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162. 이가 없으면
방희 누님에게 그동안 겪은 이야기를 하고, 흑송과 백록에게 추궁과혈을 해준 뒤에 집을 나왔다.
“다시 올 거지?”
배웅 나온 방 누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너무 자주 온다고 타박하지나 마세요.”
손을 흔들고 걸어가는데, 골목에서 걸어 나온 송웅이 옆에 붙어 보조를 맞추었다.
그는 내 몸을 한번 쓱 훑어보고 말했다.
“참 바쁘시네요.”
“송 장로는 한가한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요. 다른 거지라면 몰라도, 개방의 대장로가 한가해서야 쓰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법개에, 후개까지 맡고 있어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합니다.”
“송 장로가 고생이 많습니다. 그러다 쓰러지면 개방의 큰 손해이니, 얼른 법개와 후개를 찾아보세요.”
“예, 예, 그래야지요. 혹시 필요하신 게 있을까 싶어,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달려왔는데, 있으신가요?”
“마침 송 장로가 해줄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허현에서 천하제일무술대회를 열려고 합니다.”
“잘못 들었습니다?”
“주최는 개방입니다. 대회를 여는 목적은 강호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무를 겨루어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고수를 뽑고, 그 열 명을 축으로 무림맹을 결성하여, 악인을 벌하고, 약자를 도와 천하에 의협을 널리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 내용을 글이든, 말이든 천하에 퍼트리세요.”
“자기 기분대로 사는 게 강호의 무인들인데, 우리가 모이라 한다고 올까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천하에서 나의 서열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무림인이 있을까요?”
“흠.”
“그리고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싸움 구경입니다. 자신이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 없더라도 올 겁니다.”
“그렇기도 하겠네요.”
“명색이 대회이니, 상금도 걸어요.”
“얼마나요?”
“1위는 은 100냥.”
“헉!”
“나머지 9명도 서열에 비례해서 상금을 지급할 겁니다. 돈은 중원전장이 지원하고요.”
“너무 많은데, 지원할까요?”
“할 겁니다.”
“천하십대고수가 내는 돈을 거절할 상인은 없을 거고, 그렇기에 중원전장의 신용도 높아지겠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신용과 화폐는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죠.”
“…….”
“그런 게 있습니다. 그리고…….”
포우산에게도 했던 영약에 관해 설명해 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우리 장로님께서 나 때문에 더 바빠지게 되셨으니, 얼른 가보세요.”
“예, 예, 소인은 물러갑니다.”
* * *
경공 실력이 한층 늘어난 송웅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고, 곧바로 현청으로 향했다.
“웬 녀석이냐.”
창을 들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병사가 눈을 부라렸다.
“공손앙 현승 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현승 님을? 나 원 참. 이놈아, 현승 님이 네 녀석 뒷집에서 키우는 똥개라도 되는 줄 아느냐?”
“이놈 이거 아주 제정신이 아니네. 엉덩이를 걷어차이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고, 썩 꺼지거라.”
허현에 산다고 누구나 나를 알고 있지는 않다.
현청을 지키는 병사라도 마찬가지.
그나마 안 의원이 준 옷이 깨끗한 편이고, 환골탈태 덕에 피부가 하얗고 뽀송뽀송해서 거지로 보이지 않아, 병사들이 더 심한 말로 무시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어쨌든, 이런 정도로 화를 내고 싶진 않았다.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다지만, 이깟 일로 사람을 때리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무력 시위가 필요했으니, 취옥장을 살짝 들어, 병사들과 나 사이에 박혀 있는 돌 하나를 찍었다.
콰득.
단단한 돌이 모래처럼 부서지자,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고, 잔뜩 굳어진 얼굴로 창을 겨누었다.
그래서 말했다.
“개방 방주 진천입니다. 하오문 문주이기도 합니다. 현승 님과는 오가며 안부를 물을 정도의 친분은 있습니다. 현승 님은 안에 있습니까?”
두 병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겨누었던 창을 뒤로 뺐고.
“방주님,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현승 님은 개간되고 있는 주변 땅을 둘러보러 가신다고 아침 일찍 마을 밖으로 나가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현령이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병사들은 서로를 쳐다보고 말했다.
“왕께서 현을 다스리라고 보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잘못 알고 있습니다. 지배하라고 보낸 게 아니라, 왕께서 넓은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백성들의 말을 들을 수 없으니, 대신 현령을 보낸 겁니다. 제후들도 그 역할을 따져보면, 그 시초가 현령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애환과 고통을 살피고, 그들의 말을 들어 도와줄 방법을 찾기 위해서 제후들에게 식읍이란 명목으로 땅과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을 부탁한 것이지요.”
세금도 본래는 딱 백성들을 돌볼 정도의 금액만 걷고, 부담을 줄 정도로 과하게 거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내 말에 동의할 제후는 거의 없겠지만.
“그리고 허현에는 현재 현령이 없으니, 현승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러니 두 분은 현승 님을 만나겠다는 현민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여자든, 아이든, 거지든, 당장 내일 죽게 될 노인이라도 만나고자 하면, 두 분은 어떻게든 만날 수 있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병사들이 이해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내심 욕을 하고, 원망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야 현민은 불만을 해소하게 되고, 현승은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막게 되며, 여러분은 공적으로는 상관과 동료와 백성을 지키고, 사적으로는 목숨이 위태로워질 상황을 피해서 다시 안전하게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옳은 언행과 의협이란 그런 것이다.
인정받지 못하고, 욕을 먹거나, 설사 목숨이 위태로워지더라도 감수하고 꼭 해야만 하는 것.
“두 분의 건승을 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아, 예.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살펴 가십시오, 진 방주님.”
현청과 병사들을 뒤로하고 허현의 외곽으로 나갔다.
허현을 떠날 때만 해도 주위는 온통 초원이고, 평야라서, 황량하기까지 했는데.
“좋구나.”
지금은 어딜 보아도 논이고, 논들 사이사이의 공터를 밭이 메웠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 소와 말이 곳곳에서 각각의 역할을 맡아서 개간에 열중이었다.
“진 방주?”
마침 마을로 향하던 공손 현승과 마주쳤다.
“네, 개방 방주 진천 맞습니다.”
“정말 진 방주요? 하지만 어떻게…….”
“의술이 뛰어난 안 의원님께서 잘 치료해 주셨고, 환골탈태도 했습니다.”
“그게 무슨…….”
이해하길 기대하고 사실을 밝힌 건 아니었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방금 공손 현승 님을 만나러 현청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공손 현승 님이 병문안을 와서 내게 해준 이야기와 관련해서 경고해 줄 말이 있습니다.”
“의식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던 거요?”
“네, 듣고 있었죠.”
“무얼 경고한다는 거요? 나도 아직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 소식은 사실일 겁니다.”
“거의 확신하듯 말하는데, 근거라도 있소?”
“공손 현승 님도 왕실에서 일어난 변고에 대해서 듣게 되면 사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왕실에 무슨 변고가 일어났다는 거요? 아니, 진 방주가 그걸 어찌 아오?”
“내가 그 변고가 일어난 현장에 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현승과 공조해야 하기에 성주에서의 일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또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지 않고, 타인의 관점과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기에 본래 삼왕자였던 신분과 허현에 오게 된 과정도 말해줬다.
“아…….”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이야기에 멍하니 듣고만 있던 공손 현승은 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났고.
“소신, 그동안 삼왕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손하였음을 사과드립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꿇자마자 내가 격공섭물로 일으켜 세웠다.
“내가 예전 신분을 밝히고, 내막을 설명한 것은 성주에서의 변고와 정세 변화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지, 혈통과 신분을 자랑하고, 귀빈 대우를 받으려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럼, 이전처럼 편히 대해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죠.”
“후~ 한숨 놨소. 자, 이제 무엇을 경고하려는지 들어봅시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듯 태세 전환이 빠른 모양이다.
“혼마는 제후들의 말뿐인 충성에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형식을 갖추고, 천하에 선포하는 식으로 과시하려고 할 게 분명합니다.”
“설마, 그 혼마라는 괴녀가 회맹(會盟)을 개최한다는 뜻이오?”
회맹이란 전통적으로 패자를 자처할 만큼 강성한 제후국의 주체로, 제후국들 간에 국방, 전쟁, 제후위 계승 등 국가 명운을 좌우할 만한 중대 현안을 논의하고 약속을 맺는 자리였다.
또한, 회맹이 체결되면 회맹의 효력이 지속될 동안은 군사,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회맹은 모두가 가장 강한 나라임을 인정한 제후국의 군주가 천자를 대리하여 천하를 관리하겠다고 선언하고 공증받는 자리인데, 왕실이 회맹을 연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잖소. 군주들이 모일지도 미심쩍지만, 전통의 패권국인 북진뿐만 아니라, 제나라, 서진, 남초, 모두 반대하며, 자신들이 패자라고 주장하면서, 천하가 완전히 난장판이 될 거요. 그건 제후들의 다툼을 중재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왕실에도 결코 좋을 게 없소.”
하지만 그것이 혼마의 의도이기에 회맹은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왕실이 무슨 힘이 있소. 비웃음만 당할 거요.”
“그래서 혼마는 힘을 증명하려고 할 겁니다.”
“어떻게?”
“허현을 정식으로 병합하고, 이에 반대하는 제후들에게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여 굴복시키는 방식으로요.”
공손 현승은 피식 웃었다.
“왕실이 우리를 병합하고, 제후국과 싸울만한 전력이…….”
그러나 곧 내가 말해준 성주의 별궁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며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괴약을 쓰고, 기이한 주술까지 이용해, 무공도 익히지 않은 남녀노소를 죽음에 초연하고, 괴력까지 발휘하는 괴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 막대한 군대를 단시간에 구축할 수 있을 겁니다.”
“끔찍하군. 진 방주, 이대로는 다 같이 죽게 될 터인데, 우리가 어찌 대비해야 하겠소?”
“전쟁을 피해야지요.”
“그 혼마라는 괴녀는 우리 허현을 희생 삼으려고 작정했을 것인데, 어찌 피한단 말이오?”
“옛말에 전쟁을 피하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힘을 합해 맞서 싸울만한 전력을 구축해야겠지요.”
“일단 그 수밖에 없을 거 같소. 사실 이주해 온 수만 명이 모두 전쟁을 경험하고 숙련된 병사들이니, 우리의 전력도 만만치 않잖소.”
혼마가 괴군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초와도 단독으로 맞설 수 있는 전력이었다.
“나는 가보겠소. 곧 연락드리리다.”
생각이 복잡해진 공손 현승은 서둘러 현청으로 향하고, 나는 저기 어딘가에 있을 제갈신기를 찾기 위해서 작업하는 사람들 사이와 드넓은 논밭을 거닐었다.
* * *
긴 대화를 나누고 제갈신기는 말했다.
“똥개도 자기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잖소. 그러니까 어떤 나라의 군대가 와도 우리가 이길 거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제갈신기는 왕후비론을 수없이 읽고 분석하여 통달하였고, 이를 적용하여 타국의 침략을 가정한 채로 땅을 개간했다고 한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어찌 알았습니까?”
“몰랐소.”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냥 개간만 하면 되지, 왜 병법과 음양과 술법 등을 적용하는 수고로움을 자처하여 개간한 겁니까?”
“진 방주에게 숨길 것이 뭐가 있겠소. 흥미가 동해서 열심히 배웠고, 애써 익힌 걸 낭비할 수 없어 실전에 써먹을 방법을 고민하다가 개간에 활용했을 뿐이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조을이 말했다.
“소 뒷걸음질에 쥐를 잡았네.”
제갈신기는 조을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유 여하를 떠나,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는 거요.”
우연히 한 일에 뜻하지 않게 좋은 결과를 얻었으나, 어쨌든 노력한 거고, 의도도 나쁘지 않았고, 결과 또한 좋았기에, 나는 제갈신기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소는 축(丑)으로 행(行)이니 의도를 의미하고, 쥐는 자(子)로 무명(無明)이니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즉, 행하였고, 어리석음을 깨뜨렸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요.”
제갈신기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어렵다! 못 알아듣겠다!”
그 옆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듣고 있던 조을은 더욱 심하게 얼굴을 찌푸렸고.
“진 방주, 제발 말 좀 쉽게 풀어 설명합시다.”
팽찬은 투덜거렸다.
그리고.
“방주님, 이 땅의 이점을 더욱 살려 우위를 점하려면 말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이릉이 의견을 냈다.
“관청에서 말을 지원받을 수 없을까요?”
“거긴 우리보다 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했고, 한 가지 방법이 떠올라 말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을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