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이안이 불결한 거목을 처치한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안은 스펠로가 더없이 깍듯해진 게, 비단 자신의 권위에 압도당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실제로도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가장 작은 규모로 의식을 치른 만큼, 그곳의 타락자들은 거목의 힘에 더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을 테니까.
물론 이안은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예상이 현실이 되었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었다.
“감사드립니다. 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시민들은 물론이고 각하께서도 직접 감사를 표하실 겁니다.”
이어진 스펠로의 말에, 이안이 턱 끝만 까딱였다.
“감사 인사는 됐소.”
“그래서, 그렇게 모든 게 끝난 건가요?”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스펠로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놈들은 약해지고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예 무력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용감하게 선봉에 서셨고, 군도의 지원군과도 힘을 합칠 수 있게 됐습니다. 덕분에 도시를 되찾을 수 있었죠.”
“저주의 원흉도, 찾아냈나요?”
“물론입니다. 각하께선 타락한 자들의 소굴이 지하 수로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확인하셨습니다. 해서 토벌대를 투입하셨죠. 토벌은 성공했습니다. 타락자들은 모두 죽었고, 의식을 치렀던 소굴은 불로 태워 정화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스펠로를 돌아보았다.
“타락자들을 전부 죽였다고?”
“저도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만. 지하 수로에서 번진 굉음과 비명은 똑똑히 들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이들이요. 각하의 호위 기사인 발로이 경과 팔메르 경. 그리고 고문 마법사인 마티아스 공의 활약이었죠. 그 끔찍한 지하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그들뿐이었습니다.”
“그랬겠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다른 생존자가 있었더라도 입막음을 위해 죽였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건 살아 돌아온 자들은 게임에서도 본, 공작의 하수인들일 터였다.
그때는 둘뿐이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숫자가 하나 더 늘어나는 정도의 변화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스펠로가 말을 이었다.
“물론,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닙니다. 반파된 도시를 재건하고, 지하 수로와 숲에는 여전히 저주받은 잔당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머잖아 남김없이 뿌리 뽑고 본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덕분에 테센으로 병력을 차출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더더욱 빨라지겠죠.”
“이 탄 냄새가 그래서 나는 거였군….”
“예. 토벌을 끝내고 오염된 숲과 들판을 불태우고 있는 겁니다. 저주의 잔재를 정화하기 위해서요.”
“그것도 공작께서 명하셨겠고.”
“물론입니다.”
민심이 하늘을 찌르겠군.
코웃음을 삼킨 이안이 뒤통수를 뒤로 기댔다.
모든 걸 솔선수범해서 진두지휘했다니. 이번 비극의 수습이 끝나면, 공작의 입지는 오히려 더 공고해질 게 분명했다.
적어도 이 일대에서는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게 될 터였다. 그것도 진심에서 우러난.
물론, 그렇게 되게 만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라클리프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이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스펠로가 곧바로 대답했다.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진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더 서둘러 주시오.”
스펠로를 돌아본 이안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백작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으니까.”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스펠로가 고개를 숙였다.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여준 이안이,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가는 숲과 들판을 지나, 병사들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잿더미가 된 들판에 야영지를 꾸렸다.
그들이 가장 먼저 세운 건 이안 일행이 묵을 막사였다.
따로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눈치껏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채였다.
열 명도 넘게 사용할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천막. 꽤 편해 보이는 목제 침상과 침구는 물론, 가장자리에는 여러 개의 등잔이. 중앙에는 커다란 식탁까지 차려졌다.
본래는 지휘관들이 사용했을 물건들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일행이 막사에 들어선 직후, 스펠로가 접시를 잔뜩 든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염장한 고기. 마찬가지로 소금에 절였다가 구운 생선과 포도주 같은, 제법 그럴듯한 음식들이 식탁에 줄지어 놓였다.
회군하게 되면서 보급 물자를 아낄 필요가 없어진 덕분이리라.
“편히 쉬십시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충분할 것 같군. 호위도 필요하지 않으니, 전부 물려 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스펠로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곧 주위를 지키던 병사들도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척을 감지하던 샬롯과 테사이아가 신호를 주자, 메브와 필립이 비로소 두건을 벗었다.
식탁으로 홀린 듯 모여 앉는 일행들의 시선이, 검집을 풀고 있는 이안에게 집중됐다.
이안이 식탁으로 다가오며 풀썩 웃음 지었다.
“뭘 기다려? 먹읍시다.”
기다렸다는 듯 장갑을 벗은 일행들이 음식으로 손을 뻗었다. 다들 한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식탁에 고개를 파묻었다.
보존 식량만 먹으며 지낸 기간이 꽤 길었기 때문이었다. 소금에 절인 것들이라 해도, 어쨌건 육포나 딱딱한 빵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맛있었다. 아마도 테센에서 만들어졌을 포도주 역시.
심지어 나세르까지도 입가에 기름을 묻혀가며 음식을 집어 먹었다.
“…이제야 좀 살겠군요.”
이윽고 필립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듣는 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잔뜩 먹어 둬라. 라클리프에 도착하면, 식사할 틈도 없이 힘을 써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고기를 우물대며 말했다.
메브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최측근들은 하수인이 분명해.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타락자들을 처리한 걸 보면, 보통내기들도 아닐 거다.”
“그렇겠지. 게다가, 의식을 완전히 끝내 버린 것도 아닌 것 같고.”
이어진 이안의 말에, 일행들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포도주로 입을 축이고는 내뱉었다.
“의식의 매개체에는 공허의 표식이 새겨져 있지. 그걸 없앴다면, 저주의 잔재는 몰라도 잔당들이 남아 있을 수는 없잖소. 다들 알 텐데.”
“아. 그렇겠군…. 그래. 과연.”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을 닫거나 타락자를 처치해 본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메브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읊조렸다.
“하수인들을 통해 공허의 힘이 담긴 표식을 회수한 건가. 그래서 그들만 살아서 돌아온 거고.”
“뭐, 그럴지도.”
나중을 위해 남겨 뒀든, 메브의 말대로 표식이 새겨진 부분만 회수해 돌아왔든. 결과적으론 달라질 게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테센으로 병력을 보낸 건지도 모르겠군요. 누가 일을 꾸민 건지, 공작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필립이 덧붙였다. 메브가 동의하듯 말을 받았다.
“테센의 의식이 뭔가 잘못된 것이라 여겼겠군. 상황을 확인한 후에, 그곳의 힘도 차지하려 한 거겠지.”
“뭐, 그럴지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공작의 진짜 의중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당장 중요한 건, 공작이 주인 없는 공허의 마력을 차지했으리란 사실이오. 잔당 소탕이 끝나면 오롯이 그놈의 것이 되겠지.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되었거나.”
물론 그렇다 해도, 그가 게임에서 본 것보다는 훨씬 더 약하겠지만.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정말 크랄렌 공작이 타락자인 거군요.”
듣고 있던 나세르가 내뱉었다. 딱히 놀란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이제야 확신하게 된 것이리라.
“그자가 마법을 익혔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냐?”
이안이 툭 덧붙였다. 메브의 시선에,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표식에 담긴 힘을 부릴 수 있다면 고대 신을 섬기는 사제나 마법사일 텐데. 전자면 타락한 사제들과 사이가 틀어질 리 없잖소.”
사실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토대로 끼워 맞춘 거지만.
메브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미간을 좁히고 있던 나세르가 입을 열었다.
“중앙에서 죽은 차남이 마법사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공작도 그럴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보입니다.”
“하수인 중에도 주문쟁이가 있던데. 타락한 주문쟁이가 둘이겠군.”
샬롯이 읊조렸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주문을 부릴 틈도 없게.”
지금은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메브와 필립은 정화자의 무구들로 중무장 하고 있고, 샬롯과 테사이아도 마도구나 마법 유물을 나눠 가졌으니까. 물론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으니 역할만 적합하게 분담하면 되겠군.”
메브가 덧붙였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경은 나와 공작을 상대하셔야지.”
“그럼 주문쟁이는 내가 상대할게.”
테사이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주문쟁이는 주문쟁이끼리 노는 거라며. 난 마법은 아직 쓸 줄 모르지만, 어쨌든. 유물도 있으니까.”
“그럼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둘의 차지가 되겠군요.”
필립이 샬롯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샬롯이 그가 걸친 로브를 턱짓했다.
“그걸 쓴다고 혼자 다 상대할 생각은 하지 마라. 네 상대를 끝내면, 나한테 합류하지 말고 다른 놈을 상대해. 하수인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상대는 내가 죽일 거다.”
“예. 그러죠.”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칼 좀 빌려줘, 빨강 머리. 이안도, 던지는 단검을 빌려줘. 그 안에선 활이 별 쓸모가 없을 것 같거든.”
“내 세검을 빌려주지. 이안이 보관 중이니, 받아 가라.”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던질 줄은 알고?”
메브에 이어 이안이 되물었다.
테사이아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몰래 좀 던져 봤는데, 활 쏘는 것보다 쉽더라고.”
아, 그래. 활만 연습한 게 아니란 거지.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나세르가 불쑥 내뱉었다.
“그럼, 저는 무슨 역할을 하면 됩니까?”
한순간 동시에 그를 바라본 일행이, 이윽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안이 손에 묻은 고기 기름을 쪽 빨고는 내뱉었다.
“마부.”
“예…?”
나세르의 입가에 늘 맺혀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그 사실에 묘한 즐거움을 느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넌 우리랑 같이 들어가지도 않을 거다.”
“…저도 도움이 될 텐데요.”
“알아. 그러니까 마차를 지켜야지. 우리가 공작의 목을 따면 소란이 일 거다. 그때 말과 마차에 해코지하려는 놈들이 있을 수도 있어. 네가 제압해. 죽이진 말고.”
“…….”
나세르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댔다. 그 표정에, 일행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웃음을 흘렸다. 이안만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별 수 없군요. 그게 제 역할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윽고 나세르가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실감한 듯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일행들을 훑었다.
“무튼, 듣고 보니 여러분들이 전문가라는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정화대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가 술잔을 들며 덧붙였다.
“더 뛰어나실지도 모르겠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부분에선 특히요.”
“뭐, 정화자분들은 제약이 많은가 봅니다?”
필립이 고기를 다시 우물대며 물었다. 나세르가 미소 지었다.
“우리. 아니 그들은 이름 없는 자들이니까요. 동시에 늘 노출되어 있죠. 복장부터가 눈에 띌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여러분들은, 아주 자유로우시고요.”
“글쎄. 아까 봐서 알겠지만, 우리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아니야.”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나세르가 인정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주목받는 걸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죠. 정화대에선 불가능한 방식입니다. 그들은 그저 교단의 권위를 빌릴 따름이죠. 덕분에, 정화대의 귀에 나리의 소식이 어떻게 들리게 된 건지 알겠더군요. 저를 포함한 모두는 정말, 선후를 반대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나세르가, 양손 검지를 모아 교차하듯 휘휘 돌렸다.
“나리가 나타난 곳에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니라, 타락자가 있는 곳을 나리가 찾아가시는 거니까요. 오늘처럼,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전부 동원해서.”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앞으로 너도 그래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실소를 흘리며 내뱉었다. 나세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기대되는군요. 저도 좌중 앞에서 연설하는 법을 연습해 둬야겠습니다.”
그걸로 내 이름을 소개하게 되진 않겠지만.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메브의 눈을 슬쩍 돌아보며 술잔을 들었다.
잠시 묘한 눈빛이 되었던 그녀가,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살짝 털고는 내뱉었다.
“공작이 의원인지만 확실히 밝혀낼 수 있으면 좋겠군.”
“…그가 의원이라면, 뭔가 또 달라지는 겁니까?”
의원이 뭐냐는 질문은 포기한 듯, 나세르가 물었다. 잠시 멈칫한 메브가 술잔을 들며 내뱉었다.
“내 복수가 끝이 나게 되겠지.”
“복수요…?”
메브는 더이상 대답하지 않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필립과 샬롯, 테사이아의 얼굴에서도 문득 미소가 사라졌다. 저마다 이번 일이 끝난 후를 떠올린 것일 터였다. 저마다의 길로 뿔뿔이 흩어지게 될 테니까.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나세르만이, 또 뭔가 말실수를 했다고 판단한 듯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벌써 하기엔 이른 생각들 같은데.”
술잔을 비운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일행들의 시선을 받은 그가,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아직 남은 일이 있으니까. 맡은 역할을 잘 숙지하고, 방심하지 마. 오늘처럼.”
“…예. 나리.”
고개를 끄덕인 필립을 시작으로, 일행들이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다.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본 나세르가 덧붙였다.
“공작을 정확히 어떻게 속이시려는 겁니까? 타락자들은 의심도 경계심도 많은 자들이라, 같은 편이라 해도 순순히 모든 걸 털어놓지는 않을 텐데요.”
“잘.”
“예…?”
“안 되면 말라는 생각으로.”
“…알려주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알겠습니다.”
진심인데. 음식을 입에 넣는 나세르를 바라보며 생각한 이안이, 느긋하게 술잔을 들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거짓말과 이간질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