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5
15화
15. 무시하면 될 일
“이제 회과육을 만들어봅시다. 일단 고기를 삶아야 합니다.”
“바로 볶지 않고요?”
“바로 볶으면 기름이 너무 많이 나와서 지나치게 기름지답니다. 물론, 육즙이 보존되어 쫄깃한 식감은 있겠으나, 맛이 깊이 배지 않는 단점이 있습니다.”
마 상궁은 설명을 듣고도 고개를 갸웃했으나, 삶은 고기를 볶은 다음에 조금 맛을 보고는 크게 감탄했다.
‘와, 간이 잘 뱄네!’
질감이 살짝 퍽퍽하긴 했으나, 대신 적당하게 담백했다.
잘게 썬 마른 고추도 섞어 밥과 함께 볶아서 완성한 회과육을 먹어본 마 상궁의 반응은.
‘기름지지만 느끼하지 않고, 적당히 매콤해서 부담이 하나도 없어.’
마 상궁은 회과육이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하며 매우 감탄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석 재부가 만든 순오만큼 맛있다.’
마 상궁은 동후에게 올라온 순오(고기즙을 뿌린 볶음밥)를 몰래 훔쳐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방금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는데, 솥에 남은 회과육을 또 먹고 싶을 정도였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네요. 앞으로 삼왕자님이 요리하는 걸로 하죠.”
그녀는 짐짓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말했지만.
“오해하지 마세요. 맛있어서가 아니라, 남기는 건 죄라고 배웠기 때문에 먹는 거니까.”
속이 뻔하게 보이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솥을 통째로 끌어당겨 회과육을 허겁지겁 퍼먹기 시작했다.
‘마 상궁이 내 요리를 마음에 들어 하니 되었다. 이런 식으로 두 번만 더 식자재에 숨겨 목간을 유출 시키면 보고에 대한 이야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겠지.’
발 없는 말은 천 리도 갈 수 있으니까.
물론, 보고의 존재를 퍼트리면 정확히 어떤 일이 생길지는 삼왕자도 예측할 수 없었다.
중행소에게 복수를 하고 나면 또다시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 * *
“또 도둑이 잡혔다고?”
사례태감 방임은 최근 들어 왕성에 도둑이 들끓는 상황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보고에 대한 말을 지껄이더냐?”
“그렇습니다, 방 공공.”
“도대체 그런 허튼소리가 어디서 퍼져 나간 것인지.”
정말로 보고가 있기라도 한다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으리라.
‘전하께서 왕좌에 앉으시고, 왕실의 재산을 조사한다고 찾아보지 않은 곳이 없는데, 보고는 무슨 보고.’
“근위군에 경계를 더 철저히 하라고 전하라.”
그 외에도 다양한 사안에 대하여 환관들에게 일일이 지시를 내린 방임은 손에 비단으로 만든 외교서신을 받들고서 고왕의 작업실로 향했다.
사각사각…….
나무 깎는 소리뿐인 작업실엔 두상, 반신상, 전신상을 비롯해 다양한 자세의 조각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모두 한 여자를 표현하고 있으니, 고왕이 유일하게 사랑했고, 지금도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는 초빈이다.
방임은 고왕에게 다가갔다.
“전하, 초나라에서 서신이 왔사옵니다.”
주나라의 국정은 고왕의 허락하에 방임과 동후가 양분하여 운영하지만, 외교에 관련해서는 방임이 전담했다.
특히 초나라처럼 강대한 제후국과의 외교권에 있어서는 동후의 개입을 철저하게 차단해 왔다.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 했거늘.”
“송구하오나, 이번 사안은 전하께서 직접 판단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무슨 내용이더냐?”
“초나라 제후가 딸을 시집보내고자 하옵니다.”
고왕이 처음으로 작업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웅중이 자신의 딸을 왕자들의 첩으로 보낸다 했다고?”
웅중은 초나라의 제후로 자존심이 세고, 야욕이 큰 자였다.
사실 초나라 자체가 주나라의 왕족이나 개국공신이 분파한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성장하여 남방의 패자가 되고, 명목상 봉작을 받았을 뿐이다.
심지어 초나라의 제후는 내부적으로는 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주나라를 둘러싼 제나라 등의 강력한 제후국들만 아니었다면 진작 주나라를 침탈해 천자의 지위를 빼앗고도 남았을 것이다.
최근 초나라의 움직임만 보더라도, 주나라로부터 남동쪽에 위치한 소국 거(莒)를 멸망시키며 제나라를 위협하고 주나라를 불안에 떨게 했었다.
그런 웅중이 딸을 첩으로 보낸다니 의아할밖에.
“첩이 아닙니다. 왕자의 정실 부인을 원하고 있사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왕자들은 이미 모두 혼인을…….”
순간 아직 미혼인 아들이 떠올랐다.
“설마, 삼왕자와 혼인시키겠다는 건 아니겠지?”
“정확히 희천 삼왕자님을 지목하였습니다.”
“그들이 삼왕자를 어찌 알고?”
“그에 대한 설명은 없었사옵니다. 하지만 분명 삼왕자님을 지목하였고, 전하께서 허락하시면 그의 딸이 직접 낙읍에 와서 삼왕자와 대면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며 허락을 구하고 있사옵니다.”
고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명을 내렸다.
“입성하여 삼왕자와 만나는 건 허락하겠으나, 혼인은 웅중의 딸이 삼왕자와 대면한 이후에 다시 논의하겠노라고 전하라.”
사각사각…….
그러곤 언제 관심을 보였냐는 듯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 * *
“나갔다 올게요.”
마 상궁은 삼왕자가 방금 기름에 튀겼다 꺼낸 만두 하나를 집어 들고 정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만두도 모두 튀겨서 꺼내놓은 삼왕자는 마당으로 나섰다.
그는 지팡이를 옆에 놓아두고, 삼재권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삼왕자의 움직임은 지독히도 느렸다.
고의가 아니라, 빠르게 펼치기엔 숨이 턱 하고 막힐 만큼 버거워서다.
한 보 전진하며 주먹을 내뻗는 상권 일초 일보권은 물론이고, 온 힘을 실어 내려치는 하권 이초 낙격단도 마찬가지.
마지막 초식인 하권 사초 휘점절개는 도약할 여력이 없어 흉내를 내는 수준에 불과했다.
여덟 초식을 고작 한 번씩 펼친 것인데도 삼왕자의 이마에선 송골송골 구슬땀이 맺혔다.
하지만 삼왕자는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했다.
느리게, 그러나 신중히 펼치다 보니 이전에는 알아챌 수 없었던 문제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각과 감각으로 삼재권법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삼왕자는 더 개선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삼재권법을 보다 간결하고, 정밀하게 수정해갔다.
연달아서 일곱 번이나 펼치고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삼왕자는 그대로 널브러졌다.
‘충분히 많이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때 이후로는 기록적인 숫자로구나.’
그의 옷은 비를 맞은 듯 땀으로 흥건했고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때.
“뭐하니, 얼른 따라 들어오지 않고.”
마 상궁이 어린 궁녀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삼왕자를 보고 인상부터 찌푸렸다.
“아, 정말! 또 그 삼재권법이니 뭐니를 한 거죠!”
“딱히 할 일이 없고 심심해서 잠시 몸을 풀었습니다.”
삼왕자는 끙끙거리고 일어나며 평소처럼 변명했다.
“심심하면 서예나 하면 되지, 꼭 빨랫거리를 만들어야겠어요!”
“마 상궁이 수고하지 않게 빨래는 내가 할 테니 염려 놓으세요.”
사실 마 상궁은 유일각에 와서 삼왕자의 빨래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누가 빨래 때문에 그래요? 쓸데없이 물 쓸 일을 만드니까 그런 거잖아요. 물은 누가 떠와요? 내가 떠오잖아요. 삼왕자님이 할 수 있어요? 못 하잖아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잔소리와 질책을 받고도 삼왕자는 담담히 사과했고.
“미안합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뒤쪽의 궁녀는 누굽니까?”
“쳇, 능구렁이처럼 말은 잘 돌려요. 얘는 앞으로 우리와 함께 지낼 궁녀예요. 위에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걸 제가 간신히 설득해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를 데려온 거니까, 저한테 고마워하세요. 얘, 인사드려. 삼왕자님이야.”
“소녀의 이름은 우미림이에요. 우 나인으로 불러주셔요.”
“나는 희천이라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삼왕자는 마주 인사하며 우미림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얼굴에서 희미한 가죽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삼왕자님, 애 민망하게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못생긴 애 처음 봐요?”
마 상궁은 삼왕자를 타박하면서 오히려 더 심한 말을 했다.
그러나 우미림의 얼굴이 어떻게 궁녀가 되었는가 싶을 정도로 못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와 어투는 매우 고왔다.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내가 눈이 좀 어두워서, 자세히 뜯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어디 눈뿐인가요. 귀도 어둡고, 감도 떨어지고, 다리 하나가 굳어 지팡이에 의지해야 걸을 수 있고, 손 하나는…….”
마 상궁은 조롱하듯 삼왕자의 단점을 거침없이 늘어놓았다.
그런데도 삼왕자는 화는커녕 반박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우미림의 눈에는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아, 피곤해. 전 들어가서 한숨 잘게요. 얘, 궁금한 게 있으면 삼왕자님한테 물어보고, 나 방해하지 마.”
마 상궁은 당연하다는 듯 튀긴 만두를 한 접시 가득 챙겨서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식사 전일 거 같은데, 우 나인도 한 번 먹어보세요.”
삼왕자는 그릇에 만두 몇 개를 담아 내밀었다.
“감사해요.”
배가 고프진 않았으나, 접시를 받아든 우미림.
자연스럽게 삼왕자의 뒤로 나열된 화로와 솥 등의 도구들이 눈에 들어와 물었다.
“설마 삼왕자님이 직접 튀기신 건 아니죠?”
“내가 튀겼습니다. 만두도 내가 만들었고. 유일각에선 내가 요리를 담당하고 있답니다.”
“요리를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만두 하나를 입에 문 우미림은 깜짝 놀랐다.
‘어머, 맛있어라!’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유일각이 어떤 곳이고, 삼왕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최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에 입궁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같이 생각도 하지 못한 상황들이 벌어지네.’
하지만.
‘뭐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그것만 찾아내면 금방 떠날 테니, 신경 쓸 건 아니지.’
정체만 들키지 않는다면 상궁이 왕자를 찬모 취급하든 거지 취급하든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었다.
* * *
자정을 막 넘긴 시간.
우미림은 침상에서 일어나 짐 속에서 꺼낸 잠행복을 입었다.
검은 두건을 썼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감싸 눈만 드러나게 했다.
완벽히 준비를 끝낸 우미림은 창문을 통해서 방을 빠져나와 지붕 위로 올라섰다.
‘이 시간에 또 저걸 하고 있네.’
마당 한 편에 화로가 피워져 있음에도 사물을 구분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 마당에서 삼왕자가 천천히 주먹을 내질렀다.
우미림은 유일각에 온 날부터 7일 동안 밤마다 외출했는데, 그때마다 삼재권법을 연마하는 삼왕자를 목격했다.
‘천지궁(天地宮)에서는 7살 꼬마도 하지 않는 기본 중의 기본인 동작들인데.’
그래서 무림인의 상식으로는 시간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삼왕자님처럼 허약하고 장애까지 있는 몸이라고 한다면, 솔직히 저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어.’
마 상궁이 재밌는 이야기라며 떠든 덕에 임충과 희호소, 진 상궁에 대해 알고 나선 삼왕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쌍해라.’
안타까운 마음도 컸고.
‘진짜 내 마음 같아서는 제대로 된 무공이라도 전수해 주고 싶네.’
이를테면 상승의 도리가 담긴 권법과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심공 말이다.
‘심공을 배우려면 내공을 감지할 재능도 있어야겠지만, 어쨌든 천지궁의 무공을 배운다면 저런 삼류도 못 되는 권법을 연마하는 것보다 몸이 훨씬 건강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천지궁의 무공을 궁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외인에게 전수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녀가 궁주의 딸이라고 해도.
‘좋아, 결심했어. 궁으로 돌아가면 궁주님에게 허락받고 삼왕자에게 가르쳐 주는 거야.’
하지만 당장은 답답한 면구까지 쓰고 주나라 왕성에 숨어든 목적을 완수하는 게 우선이었다.
오늘, 늦어도 내일까지 찾지 못하면 빈손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갔다 올게요.’
우미림은 삼왕자 쪽으로 손을 흔들고 내정의 중심을 향해서 가볍게 날아올랐다.
그녀는 상상도 못 하리라.
‘또 나가네.’
삼왕자가 그녀의 은밀한 외출을 진작부터 알고 있다는 걸.
삼왕자가 이전처럼 밤낮을 잊고 연마하는 건, 진 상궁의 예견대로 삼재권법에 심취할수록 촉각의 회복이 놀랍도록 빨라지고 있어서였다.
요리와 서예도 못지않게 노력을 기울이면서, 미각과 후각 또한 예전만큼은 아니라도 꽤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비록 손발의 장애와 오장육부의 고통에는 진전이 없어서 아쉽지만, 세 가지 감각은 첫 대면 때 우미림이 평범한 궁녀가 아니라는 걸 바로 감지했을 만큼 예민했다.
‘가죽으로 만든 면구로 얼굴을 바꾸고, 정체를 숨긴 채 궁녀로 들어온 것이라면 역시 내정을 돌아다니는 게 목적일 테고, 그렇다면 역시 보고 때문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겠지?’
삼왕자가 보고의 존재를 외부에 퍼트린 이후 왕성에 들끓고 있는 도둑들처럼 말이다.
물론, 우미림에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녀를 지켜본 결과 대화가 통할 상대라는 판단이 선 삼왕자는 마당에서 글을 쓰고, 식자재를 다듬으며 기다렸다.
우미림은 이전보다 늦게 돌아왔다.
보고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절박하고 조급한데, 진전은 전혀 없다 보니 위험을 감수하고 더 늦게까지 수색해서다.
그런데 유일각으로 돌아온 그녀는 막 지붕에 올라선 순간, 돌처럼 굳어졌다.
이 시간에는 보이지 말았어야 할 삼왕자가 버젓이 마당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우 나인, 이리로 와서 나와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