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6
16화
16. 입으로 꺼낸 약속
우미림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일개 나인인 그녀에게도 친절하고 공손한 삼왕자는 얼굴에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초봄의 장강처럼 고요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담장과 지붕을 넘나드는 걸 보고 놀라지 않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아하, 삼왕자님은 내가 무림인이고, 밤마다 외출하고 있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구나.’
다만.
‘오감이 무딘 분이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이미 들킨 마당에 세세히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지붕에서 뛰어내린 우미림은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하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잠이 보약이라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얼른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러나.
“내 요구 2가지를 들어준다면 우 나인을 보고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던 우미림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당황하여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아하! 그런 것이었구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삼왕자님이 보고에 관한 소문을 퍼트린 건가요?”
“그렇습니다.”
“보고가 진짜 존재하기는 하나요?”
“나도 보고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 확실히 있다고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있다고 믿습니다.”
“솔직히 말해주니 믿음이 가네요.”
삼왕자에 대한 연민과는 별개로, 오히려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면 불신만 커졌을지 모른다.
“2가지 요구란 게 뭐죠?”
“받아들이겠다는 약속부터 하십시오.”
“내가 약속만 하고 지키지 않으면 어쩌려고요?”
“우 나인이 그럴 사람이었다면 이런 대화 자체를 안 했을 테죠. 그리고 내가 보고의 위치를 안다는 걸 알자마자 고문하여 억지로 털어놓게 했을 겁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기는 한데…….”
순간 우미림은 공력을 끌어모아 삼왕자에게 발산했다.
“큭!”
삼왕자는 어깨를 짓누르는 압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우미림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좋은 눈빛이네요.”
우미림은 싱긋이 웃으며 공력을 풀었다.
“하지만 삼왕자님이 상대보다 강하지 않을 때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힘이 없는 자신감은 허세에 불과하고, 세상은 그런 사람이 살아남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삼왕자도 깨닫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입니다. 앞으로 참고하여 조심하겠습니다.”
“삼왕자님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요. 보통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좋아요,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죠. 이제 조건을 말해보세요.”
“첫째는 내가 먼저 보고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들어가십시오.”
“알았어요.”
“둘째는 내가 왕성을 떠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떠난다는 말은 사람들 몰래, 왕성에서 멀리 도망쳐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소.”
왜 도망치려 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가 삼왕자와 같은 처지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테니까.
“흠, 그렇다면 기한이 꽤 걸리겠네요. 두 번째는 당장 지키긴 힘들 거 같아요. 나는 보고에서 한 가지 보물만 챙겨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집에 가서 일을 끝내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빠르면 20일 정도 걸릴 거 같은데, 그때 탈출을 도와드리면 안 될까요?”
삼왕자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미림은 기분이 묘했다. 자신을 완전히 믿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으니까.
“나는 입으로 꺼낸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우 나인을 믿겠습니다.”
우미림은 살짝 당황했다.
‘가슴이 왜 이렇게 빨리 뛰는지 모르겠네.’
무슨 대단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미림은 면구를 써서 붉어진 낯이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크게 기지개를 켜며 휙 돌아섰다.
“그럼 이따 경계가 소홀해지는 밤늦게 움직여야겠죠?”
“그래야 할 겁니다. 낮에는 갈 수 없는 곳이니까요.”
“그럴 거 같더라고요. 하~암! 삼왕자님도 이제 들어가 주무세요. 저도 눈 좀 붙여야겠어요.”
우미림은 손을 흔들며 먼저 들어갔고, 삼왕자는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략 한 달만 버티면 되겠구나.’
애왕의 심공이 절맥을 치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미림이 도와주기만 하면 탈출은 확실한 거니까.
* * *
지글지글 보글보글.
유일각의 마당은 튀기고 끓는 소리와 맛있는 향기로 가득히 덮였다.
마 상궁의 식탐을 충족시키기 위해 삼왕자가 매일 끼니마다 3가지 이상의 요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왕자가 애쓰고 노력한 덕에 마 상궁은 먹는 것에 있어서는 궁녀들의 우두머리인 제조상궁 옹 씨보다 더한 호사를 누리고 있달까.
그러나 삼왕자는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엔 마 상궁의 마음을 얻으려고 시작하긴 했으나, 천하제일의 숙수가 되기 위해서 솜씨를 갈고닦는 수련 과정이라 여기고 있어서다.
심지어 마 상궁이 맛있어하는 반응을 즐기기까지 했다.
비록 마 상궁이 그의 마음을 알아주진 않더라도 말이다.
“아~ 배고파!”
우미림이 들어온 후 요리를 보조하는 것에도 아예 손을 놓아버린 마 상궁.
“삼왕자님,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우미림은 한쪽에 의자를 두고 편히 앉아서 손만 까딱거리는 마 상궁의 뒤통수를 뾰족하게 노려봤다.
‘으이구, 저 화상을 확 그냥!’
만들어만 주시면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하며 얌전히 기다려도 부족할 판에, 재촉하기까지 하다니.
그때.
쿵쿵쿵.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오늘 식자재를 가져오는 날이었나? 얘, 뭐하니. 어서 나가보지 않고.”
우미림은 바쁜 거 안 보이냐고,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오늘 밤만 지나면 끝이니까, 참자.’
대신 집에 갔다 돌아오면 마 상궁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리라 다짐하며 정문으로 급히 걸어가.
“누구세요?”
문을 열었다.
그런데 식자재를 가져다주던 담당이 아니라 늙은 환관이 서 있었다.
사례태감 방임이었다.
“방, 방 공공!”
벌떡 일어나서 정문으로 후다닥 뛰어가 머리를 조아린 마 상궁은 방임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유근을 보았다.
‘저 인간은 왜 방 공공의 방문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거야!’
원망하는 마음도 잠깐.
유일각을 찾아온 게 방임과 유근만이 아니란 걸 알고 속내를 더 깊숙이 감추었다.
약관도 안 되었을 이국적인 미모의 여인과 키가 8척은 될 듯한 거구의 중년 사내가 뒤따라서 유일각 안으로 들어왔다.
방임은 딱 보아도 요리 중인 모양새의 삼왕자를 보고도 별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여인을 소개했다.
“삼왕자님, 초나라에서 오신 웅사여 공녀이십니다.”
웅사녀는 삼왕자의 외모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드디어 만나 뵙게 되었네요, 삼왕자님.”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삼왕자는 어리둥절했다.
주나라와 사이도 썩 좋지 않은 제후국의 공녀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미리 듣지도 못한 데다, 마치 자신과 만나기를 고대했다는 듯한 인사말이 의미심장해서다.
하지만 정작 삼왕자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웅사녀가 아니라, 거구의 중년 사내다.
‘무공 고수다.’
거구인데도 전혀 비대한 느낌 없이 단단한 체구, 굳은살이 박인 양손, 그리고 내공이 깊으면 불끈 솟는다는 태양혈.
상승 경지에 올라선 무림고수와 관련해서 읽은 설명 속 외견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다면.
“마 상궁, 우 나인, 손님이 오셨는데 마당이 어수선해서 보기가 안 좋군요. 어서 이것들을 다 치우도록 해요.”
혹시라도 우미림이 평범한 궁녀가 아니고, 얼굴에 면구를 쓴 게 발각되는 일이 없도록 멀찍이 거리를 두게 하려는 의도였다.
“예, 삼왕자님.”
눈치 빠른 우미림은 즉시 반응했고, 방임의 눈치를 보기가 싫었던 마 상궁도 서둘러 요리와 도구를 치우려고 움직였다.
그런데.
“삼왕자님이 직접 만드신 거죠?”
웅사녀가 바짝 다가와 우미림이 막 집어 들려던 음식에 고개를 숙이고 향을 음미하더니.
“냄새도 좋고, 맛있어 보이네요. 먹어봐도 될까요?”
“입맛만 버리실까 염려스럽네요.”
“먹어보지 않으면 입맛에 맞을지 안 맞을지 알 수가 없죠.”
“원하시면, 드셔보십시오.”
“고마워요.”
웅사녀는 우미림이 치우려고 챙겨두었던 젓가락을 빼앗았고.
“음~ 셋 다 너무 맛있네요!”
하나씩 차례로 집어 먹어보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이곳은 다양하게 저를 깜짝 놀라게 하네요.”
웅사녀는 뒤를 돌아보며 중년 사내에게 손짓했다.
“장 오라버니,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봐요.”
중년 사내는 과거 특별한 인연으로 웅사여와 의남매를 맺고 호위무사로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철탑웅패 장중이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행히 우미림은 그사이 뒤로 빠져 마 상궁과 주방으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장중은 웅사녀에게 건네받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오, 정말 맛있군.”
둘은 주거니 받거니 초나라의 음식들과 비교했고, 결국 그릇을 모두 비웠다.
“어머, 우리가 다 먹어버렸네요. 어쩌죠?”
“맛있게 드셨으면 된 거죠. 그리고 음식은 또 만들면 됩니다.”
“지금 만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
“하하하, 농담이에요. 아니, 농담은 아니지만, 여기 밥 먹으러 온 건 아니니, 참으려고요.”
마 상궁만큼이나 식탐이 강해 보이고, 푼수끼까지 보이는 여자가 자력으로 강남을 제패하고, 강북의 제후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초나라 군주의 딸이라고?
삼왕자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웅사여는 특유의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삼왕자님, 둘이서만 담소 나눌 곳이 있을까요? 당연히 차도 마시면서요.”
* * *
삼왕자는 거실에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웅사여와 마주 앉았다.
마 상궁이 각각의 잔에 차를 따랐고.
“아까 그 어린 궁녀는 어디 가고, 너만 왔느냐?”
웅사여의 물음에 마 상궁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궁녀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라서, 접대 중에 귀하신 분께 실수를 저지를까 염려되어 저만 왔습니다.”
사실 반만 진실이다.
본래 주전자와 찻잔 등은 우미림이 들게 하고, 자신은 따르는 일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작하듯 납작 엎드린 우미림이 발발 떨며 실수할까 두렵다고, 혹시라도 벌을 받고 쫓겨나면 아버지에게 맞아 죽는다면서 꼼짝하지 않으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혼자 와야 했다.
“그렇게 안 보았는데, 겁이 많은 아이로구나. 알겠다, 그만 나가보렴.”
마 상궁이 나가고 둘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침묵을 깬 건 웅사여였다.
“제가 찾아올 줄은 모르셨죠?”
“네.”
“제 아버지가 저와 삼왕자님의 혼인을 추진 중이란 것도 모르시겠군요.”
혼인?
‘나와?’
하지만.
‘왜?’
단순히 외모와 장애 때문에 드는 의문이 아니었다.
양민들 사이의 혼인이라면 모를까, 천자와 군주 사이에 이루어질 정략혼에 주관적인 호불호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걸 알만큼의 지식은 쌓았으니까.
아니, 그런 지식이 있어서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서자의 정실이 되기보다 적자의 첩실이 되는 게 더 나을 텐데요.”
왕이 될 가망이 티끌만큼도 없는 서자의 아내보다, 왕이 될 수밖에 없는 적자의 첩이 되는 게 정략혼의 관점에서 더 합당하지 않겠는가.
강남의 패자인 초나라 군주의 딸이면 첩이라도 무시 받지 않을 테고.
그러니 정치적인 계산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상식적이지 않다.
“어머, 삼왕자님은 정말 솔직하고 직설적인 분이네요. 좋아요, 저도 솔직하게 말하죠. 제 아버지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첫 번째가 아니면 안 되는 분이거든요. 그렇기에 딸도 두 번째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
“좋은 아버지시군요.”
“대단한 아버지죠.”
삼왕자는 좋은 것과 대단한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웅사여에게 그 차이가 어떤 의미인지도.
그런데.
“삼왕자님은 많고 많은 제후국 중에 북의 진(晉)이 강해진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웅사여가 가볍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혼인할 만한 상대인지를 평가해 보고자 하는 의도인 걸까?
물론, 대답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황하를 왼쪽과 아래에 두고 태행산의 골짜기를 차지하고 있으니, 지세가 험하여 방어하기가 좋습니다. 또한, 주위에는 작은 나라들뿐이었고, 초창기에 기틀을 단단히 할 만큼 덕을 겸한 군주가 여럿이었죠.”
“서의 진(秦)이 강해진 이유는요?”
“일단 황하를 오른쪽에 두고 화산과 효산을 동쪽으로 두어 자연스레 천혜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이후 주(周)의 옛 땅을 봉읍으로 받아 제후국의 지위에 오르면서 본래 지닌 강성함을 공고히 한 경우입니다.”
“동의 제(齊)가 강해진 이유는요?”
“바다에서 나오는 물산을 거둬들이고 산동의 평원을 개간하여 부유함을 추구했으며, 무엇보다 실리를 우선으로 하는 풍토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초(楚)는요?”
삼왕자는 웅사여의 나라를 평하는 질문에도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한수를 방벽으로 하고, 장강을 뒷마당에 두어 강북의 제후국들이 넘보기 어려웠고, 이에 방심하지 않고 신속히 주변의 소국을 규합하여 국력을 키운 결정이 탁월했습니다.”
웅사여는 환하게 웃었다.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네요. 삼왕자님은 저의 기대를 넘어서는 분이신 거 같아요.”
진 상궁과 사부님들 말고 이런 식의 긍정적인 평가를 해준 이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웅사여에게 마음이 혹한 건 아니었다.
혼인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그는 조만간 왕성을 떠날 거고, 어떤 제후국이든 연결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웅사여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한 것도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대답할 수 있어서 답한 것뿐이었다.
한편으로 앞날을 염려해 눈치를 보지 않으니, 거침이 없달까.
그렇기에.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말씀드리지만, 전 공녀님과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웅사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빙긋이 웃었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농담 아닙니다.”
“제가 예쁘지 않은가요?”
“예쁘신 거 같습니다.”
“제가 똑똑하지 않은가요?”
“똑똑하신 듯합니다.”
“그럼 왜 저와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하시나요?”
예쁘고 똑똑한 여자는 절대 거절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건데,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달리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할 말이 없다는 건 아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누구와도 혼인할 생각이 없을 뿐인 거죠.”
당사자에게 생각이 없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이유가 있을까?
“혼사 여부는 저나 왕자님의 생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건 아시죠?”
맞다.
평생을 유일각에 갇혀 지낸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듯, 혼사도 다를 바 없다.
웅사여를 설득하는 자체도 무의미했고.
그래서 유일각을 탈출하려는 거고, 왕실과 영원히 결별하려는 거 아닌가.
‘얌전히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면 다 해결되겠지.’
그래서.
“삼왕자님, 너무 짧게 느껴질 만큼 재밌는 대화였어요. 곧 또 뵙기를 기대할게요.”
“저도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삼왕자는 웅사여가 유일각을 떠날 때까지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담담히 예의를 다했다.
이미 이틀 전에 고왕을 알현하고, 전날에는 다른 왕자들이 준비한 연회까지 참석한 뒤에 유일각을 찾았던 웅사여는, 다시 고왕을 알현하고 곧장 초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탔다.
그런데 마차 안에는 그들이 타기 전부터 면사로 얼굴을 볼 수 없게 가려서, 나이도 생김새도 전혀 알 수 없는 여인 한 명이 이미 앉아 있었다.
하지만 둘은 여인을 쳐다도 보지 않고 마치 없는 사람 취급했다.
신기한 건 여인 또한 두 사람의 어떤 대화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마차 장식품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차는 왕성을 빠져나왔고, 웅사여가 장중에게 물었다.
“장 오라버니가 보기에 삼왕자는 어땠나요?”
장중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요리를 잘하더군.”
“무인의 눈으로 볼 때는요?”
장중은 최근 발간된 무림영웅록에서 팔성의 일인으로 꼽힌 절정의 고수이니, 꽤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으리라.
“병신이었다.”
삼왕자를 고의로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인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내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 거 같아요?”
“어제 몇 시진을 어울렸던 다른 왕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머리 쪽으로는 괜찮은 왕자인가 보구나.”
“그냥 괜찮은 게 아니라, 성장해 있을 훗날이 무척 기대될 만큼 괜찮아요.”
“웅매가 그 정도로 칭찬하는 사내는 처음이로군.”
순간 웅사여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처음이죠. 그러니까 반드시 제거해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