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89
89화
89. 흐뭇하고 기쁜 마음으로
진천의 중얼거림을 들은 남익의 눈썹이 꿈틀하며 출렁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제법 예의가 있었다.
“나는 소형제를 본 기억이 없는데, 소형제는 나를 어찌 알지?”
당연하게도 남익은 진천을 알아보지 못했다.
잊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외모의 변화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조가현에 왔습니다.”
물론, 지금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남익의 뒤로 스무 명의 도객 사이에 섞여 있는 아종을 통해서 이미 의문을 해결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만날 이유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종 등을 살려 보내 남익을 이곳으로 오도록 유도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내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인가?”
“아니. 그건 우연이었습니다. 복우파가 돈에 혈안이 되어 횡포를 부리고 있지 않았다면, 당신의 제자가 배후의 권력과 무공의 강함을 믿고 어부들을 괴롭히지 않았다면, 일어날 일이 아니었죠.”
남익은 아종을 돌아보았다.
“아종, 소형제의 말이 사실이냐?”
“좌호법께서 제게 문주님의 명이라고 하시며 사제들을 데리고 호수의 관리를 지시하셨는데…….”
아종이 더듬거리며 내막을 이야기하자, 남익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까지 제자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어부와 백성들을 상대로 어떻게 갑질을 해왔는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소형제, 제자의 잘못은 내가 사과하지.”
“내가 아니라 조가현의 백성들에게 사과할 일이고, 설사 사과한다고 해도 해결될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호수의 허가패에 대해서라면 그 부당함을 문주께 말씀드리겠네.”
“기대해 보죠.”
진천은 순가와 중행희를 지팡이로 가리켰다.
“참고로, 중행가의 병력과 싸우게 된 것도 우연입니다. 자존심만 세고 스스로 겁쟁이임을 인정할 수 없던 이 귀족의 말만 믿고, 힘없는 백성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이 멍청하고 욕심 많은 장수의 고집만 아니었다면, 부하들이 죽고, 전차 절반이 박살 나는 일은 없었을 테죠.”
순가와 중행희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진천의 각오에 따라 언제든 저승 문턱을 넘어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익과 함께 진천을 중심으로 삼각을 이룬 두 명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사부님께 예의가 없구나!”
“얼마나 배운 게 없으면, 언행이 그따위란 말이냐!”
아종도 제자고, 이 둘도 제자였다니. 남익은 무공의 재능보다 숫자에 연연하는, 드물게 제자 욕심이 많은 강호인인 걸까?
아니면 내심 언제고 복우파로부터 독립할 야망이 있어, 지금부터 세를 불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일대종사의 능력에 다다르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명성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제자를 받아들이려면, 혼자일 때보다 문파의 지원을 받는 게 더 쉽고 빠를 테니까.
‘혹은 남익이 복우파의 젊은 무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남익은 배우고자 하는 열정만 보인다면 누구든 받아주는 호인일 수도 있고.’
어쨌든, 진천은 인내심이 점점 한계치까지 다다라 가는 것을 느끼며 남익의 두 제자를 역으로 질책했다.
“사부가 대화 중인데 제자가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함부로 끼어드는 건 예의가 있는 겁니까? 어떻게 제자들이 하나같이 방만하여 사부의 얼굴에 똥칠하는 것 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지, 통탄스럽군요.”
남익의 첫째 제자 삼추와 둘째 제자 조망은 그제야 사부의 불편한 안색을 확인하고 놀라며 머리를 숙였다.
“제자들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어린 것이 말을 함부로 하기에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남익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언행을 따지는 것은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 것과 같다. 소형제의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조금 전 손을 섞어보니,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 고수였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삼추와 조망은 깜짝 놀랐다.
그들도 잠깐 부딪쳐보았기 때문에 진천이 자기들보다 강하다는 건 눈치챘다.
하지만 진(晉)나라에서 벽한파와 함께 쌍벽을 이룬다는 복우파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고수인 사부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하다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어리고, 장애까지 있는 거지 놈이 그 정도로 고수라니.’
솔직히 둘의 상식으로는 수긍하기가 힘들었으나, 하늘처럼 생각하는 사부가 확언한 만큼 이제부터라도 함부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기로 했다.
“소형제는 내게 용건이 있어 조가현에 방문한 거라고 했으니, 그 두 사람은 보내주는 것이 어떠한가. 특히 장수는 부상이 심해서 서둘러 의원에게 데려가야 할 거 같네.”
“글쎄요. 떼로 몰려와 나를 죽이려 했고,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게 직업인 장수의 부상까지 걱정해야 합니까?”
“…….”
“지금은 이쪽보다 당신 자신이나 걱정해야 할 겁니다.”
“무슨 뜻이지?”
“내가 당신에게 질문을 할 건데,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당신을 죽일 거거든요.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제자들도 죽을 길인 줄도 모르고 내게 덤비겠죠. 이후 복우파에서도 원수를 갚는다고 나선다면, 결국 나는 복우파를 괴멸시키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 한 명 때문에 복우파가 멸문당하게 하기 싫으면 속일 생각 말고, 신중히 대답하도록 해요.”
삼추와 조망, 그리고 다른 복우파 도객들의 얼굴에 깔린 적대감이 강해졌다.
그러나 정작 남익은 담담했다.
“어디 물어보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성실히 대답할 테니.”
“희호소 사부님을 당신과 벽한파의 고수가 데려갔죠?”
남익의 눈동자가 놀람과 의문의 감정으로 일렁였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진천의 위아래를 꼼꼼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알기로 희 각주의 제자는 한 명뿐인데, 소형제는 비슷한 연배로 보이지만, 외모가 전혀 다르네. 게다가 그는 죽었기 때문에, 소형제가 그일 리가 없지. 그런데 어찌 희 각주의 제자를 자처하는가?”
“내가 질문을 한다고 했지, 질문을 받겠다고 했습니까?”
“그렇군.”
“사부님의 시신을 불태우고 남겨진 재를 중행씨의 장원 곳곳에 뿌렸다죠? 중행가의 사람이든 중행가를 찾아오는 손님이든 사부님을 짓밟으라고 말입니다.”
중행열 대부의 아내이고, 죽은 중행소의 모친인 요시 부인이 결정했다고 하지만, 진천은 알고 싶었다.
“당신도 동의했습니까?”
“동의하지 않았네. 사실 문주에게 그래선 안 된다는 의견을 전달했지. 아무리 복수라지만, 희 각주 또한 복수였던 거고, 희 각주는 엄연히 주왕실의 방계인데 복수하는 방법이 너무 과하다고 했어. 그러나…….”
문주는 노발대발하며 중행가에 전해지는 일이 없도록 그 문제에 대해서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
“당시 나와 함께 시신을 이송한 벽한파의 송풍미검(松風美劍)도 벽한파 문주에게 반대 의견을 냈다고 들었네. 하지만 역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더군.”
“당신의 말인 즉, 두 문파가 동의했다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진천은 열심히 눈알을 굴리고 있는 중행희의 어깨를 지팡이로 툭 쳤다.
“당신도 그 논의 자리에 참석했나?”
“나는…….”
“거짓말은 하지 말도록 해. 지금은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지만, 나는 변덕스럽기 때문에, 당신의 대답에 따라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있었다.”
“그래서?”
“백모님의 의지가 너무 단호했고, 대부님도 확고하게 동조를 하시니, 반론을 제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론할 생각은 있었고?”
중행희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대꾸하지 않았고, 시선도 피했다.
아마도 중행가의 일족 대부분은 중행희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실질적인 책임은 요시 부인과 중행열 대부에게 있고, 희호소 사부의 유해를 모독한 죄는 그들 부부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만 죽이면 끝날 일인가?’
중행씨의 종주와 그 부인의 죽음을 중행가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사부님의 유해를 계속 짓밟히도록 놔둘 수는 없다.’
진천도 중행열 내외만 처리하고 끝낼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생각이지만, 오늘은 때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확인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해 보았다.
‘지금쯤이면 조가현을 빠져나갔을 거다.’
그렇다면 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지팡이로 순가의 혈도를 때려 기절시키고, 중행희에게 말했다.
“당신은 중행가로 돌아가면 내가 사부님을 모욕한 자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 찾아갈 거라고 전해요.”
그리고 중행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역시 혈도를 때려 기절시킨 후, 갑자들에게 둘을 데려가라고 했다.
“혈도는 한 시진 후에 풀릴 거다.”
전차에서 뛰어내려 눈치를 보며 중행희와 순가를 업고 돌아가던 갑사 중 하나가 노려보며 말했다.
“두고 보자.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뭘 다음을 기다려. 지금 덤벼.”
“…….”
“안 덤벼? 그럼 내가 갈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갑사는 반박도 못 하고 동료들을 재촉해 전차에 올라서는 병사들과 함께 급히 떠났다.
진천은 갑사들이 중행희 등을 데려갈 길을 열어주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처음과 달리 싸울 의지가 보이지 않는 남익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막을 겁니까?”
“솔직히 고민이 되는군.”
“본인을 복우파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면 고민이 되겠죠.”
“난 복우파의 우호법일세. 당연히 하나인 게지.”
“그래서 본인이 살고 싶은 삶에는 관심도 없이, 가시밭길로 떠밀기만 하는 복우파와 함께 중행가의 영원한 개가 되겠다는 겁니까?”
“개라니, 말이 심하군. 그리고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소형제가 어찌 안다는 건가.”
“네, 모릅니다. 그럼,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까? 내가 보기엔 둘 다 아닌 거 같은데요. 내 예상이 틀렸다면, 지적해 주시죠.”
남익은 입술만 우물거릴 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런 남익을 바라보는 제자들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고.
진천은 말했다.
“앞으로 나와 싸울 기회는 많을 겁니다. 그러니 꼭 오늘 싸울 필요는 없겠죠.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또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당신을 만나면, 오늘 하지 않은 마무리를 반드시 매듭짓겠다고 약속하죠.”
남익의 제자들에게도 말했다.
“당신들에게도 약속하겠습니다. 적으로 만나게 되면 당신들을 반드시 죽일 겁니다. 그러니 나와 다시 만나기 전까지 열심히 무공을 단련하면서 생각해 봐요. 복우파에서 당신들은 어떤 존재이고, 문주가 중행가의 하부 조직처럼 운영하는 복우파가 당신들에게 어떤 의미이며, 당신들이 왜 무공을 익혔고, 이대로의 삶이 괜찮은 건지 말입니다. 뭐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겠지만, 나 같으면 그 정도는 알고 죽는 게 덜 억울할 거 같습니다.”
* * *
절뚝절뚝.
호수를 떠나, 황보호한과 백성들의 흔적을 따라가던 진천은 나무 지팡이를 잡고 있는 왼손을 보았다.
바람 부는 날의 사시나무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천하제일의 숙수가 되는 법을 깨달았을 때부터 기혈을 막고 있던 막대한 기운 중 하나가 반응하여 녹아내리며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그런데도 운기로 조종할 상황이 아니라서 억누르고 있다 보니 생겨난 증상이었다.
사실 이전까지 막힌 기혈이 녹으려고 할 때마다 곤욕을 치른 것과 비교하면, 그리고 예양을 시작으로 순가와 남익까지 상대해야만 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가히 초인적인 인내와 통제력 발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계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중앙로임에도 개의치 않고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서 가부좌하고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오고 가는데도 어느 한 명 방해 하거나,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진천이 운기에 몰입하고, 주위 환경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곳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자체를 인식하지 못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몰두하던 끝에 막혀 있던 기혈이 녹아내리고 빠져나온 기운을 상단전으로 거의 인도하고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중행가의 친위대가 왜 방위군의 장수를 죄인처럼 끌고 가는 거지?”
오가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운기를 마무리하며 눈을 떴다. 중앙로 중심에, 꽤 화려한 복장의 여러 갑사들이 포박한 장수 한 명을 끌고 가는 게 보였다.
그런데 끌려가는 인물이 낯설지 않았으니, 부사장 예양이었다.
‘저 사람이 왜?’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일부 행인들은 예양이 잡혀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항명했다 하더라고.”
“지휘하던 병력으로 폭도들을 호위해서, 조가현의 경계 밖으로 안전하게 빠져나가도록 돕기까지 했데.”
“심지어 그 폭도들에게 군량미를 넘겼다고도 하더구만.”
아무래도 오늘 심경에 변화가 생겨, 그냥 병영으로 복귀하지 않고, 옳지만 모질고 험한 길을 선택했다가 낭패를 당하게 된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게도 일부 책임이 있구나.’
그런데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보다 뿌듯하고 싱글싱글 웃음이 나는 것은, 세상에 협자가 한 명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른척해서는 안 되겠지.’
진천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빼곡하게 모여선 사람들을 헤치고서 중앙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외쳤다.
“아이고, 배고프다! 어르신, 형님, 누님, 거기 갑사님들, 배고픈 거지에게 적선 좀 베풀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