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96
96화
96. 괴이한 일이 생겨도
통행이 전면 금지된 자정을 넘은 시간인 만큼,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순찰 중인 병사들뿐.
그렇게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촌장이 병사들의 이목을 완벽히 속이며 당도한 곳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초라한 형태의 흙집이었다.
그 집으로 촌장에 이어 9명의 젊은 사내들이 기척을 숨긴 채 속속 모여들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진천은 잠시 기다렸다가 흙집으로 접근했다.
‘사내들의 경신법은 촌장에게 배운 게 분명하다.’
표현이야 의형제 사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제관계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진천은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공간이 너무 협소하여 침입하자마자 금방 발각될 게 뻔했으니까.
대신 달빛을 거부하며 그림자까지 드리운 담벼락 옆에 붙어, 손바닥을 붙이고, 모든 오감을 활용하여 집 안에서 생겨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 * *
“큰형님, 한단에서는 건물과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와 가축에까지 세금을 걷고 있습니다.”
“집주인에게 듣기로 최근에 조세 항목을 크게 늘렸다고 합니다. 내전 준비로 돈이 부족해 그런 모양인데, 다들 세금 징수법이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고정될 걸 염려하더군요.”
“문제는 자기들이 우리를 징집하여 일방적으로 국인들에게 떠넘겨놓고는, 우리의 머릿수까지 계산하여 인두세를 다시 걷기로 했다는 말이 들리고 있습니다.”
“저도 집주인에게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야인들을 보는 국인들의 시선과 분위기가 무척 안 좋습니다.”
“담당 관리를 찾아가서 이 문제를 따져야 합니다. 농사도 못 짓게 하고, 군역까지 강제하더니, 조세 문제로 우리를 욕먹게 하는 건 너무한 겁니다.”
“함께 훈련받는 다른 마을의 촌장과 젊은이들도 이 문제를 이야기하며 연신 불만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관리들은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이런 게 큰 문제가 된다는 걸 영원히 모를 겁니다. 알고 싶지도 않겠죠. 여차하면 무력 시위라도 해야 합니다.”
의형제들의 성토가 계속 이어졌지만, 촌장은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의형제들의 말수가 줄어들고, 목소리도 잦아들더니,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제야 촌장은 말했다.
“내가 고심 끝에 너희에게 무공을 가르치겠다 마음먹고, 평생을 책임지겠다는 각오까지 세워 바가지로 술을 나눠 먹고 의형제를 맺은 날, 무엇이라 당부하였더냐.”
“무공을 내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싸우지 않음을 부끄러워 말라 하셨습니다.”
“무공이란 지키기 위해 써야 하는 힘이라 하셨습니다.”
“끝까지 책임질 각오 없이 일을 벌이는 건 비겁한 용기라 하셨습니다.”
“그러하다. 나는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물어가는 맹수와 시시때때로 마을에 들이닥쳐 침탈하는 도적들에게 부모와 형제, 이웃을 잃고 무력감 속에서 울분을 토하던 너희가 안쓰러워, 내가 마을에 없어도 그것들을 막아내고 물리칠 때 사용하라고 무공을 가르친 것이다.”
“…….”
“그런데 너희는 섣부른 용기로, 내게 배운 무공을 믿고, 무공을 배우지 못한 수많은 야인과 국인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언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드는구나.”
“큰형님, 죄송합니다.”
“저희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젊은 혈기에 휘둘려서, 후회할 일은 벌이지 말도록 해라. 지금의 어려움은 훗날 노년에 이르러 돌아보면 찰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 내전도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으니, 예상도 못 한 전개로 당장 며칠 안에 끝날 수도 있음이야. 징집이 해제되고, 마을로 돌아가면 하룻밤 꿈만도 못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삶을 길게 보며 자중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큰형님.”
진천은 새삼 깨달았다.
‘마공이 나쁜 것이 아니로구나.’
마공의 악한 영향을 주장하는 건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핑계일 뿐이었다.
‘날카로운 칼로 사람을 상하게 했다고 칼을 원망할 수는 없는 법이다.’
칼은 식재료를 다듬는 데 쓸 수도 있고, 논두렁에 자라나는 풀을 벨 수도 있으니,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어디에 어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마공을 익혔다는 이유 하나로 촌장을 평천대성과 루주처럼 나쁜 사람이라 지레짐작했다.’
만약 지켜보고 감시하며 불의한 증거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 선입관에 사로잡혀 잘못도 없는 촌장의 목숨을 빼앗았을지도 모른다.
‘편견이란 게 이렇게 무섭구나.’
촌장과 의형제들의 대화는 무거웠던 주제에서 탈피하여, 어떤 야인이 어떤 국인 처자와 눈이 맞았는지, 어떤 국인이 어느 마을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 급식장의 음식은 갈수록 맛이 없고 양도 적어진다는 등등의 소소한 이야기와 농담을 주고받는 식으로 바뀌었다.
멍하니 앉아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던 진천은 더는 들을 이유가 없었기에 일어났고, 담벼락 아래 어둑한 그림자에서 벗어나 달빛 덕에 밝아진 길로 나왔다.
잠시 갈피를 못 잡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촌장이 일하던 곡물상점 앞?
팽찬 등의 낭인들이 머무르는 객잔 앞?
아니면 길거리나 다리 밑 어딘가에서 자고 있을 송웅을 찾아갈까?
사실 고민할 건 없었다.
자신에겐 멍석이 있으니, 누울 자리만 있다면 어디든 거처가 될 수 있으니까.
‘일단 계속 걸어보자.’
거지의 삶이 이래서 좋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귀찮고 지치면 어디든 누워 안방인 듯 잘 수 있으니까.
그런데.
“거기 누구야!”
모든 감각을 흙집에 두어 촌장과 의형제들에게 집중했고, 길로 나와서는 상념에 빠져 있다 보니, 순찰 중인 병사들이 가까워진 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늘져서 더욱 어두운 담장 아래로 들어가, 급히 달려오는 병사들이 횃불에 의지하여 어둠에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사이에 건너편 지붕으로 뛰어오르고, 근처의 다른 지붕으로 연이어 세 번을 옮기며 병사들을 떨쳐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금쯤 병사들은 자기 눈을 의심하고, 아무도 없는데 들고양이 같은 들짐승 때문에 착각했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위기를 넘긴 줄 알았는데, 순간 뒷골이 찌르르하고 울리며 육감으로부터 위험 신호가 왔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왼쪽 건너 건너편 지붕 위에서 촌장이 노려보고 있었다.
진작 미행이 들킨 걸까, 아니면 병사들의 외침 때문에 뒤늦게 발각된 걸까.
어쨌든, 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우선 설명을…….’
그런데.
“대부께서 엄벌을 내리겠다는 경고를 내렸는데, 이 시간에 돌아다닌다는 건 죽기를 각오한 자가 아니면 힘들다! 중행가와 범가의 세작이라는 거지! 찾아!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분명 근처에 숨어 있을 거다!”
속였다고 생각한 병사들이 인근에 나타나고, 다른 곳을 순찰 중인 병사들에게도 신호를 보내며 곳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한위조연합 병사들의 경계심과 군기를 너무 얕잡아보았구나.’
중행범연합보다 전력에서 밀리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패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순찰하는 병사들이 이런 규율과 풍기를 갖추었다면 승산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촌장을 향해서 포권을 취하고, 고개까지 살짝 숙였다.
‘아까 의형제들에게 말하는 걸 보면, 다짜고짜 싸움부터 벌일 사람은 아니다.’
강호의 인사법으로 예의까지 갖추어 인사를 건넸으니, 자신을 무턱대고 적대하진 않으리라.
그런데 촌장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투지와 살기가 짙게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인사를 한 게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 모양새였다.
‘그래도 주변 곳곳에 병사들이 수색 중이니…….’
함부로 공격해서 시선을 끌진 않을 거란 예상은 바로 깨졌다.
촌장은 지붕을 박차고, 사이의 지붕을 단번에 뛰어넘어, 진천의 얼굴로 발길질을 했다.
지붕을 박차고 발길질을 날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발끝이 얼굴에 다다랐을 만큼 빨랐다.
고개를 돌려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옆으로 흘려보내면서 다른 지붕으로 날아오르며 진천은 생각했다.
‘마공인가?’
촌장의 발길질은 시력으로 파악하기도 힘들 만큼 빨랐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감으로도 부족해, 육감의 도움까지 받지 못했다면 피할 수 없었다.
‘촌장이 근처까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소리조차 내지 않는 마공의 위력 덕분일지도.’
지붕에 착지하는데, 문득 뺨이 서늘했다. 분명 피했는데, 가늘게 베인 자국을 따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기 같은 기운을 느낀 적이 없으니, 검풍처럼 발끝으로 칼바람을 일으킨 모양이다.
그만큼 빠르다는 건데, 마치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진천이 지붕에 착지할 때 어느새 날아온 촌장이 그의 머리 위로 낙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소리도 없이 촌장의 두 발이 동시에 머리와 어깨를 찍었다.
머리로 떨어지는 발은 피하고, 어깨로 떨어지는 발은 육감에 의지해서 공력을 담은 지팡이로 막았다.
땅- 웅-
마치 종을 친 듯한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잘게 떨리며 격한 진동음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인근에 있던 병사들이 소리에 반응하는 말이 들려왔고, 그들의 시선은 자연히 지붕 위로 향했으나, 진천은 촌장의 공세에서 벗어나고자 이미 건너 건너의 지붕 위로 자리를 옮긴 상태.
그러나 촌장은 순식간에 따라붙어 다시 소리가 없고, 눈으로 파악하기도 힘든 속도로 발길질했다.
진천은 또 막아냈고.
땅- 웅-
여지없이 종을 치는 소리와 지팡이가 떨리는 진동음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다른 지붕으로 자릴 옮기길 계속 반복하니.
“뭐야!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소리만 들리고, 소리의 근원지에는 아무것도 없다 보니, 당혹감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젠장, 귀신이 곡하는 소리도 아니고 말이야.”
“설마 진짜 귀신 아냐?”
“가뜩이나 기분 X같은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너야말로 귀신 소리 말고 닥쳐!”
옥신각신하던 병사들의 논쟁은 뒤늦게 도착한 졸장급 갑사의 말로 종결되었다.
“강호의 고수들이 비무 중인 거 같다.”
졸장은 양장을 가까이 불러 말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니, 너는 만목장(萬木莊)으로 가서 도움을 청해라.”
양장과 병사들은 깜짝 놀랐다.
만목장은 진나라에서 복우파와 벽한파 못지않게 위세가 높은 무림의 가문으로, 대부 지백요의 친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졸장의 지시는 또 있었다.
“십두참인(十頭斬人)만으로는 안 되고, 무조건 백두참인(百頭斬人)을 두 분 이상 모셔와야 한다.”
병사들은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만목장의 일반 문도를 일두참인(一頭斬人)이라 한다. 최소 15세 이상의 남자 1명을 죽여야만 정식 문도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십두참인은 100명을 채우기 전까지의 호칭이고, 100명을 다 채운 문도는 백두참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백두참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아무나 죽이면 안 된다.
상대가 남자야 하고, 제대로 싸울 수 있어야 하며, 절반의 숫자는 무공까지 익혀야 하며, 다시 그 절반의 숫자는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기준과 조건 때문에 만목장 내에서도 백두참인으로 인정받을 정도의 고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졸장님, 저희가 요청한다고 백두참인을 보내줄까요? 그것도 두 분 이상을요?”
“가서 있는 그대로 설명해라. 소리는 들리는데, 보이진 않는다고. 물론, 만목장에서 파견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
양장이 급히 떠나고, 졸장은 병력을 불러 모아서 주변에 포위망을 구축하도록 자리를 지정해 주고, 당부했다.
“어떤 괴이한 일이 생겨도 내가 따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경솔하게 행동하지도 마라.”
병사들이 흩어지고, 졸장은 또다시 들려오는 종을 치는 소리와 진동음에 반응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중행범연합과 결전을 치를 날이 다가오는데, 부디 좋은 징조이기를.’
* * *
우둑!
발길질을 막을 때마다 조금씩 균열이 생기던 나무 지팡이가 결국 부러졌고.
퍽!
발길질에 얻어맞은 진천은 공중을 크게 돌며 집을 다섯 채나 뛰어넘어 날아갔다.
그대로 지붕에 부딪히고 나뒹굴어 땅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으나, 진천은 기이한 동작으로 지붕에 착지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왼팔을 위아래로 둥글게 둥글게 휘저으면서 균형을 잡았다.
어느새 건너편의 지붕까지 쫓아온 촌장의 표정이 더 그럴 수 없을 만큼 차갑게 굳어졌다.
[태극(太極)? 누군가 했더니. 네놈, 미후(獼猴)가 보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