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81
제 5 장 신병(神兵)의 위력
홍오의 정신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화가 나서 다 때려 부수고 싶다가도, 장건만 생각하면 헤벌쭉 웃음이 났다. 그러다가도 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물어물어 장건을 찾아가는 그 동안에도 홍오는 수백 번이나 심경의 변화를 느끼며 고통스러워했다.
“지금 건이가 뭐 한다고?”
장건이 남의 칼이나 갈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줄 선 무인들을 다 때려죽이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었다. 병가가 있는 법당 안으로 들어와 장건을 만나기까지 일 각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면 분명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장건을 보는 순간, 홍오는 노여움을 잊었다.
장건을 위해 최초로 굉목을 버렸다. 앞으로 무엇을 더 버리게 될지는 몰라도 장건을 위해서라면 못 버릴 게 없었다. 그런 그가 장건을 보고 화를 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홍오는 아무 말 없이 장건의 옆에서 쭈그리고 앉았다.
구시렁거리는 정도는 했다.
“에이잉! 누가 너한테 칼을 갈라고 했느냐? 대체 누구야, 우리 건이에게 칼갈이를 시킨 놈이? 저 원익이란 뼈다귀 놈이지? 내가 혼 좀 내주랴?”
장건이 대답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보세요. 이렇게 깨끗해지면 기분이 좋잖아요.”
“네 것도 아니고, 남의 건데 뭐하러 애를 써?”
“이런 걸 들고 다니면 민폐죠. 보는 사람이 기분이 안 좋잖아요.”
물론 장건 본인이나 그럴 터다.
“에이잉!”
홍오는 못내 마땅찮은 듯 돌아앉았다. 그러나 바로 다시 몸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퍼주는 것 같구나.”
홍오와 장건, 둘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기를 든 승려와 속가제자들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렇잖아도 홍오의 성격이 워낙에 괴팍한데 오늘따라 수상한 낌새가 보여 근처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홍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순간적으로 적색 기운이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장난기가 잔뜩 감돈다.
“너도 생각해 보거라. 이런 일을 공짜로 해주는 건 미친놈밖에 없단다.”
“네? 그럼 제가 미친 건가요?”
홍오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아니, 어떤 놈이 너한테 미쳤다고 했느냐! 내 그런 놈을 보면 당장 잡아서 아가리를…… 거기 너냐? 아니면 벽 쪽에 너냐?”
뒤에 일렬로 대기하던 승려들이 흠칫거렸다.
장건이 고개를 슬쩍 갸웃거리며 홍오를 보았다.
“대사님, 괜찮으세요? 오늘따라 왠지 기운이 팔팔하신 거 같아요.”
홍오는 갑자기 껄껄 웃었다.
“아니다. 내 좋은 생각이 나서 그런다.”
무언가 횡설수설하는 듯하면서도 말은 똑바르다.
“무슨 생각이요?”
“손질을 해주고 일정액 소림에 기부를 받는 것이지. 보통은 희사(喜捨)라고 한다만.”
“이걸 돈을 받아요?”
장건의 눈이 잠시 반짝거렸다.
“당연하지. 그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하지만…….”
“쯧쯧. 너, 그럼 안 된다. 네가 이걸 다 공짜로 해주면 대장장이들은 어떻게 먹고 살겠냐? 숫돌 파는 사람은? 칼집의 장식을 만드는 사람은?”
장건이 ‘아차!’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제가 그분들 생각을 못 했네요.”
“거 봐라. 그뿐이냐? 네가 이걸 하느라고 해번소의 일이 더뎌졌잖아. 다른 사람들 생각도 좀 해야지.”
“그럼 어쩌죠?”
“뭘 어째? 방금 말했잖아. 기부를 받자고. 그러면 소림으로서도 좋은 일이고. 이 쓸모없는 칼을 들고 다니던 놈들도 새 칼이 생기면서 동시에 부처님께 공덕을 쌓을 수 있게 되니, 서로가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네요. 그래도…… 겨우 이런 일을 하고 돈을 받는다는 게 좀 내키진 않아요.”
그러면서도 장건은 ‘돈’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듯했다. ‘내가 보기 안 좋아 시작한 일인데……’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자꾸만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걱정 마라. 나머진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지금 손질한 거나 이리 다오.”
홍오가 장건의 어깨를 토닥였다. 순간 장건의 어깨가 움찔하며 흔들렸다.
‘어?’
장건은 홍오의 손이 닿은 순간에 왠지 모를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실제로 피부가 뜨거운 게 아니라 기가 뜨거운 듯 느껴졌다.
그러나 홍오는 그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좋은 일을 하러 가보실까나? 우리 건이가 오늘 부처님께 큰 공덕을 쌓게 도와야지!”
홍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법당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줄을 서 있던 승려들이 우르르르 옆으로 비켜섰다.
“뭐야? 너희들, 뭐 못 볼 거라도 봤냐!”
괜히 그들을 향해 윽박지른 홍오가 ‘껄껄’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림승들은 불안한 눈길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상하게 근간에 조용하시다 싶더니…….’
‘오늘따라 정도가 더 심하신 것 같네.’
그러나 그들도 어람봉에서 굉목이 피투성이가 된 채 혼절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 ☆
“오오오!”
“하아아……!”
장건의 손에서 건네진 병기들을 받은 무인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겨우 일다경이나 될까 말까 한 시간이면 오래된 병기를 새것처럼 만들어 온다 -심지어 그 시간도 왠지 모르게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듯했다-.
단순히 겉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병기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 번쩍번쩍하며 어지간한 보검 못지않은 상태가 되어 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날을 벼리는지 모르겠지만, 명인이라 불릴 만큼 숙련된 장인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로 잘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들 신기해 병기를 꺼내보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렇게 하도 여기저기서 번쩍거리다 보니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불만도 터져 나왔다.
“거 신성한 소림에서 자꾸 날붙이들을 휘두르지 맙시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사람이라도 다치면 어쩔 거요?”
그러면서도 무기를 돌려주는 일이 너무 늦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몇 배나 좋아진 자신의 무기를 들고 감탄하던 무인들은 민망한 얼굴로 무기를 갈무리했다.
“미안하게 됐소.”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불평불만을 하던 이들도 딱히 더 다그치지는 않았다. 좀 있으면 그들도 보검을 손에 쥘 수 있게 될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법당에서 나온 홍오가 원익의 옆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강호의 뭇 동도들에게 고하네-!”
쩌렁거리는 목소리가 해번소를 울렸다.
적지 않은 연배의 노승이 말을 꺼내자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병기를 소유하는 것은 어떤 무인이라도 탐내는 것이며, 또한 좋은 병기는 소유한 자의 무력을 능히 몇 배나 상승시켜주네.”
홍오의 말을 수많은 무인들이 경청했다.
“본래 공짜로 재물을 얻으면 쉬이 탕진하듯, 좋은 병기 역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값어치를 할 수 있는 법. 하나 소림은 사찰인 바, 그러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네.”
무인들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동조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복을 얻었는데 혹여 뭐라도 내놓으라 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던 차다.
“역시 소림입니다!”
“오늘 소림이 베푼 은혜는 강호사에서 천년이 지나도록 회자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오자 홍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바로 그러하네! 은혜를 원수로 갚고서야 어디 사람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오늘 은혜를 받은 이들은 마땅히 부처님께 공덕을 쌓아 오늘의 일이 천추에 새겨지도록 해야 할 것일세.”
“…….”
“…….”
무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듯한 얘기다.
“이게 무슨 말이지?”
“글쎄……?”
홍오가 다시 말했다.
“살생을 일삼고 혈해(血海)에 파묻혀 사는 무인들이 부처님께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네.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지. 그중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사찰에 시주를 하는 것일세.”
한 무인이 언성을 높여 물었다.
“어떤 사찰이나 상관없습니까?”
“당연히 상관이 없지.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이 선종이든 교종이든 유파가 무슨 상관이며, 어디에 있는지가 무에 중요하겠는고?”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잖아도 너무 쉽게 기연을 얻어 불편하던 참이었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사찰에 가 희사를 하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이어 홍오가 나직한 목소리로, 하지만 내공을 실어 모든 이들이 들리도록 말했다.
“한데…… 가뜩이나 요즘 중의 흉내를 내며 사람을 홀려 돈만 챙기는 절 같지 않은 절들도 횡행한다는 마당에…… 혹여나 자네들이 그런 곳을 간다면 어떻게 될까? 기껏 쌓으려 했던 공덕도 물거품이 되고 말 게야. 쯧쯧. 사실 뭐 멀리 찾을 필요가 있겠나? 천하제일사찰을 눈앞에 두고 말이지. 바로 이곳에서 공덕을 쌓는 것이 가장 편한 일이 아니겠느냔 말일세.”
“…….”
“…….”
무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쉽게 말하면 돈을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반항적인 기질을 가진 이는 있는 법.
“지금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어쩝니까요?”
홍오가 별안간 왈칵 성을 낸다.
“노력도 않겠다, 공덕도 쌓지 않겠다! 그런 놈에게는 본사가 굳이 은혜를 베풀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런 놈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을 놈들이야! 나는, 내 이 비루한 몸뚱이가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런 놈들에게 차라리 살계를 열어 본보기를 보이는 게 낫다 생각하는 게 신조인 사람이야!”
누가 시킨 사람도 없는데 홍오는 방방 뛰기까지 했다. 흥분했는지 말도 뒤엉켜, 듣다보면 뭔가 이상하다.
지켜보던 원익은 어이가 없어졌다. 아무리 평소에 하는 짓마다 말썽이고 젊었을 때에는 훨씬 더 심했다지만, 대놓고 협박하며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백조님!”
원익이 급히 홍오를 말리려 들었다.
“이거 놔라! 내 당장 그 나쁜 놈들에게 지옥불의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게다. 어디 있어! 이 금수만도 못한 놈들!”
홍오가 그렇게 흥분하다 보니 말리는 원익은 오히려 바람잡이처럼 홍오를 거든 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뭇 무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원자배의 원익이 사백조라 불렀다. 현재의 소림에 원자배가 사백조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인 것이다.
“호, 홍오 대사!”
이미 긴가민가하던 무인들도 홍오의 정체를 확실히 알았다.
무인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어린 나이의 무인들을 제외한다면 홍오의 살아있는 전설을 모르는 이는 흔치 않다.
“저 성정 때문에 소림의 산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네그려.”
“나이를 먹은 지금도 저러하니 예전에야…….”
그러나 지금은 홍오의 과거 행적이 중요한 때가 아니다. 돈 몇 푼으로 자신의 검을 보검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아까운 일은 아닌 것이다.
공짜인 줄 알았다가 돈을 내야 하니 기분이 나쁠 뿐, 이 정도면 싸게 먹히는 셈이다.
곧 홍오는 원익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새 어디서 구해왔는지 빈 가죽 포대까지 앞에다 두었다. 동냥하는 거지같은 모양새라 원익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홍오에게 뭐라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자자! 목패와 증명서는 이쪽으로, 그리고 희사는 잠시 임시로나마 내가 받도록 하지.”
그리고서 홍오는 원익에게 ‘나 잘했지?’ 하는 투로 뒤돌아보았다.
“예예, 사백조께서 그리 하신다는데 제가 어쩌겠습니까. 다만…….”
“다만? 다만, 뭐?”
홍오가 눈을 부라렸다. 원익은 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릿한 살기를 느꼈다.
홍오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우리 건이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도대체가 시건방지게 우리 건이에게 칼갈이를 시켜? 이 뼈를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은 놈.”
원익은 모골이 다 송연했다. 어떻게 중의 입에서 뼈를 갈아먹겠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사, 사백조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네놈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우리 건이가 워낙 착해빠져서 봐 주는 거니까.”
말끝마다 ‘우리 건이’가 나오는 것도 으스스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원익은 홍오가 단순히 기분이 나쁜 것으로만 생각했다. 무공에 큰 뜻이 없던 그에게는 얼핏얼핏 비치는 홍오의 살기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큰 고역이었다.
홍오가 외쳤다.
“자자, 공덕을 쌓는 것은 재화의 양에 비례하는 것이야. 아깝다 생각하면 수만금을 희사했어도 공덕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려. 좋은 무기를 하나 구했다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희사하시게!”
장사를 해도 이렇게 뻔뻔한 이는 몇 되지 않을 터였다.
다들 떫은 감을 씹은 듯한 얼굴이었지만 명분 아닌 명분이 있기에 홍오를 타박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는 홍오의 악명도 한몫을 한 게 분명하지만 말이다.
곧 한 무인이 내민 은원보를 보고 홍오가 짐짓 인상을 쓰며 말하고 있다.
“어허, 이거 너무 적지 않나?”
“대사님, 제가 가진 게 그뿐인지라…….”
“쯧쯧. 사람들이 이렇게 인색해요. 아! 막말로 이거 내가 잘살자고 하는 짓인가? 다 소림을 위해서, 그리고 자네들을 위해서 희사를 받는 건데 말이야. 사람들이 그런 걸 몰라요, 에잉.”
거의 흥정하듯 홍오는 희사를 받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오의 가죽 포대는 꽤 묵직해졌다. 온갖 동전과 금원보, 은원보 등이 포대에 가득했다.
그렇게 홍오가 장사 아닌 장사를 하고 있는 사이, 멀리 정문에서 한 명의 무인이 달려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소림에서 드디어 결정이 났네!”
뭇 무인들이 소리친 이를 돌아보았다.
“소림에서 정식으로 중재를 하기로 했으니 시비를 가리고 싶은 이는 탑림 인근의 연무대로 오라는 전언일세!”
무기를 이미 찾은 무인들도 아직 시비를 해결하지 못해 소림의 답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차였다.
“잘 됐군!”
“이쪽이야말로!”
처음 시비가 붙었던 칠철환 구력을 위시하여 뭉친 쪽과 삼절문, 기령파, 천우문의 무인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무기를 꼬나 쥐었다.
매풍검 삼다강이 근사하게 번쩍거리는 검을 들고 칠철환 구력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와서 물러날 생각은 아니겠지?”
“우하하하! 노부를 어찌 보고 그런 망발인가. 노부와 풀어야 할 것이 있는 자들까지 이참에 모두 정리해주마.”
칠철환 구력은 사람 몸통만 한 일곱 개의 쇠고리를 짤랑거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독문병기인 칠철환도 장건의 손길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원래 검은 색이었던 칠철환도 무시무시한 예기를 뿌려대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다.
무인의 천성상 좋은 무기를 들면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었다. 새로운(?) 무기를 소유하게 된 무인들은 손이 근질거렸다.
원한 관계나 시비가 붙은 무인들은 물론이고, 곧 그 외의 무인들까지도 우르르 탑림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희사를 챙기고 있던 홍오는 그 모습에 입맛을 쩝 다셨다. 아직도 줄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장건이 무기를 손질해주면 신병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오히려 사람은 더 늘었다.
“에이잉, 내 우리 건이만 아니었어도 저 재미있는 구경을 놓치지는 않았을 것을. 하여간 희한한 놈들이야. 저따위로 칼을 갈아주는데 뭐가 좋다고 히히덕거리는지.”
홍오는 투덜대면서 새 가죽 포대를 가져와 입구를 활짝 열었다.
☆ ☆ ☆
소림사의 본사 내원은 산을 등지고 있다. 앞쪽으로 여러 전각과 법당이 있는 외원을 둥그렇게 감싼 형태다. 탑림은 그 외원에서도 거의 바깥인 외곽 쪽에 위치해 있고, 일반 향객들의 왕림은 적은 편이다. 대부분은 멀리서 탑림의 웅장함을 보고 감탄할 뿐이다.
그곳의 한편에 단으로 구분하지 않고 널찍이 펼쳐진 공터가 있다. 구조가 몇 번이나 변경되면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게 된 오래된 연무장이다.
원호는 몇몇 원주들과 나한승들을 대동하고 그곳에 자리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찾아온 무인들이 연무장 안에 무리지어 서 있었다.
무공 교두인 원우가 조심스레 원호에게 물었다.
“탑림이 너무 소란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장소를 옮기는 것이…….”
탑림은 소림을 대표하는 장소이며 성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피 튀는 혈전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조사들을 볼 면목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호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래서 이곳으로 정했네. 설마하니 이곳에서 큰일이야 벌어지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원우를 비롯해 원주 몇은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다.
탑림의 연무장에는 소림이 중재한다는 얘기가 돌면서 남자 무인들뿐 아니라 여자 무인들까지도 상당수 몰려와 있었다. 벌써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데 아직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모인다.
찾는 이유도 다양했다. 얽힌 원한뿐 아니라 소림에서 만난 인연도 시비의 이유가 되었다. 좋아하는 여인과 삼각관계가 되었다든가, 그저 단순히 호승심에 겨뤄볼 생각으로 왔다든가 하는 일도 있었다.
소림에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무인들은 이번 일을 작은 무림대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원호는 가만히 몰려든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최초 발단이 되었던 삼절문과 매풍검, 그리고 칠철환 구력을 중심으로 크게 세력이 양분된 형태이고, 사소한 이유로 온 이들도 드문드문 무리를 짓고 있었다.
개인적인 비무는 일단 차치하고 큰 건부터 처리하는 게 옳은 수순이다. 자칫 시비가 더 번지면 개인적인 시비나 용무까지도 휘말릴 수 있다.
결정을 내린 원호가 말했다.
“본사에서 중재하기로 한 것은 가급적 원만히 일을 해결하기 위함이오. 강호의 원한이 끝없이 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하나 아량의 마음을 가진다면 해결되지 않을 것은 없다고 보오.”
나서기 좋아하는 백미창응 주오렴이 앞으로 걸어 나와 포권했다.
“섬서에서 온 주오렴이라 하오. 대사의 말씀은 극히 정당하나, 우리는 무인이니 그에 맞는 중재를 해주셨으면 하고 요청하는 바이오.”
“그럼 귀하께서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오이까?”
주오렴이 무리진 무인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 모인 모두가 사사로이 일을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그렇다면 일단 양측의 대표를 몇 선정하여 승부를 내는 것이 어떨까 제안하오.”
매풍검 삼다강과 칠철환 구력이 동의했다.
“좋소.”
“소림에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에 따르리다.”
원호가 원주들을 쳐다보았다. 원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렇게 하려 했는데 먼저 말을 꺼내주니 편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기령파와 칠철환 등의 문제가 해결되면 나머지는 쉬운 일이다.
결국 양쪽에서 세 명의 대표를 정해 비무를 벌이기로 했다.
원우가 비무의 주재로 나섰다.
“첫 번째 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대표가 되신 분은 앞으로 나서 주십시오.”
자고이래(自古以來) 처음부터 고수가 나서는 법은 없는 것이다.
삼십 대 초반의 나이인 천우문의 제자 유장붕이 주변의 허락을 받고서 앞으로 나왔다.
“첫 상대는 나 유장붕이다! 천우문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칠철환 구력! 앞으로 나오라.”
칠철환 구력은 혀를 끌끌 찬다. 그는 유장붕보다 몇 수나 위의 고수였다. 원한 관계가 있으니 나가서 당장에 요절을 내고 싶으나 체면이 상한다.
다들 새로 얻은 무기를 시험해보고 싶긴 했다. 그래도 비무 상대로는 적당한 실력이 나서는 것이 비무의 묵시적인 법칙이다. 칠철환 구력과 친분이 있는 장량문(長良門)의 이십 대 젊은 제자가 낫처럼 생긴 긴 쇄겸도(鎖鎌刀)를 들고 나왔다.
“어디 네까짓 잡배가 구 선배께 도전을 하느냐! 나 장량문의 완첨이 네 상대를 해주겠다.”
유장붕과 완첨이 급히 정리한 비무대로 올라섰다.
원우가 말했다.
“한쪽이 패했다 인정하거나 더 이상 승부를 겨루기 어려운 경우가 되면 빈승의 전권으로 승부를 종결지을 것입니다. 이의가 있으십니까?”
유장붕과 완첨이 동시에 대답했다.
“없소!”
원우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하고 물러섰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소림의 성소인 탑림이니,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으나 손끝에 일말의 사정을 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무인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다 보면 피를 보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패자에게 최소한의 자비는 베풀라는 뜻이다.
“동의합니다.”
“대사님의 말씀을 따르겠소.”
이어 유장붕과 완첨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었다.
창!
유장붕의 검이 뿌연 광채를 발하며 모습을 드러냈고, 낫처럼 생긴 완첨의 쇄겸도가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예기를 뿜어냈다.
둘의 무기는 바라보기만 해도 살이 에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특히나 완첨의 쇄겸도는 섬뜩하리만치 맑게 빛나고 있었다.
“허!”
좌중이 술렁였다.
아직 해번소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이들은 깜짝 놀랐다.
“천우문의 유장붕이 그렇게 대단한 자였던가?”
“그럴 리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천우문은 그리 대단한 문파가 아닐 텐데.”
“그러면 어떻게 일반 제자가 저런 명검을 들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여자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장량문은 삼류인 줄 알았는데…….”
“완첨이란 사람, 지난번에 나한테 치근덕대기에 코웃음을 쳐버렸지 뭐야. 설마 저런 보도를 물려받을 정도의 기대주인 줄 몰랐거든. 이번 비무에 이기면 생각 좀 해봐야겠어.”
원호와 각대 원주들도 자못 놀랐다.
천우문이나 장량문이나 그저 그런 문파다. 한데 둘이 들고 있는 무기에서는 범상치 않은 예기가 느껴진다. 가히 명검과 보도로 꼽힐 만하다.
저 정도의 예기면 어지간한 나무쯤은 큰 공력 없이도 가를 수 있어 보였다.
원호와 원당이 전음을 주고받았다.
『사형, 첫 비무부터 주의해야겠습니다. 병기가 너무 날카로워 자칫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일세. 어떻게 천우문과 장량문에서 저러한 보물을 얻게 되었을꼬.』
소림승들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장건의 손을 탄 무기를 지니고 있는 무인들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기를 쓰다듬으면서 흥분 반, 기대 반의 모습으로 유장붕과 완첨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종의 대리만족 같은 기분이다.
차랑!
햇살이 가뜩이나 창연해 둘의 무기에서 뿜는 빛은 보는 이들을 괴롭게 할 정도다.
그럼에도 유장붕이나 완첨, 본인들은 엄청난 무기를 손에 쥔 터라 평소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초고수라도 된 양 잔뜩 들떴다. 약간의 과장을 더해, 지금이라면 우내십존하고 싸워도 지지 않을 듯 자신감이 충만하다.
“덤벼보아라, 애송이!”
“그 버릇없는 입을 세로로 쪼개주마!”
유장붕이 천우문의 검법으로 완첨을 공격해갔다. 천문일도(天門一道)의 검초로 완첨의 허벅지와 허리를 동시에 베었다.
완첨이 장량문의 독문 수법인 구장보(龜丈步)를 밟으며 몸을 뒤로 뉘였다.
싸악!
검이 스쳐가자 완첨은 솜털이 곤두섰다. 검기를 일으킬 실력도 되지 않는데 소름이 끼치게 날카로운 검풍이 느껴진다.
그제야 완첨은 상대도 자신의 쇄겸도와 마찬가지로 장건이 손질한 무기를 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기가 바뀐 것은 자신만이 아니다. 자신의 검이 좋아졌다고 흥분할 때가 아니었다.
“흥! 천우문의 검이 겨우 이 정도냐!”
스쳐간 검의 예리함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완첨도 공세로 전환했다.
쇄겸도는 긴 낫처럼 생긴 기형도(奇形刀)다. 일반적인 도법과 다르게 무겁지 않으면서도 치명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
파공성을 울리며 완첨의 쇄겸도가 빙글 돌았다. 유장붕이 급히 보법을 밟으며 두어 번의 공격은 흘리고 나머지는 검으로 받았다.
짜랑!
둘의 무기가 마주치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 쇠와 쇠가 마주친 것이 아니라 옥구슬로 만든 방울 소리가 났다.
중인들이 감탄했다.
“우와아.”
보통 고르게 망치질이 되고 담금질이 잘 된 무기가 소리가 좋기는 한데, 둘의 무기는 태생이야 형편없어도 지금은 외관이 전혀 울퉁불퉁하지 않고 흠집이 없으니 좋은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미세한 차이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애초에 명검도 아닌, 저잣거리의 대장간에서 만든 일반 도검의 몸통이 매끄럽게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저렇듯 청명한 울림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무기이니 그렇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완첨이 놀란 만큼이나 유장붕도 놀랐다.
‘이 녀석의 쇄겸도도 보통이 아니라는 걸 깜박 잊었구나! 실수로라도 베이면 큰일이 나겠다.’
병기의 예리함은 실력 이상의 효과를 보인다. 극도로 날카로운 검은 검기를 두른 것과 마찬가지로 살만 조금 베일 것을 뼈까지 가른다.
유장붕과 완첨은 처음엔 자신만만했었으나 지금은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한 번만 실수해도…….’
‘스치기만 해도…….’
서로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만큼이나 자신의 무기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정도다.
조금씩 둘의 몸놀림이 둔해졌다. 긴장이 심해지면 평소 실력의 반도 내기 힘든 법.
경험이 더 적은 장량문의 완첨이 보법을 잘못 밟아 중심을 잃고 말았다.
“아차!”
완첨이 기우뚱하며 허우적거리는 순간을 유장붕은 놓치지 않았다.
“이노-옴!”
유장붕은 노호성을 지르며 검을 크게 내리쳤다. 왼쪽 어깨로 바람을 가르며 검이 그어졌다.
무인들의 입에서 탄성과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보기만 해도 살벌한 무기가 그 능력을 선보이기 직전이다.
원우와 소림의 승려들이 바로 난입할 준비를 했다.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막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완첨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가 반격을 시도했다. 승패의 결정이 아직 나지 않은 것이다.
소림승들이 잠시 멈칫한 사이, 완첨은 기우뚱하면서도 유장붕의 다리를 베어갔다.
“이런!”
유장붕의 검이 먼저 완첨의 어깨에 떨어졌다. 어깨를 통째로 베어낼 기세였다. 검기가 맺혀있지 않더라도 검의 예리함만으로 어깨가 날아갈 판이었다.
그런데……
빡!
“으아악!”
완첨이 비명을 지르며 쇄겸도로 유장붕의 허벅지를 찍었다. 쇄겸도의 날카로움은 유장붕의 허벅지를 통째로 베어낼 만했다.
하지만……
퍽!
“으악!”
유장붕도 비명을 질렀다.
아찔한 광경을 기대하며 지켜보던 무인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내 어깨! 으아아!”
완첨이 어깨를 붙들고 바닥을 구른다.
“내 다리! 크아아!”
유장붕도 검을 놓친 채 허벅지를 잡고 외발로 통통 뛰어다닌다.
막 난입하려던 원우와 소림의 승려들도 시간이 멈춘 듯이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
“…….”
한동안 둘의 비명만이 울릴 뿐, 탑림은 조용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비무대의 바닥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완첨의 어깨는 그대로 달려있었고, 유장붕의 허벅지도 멀쩡했다.
심지어 옷조차 베이지 않고 멀쩡했다.
“…….”
“…….”
한동안 적막함이 감돌면서 완첨과 유장붕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완첨이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내 어깨…… 응?”
유장붕도 자신의 허벅지를 감싸고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내 다리가…….”
다리가 끊어진 듯 아팠지만 정말로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칼날이 아니라 칼등으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완첨과 유장붕은 고개를 들어 서로를 마주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완첨과 유장붕은 재빨리 무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서로를 향해 난도질(?)을 해댔다.
“죽어랏!”
“죽어!”
퍽퍽퍽퍽.
퍽퍽.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둔탁한 타격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