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85
285화
이안이 목함을 받으며 한 말에,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착용까지 하지는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저, 보여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휘장을 달고 다니는 상인들에게요.”
파엘이 자신의 옷깃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철로 만들어진 육각형의 휘장이 고정되어 있었다. 연맹 소속의 상인들은 철 휘장을 달게 되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목함의 윗부분을 밀어 여는 사이, 몸을 돌린 파엘이 옆의 엘리야에게도 또 다른 목함을 건넸다.
“받아 주십시오, 영애. 은 휘장입니다.”
“감사해요, 단주.”
“당연한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앞으로는 연맹의 이름으로 후원을 받으시게 될 테니까요. 제도에 도착해 자리를 잡으시면, 인편을 통해 연락을 한 통만-”
이어지는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정말 금으로 만들었네.’
목함 내부에는 부드러운 붉은 천이 깔려 있었다. 황금 휘장은 그 한복판, 딱 맞는 크기로 음각된 홈에 놓여 있었다.
“이건, 저 위대한 백금룡의 상징 아닌가요?”
옆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두건을 깊이 눌러쓴 세라스가 그의 옆에 서서 황금 휘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오.”
“연맹의 첫 황금 휘장의 주인인 경이, 그분의 대행자인데도요?”
“연맹의 이름을 지을 땐, 다들 내가 그분의 대행자라는 건 알지도 못했었소. 저들은 아마, 이게 백금룡의 비늘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도 전혀 모를 것이오.”
애초에 육각은 여섯 상단이 모여서 붙게 된 이름에 불과했다.
이후 연맹의 규모가 커지더라도, 자신들이 가장 큰 권한을 유지하기 위한 상징인 것이다.
“절묘한 우연이네요. 하지만 저처럼 그분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들에게는, 좀 다르게 받아들여질 겁니다. 적어도 경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는 동안에는요.”
“뭐. 그럼 상인들도 그분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더 조심하겠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목함을 닫았다.
“…변방으로 상단을 보내시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단주.”
“염려 마십시오, 경. 내부 정리가 끝나면, 계획해 보겠습니다. 자고로 위험이 도사린 곳에 황금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사이, 파엘은 또 다른 황금 휘장의 주인인 필립과 대화를 마치고 있었다. 어젯밤 둘이 뭔가 쑥덕대더니, 모종의 합의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필립이 흐뭇하게 목함을 어루만지며 마부석으로 돌아가는 사이, 파엘이 다시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세라스에게 볼일이 있는 것일 터였다.
이내 멈춰선 파엘이, 정중하게 무릎을 굽혔다.
“만나 뵐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공녀님.”
“…나도 그래요. 단주.”
비로소 쓰고 있던 두건을 벗으며,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하얗게 핏기가 없었다.
‘어젯밤엔 터질 것처럼 붉더니.’
이안은 내심 코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상태가 이런 건 물론, 연회의 여파였다.
어제는 더 거나하게 취한 채로 돌아간 것이다.
아스메를 제외한 황녀 일행 모두가 그랬다.
세라스는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안이 만났던 사람 중에선 가장 약한 편에 속했다.
황족은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하나씩은 가지고 태어난다던데. 그녀의 능력은 적어도 육체를 강화해 주는 쪽은 아닌 게 분명했다.
“머잖아 또 만나게 되리란 예감이 드는군요. 본가에 도착하면, 사람을 보내도록 할게요.”
조만간 황금 휘장의 주인이 한 명 더 탄생하겠군.
몸을 돌려 마차로 다가가던 이안은, 뒤에서 이어진 세라스의 말에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지독한 숙취를 남기긴 했지만, 어쨌건 덕분에 세라스와 파엘은 확실한 인연을 맺었다.
제도 진출을 목표로 하던 파엘은 말할 것도 없고, 세라스 역시 새로 만들어진 유력한 상인 연합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마차 바닥에 내려 놓았던 검은 천 보따리를 집어 든 이안이, 허리를 숙이는 파엘에게로 다가갔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파엘이 이안에게도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였다.
조건 반사적으로 하는구만. 생각하며, 이안은 파엘의 품에 보따리를 안겨 줬다.
“가지고 돌아가시오.”
엉겁결에 받아든 파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뭡니까? 생긴 게 꼭….”
“저주술사의 머리요.”
“…잘린 머리 같다고 하려고 했는데. 정말이었군요.”
멈칫한 파엘이 입맛을 다시며 읊조렸다.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보르에게 전해 주시오. 썩지 않게 잘 보관하시고.”
아공간에 넣어 둔 덕분에, 머리는 아직도 아주 신선했다. 물론,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터였다. 보따리를 고쳐 든 파엘이 빙긋 미소 지었다.
“잊지 못할 작별 선물이군요. 적어도 보르 그 친구는 아주 좋아할 겁니다.”
“내가 주문한 조건들은, 기억하고 있소?”
“물론이죠, 경.”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이안은 그에게 금화 한 무더기와, 원하는 마법 무구의 조건을 꽤 상세하게 알려 준 참이었다.
“찾으면 잘 가지고 계시오. 연맹 소속 상인을 만날 일이 있으면, 내 위치를 전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한 달 보름이면 물건을 공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후엔 언제라도 연락만 넣어 주십시오. 돈이 남으면, 함께 딸려 보내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미소 지은 파엘의 시선이, 일행들을 한차례 훑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여러분 모두,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셨기를 바라겠습니다.”
정중하게 무릎을 굽힌 파엘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툭 덧붙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회담 때 내가 한 말도, 잊지 마시오.”
“…물론입니다, 경. 아니. 성자 대행.”
멈칫한 파엘이 다짐하듯 덧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스쳤다.
퀘스트를 전부 완료했으니, 이제 저 넉살 좋은 제국 상인이 죽을 자리만 찾아다니는 일도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본인의 감을 믿지 않으리라 공언까지 하지 않았던가.
연맹이 민심을 잃지 않고 성장한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개 같아진 후에도 충분히 활동을 이어 갈 수 있으리라.
물론,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 덩치가 필요 이상으로 커지면 고여서 썩어버리게 되겠지만.
적어도 혼돈의 시대가 끝나기 전까지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
옆에서 낮은 한숨이 이어졌다. 이안이 세라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야 감추고 있던 피로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힘들어 보이는군.”
“티가 많이 나나요? 날씨가 이래서 그런지, 오늘은 더 힘드네요.”
이안을 돌아본 세라스가 조금은 머쓱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침부터 내내 아스메에게 혼이 나고 있답니다. 제발 체통을 지키라고요.”
이안은 그녀의 뒤편에 선 아스메를 슬쩍 돌아보았다.
확실히 벙어리는 아닌 모양이지만.
그는 아직도 저 시녀가 말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입을 열 때를 가려야 하는 규율 같은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건, 지금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한 눈길로 세라스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내가 보기에도 공녀께선, 되도록 술을 드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제가 뭔가 또 추태라도 부렸나요?”
“단주를 옆에 앉혀 놓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긴 하셨지.”
“이런….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더 늘었군요.”
세라스가 탄식했다.
이안은 짧게 웃음 지었다. 세라스가 보이는 이런 모습들은, 일종의 전략적인 빈틈에 더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어설픈 부분들도 있겠지만, 의도적인 것들이 분명 섞여 있었다.
상대를 안심시키거나, 자신을 친근하게 여기게 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보단 언뜻언뜻 내보이는 야심이, 그녀의 본모습에 가까울 터였다.
애초에 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제도를 떠날 정도의 행동력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물론 그녀의 내밀한 진심과 속사정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었지만.
다각- 다그닥-
상단 마차들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이어지는 갈림길로 줄지어 들어섰다.
이안과 황녀 일행은 북쪽으로 이어진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럼 이제, 우리도 떠납시다.”
엘리야에게 눈짓을 보내며, 이안이 내뱉었다. 엘리야가 다시 마차에 오르는 가운데, 세라스의 뒤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 경.”
페이든이었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덧붙였다.
“제도까지 가장 빠른 길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때 저 먼 하늘이 번쩍였다.
구름이 심상치 않더라니.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편할 대로 하시오.”
우르릉, 하는 천둥이 한참 늦게 마차 내부를 울렸다.
***
솨아아아….
빗소리가 멈추지 않고 귓가를 간지럽혔다.
해가 지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한밤중이 되어서도 멎지 않았다. 폭우라 부를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마석등만이 마차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는 가운데.
‘오늘 밤은 마차 안에서 자겠군….’
창가에 옆머리를 기댄 이안이 심드렁하게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어쨌건 이동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황녀 일행은 앞서 말했듯 한시라도 빨리 제도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러다 말들이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오히려 이동에 더 차질이 생길 텐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은 빗줄기와 어둠에 잠긴 주위를 어렵지 않게 분간할 수 있었다.
관도 주위에는 어느새 나무가 울창해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강이라도 흐르는 게 분명했다. 한기에 시들고 있는 풀숲과 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진 건, 숲이 전해주는 느낌이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아서였다.
불과 삼십여 분 전까지만 해도 운치 있게 느껴지던 광경이건만.
지금은 변방의 숲을 마주한 것처럼 음산했다. 이안의 뒷목으로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이안이, 이윽고 위로 손을 뻗었다.
틱-
장내가 삽시에 어두워졌다. 이안이 마석등을 꺼 버린 것이다.
“……?”
옆자리, 마법서를 읽느라 여념이 없던 엘리야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살펴봐.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는지.”
이안이 정화자의 판금 장갑과 팔목 보호대의 고정부를 차례대로 조이며 내뱉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와중에도 엘리야의 눈에 마력이 일렁였다.
뒤이어 그녀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광택을 머금었다.
닫아뒀던 옆의 창문을 슬쩍 열며, 엘리야가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이상한 마력은….”
그녀의 시선이 창밖과 정면의 벽면. 이안 쪽의 창문에 이어, 장비 점검을 거의 끝내 가는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없는 것 같아요. 우리 마차와 저쪽 마차에서 느껴지는 것 말고는요.”
“그래…?”
딱히 놀랍지도 않다는 듯 읊조리며, 이안은 건너편의 의자로 건너갔다.
마차의 벽면과 빗줄기 때문에 평소보다 감각이 둔해지긴 했지만. 사실 이안도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이상 징후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육감만큼은, 여전히 조용히 불길함을 속삭이고 있었다.
경험상 육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언가 있으리라. 아마도 기척을 감춘 무언가가.
타후므리트처럼 강대한 마력과 존재감을 지닌 용조차, 자신의 기척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지 않던가.
드륵-
간이 창문이 열리고, 비를 피해 벽면에 기대앉은 뒷모습이 드러났다.
이안이 내뱉었다.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다.”
“……!”
졸고 있었던 듯 어깨를 들썩인 필립이 상반신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빗물이 들이치지 않게 하려 한 듯, 안면 가리개도 올린 채였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물입니까?”
“글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아닐지도 몰라.”
“그럼 또, 나리를 노리는 것들이 따라붙은 거겠군요.”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또 다른 역천룡의 사도이거나, 의회의 하수인일지도.
황녀가 그랬듯, 놈들도 그의 위치를 알게 되었을 터였기 때문이다. 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건, 육탄전이 되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황녀가 알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주문은 마법 무구라 여길만한 수준의 것들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투구 벗고 얼굴이나 안으로 들이밀어. 엘리의 도움을 받을 거다.”
“아, 예. 나리께서 앞장 서실 겁니까?”
필립이 재빨리 자신의 투구 양쪽을 쥐며 물었다.
“그래. 너는 말과 엘리를 지켜.”
내뱉으며, 이안이 엘리야의 옆자리로 되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책을 덮어 내려놓은 엘리야가 양손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이안이 얼굴을 내밀자, 그녀가 마력이 아른거리는 손으로 그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눈을 감고 그녀의 주문을 받아들이며, 이안이 재빨리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나가면 문과 창문을 전부 잠궈.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라. 밖의 상황은 필립이랑 나한테 듣고, 넌 보조할 수 있는 부분을 해. 이 안에서.”
-네. 그럴게요.
얼굴에서 손을 뗀 엘리야가 속삭였다. 이안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간이 창문으로 들이민 필립의 얼굴을 감싸 쥐기 위해서일 터였다.
스윽-
이안은 소리 없이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빗물이 머리와 얼굴에 이어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만 좀 축축하고 싶은데. 시발.’
미간을 좁히면서도, 이안은 단숨에 지붕 위로 올라갔다. 평소보다 훨씬 은밀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그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아른거렸다.
솨아아….
감각들이 예민하게 돋아나면서, 모든 게 점점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앞서 나가고 있는 황녀의 마차. 그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의 숨소리. 사방에서 쉬지 않고 떨어지는 빗방울과 끝없는 어둠에 삼켜지고 있는 듯한 숲. 저 앞까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 관도.
“…….”
그리고 그 주위로 소리 없이 꿈틀대며 다가오고 있는 어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