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21
21화
21. 바람 앞의 등불
낙읍의 서쪽 삼문협(三門峽).
삼왕자는 무상제일공의 구결을 끊임없이 읊조리고, 운기행공에 몰입하다 보니, 무아지경에 빠졌다.
뜻풀이처럼 자신을 잊은 게 아니라, 일 갑자의 기운과 하나가 되어서 내면을 떠돌았다.
그 덕에 망아지처럼 날뛰며 육신을 망친다고 생각했던 기운이, 사실 태생부터 그를 괴롭혔던 불균형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재탄생을 위한 파괴의 과정이랄까.
그렇게 생각하니, 고통을 참기가 이전보다 수월했다.
의식으로 동행을 해보니, 일 갑자의 기운은 꽤 세심했다.
어느 것은 치유하고, 어느 것은 다독이고, 어느 것은 다음을 기약했다.
마치 동면에 들어간 듯 내면에 집중했으나,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건 아니었다.
“그냥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모두가 날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만 같았어요.”
마 상궁의 속삭임이 들렸다.
“뭐든 다 잘하는 진 상궁이 부럽고, 질투가 났어요. 비빈님들이 오해하게 이간질하고, 곤녕궁 밖으로 떠돌게 했어요. 스스로 궁녀를 그만두게 하려고 괴롭히기도 했죠. 하지만 그냥 뭘 해도 달라지지 않으니, 나만 비참해지는 기분이라 의욕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먹는 것에 집착했나 봐요. 맛있게 먹고, 배가 부른 그때만은 행복했으니까요.”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녀의 음성엔 자괴감이 짙게 어려 있었다.
“삼왕자님이 아기 때 제가 돌보았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에요. 제대로 먹이지도 않았어요. 소리나 지르고, 짜증만 내고, 나인들에게 떠넘겨버렸죠. 마침 진 상궁이 오지 않았다면 삼왕자님을 죽게 했을지도 몰라요. 정말 죄송해요. 정말…….”
마 상궁은 울먹였다.
그녀의 사과가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말을 할 수는 없었으나, 그럴 수 있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실 저는 내내 삼왕자님께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어요.”
마 상궁은 궁에서 쫓겨나지 않는 대신 제조상궁의 사주를 받아 삼왕자를 감시한 사정도 밝혔다.
유사한 조건을 내건 사례태감의 제안을 수락했다는 것도 말했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에게 보고할 수 없었어요. 삼왕자님이 요리해 주신 음식을 먹고 위로받았거든요. 진심으로 저를 위해 만들어주셨다는 게 느껴졌어요. 존중받는 기분이었어요. 저는 나쁜 여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투덜거리기만 하는 못된 년인데. 삼왕자님은 그런 저를 살리시려고…….”
소리죽여 흐느끼던 마 상궁은 결국 하늘이 무너진 듯 오열하며 엉엉 울었다.
한참을 울다가 진정하고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젠 사랑받길 바라지 않을래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내 마음 따라 살 거예요. 솔직하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거예요. 저는…….”
갑자기 주의가 어수선해지고, 수레가 격하게 흔들리더니, 평탄하지 않은 어딘가로 급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왕성을 공격한 자들이 삼왕자님을 찾는 거 같아요. 삼왕자님을 잠시만 여기에 숨겨둘게요. 돌아올 거예요. 반드시 돌아올 거니까…….”
“마 상궁님, 어서 출발해야 합니다!”
“꼭 돌아올게요.”
마 상궁과 윤성이 떠났다.
시간이 흘렀다.
한 시진, 반나절, 하루…….
삼 일이 넘도록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으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았다.
‘마음을 따른 것이겠지.’
그녀가 다짐했던 삶을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여보, 나 소피 좀 보고 올게. 어머나! 여보, 얼른 이리로 와봐요!”
인근을 지나던 낭인 부부가 수풀 속에 눕혀져 있던 삼왕자를 발견했다.
* * *
낙읍의 왕성 건주궁(建周宮).
“빈 대부님, 서관도 쪽을 수색하던 군사들이 진(秦)나라로 도망치던 백성들을 사로잡아 방금 복귀하였습니다.”
삼왕자와 냉안마도, 다정마도를 찾기 위한 수색 작업은 이틀 만에 중지되었다.
불이 완전히 꺼지고, 잿가루만 남은 유일각을 뒤늦게 수색해 본 결과 여러 개의 인골, 일부 녹아내린 냉안마도와 다정마도의 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목격담이 신경 쓰여 성주(成周)에 침투시킨 간자를 통해서 삼왕자가 고왕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심지어 고왕은 자신들이 왕성을 함락시키는 중에 삼왕자를 죽인 거로 믿고 있었다.
결국, 빈기는 그가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삼왕자와 냉안마도, 다정마도가 유일각에서 죽었다 결론 내렸고, 웅사여에게 서신까지 보내 최종적으로 수색을 종결했다.
“빈 대부님, 고왕이 동북쪽의 성주를 주나라의 새로운 왕성으로 선포하고, 왕자 게(揭)를 낙읍의 제후로 봉하였다고 합니다.”
빈기는 코웃음을 쳤다.
“흥, 여섯 귀족의 다툼으로 혼란한 진(晉)나라가 도움을 차일피일 미루니, 우리가 성주까지 공격할까 두려워 희게에게 책임을 떠넘겼군.”
주례에 의하면 천자는 6군을 거느리고, 큰 제후국은 3군을, 작은 제후국은 2군 혹은 1군을 거느린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주나라는 1군(12,500명)조차 거느릴 여유가 없었다.
아니, 주나라가 압도적 군사력을 가지고 진정한 천자국으로 군림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제후국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고왕의 선택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왕자 희게에게 낙읍의 탈환을 맡긴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현재 주나라 왕실에서 낙읍을 탈환할 만한 인물은 희게가 유일했으니까.
겉으로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반응했으나, 빈기도 희게를 경계했다.
사실 희게는 형제 중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왕자였다.
그 덕에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고.
하지만 그는 고왕의 명을 받아 국경을 경계하고, 순찰하는 임무로 십수 년을 이민족과 싸우며 노련한 장수가 되었다.
국경을 맞댄 제후국들을 상대로 쌓은 정치력까지 고려하면 매우 위험한 상대였다.
“이번에 삼왕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잡아 온 백성들을 모두 성벽 보수에 투입하라.”
“존명!”
“통술 대부는 지금 어디 있느냐?”
“태화궁(太和宮)에 있습니다.”
빈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태화궁은 전 왕들의 위패를 보관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왕의 즉위식을 치르는 상징적인 장소.
‘보고를 찾겠다고 건주궁을 시작으로 왕성의 주요 전각들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없으면, 거짓 소문인 게 증명된 거 아닌가.’
그런데도 포기를 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며, 내심으로 호시탐탐 주나라가 멸망하길 원하는 제후들에게 괜한 빌미를 줄 수도 있는 태화궁까지 건드리다니.
‘지금은 헛소문에 빠져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닌데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목을 쳐버리고 싶지만…….’
통술은 최근 합류한 자들을 대표하고, 그 규모가 전력의 절반을 차지하는지라, 짜증이 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이러다 왕성을 싹 갈아엎겠다고 할지도 모르겠군.’
어쩔 수 없이 직접 나서서 말리기로 마음먹은 빈기는 그동안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러워 바쁜 척 외면해 왔던 통술을 만나기 위해서 건주궁을 나섰다.
* * *
삼문협의 서쪽 령보현(靈寶縣)의 의방.
삼왕자는 눈을 떴다.
유일각을 떠나던 날 무아지경에 빠지고 6일 만에 깨어난 거다.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예전처럼 몸을 일으키는 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앉은 채로 뛰어올라도 천장까지 닿을 것처럼 기력이 넘치고, 몸이 가볍기만 하다.
뼈가 보이도록 말라서, 남들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격렬히 날뛰던 일 갑자의 기운도 잠잠하다.
백회혈 아래에서 새로이 열린 상단전으로 흡수되어 선천기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사실 몸이 강건해진 것도 일 갑자에 이르는 선천기의 영향이다.
따로 공력을 모아 운용하지 않더라도, 일 갑자의 근본적인 기력이 생겨 자연스럽게 일 갑자를 운용하듯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거다.
게다가 무상제일공으로 선천기를 공력처럼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른팔을 들었다.
손목부터 보이지 않고, 붕대로 깔끔히 감싸져 있어, 마치 나무 몽둥이를 보는 듯하다.
안타깝기는 했으나, 슬프진 않았다.
당시에 손을 잃은 대신 목숨을 건졌으니까.
이 손을 가져간 이는 진작 불쏘시개가 되었으니, 복수심으로 마음 썩일 것도 없었고.
‘오른손이 잘릴 때는 이제 요리는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왼손을 들었다.
보기 흉하게 뒤틀려 있어야 할 손이,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자랐을 여인의 고운 손처럼 가냘프고 하얗다.
‘하늘도 내가 천하제일의 숙수가 되는 걸 보고 싶으신 모양이다.’
사실 변화가 생긴 건 손만이 아니다.
피부 곳곳에 천형처럼 자리 잡고서 평생 괴롭혀온 두드러기와 발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마치 아기의 그것처럼 깨끗하다.
게다가 털이 나기 시작하며 머리와 눈 위가 근질근질했다.
‘머리카락이 자라고, 눈썹이 생기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다.’
직접 삼왕자라고 주장해도 부정당하지 않을까?
왕실과 절연해야 하는 입장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보고 듣는 등의 감각도 보통 이상으로 예민해졌다.
이 모든 건 지난 6일간 일 갑자의 기운이 내부를 오가며 치유하고, 균형을 잡아준 결과다.
무림에 관해 다양한 내용이 기록된 간독에서 이를 표현하는 사자성어를 읽은 적이 있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선가(仙家)에서 연단법(鍊丹法)을 공부하고 수련하는 도사들로부터 기원하여 무림으로 흘러들어온 경지라고 했던가.
그러나 말 그대로 꿈의 경지고, 등선(登仙)이 그러하듯 환골탈태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전설 기반의 야사로만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일존 무명자가 환골탈태하여 등선하였다는 야사도 있다지.’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무명자로 활동했던 애왕 희거질의 무상제일공을 익히고 환골탈태한 것이라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맞다 단정 짓지도 못하는 게, 환골탈태가 무상제일공을 익혀서인지, 아니면 일 갑자의 기운 덕분인지 알 수가 없어서다.
‘한쪽에 모든 공을 몰아주는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환골탈태가 안 되었을지 모른다.
무상제일공만 익혔다면 맥과 경을 치유할 힘이 부족했을 거고, 일 갑자만 있었다면 통제할 수 없어 주화입마에 빠졌을 테니까.
‘둘이 조화를 이루어 기연을 만들어 냈다고도 할 수 있겠군.’
하지만 완벽한 기연은 아니다.
왜냐하면.
절뚝 절뚝…….
오른 다리의 굳어진 무릎은 여전했기 때문에.
‘왼손은 정상이 되었는데, 오른 다리는 왜 변함이 없을까.’
알 수 없었다. 일 갑자의 공세와 다독임, 회유에도 끄떡하지 않고 버틴 나머지 이 갑자의 기운이 여전히 맥과 경 일부를 막고 있어서라고 추정할 뿐이다.
‘일 갑자의 기운으로도 어쩌지 못한다면, 이걸 뚫어낼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할까?’
역시 알 수 없었다.
‘의술이 뛰어난 진 상궁이라면 답을 말해줄 수 있을지도.’
그때.
덜컥.
갑자기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어머나! 꼬맹이가 꼬맹이가 아니었네!”
삼왕자가 홀딱 벗고 서 있는 걸 보고도 눈을 가리기는커녕 오히려 빤히 쳐다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
그 순간, 삼왕자는 내심 많이 놀랐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드넓은 호수의 수면 위로 떨어진 듯 내면에만 작게 퍼진 파장 수준이었으나, 분명히 부끄럽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야, 감추려고도 않고, 반응이 재미없네.”
여전히 표정으로 나타나진 않다 보니, 여자는 삼왕자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삼왕자는 심각했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물론, 예전에도 부끄러움을 알았다.
하지만 이전에는 머리로 인지하고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면, 지금은 마음을 통해 실시간으로 느낀다고 해야 할까.
“꼬마어른 씨, 거기 자랑은 충분히 한 거 같으니까, 이불로라도 가려줄래?”
“아, 네.”
그러고 보니 이전까지는 어떤 풍경을 보아도, 어떤 사람을 마주해도 딱히 감흥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로 무심한 기분이 아니다.
장애와 감각이 회복되니 감정까지 살아난 걸까?
혹은 그 반대인가?
여자의 뒤로 사내가 따라 들어왔다.
사내의 키는 매우 컸는데, 여인의 작은 키와 대비되어서인지 웅사여 공녀와 함께 유일각을 방문했던 철탑웅패보다 더 거구로 보였다.
그런데.
쿵-
사내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큭큭…….읍!”
삼왕자는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웃음에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렇게 진심으로 웃었던 적은 처음이다.
여자도 따라 웃었다.
“흐흐흐, 웃기지? 우리 남편이 가끔 이렇게 곰처럼 재밌는 재주를 부린다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웃긴 걸 봤으니, 웃는 게 당연한 거지.”
하지만 이제까지 그 당연한 걸 당연한 줄 몰랐던 삼왕자로서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리는 웃음의 여운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다만, 웃음을 참는다고 그렇게 소리죽여서 딱딱한 표정으로 큭큭 거리면 비웃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웃기면 그냥 하하하, 하고 시원하게 웃으렴.”
솔직히 그렇게까지 웃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큭큭, 거리는 웃음도 자기에겐 파격적일 만큼 매우 큰 웃음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안녕, 난 방희라고 해. 방 누님이라고 불러. 이쪽은 내 남편 탁발. 탁 형님이라 부르고.”
방희는 동쪽으로 향하던 길에 삼문협 인근 숲속에서 삼왕자를 발견했고, 상태가 심각해 보여서 령보현에 있는 의방에 데려온 사정을 설명했다.
즉, 이들은 삼왕자를 구하겠다고 하루는 족히 걸리는 길을 되돌아왔던 거다.
“넌 이름이 뭐니?”
“진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