, 긴 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눈두덩이를 가볍게 문지르며 샨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제…… 슬슬 이야기해 주실래요?”
샨도 그럴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먼의 침대에 앉았다.
“그래. 하지만 그 전에 너희가 먼저 이야기해 줘. 그래야 설명하기가 수월하니까.”
여기서조차 앞뒤를 가리다니.
데몽이 미간을 팍 구겼다. 그러나 이내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유림이 안 이상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다 이걸 빌미로 그들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 것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데몽의 대답에 테오와 륜이 경악했지만, 그는 괜찮다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어차피 한유림은 다 알고 있으니까. 거기다 더는 숨길 이유도 없고.”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숨을 골랐다. 그런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세 사람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클레이즈에 입학했어.”
“목적? 그게 뭐지?”
“스승님의 복수.”
묘한 정적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유림에게 이야기했을 때와 별 차이 없는 반응이었다.
데몽이 그녈 바라봤다. 마치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우스워 가볍게 웃어버렸다.
그는 굴에서 유림에게 했던 것처럼 차분히 말을 이었다, 스승님의 실종부터 왜 클레이즈에 입학했는지.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유림과 륜, 테오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리고 ‘라단’이란 이름이 언급됐을 땐, 아무 반응 없던 요한마저도 눈을 홉뜬 채 데몽을 바라볼 정도였다.
얼추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엔 유림이 테오와 륜에게 짧게 자신들의 과거를 들려주었다.
그제야 륜과 테오도 왜 ‘라단’이란 이름에 그들이 그렇게 놀랐는지, 그리고 데몽이 왜 모두에게 과거를 말해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 무슨 이런 인연이 다 있어?”
너무 놀란 테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스승님이 참여했다는 실험에 이 여섯 명이 관련되어 있었을 줄이야. 머리가 아팠다. 일단 그 무엇보다 스승님과 제 동기들이 그런 비윤리적인 사건에 엮였다는 것이 너무 소름 끼쳤다.
어쨌든 이로써 이거 하난 확신할 수 있었다, 한유림과 그 친구들이 자신들의 적은 아니라고.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저를 실험하고 학대한 인물들과 한편을 먹겠는가.
륜이 아랫입술을 한참 핥더니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내 물었다.
“그럼…… 초대장을 보낸 인물이 그 녀석들과 관련이 있는지만 알면 되는 거네.”
“그래. 그게 중요해.”
데몽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실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그럼, 이제 그쪽의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의심이 가득 담긴 륜의 질문에 샨이 옅게 웃었다.
“림이네는 믿어도 나는 못 믿겠다는 눈치네. 설마 내가 그들과 한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수상한 건 확실하죠. 거기다 당신에게도 가지 않았습니까, 그 가짜 초대장.”
“뭐?! 샨도 초대장을 받았어?!”
데몽의 질문에 루아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가만있던 디하르의 눈동자도 크
게 떠졌다.
샨은 흔쾌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응. 그래서 지금은 요한이랑 같은 3클래스야.”
루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제 오빠를 바라봤다. 시선을 피한 채 딴청을 피우는 것을 보니 역시 이 사실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가짜 초대장을 받은 게 유림이랑 너, 둘인 거야?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누가 보냈는지도 궁금했지만, 어째서 그 둘에게만 왔는지도 이해가 안 갔다.
혹시 어렸을 때의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루아는 조급함에 저도 모르게 손톱을 질겅였다. 디하르도 초조함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였다, 가만히 누워 있던 요한이 갑자기 손을 살짝 든 것이.
“그거-”
그러더니 대뜸 말했다.
“내가 보냈어.”
일순 싸한 정적이 그들을 뒤덮었다.
“…….”
“…….”
“…….”
“…….”
“……뭐?”
요한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를 툭 하고 던졌다.
“초대장. 내가 만들어서 보냈다고.”
아주 태연하고도 태평하게 말이다.
모든 생명은 늄을 가지고 태어나 늄의 소멸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어떻게 보면 늄이란 것은 한 생명을 뜻하는 고유한 단어이자 힘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늄은 지문처럼 각각의 고유한 향과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른 ‘잔상’을 가진다.
흔히 ‘늄의 잔상’이라 불리는 이것은 늄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진해지는데, 개중 농도가 짙은 일부는 생명이 소멸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본체의 모습을 따르며, 가끔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유령’, 혹은 ‘귀신’의 정체이다.
그리고 요한은 이것을 보고 다루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흔히 영매사, 무당이라 불리는 존재. 그게 바로 그였다.
다만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요한은 죽은 생명의 잔상뿐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잔상도 이용 가능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살아 있든 죽었든 그 잔상의 ‘조작’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니까…….”
“네가…….”
“했단 거예요?”
데몽과 테오, 그리고 륜이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한마디씩 이어 물었다. 당혹스러운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샨을 제외한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이 짧게 답했다.
“어.”
그리고 그에 대한 파급은 어마무시했다.
“말도 안 돼!”
“미친!”
“클레이즈의 초대장은 아무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만일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요한이란 사내는 클레이즈에 있는 상급 교수들과 맞먹는 실력자란 소리가 아닌가.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잠깐 고민하던 요한이 정말 간략하게 말했다.
“정확하겐 가짜 초대장을 만든 게 아니라, 잔상을 이용해 착각하게 한 거야.”
잔상이라니…….
쪽빛 눈동자보다 더 보기 드문 능력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건 끼어들기 뭐해 내내 가만있던 하민을 이 대화에 등판시킬 정도였다.
“그니까…… 초대장이 림이 열아홉 살인 걸로 착각하게끔 조작했다는 거예요? 그, 그게 가능해요?”
“아주 잠깐은.”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른 주제에 별거 아니라는 듯한 저 대답이 더 기가 막혔다. 이건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넘는 일이 아니던가.
“하…….”
데몽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오늘 겪었던 일 중, 지금 요한의 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나마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유림만이 냉정하게 대화를 이을 뿐이었다.
“그럼 넌 내가 사혈에 산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 2년 전부터 알았어.”
“왜 안 나타났어? 아니,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 질문에 요한의 시선이 샨에게로 옮겨갔다.
“샨이 부탁했으니까.”
샨이 부탁했다니.
유림이 정말이냔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그렇다며 고갤 끄덕였다.
“맞아. 내가 부탁했어.”
“어째서?”
샨은 아주 잠깐의 뜸을 들인 후 말을 꺼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부터 말해야겠다. 아니, 내가 왜 사라졌는지부터.”
그 말에 유림을 비롯한 디하르들이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연구소에서 구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모습을 감춘 샨. 그러나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요한밖에 없었다.
샨은 방에 있는 모두를 둘러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림을 바라봤다.
“사실 난 너희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특히 림, 네 앞에는.”
유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가슴이 욱신거렸고 왠지 모를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왜……?”
“네가 싫어할 것 같았고…… 또 그들이 널 알고 있으니까.”
“그들?”
처음으로 샨이 난처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는 가능하면 이 사실을 유림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거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연구실에서 있었던 폭발…… 기억해?”
“……어렴풋이.”
“그때 연구에 관련된 대부분의 자료가 함께 사라졌어. 그것도 알고 있지?”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유림과 아이들, 그리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연구원의
증언과 남은 일부 자료만으로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파악했다.
“우리가 연구실에서 구출되고, 치료를 받았을 때, 우연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어.”
“어떤……?”
“일부 자료가 어딘가로 흘러갔다는 것을.”
“뭐?”
샨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안엔 너에 대한 자료가 있었어.”
“……!”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자신의 자료가 어디로 흘러갔다고?
두 귀로 들었음에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쿵쿵쿵. 거센 고동 소리가 온몸을 강타했고, 묵직한 돌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유림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니,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그걸 정리하려고 떠났어. 그건 없어져야 할 자료니까.”
그걸 찾으러 갔다니. 끔찍한 대답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 내 자료가 넘어갔다는 거.”
“네가 몰랐으면 했거든.”
“어째서?”
“그래야지만 네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유림은 어쩐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샨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움직이다니…….
자신의 자료가 넘어갔단 사실보다 그게 더 가슴 아팠다. 실로 유림에게 샨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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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