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23
23화
23. 사소한 감정
“얌전한 애라 상단에 피해 끼칠 일은 없어요. 먹는 것도 우리 몫을 나눠 먹을 거고요.”
그래도 여심공은 탐탁지 않았다.
아니, 속으로 욕을 했다.
‘지랄! 애가 최소 삼사일은 굶은 거 같은 몰골인데, 퍽이나 나눠 먹겠다. 게다가 오른손이 없고, 오른 다리도 절뚝거리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어떻게 그 먼 거리를 같이 간다는 거야.’
무엇보다 상행은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한데에서 먹고 자는 게 기본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한겨울에 저런 애를 같이 데려갔다가는 중간에 송장이나 치우겠지.’
혹시 죽으면 상단을 탓하며 관 값이라도 챙기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사실 상행 여건이 갑자기 안 좋아지지만 않았다면, 이런 요구는 단박에 거절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 이런 상황을 마주할 일이 없었겠지.
본래 여가장은 낭인을 고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여가장은 상인 가문이지만 대대로 가전 무공을 전승해 온 무가였고, 일족과 제자들의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상단을 호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주나라의 왕성이 정체 모를 세력에게 함락되어 시국이 어수선해지며 상행로에 걸친 낙읍 인근에 도적이 들끓는다고 하고, 역시 상행로에 걸친 언사현과 공의현에서 갑자기 마적 떼가 출몰하여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비 차원에서 열 명의 낭인을 고용하게 되었던 것.
하지만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3일을 남긴 시점에 믿을 만한 낭인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방희와 탁발의 실력이 쓸만해서 선수금 요구도 받아들였는데, 짐밖에 안 될 애를 데려가겠다니.
“우리 여가상단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자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철칙이라 아니 되오.”
“행수님, 한 명뿐이잖아요. 빡빡하게 굴지 마시고, 그냥 허락해 주세요.”
“상행이 무슨 옆 동네로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오.”
“내가 볼 때는 간단한 거 같은데요?”
방희의 말에 여심공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거 같아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방법이 있다.
“정 그렇게 데려가고 싶으면 저 아이에게 쟁자수 일을 시키겠소. 일도 오늘부터 바로 시작해야 하고.”
그러나 방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경을 헤맸고, 막 회복한 진천에게 강도 높은 육체노동은 무리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심장 마비라도 오면 어쩌라고.’
그리고 손도 하나 없는 아이가 무슨 짐을 나른단 말인가.
그런데.
“저는 좋습니다.”
진천이 앞으로 나서서 받아들였다.
‘방 누님과 탁 형님이 상단의 호위를 하게 된 것도 내 치료비 때문이었는데, 나 때문에 두 분이 곤란해지시면 안 되지.’
도움은커녕 피해만 끼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함을 느끼던 진천에겐 오히려 반가운 제안이었다.
방희는 만류했다.
“진천아, 안 해도 돼. 할 필요 없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여심공과 끝까지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일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배상금이야 칼이라도 팔아서 돌려주면 되지.’
낭인에게 병기는 목숨만큼 귀하다지만, 웃기는 개소리다.
어떤 식으로든 목숨이 위험하다 싶을 때 망설임 없이 병기 던지고 도망치는 낭인이 얼마나 많은데.
왜냐.
칼은 돈을 벌어 다시 살 수 있으나, 목숨은 억만금으로도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천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제가 하고 싶어요, 누님.”
“하지만 몸이…….”
“괜찮습니다. 몸은 이제 멀쩡해요.”
진천은 증명해 보이겠다며 한 바퀴 빙글 돌고, 펄쩍펄쩍 뛰었다.
“방 누님, 탁 형님, 저는 일을 하게 되어 너무 좋습니다.”
진심이다.
얼마 전까지 걷는 것도 버거웠던 몸인데, 무거운 짐을 나를 수 있게 되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자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질 거 같아서 유일하게 가능한 웃음을 지었다.
“큭큭!”
역효과만 생기니, 그렇게 웃지 말라 했건만.
그러나 진천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이니, 방희도 계속 반대할 수는 없었다.
“어, 그래, 진천아, 이 누님은 널 믿지. 여보도 그렇지?”
탁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은 자신의 웃음이 통한 거 같아서 내심 흡족했다.
그리고.
“행수님, 저기로 가면 되나요?”
여심공은 진천의 순수한 시선을 받고, 새삼 손이 없는 오른팔이 눈에 들어와 괜히 미안했다.
그러나.
“허험, 그렇네. 저기로 가서 새로 온 쟁자수고, 내가 보냈다고 하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걸세.”
“그럼, 전 일하러 갑니다. 이따 뵐게요.”
진천은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중심으로 쟁자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
* * *
“어이쿠, 그걸 혼자 올려? 나랑 같이 올리지 않고.”
“이 녀석아, 그러다 병난다, 병나. 쉬엄쉬엄하라니까.”
장부를 살피며 수레에 실린 짐들을 확인하던 여심공은 말소리가 들려오는 건너편을 쳐다봤다.
마지막 수레에 짐을 싣는 쟁자수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진천도 섞여 있었고.
여심공의 표정은 복잡했다.
홧김에 진천을 쟁자수로 고용했지만, 그에겐 다른 의도가 있었다.
고용할 당시 3일 뒤에 출발하니까, 이틀, 아니 하루만 빡빡하게 굴려도 알아서 떨어져 나가리라 예상했던 거다.
물론, 그걸 빌미로 낭인 중 가장 쓸 만한 실력의 방희와 탁발을 쫓아내려는 건 아니었다.
진천을 데려가는 게 얼토당토않은 요구인 게 증명되었으니, 진천을 데려가는 대신 어떤 불상사가 생겨도 상단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을 추가하고, 방희와 탁발의 고용비를 3냥에서 2냥으로 깎으려 했다.
그런데.
‘저렇게 일을 잘할 줄이야.’
겉모습은 작고 왜소하고 바짝 말라 힘이 하나도 없는 약골로 보이는데, 큼직한 짐들을 어렵지 않게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오른 다리의 장애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엔 무릎이 안 굽혀져 오른 다리를 절기는 해도 딱히 지팡이가 필요해 보이지 않는데 왜 들고 다니나, 의아할 정도였다.
손이 없는 오른팔도 능숙하게 잘 사용했고.
‘손도 하나 없는 녀석이 얼마나 열심인지, 아주 진국입니다요!’
‘얼마나 성실한지, 싫은 소리 한마디 하는 걸 못 들었습니다요!’
‘농담에도 잘 웃지 않는 게 좀 흠이긴 하지만, 그 외에는 책 잡을 게 하나 없어요!’
잔뼈가 굵은 쟁자수들에게도 어떠냐고 물었는데,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
여심공은 씁쓸하게 웃으며 줄줄이 늘어선 수레의 시작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 정말이라니까. 나도 숫자 맞춰서 친구들 데리고 나올 테니까, 상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같이 재밌게 놀자고.”
그의 아들 여철당이 시녀와 시시덕거리는 중이었다.
여철당은 단순히 그의 아들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장주이자 단주인 형님에게 자식이 없기 때문에 여가장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하지만 좀처럼 철이 들지 않고 놀기만 좋아하니, 형님과 논의하여 이번 상행에서부터 쟁자수를 시키고 있었다.
가장 밑에서부터 일을 배우다 보면 여가상단이 얼마나 어렵게 유지되고 있으며, 그 후계자가 되려면 얼마나 큰 책임감이 필요한지, 몸소 깨닫게 되리란 기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별 소득이 없었다.
‘나이는 철당이가 2살이나 더 먹었는데, 저렇게 비교가 되어서야.’
아니, 실망감만 커지고 있었다.
“아우~ 쟤가 또 오늘만 살다 갈 것처럼 용을 쓰며 하네.”
방희가 탁발과 함께 나타났다.
두 사람은 매일 저렇게 나와서 반 시진 정도 진천을 지켜보다 돌아가곤 했다.
“남 소저께서 참 기특한 동생을 두셨소이다.”
이틀간 소 닭 보듯 하던 여심공은 슬며시 다가가 칭찬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어쨌든, 같이 상행을 가야 하는 사이고, 어쩌면 자기 등을 맡겨야 할지도 모르는데, 계속 냉랭하게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방희는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려고 하냐는 듯 새침하게 쳐다봤다.
“허허, 오해 마시오. 진심으로 칭찬을 한 거니까. 사실 그때 진천이가 허약해 보여서 상행을 따르는 게 불가능하다 의심했었는데, 내가 완전히 잘못 짚었구려. 사과하리다, 미안하오.”
“고마운 말씀이지만, 사과는 우리가 받을 게 아닌 거 같아요.”
“맞는 말이오.”
여심공은 막 짐을 모두 실은 쟁자수들에게 걸어갔다.
“모두 수고했소. 내일부터 긴 여정이 시작될 테니, 오늘은 일찍 돌아가 푹 쉬고, 내일 출발 시간에 늦지 않게 모이도록 하시오.”
쟁자수들이 삼삼오오 흩어질 때, 여심공은 진천을 손짓해 불렀다.
“나는 네가 일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착오였구나. 널 의심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행수님 입장에서야 제 모습을 보면 의심하고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진천은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짜 문제는 실수인 걸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다.
“자, 이걸 받아라.”
여심공은 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의 은조각을 내밀었다.
가치를 따지면 은 1냥의 1/10.
“본래 상행을 출발하기 전에 짐을 싣는 일은 급료를 따로 지급하는데, 네가 제대로 하지 못할 거로 생각해 언질도 안 했구나. 본래 손톱만 한 크기로, 은 1냥의 1/20을 지급하는데, 사과의 의미로 더 얹어 주는 거다.”
상인은 누구보다 돈을 추구하는 이들.
돈을 더 준다는 건 그만큼 사과에 진심을 담았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진천은 거절하지 않았다.
상대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그럼, 푹 쉬고, 내일 보자꾸나.”
여심공이 자리를 떠나고, 진천은 한쪽에 세워둔 지팡이를 집어 들고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희와 탁걸에게 걸어갔다.
“방 누님, 이거 받으세요. 상행이 끝나고 돈을 받으면 또 드리겠습니다.”
“야, 야, 됐어.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먹지. 그리고 내가 돈 벌자고 널 도왔니. 앞으로 너도 돈 필요할 때가 많을 테니까, 잘 챙겨둬.”
진천은 굳이 고집 피우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어딜 가게?”
“마을 좀 다녀오려고요.”
“그래, 다녀와. 내내 일만 했으니, 기분 전환도 해야지. 혼자 괜찮겠어? 우리도 같이 갈까?”
“아니요. 혼자 다녀올게요.”
“너무 늦지 말고,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네.”
여가장을 나온 진천은 곧장 마을 중심 쪽으로 사라졌다.
끝까지 바라보던 방희는 물었다.
“괜찮겠지?”
탁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을 거야. 어린애도 아니고. 일하는 거 보니, 힘도 장사드만. 그리고 금방 해 떨어질 건데, 그사이에 일이 생길 게 뭐가 있겠어.”
* * *
진천이 마을 외곽에 자리 잡은 여가장을 나선 건 방 누님과 탁 형님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다.
본래는 쟁자수 일을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니 자신을 위해서 제 몫을 한 것에 불과하고, 방 누님과 탁 형님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여 행수님에게 받은 돈을 주려고 했던 건데, 방 누님은 돈을 받지 않았다.
‘사실 돈으로 갚는 것도 마땅한 예의는 아니었어.’
자신이나 방 누님이나, 탁 형님이나, 돈을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상인은 아니니까.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쟁자수 아저씨들의 말을 들어보면 상행 중에는 조리할 시간이 없고, 딱히 방법도 없어서 계속 육포로만 때운다지.’
사실 여가장에서 주는 음식도 유일각 시절보다 미각이 예민해진 진천의 입맛에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여가장에서 상행 중에 육포가 아니라 무얼 주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서.
‘내가 상행 중에 두 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드려야지.
마을로 나온 건 그때 쓸 식자재를 사기 위해서였다.
마음이 조금 들떴다.
무슨 요리를 할지 고민하고, 상상하고, 식자재를 고르는 건 유일각에서도 가장 큰 즐거움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장을 찾아 마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들떴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번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방희 누님과 탁 형님과 함께 여가장을 찾아갈 때는 마을 풍경이 제법 번듯하고, 사람들의 모습도 꽤 말끔하고 분위기가 대체로 밝았었다.
살만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오늘 보게 된 풍경은 전혀 딴판이었다.
지저분하고, 허름하고, 무엇보다 곳곳에 거지들이 많이 보였다.
‘어떻게 한 마을인데 이렇게 극과 극일 수가 있는 거지?’
의아하기보다 슬펐다.
왕성 바깥은 이러했구나.
백성들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었구나.
아버지는 그동안 무얼 했던 거지?
왕실의 사람들은, 귀족들은 무얼 했던 건가.
그들이 권력과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건, 백성들을 행복하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과 믿음 덕분이었을 텐데.
그리고.
‘나도 다를 게 없다.’
자신의 처지가 가장 어렵고, 가장 괴롭고, 가장 슬픈 것이라 여겼던 시간이 너무도 부끄럽기만 했다.
‘나는 참으로 이기적이었구나.’
이제껏 자신을 왕자가 아니라고 부정해 왔으나, 왕자이기에 누렸던 것들이 떠올라 너무나 미안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을 쉽게 여겨 처리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감정은 계속 발생하며,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큰 불행으로 발전하는 일이 적지 않으니, 부디 감정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문득 천 재부의 말이 떠올랐으나, 한 번 무거워진 감정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무게를 더하고, 가라앉는 마음을 따라 더욱 좁고 지저분한 풍경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이 감정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금 보는 이 풍경을 마음에 단단히 새겨넣어야 한다는 듯이 자기에게 채찍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절뚝이며 멍하니 걸어가던 진천은 어느 순간 인적 없는 곳에 들어서 버렸다.
빛이 잘 들지 않아 칼날 같은 냉기가 을씨년스럽게 흘러가는 암울한 분위기가 깔린, 좁고 지저분한 골목이었다.
그리고 천 재부의 말처럼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영향일까?
“어이, 꼬맹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겁도 없이 기어들어 와?”
난데없이 불행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