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74
제3장 그들이 왔다
며칠이 지났다.
실로 간만에 서가촌에서 고함 소리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니었다.
서가촌에서 쫓겨난 장로들과 문하 제자들이 서가촌 밖에서 마치 진을 치듯 뭉쳐서 야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마을 입구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때문에 서가촌을 찾는 이들은 여전히 늘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지 뭐.”
장건이 출근을 한 후 소녀들은 백리연의 다관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일단 급한 불을 끈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안 돌아가지?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가…….”
양소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갈영이 대꾸했다.
“그래 봐야 얼마나 더 오래 있겠어?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갈 거야.”
“그래. 그러길 바라야지. 마을 밖으로 나가 버린 이상 이젠 더 쫓아낼 구실도 없잖아.”
둘의 대화 중간에 백리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참 이상하네.”
소녀들과 장건이 백리연을 쳐다보았다.
“뭐가?”
“마을 밖의 장로님들요.”
“저 노인네들이야 원래 이상한 짓들을 하고 있었잖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구요.”
백리연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대문파의 어르신들이 굉장히 어렵고 그런 분들이었어요. 저분들을 뵈면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고 한 마디 조언이라도 듣고 싶고 절로 존경하는 마음도 들고 그랬죠.”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그분들이 저렇게 많이 모여 계신데도 전혀 공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요. 그냥 한 무리의 불한당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제갈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맞아’하고 맞장구를 쳤다.
기실 거대 문파와 세가의 장로급이면 어느 문파를 찾아 가도 상석에 앉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이들이었다. 감히 쫓아낸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가촌에 몰려든 이들에게서는 조금의 공경심도 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하루빨리 쫓아내고 싶은 귀찮은 떨거지일 따름이었다.
양소은이 코웃음을 쳤다.
“흥. 뭐 나이만 많다고 다 어른이고 대접받고 그러나?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어른 대접도 받고 그런 거지. 안 그래?”
하연홍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전 저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엥?”
“우리야 이곳에서 장 소협만 보고 있으면 되지만, 저 밖의 강호 무림은 엄청난 혼란 속에서 변혁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다른 세 소녀들도 강호에 대한 하연홍의 말에는 동감했다. 장사를 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흘러들어 온 소문들을 귀동냥으로 얻어 들었다. 그래서 가장 최신 소식은 아니더라도 대략 강호의 흐름은 알고 있었다. 세 소녀들의 본가인 제갈가나 양가장, 백리가 역시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저 노인네들과 무슨 상관이야?”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면 가장 먼저 소외되는 게 바로 저분들이잖아요. 이제 은퇴할 시기도 되었고요.”
“아…….”
“한 평생 문파를 위해 일했는데 새 시대가 왔다고 해서 그냥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으면 굉장히 억울할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지나간 과거 얘기를 하고 어떻게든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저분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기득권을 잡길 원한다기보다는 사실 후배들의 존중을 받으면서 물러나고 싶어 하는지도 몰라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깽판을 치면 돼? 연홍이 너 은근히 감상적이다. 다른 장로 분들은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저 노인네들은 그냥 자기만 알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못된…… 아무튼 별로 불쌍해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아요. 저분들은 그냥 불안해 할 뿐이에요.”
“아니래도? 오늘 갑자기 얘가 왜 이래?”
제갈영이 끼어들었다.
“우리 오라버니한테 쫓겨서 도망 다니는 걸 보니까 불쌍했나부지, 뭐.”
하연홍이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부인하지 못하겠네.”
아마도 장로들은 꽤나 오랫동안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살아야 할 터였다.
“자업자득이야.”
양소은이 다시 불씨를 지피려 하자 백리연이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다들 그만하죠. 그날 이후 장 소협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모인 건데.”
“그래. 그게 더 중요하지.”
장건은 원호에게 크게 혼난 것도 아닌데 계속 기운이 없어 보였다. 촌장이 와서 감사 인사를 하고 전의 일을 사과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한다거나 술에 취해서 난동(?)을 부린 것이 부끄럽다거나 해서는 아닌 것 같았다. 해서 소녀들이 캐물었지만 장건은 내내 괜찮다고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기만 했다.
분명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말을 않고 있으니 소녀들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 ☆ ☆
본래 한 문파의 최고수라는 건 존경받아 마땅한 자리이며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다. 뭇 제자들이 별호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서 함부로 입에 담기도 어려운 그런 이들이었고, 그런 이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세대에서만큼은 달랐다.
각 문파의 최고수들은 우내십존이란 거대한 그림자에 수십 년을 가려져 있었다.
우내십존이 단순히 강한 무력을 상징했다면 문파의 최고수들 중 몇몇 정도는 우내십존의 자리를 꿰찰 수도 있었고, 우내십존 중 한 명을 밀어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나 수십 년간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변변한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우내십존이 만들어 낸 강호 무림의 새로운 틀, 그들 간의 질서 때문이었다.
소림사라는 공동의 목표를 두고 발생된 거대 문파간의 견고한 병립 체계.
그것은 우내십존 모두를 쓰러뜨리지 않는 한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는 철벽이었고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소림사를 제외한 거대 문파들의 관계가 그렇게 고정되면서 문파의 최고수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쓰러뜨릴 대마두가 있기를 하나, 아니면 생사를 걸고 싸울 만큼 사이가 안 좋은 문파가 있기를 하나…….
밑의 제자들이야 간혹 치고받고 싸우는 일이 있긴 했어도 정작 문파 자체를 대변하는 최고수들이 나설만한 일은 없었다. 아니, 뭔가 해 보려 해도 주위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문파 자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였으니까 일을 크게 만들면 안 되었다. 우내십존이 만든 반(反) 소림사의 연합 체계를 그들이 방해할 순 없었다.
덕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문파의 골방에서 무게나 잡으며 자리를 지키는 정도뿐이었다. 활약을 펼칠 기회도, 무용을 뽐낼 자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우내십존을 논외로 치고, 수십 년 동안 각 문파의 최고수라는 제호(題號)를 달고 평화롭게 살아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명예롭긴 하였으나, 본성과도 같이 끓어오르는 무인의 피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하여 우내십존 간에 잔혹한 살극이 벌어졌을 때, 어쩌면 가장 환호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을지 몰랐다. 드디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졌으니.
거기다 소림사의 진산식으로 인한 강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서가촌에서 마지막으로 비상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한 평생 골방에 파묻혀 있던 검집의 먼지를 쓸어내고 만천하에 자신의 무공을 드러낼 마지막 기회가.
그래서였을까.
문파의 이익을 앞세워 싫은 걸음을 억지로 한 장로들과 달리 그들은 대부분 흔쾌히 걸음을 했다.
오랜 세월 무뎌져 있던 자신의 마음속 낡은 검을 조금씩 날카롭게 벼리면서.
☆ ☆ ☆
며칠이 더 지났다.
들고 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서가촌은 한산했다. 사람이 줄어드니 물자의 소비가 줄고, 소비가 줄어드니 상인들마저도 뜸했다. 여러모로 줄어들었던 발길이 좀처럼 늘어나질 않고 있었다.
딱히 소란을 피우고 있진 않으나 마을 입구에서 무리를 지어 노숙하고 있는 무림인들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찾아왔다.
어느새 장마의 끝 무렵이 되었지만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궂은 날씨 속에 수수한 장삼을 걸친 초로의 노인이 우의 하나 없이 걷고 있었다.
서가촌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정상 즈음을 오르다가, 문득 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슈욱, 슈욱.
노인의 젖은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노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작달막한 키의 또 다른 노인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품에 자신의 키보다 더 큰 한 자루의 칼을 안고 소매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클클클.”
오척단구의 노인이 웃으면서 장삼을 걸친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과연 어떤 작자가 이리도 험악한 기세를 뿌리면서 다가오나 했더니만, 그쪽은 혹시 무영문의 화룡소(火龍簫)가 아니외까?”
장삼을 입은 노인, 화룡소의 허리춤에는 기이하게 붉은색이 감도는 옥피리가 꽂혀 있었다.
화룡소는 여전히 김이 피어오르는 채로 반문했다.
“거대한 대감도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그리하면 그대는 하북의 명가, 팽씨 가문의 벽력도이시겠구려.”
“하하! 본인은 막말을 하였는데 귀하는 본가에 금칠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본인의 말투가 본래 천박한 편이니 이해해 주시오.”
소매에 손을 넣은 채 벽력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화룡소가 정중하게 포권으로 화답하며 물었다.
“서가촌이 지척인데 왔으면 들어가실 일이지. 굳이 여기서 계신 건, 행여 본인을 기다리셨던 것이오이까?”
슈욱 슈욱!
말투는 정중했으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은 더욱 짙어졌다. 화룡소의 몸은 마치 운무에 가린 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내리는 비가 화룡소의 공력에 의해 순식간에 증발해서 생겨난 운무인 것이다!
그 운무를 바라보며 벽력도가 미소했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되, 또 굳이 아니라고도 할 수도 없겠소이다. 친구라면 이 길로 함께 서가촌에 내려가 술잔을 나눌 것이요, 아니라면 조용히 온 길로 돌아가라 권해 줄 것이기 때문이외다.”
화룡소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그렇구려! 하지만 듣자 하니 서가촌에서 귀 가문과 본문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하더이다. 우선은 그것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소?”
“껄껄! 다들 오래 칼을 품고 있었더니 녹이 많이 슬은 모양이외다. 금방이라도 시험해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지 않소이까?”
“엉덩이도 무거운 우리를 한데 모으다니. 어떤 꼬마인지 제법 재주가 좋소.”
“핑계 김에, 우리에게야 잘된 일 아니겠소?”
츠츠츳.
뱀이 위협하는 소리를 내며 벽력도의 장포가 부풀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길게 가지를 드리운 나뭇가지들이 벽력도의 공력에 부산하게 떨어대며 빗방울을 튕겨댔다.
벽력도가 살벌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심하시오. 오랜만의 칼질이라 많이 서툴 거외다.”
쉬이이익!
화룡소의 몸에서 피어나는 운무가 더욱 짙어졌다.
“나 또한 마음껏 연주를 할 것이니, 연주가 부족하다 탓하지나 마시구려.”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벽력도가 도를 서서히 도집에서 꺼내고 화룡소가 허리춤의 옥피리를 잡아갈 때였다.
깡마르고 얄팍한 몸에 납작하게 주저앉은 건을 쓴 노인이 언덕을 올라왔다.
깡마른 노인은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보더니 자신도 곧 허리춤에서 철로 만든 시커먼 주판(籌板)을 꺼내 들었다. 시커먼 주판에 공력이 깃들었는지 빗물이 뿌옇게 수증기로 화해 흩어지고 있었다.
“성질들도 급하시군. 벌써 시작하시는 거요? 자자, 내가 지켜보고 있을 터이니 어서들 해 보시구려.”
예상치 않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화룡소와 벽력도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쪽이나 사력을 다해야 승부를 볼 수 있는 상대였다. 싸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남은 한 명이 어부지리를 얻게 만들 수는 없었다.
화룡소와 벽력도는 한 걸음씩을 물러섰다.
화룡소가 새로이 나타난 노인 쪽을 보았다.
“나는 무영문에서 온 촌부올시다. 강호의 동도들은 화룡소라 부르고 있소. 귀하는 혹시 산동악가에서 오신 금산판(金算板) 산산노사(算算老師)가 아니시오?”
“하하! 잘 보았소. 내가 바로 금산판이오.”
산산노사는 벽력도와 안면이 있는지 벽력도를 보고 히죽 웃었다. 염소수염이 말려 올라가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이거 아쉽구만. 화룡소 때문에 자네 머리에 주판알을 박아줄 기회가 조금 늦춰졌군. 운이 좋은걸?”
벽력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산산노사를 쳐다보았다.
“그 망할 주판을 한 번 더 동강내면 정신을 차리려나?”
“그때는 어렸을 때고.”
산산노사가 주판알을 죽 긁었다.
촤라라락!
빗물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며 주판에 서려 있던 공력이 사라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은 그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찌를 듯한 살기가 쏘아져 오고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수다.
“몰려오는군.”
산산노사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여기서 싸움박질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진진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소.”
화룡소도 옥소를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나도 개인적으로 난장판은 좋아하지 않소이다.”
벽력도도 동의했다.
“무슨 일이든 제대로 뜸을 들여야 맛이 나는 법이지.”
화룡소와 벽력도, 산산노사는 천천히 기다렸다.
다가오던 살기들이 멈추더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인영들이 나타났다. 열 개가 넘는 인영들은 저마다 운무와 수증기를 피워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시작할 텐가?”
인영 중의 하나가 묻자 다른 인영이 되물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모르나.”
“장씨 꼬마 얘기로군.”
인영들이 저마다 말을 하며 대화를 했다.
“그냥 보쌈해 와서 분근착골 몇 번 하면 아는 걸 죄다 술술 불게 마련인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는가?”
“그리 쉽게 잡힐 녀석은 아니라고 하더만.”
“게다가 각서인지 뭔지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기도 곤란하고.”
“각서?”
“오면서 들었는데 바로 며칠 전에 몇몇 바보 같은 녀석들이 덤벼들었다가 반 강제로 각서에 수결을 하게 되었다지. 알다시피 그 각서는 불가침의 내용일세.”
인영들이 껄껄댔다.
“이거 어른이 되어가지고 무르자고 할 수도 없고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밑의 것들이 한 일이니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있나.”
“그 밑의 것들이 함부로 무력을 쓰다가 쫓겨나서 마을에는 발도 못 들이고 찬이슬을 맞고 있다하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장씨 꼬마에게 단체로 손을 쓴다면 세간의 눈이 곱지만은 않을 걸세.”
“당연히 우리가 단체로 그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또 여기에는 상호간의 입장과 천문비록의 입수 문제도 걸려 있고 말이야.”
“그럼 어찌하면 좋겠나?”
잠시 말이 멈추고 침묵하던 중에 산산노사가 제안했다.
“놈을 부르지.”
“부른다?”
“소환령을 내리자는 게군?”
“그렇다네.”
“호오!”
전 문파를 대표하는 최고수들이 같은 뜻으로 내린 소환령을 거부한다면 그에 대한 보복을 분명히 감수해야 할 터였다. 장건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족들, 혹은 속한 문파까지도.
그땐 개개인이 아니라 최고수들의 문파까지 무시하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격식 상으로도 문제없고 체면도 살고, 나쁘지 않군.”
“그럼 모두 동의하는가?”
“동의하네.”
“허면 잠시 후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
그 순간 인영들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성질들도 급하군.”
미리 몸을 드러내고 있던 산산노사와 화룡소, 벽력도 또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우리도 그만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그럽시다.”
쏴아아.
갑작스레 퍼붓는 빗속에서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져 내려갔다.
아주 잠깐 동안 마지막 발악처럼 빗줄기가 쏟아지며 성질을 부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그쳤다.
☆ ☆ ☆
최고수들은 언덕을 내려와 서가촌 앞에서 머물고 있던 자파의 제자들을 찾아갔다.
“쯧쯧, 모자란 것들.”
진주 언가의 최고수 철담공의 질책에 외당주와 제자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철담공이 허술한 움막을 둘러보며 연신 혀를 찼다. 장건에게 쫓겨나서 서가촌 밖에 임시로 만든 거처였다.
“가자.”
외당주가 철담공의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예? 가자는 말씀은……?”
“언제까지 예서 기다리겠느냐. 이미 소환령을 내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제자들을 보내 장씨 꼬마를 찾아오란 뜻이다.”
“합의를 보셨다니요?”
“여기에 온 게 어디 나뿐만이겠느냐.”
“아……!”
철담공의 말뜻을 알아들은 외당주와 제자들은 스스로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진주 언가뿐 아니라 다른 문파에서도 최고수를 파견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철담공이 코웃음을 쳤다.
“장씨 꼬마가 얼마나 대단한진 몰라도 오늘밤엔 모두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게 될 게다.”
외당주와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 한 명 때문에 각대 문파의 최고수들이 모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닌가!
☆ ☆ ☆
아무것도 모르는 장건은 여느 때처럼 소녀들과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데 누군가 제멋대로 닫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에 있었군!”
들어온 이는 약관의 젊은 무인이었다. 젊은 무인이 다짜고짜 외쳤다.
“장 소협이 여기 있다고 해서 찾아왔소!”
“장 소협을?”
소녀들은 의아한 눈길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차피 장건이 이 시간이면 어디에 있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하연홍이 경계의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젊은 무인이 장건을 쳐다보며 다짜고짜 말했다.
“장 소협은 나를 따르시오. 지금 당장.”
“예?”
소녀들은 잠깐 어리둥절했다.
젊은 무인이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투의 어조로 말했다.
“뭇 어르신들께서 장 소협을 기다리고 계시니 지체하지 마시오! 이것은 전 문파를 대표한 소환령이오!”
백리연이 확인하듯 물었다.
“어르신들이라면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젊은 무인은 백리연을 힐끗 보더니 조금 말투가 누그러졌다.
“각대 문파의 최고수분들 모두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다들 어리둥절해하자, 젊은 무인이 거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분들의 면면을 말하자면…….”
젊은 무인은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즐기듯 말을 툭 던졌다.
“악조수 어르신.”
젊은 무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소녀들은―물론 장건을 제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조수 황보성?”
“에이, 설마.”
황보성은 황보가의 최고수다. 소녀들은 설마하니 그런 사람이 여기까지 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거짓말인 것 같소?”
젊은 무인이 장건을 부른 이들의 별호와 이름을 하나씩 말했다.
“무영문의 화룡소!”
“청성파의 운일도장!”
“육음지공을 대성한 공동파의 최고 고수 육망지 고 어르신!”
그가 이름을 말할 때마다 소녀들은 점점 더 멍해져갔다.
“곤륜파의 태청진인…… 단목가의 석랑자…… 진주 언가의 철담공…….”
하나같이 쟁쟁한 이름들이었다!
그것도 모두 하나같이 각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들!
우내십존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우내십존 대신 위명을 떨치고 있었을 이들이다.
“아니, 그런 분들이 왜?”
“정말이에요?”
젊은 무인이 오만하게 웃었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겠소?”
“하하…… 하…….”
제갈영은 질린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댔고, 양소은은 뜨거운 차를 물처럼 벌컥벌컥 마셨다. 백리연은 약간 창백한 표정이었으며 하연홍은 아직도 입을 닫지 못하고 놀라는 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들이 장건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제갈영이 양소은을 보고 물었다.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 응?”
“왜 아니겠어. 장로님들이 마을 밖으로 내쫓겼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각 문파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는데.”
멍해 있던 상달은 갑자기 뭔가를 결심한 듯한 결연한 얼굴로 품에서 서신 비슷한 것을 꺼냈다. 제갈영이 멀뚱히 쳐다보자 제갈영의 손에 서신을 건네주며 말했다.
“혹시 몰라 그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오늘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응? 설마 그동안…… 나를?”
“여기 사표 수리 좀…….”
“…….”
제갈영이 소리를 쳤다.
“이 아저씨가 지금 상황에 사표라니! 가게가 어려우면 돕고 살아야지!”
“어려운 정도가 아니잖아요!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다 죽게 생겼는데!”
“아무튼 안 돼, 안 돼. 죽어도 같이 죽어.”
“벽력도에 금산판까지 있다잖아요! 이러지 말고 제발 사표 좀…….”
제갈영은 결단코 사표를 받지 않으려고 상달과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와…… 이거 진짜 보통 일이 아니네.”
하연홍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히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다. 문파의 최고수들이 모였으니 무슨 사단이 나도 크게 날 수 있었다.
소녀들은 상달을 째릿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상달이 항변했다.
“나야 입 턴 죄밖에 더 있어요? 다른 건 다 장 소협이 했다고요!”
장건이 끄덕였다.
“맞아요. 내가 한 일이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죠.”
양소은이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잘못! 난동을 피운 건 그쪽들이 먼저였잖아.”
다른 소녀들도 동의했다.
“맞아 맞아.”
“우린 그분들 때문에 망하기 일보 직전이잖아.”
“그분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쫓겨나도 싸지.”
양소은이 씩씩거렸다.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어떻게 그걸 따지겠다고 문파의 최고 고수들을 보낼 수 있냐?”
하연홍이 가만히 있다가 대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 소협이니까 그렇죠.”
양소은이 흠칫했다.
“아, 그러네?”
양소은의 부친인 신창도 장건을 상대하다가 도망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고, 각대 문파의 장로급으로도 해결이 안 된 상황이다. 최고수들이 나서는 게 순리상으로는 맞았다. 물론 도리상으로는 조금 생각해 볼일이긴 했지만.
“그러니까요.”
문득 양소은이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시간상으로 좀 안 맞는 거 같지 않아? 그 일이 있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강호 전역에서 며칠 만에 찾아왔다는 게.”
백리연이 대답했다.
“그분들 정도라면 못할 일도 아니라고 봐요.”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큰일이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렇다고 소환령을 내렸는데 달아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젊은 무인은 기다리기 귀찮은 투로 언성을 높였다.
“갈 거요, 말 거요!”
장건이 되물었다.
“안 가도 돼요?”
젊은 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되오!”
양소은이 물었다.
“왜 장 소협을 찾는데요?”
“귀찮게 묻지 말고 그냥 따르시오, 당장! 이것은 내가 아니라 어르신들의…….”
양소은이 갑자기 발을 굴렀다.
쾅!
널빤지를 이어붙인 바닥이 울리면서 나뭇조각이 마구 튀었다.
양소은이 발을 한 번 더 구르자 우지직, 소리와 함께 널빤지가 뒤틀리고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엇!”
젊은 무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닥에 발이 빠질 뻔하며 무릎을 꿇었다. 창피해진 젊은 무인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양소은이 젊은 무인의 어깨를 걷어차 버렸다.
벌러덩!
젊은 무인은 볼품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공력을 담아 찬 게 아니라 내상은 없었으나 수치심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
“무슨 짓?”
양소은이 팔짱을 끼고 젊은 무인을 내려다보았다.
“야, 말을 전하러 왔으면 곱게 하고 갈 것이지, 뭐? 다짜고짜 나를 따르시오? 네게 심부름을 시킨 사람이 고수지, 네가 고수냐?”
젊은 무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곳에 계신 분들의 면면을 알고도 전언(傳言)을 가져 온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소저는 지금 그분들을 무시하고 있는 건가!”
양소은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래도 이게 정신을 못 차리고!”
젊은 무인이 흠칫해서 몸을 움츠렸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그냥…….”
백리연이 그런 양소은을 말렸다.
“그만둬요, 언니.”
“저거 복장을 보아하니 형산파의 제자 같은데 전에 장 소협에게 당하고 나서 아주 악에 받쳤나보네. 근데 뭘 믿고 저래?”
형산파란 말을 듣고 하연홍이 말했다.
“형산파의 최고 고수라면 천강수(天剛手)를 일절로 꼽는 북무선생이란 분이 계시죠.”
젊은 무인이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소. 본문의 북무 사백께서도 걸음을 하셨소이다. 그리고 나는 ‘저거’가 아니라 대형산파의 제자 자호요.”
양소은이 눈을 부라렸다.
“눈 안 깔어? 진짜 옛날 성질 같았으면 확!”
자호는 조금 주눅 든 모습으로 시선을 살짝 낮춘 채 말했다.
“어, 어쨌든 장 소협이 지, 지금 날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소.”
소녀들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어쩌지?”
제갈영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원한다면 가지 않을 수는 있어. 오라버니는 지금 명백히 나라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까 아무리 소환령이라 할지라도, 오라버니가 안 간다 하면 대놓고 어떻게는 못 할 거야.”
하지만 지금의 일을 해결하려면 장건이 가야만 한다. 소녀들도 사실 그걸 원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은 소환이었다. 당장에 소환령을 받고 온 자호의 태도만 보아도 그쪽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문파들의 존장급 인사가 부르는데 모른 척하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시비가 붙으면 필시 고집 센 장건은 물러서지 않을 거고, 그러면 수십 명에 달하는 최고수들과 싸우게 되고 만다.
거대 문파 최고수들 수십 명과 싸운다? 그건 설사 우내십존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양소은이 말했다.
“나도 장 소협이 안 갔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해서 우린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중이지만 옛날 노인네들은 그렇지 않았단 말야. 눈 뽑고 귀 베고 팔 하나 잘라 내는 걸 우습게 여기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장건도 알고 있었다. 풍진도 애먼 장건의 팔을 자르겠다며 덤빈 무인 중 하나였다.
백리연도 제갈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요. 오늘 저녁엔 일단 소림사로 돌아가서 방장 대사님과 상의를 해 보는 게 좋겠어요.”
자호가 눈을 치켜떴다.
“지금 누구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오! 그러고도 무사할…….”
“가겠어요.”
장건이 별안간 찌르는 것처럼 말을 던졌기에 자호는 잠깐 동안 말을 잃었다.
소녀들이 외쳤다.
“장 소협!”
“오라버니!”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는 거예요?”
장건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도 제가 왜 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설사 제대로 된 대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라면 어쨌든 그에 대한 실마리나마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테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잖아요.”
“하지만……!”
장건이 소녀들의 걱정스러운 부름을 무시하고 재차 물었다.
“모이셨다는 곳이 어디죠?”
자호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일전에 장 소협이 무당파의 귀인과 대결을 벌였던 그 공터에…….”
“아아, 거기구나.”
어른의 키를 훌쩍 넘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공터였다. 약간 외진데다가 넓진 않아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이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그럼 우리도 같이 가!”
제갈영의 외침에 자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르신들께선 장 소협 한 명만 오라 하셨소. 다른 이는 일절 들이지 않을 것이오.”
장건이 자호를 독촉했다.
“알았으니까 가죠.”
“따라오시오.”
자호가 먼저 가게를 나섰다.
자호는 가게를 나서자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익!
동시에 곳곳에서 자호의 휘파람에 동조하여 다른 이들이 휘파람이 불었다.
장건을 찾았다는 뜻이다.
소녀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장건을 보았다. 순하지만 한 번 고집을 세우면 좀처럼 꺾지 않는 장건이었다. 장건이 저렇듯 결심을 해버리면 더 이상 말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제갈영이 말리는 걸 포기하고 말했다.
“오라버니, 여차하면 도망이라도 가. 알았지?”
“걱정 말아.”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잔뜩 찌푸려서 아주 간혹 빗방울 하나씩을 똑 똑 떨어뜨리는 하늘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이젠 장마도 끝났잖아.”
☆ ☆ ☆
퍼붓던 비가 잠잠해졌어도 날이 흐려서 벌써 주위는 컴컴했다.
멀리 보이는 서가촌의 전경은 번화했던 예전과 달리 어두웠다. 사람들이 떠나 휑하니 비어 버린 서가촌의 거리는 불빛도 없이 건물만 죽 늘어서 있어 볼 때마다 을씨년스러웠다.
장건은 컴컴한 서가촌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요 며칠 계속해서 고민이었다.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번 일은 나날이 황량해져가는 서가촌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욱해서 저지른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말? 대화?
그런 게 무림인들에게 통할 리가 없다.
대화가 통했다면 장건이 그렇게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장건이 술까지 마셔가며 사고를 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고 함부로 행패를 부린 게 용납될 일도 아니었다. 이곳이 무림이니 망정이지 일반인들 간의 일이었다면 장건은 관아에 잡혀가고도 남았을 터였다.
‘무공…….’
장건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무공을 배우는 것도 쓰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자신과 다르게 활용하는 무림인들을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어느샌가 칼을 보아도 그다지 무섭진 않게 되었고, 누군가 ‘싸우다가 죽은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도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 두렵기까지 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집에 돌아가서 적응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때도 무림의 일에 휘말려 주변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될 지도 모르는 것.
장건은 그것도 걱정스러웠다.
환야 허량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서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장건의 불안을 원천적으로 없애주는 건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각 문파의 어른들이 모두 모였다니 조금 겁도 나면서 한편으로는 잘 됐다는 생각도 했다.
여차하면 굉장한 싸움이 날 수도 있었으나 운이 좋다면 이번 한 번으로 장건의 고민들을 대거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여 장건은 자호를 따라나설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느덧 장건도 사선을 몇 번이나 넘나든 경험을 한 무인이었다. 많이 침착해졌다. 물론 장건의 생각을 최고수들이 알았다면 발칙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아 참.”
장건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흙탕을 마구 밟으며 자호가 허겁지겁 따라오는 중이었다.
자호의 표정은 완전히 질려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장건의 신법이 실로 오묘했기 때문이었다.
‘저것이 팔각활빙보!’
대로를 가는 데도 그냥 쭉 가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마구 이동한다. 미끄러지듯 사사삭 이동하는 데 그걸 도무지 뛴다고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하도 좌우로 움직여대니 눈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따라잡는 것만도 힘겨워 죽겠는데 계속 눈앞에서 서너 개의 잔상이 흔들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몇 명이죠?”
그래서 장건이 걸음을 멈추고 그렇게 물었을 때에도 자호는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모이신 분들요. 몇 분이시죠? 지금 생각나서요.”
“문하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총 여든 아홉 명이오.”
“아, 그럼 적어도 스무 장 정도는 필요하겠네.”
그만큼 쓰게 될지 하나도 쓰지 못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준비는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다관에 좀 남아 있으니 거길 갔다가 가야겠다.”
“뭐요?”
장건이 자호에게 말했다.
“전 잠깐 어딜 좀 들러야 해서 먼저 갈게요. 어딘지 아니까 거기로 갈게요.”
“그게 무슨!”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장건은 벌써 흐릿한 잔상을 몇 개나 남기며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힘껏 달려서 쫓아갔지만 당연하게도 장건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장건이 저 멀리에서 쫓아오는 자호를 보고 소리쳤다.
“꼭 갈 테니까 안 따라오셔도 돼요!”
자호는 장건을 뒤쫓기를 포기하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헉헉…… 도대체 왜 저렇게 왔다갔다 거리면서 경공을 하는 거야, 정신없게.”
그런데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장건을 직선으로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은근히 소름 끼쳤다.
자호는 장건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흙탕물이 다 튀고 젖어서 엉망이었다.
“에이, 옷 다 버렸구만.”
자호는 자신과 달리 장건의 옷은 깨끗하기 그지없다는 걸 알지 못했다. 장건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달린 것도 길의 웅덩이나 더러운 곳을 피해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마침 길가에 천막을 친 노점도 있고 하여 내친김에 자호는 잠시 한숨 돌리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마음먹고 달아났다면 따라잡을 길은 없고 장건보다 먼저 가 봐야 설명하기도 애매하니 차라리 조금 늦게 가는 것이 나을 듯싶어서였다.
그런데 이 작은 행동이 얼마나 큰 사건을 야기하게 될지, 자호는 알지 못했다.
괜히 쉬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먼저 가서 얘기했다면, 장건이 중간에 각서를 가지러 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일은 그렇게까지 크게 꼬이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