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84
284화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마신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대신 다른 형제분들과 경쟁하게 되셨을지도 모르지. 소문은 말보다 빠르다잖소.”
“재미있는 격언이군요. 옳은 말씀이시기도 하고요. 덕분에 경을 일찍 만나게 됐잖아요? 루 솔라께서 인도해 주셨다는 것도, 이제는 분명해졌고요.”
발그레해진 얼굴로 미소 지은 세라스가, 이내 덧붙였다.
“제가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았네요.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하고, 내일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 함께 하게 된 기념으로, 친목도 다질 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일행들끼리도 할 얘기가 많을 테니까. 물론,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이리라.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은 방주 상단과 연회가 예정되어 있소. 앞선 의뢰인인 단주가 준비해 준 송별회라, 내가 빠질 수는 없소만.”
“……!”
파엘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그를 돌아본 세라스가 덧붙였다.
“그럼, 우리도 참석해도 될까요? 황녀의 신분으로 함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요.”
“무, 물론입니다…!”
아스메가 세라스를 빤히 돌아보는 가운데, 파엘이 다시 바닥에 엎드릴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빛내 주신다면, 일생의 영광일 것입니다. 제 입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상인에겐 신뢰가 목숨이나 다름 없는 법이니. 저 역시, 철저하게 공녀로만 모시겠습니다.”
“다행이네요. 이 맛 좋은 포도주를 또 맛볼 수 있게 되다니. 그럼, 내일 낮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안 경.”
일어나 식탁 옆으로 나선 세라스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정중한 표정과 달리, 그녀의 몸은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취한 거 맞네.
“상단 사람들을 쫓아내지는 마시오. 정 거슬리면, 차라리 위층으로 올려보내시고.”
이안이 덧붙인 말에, 세라스가 페이든과 아스메를 홱 돌아보았다.
“들었죠? 너무 과하다고 했잖아요. 다들 명심하도록 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한 페이든이 아스메와 함께 세라스의 뒤를 따랐다. 아까와 달리 이안에게 목례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심지어 싸늘한 인상의 종자도 그렇게 했다.
“아, 그리고.”
식당을 나서려던 세라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안이 뒤를 돌아보는 가운데, 그녀의 시선이 필립에게로 향했다.
“거절당하긴 했지만 내 제안은 아직도 유효해요, 필립 경. 제도로 향하는 동안 잘 생각해봐요. 난, 정말 경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예.”
필립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빙긋 미소 지은 세라스의 시선이, 이번에게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성자 대행, 아니, 이안 경도요.”
“……?”
“전 어차피 언젠가, 원치 않는 누군가와 혼인해야 하거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제가 하고 싶-”
세라스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다. 사실상, 아스메의 손에 끌려나가는 것에 더 가까웠다.
“별….”
뒤늦게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번졌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다니. 어쩌면, 가지지 못한 것에 더 욕심을 느끼는 부류일지도 몰랐다.
털썩,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파엘이 주저앉는 소리였다.
“루 솔라 맙소사…. 이런 날이 다 오다니….”
이안의 헛웃음이 짙어졌다. 지금 파엘은, 그의 새로운 의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리라.
“경호병들에게 맡겨 둔 술이나 다시 가져다주시겠소, 단주? 이제 우리끼리도 대화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경…! 바로 대령해 오겠습니다!”
“바로 말고, 조금 천천히.”
“예. 조금 천천히 대령해 오겠습니다…!”
파엘이 네발로 기다시피 달려나갔다. 이제는 이안이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기세였다.
당연한 일일 터였다. 이번에는 이안 덕분에 제도에 거래처까지 생겼을 뿐 아니라, 황녀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으니까.
‘구하기 힘든 최고급 마법 무구를 찾아서 배송해 달라고 해야겠는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좌우에 앉은 필립과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투구를 벗은 필립은, 파엘과 달리 상대적으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안이 그렇듯 그 역시 황녀와의 만남이 대단히 놀랍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 정도로 놀라기엔, 그동안 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아르케아스와도 술을 함께 마신 적이 있지 않던가.
용의 아이인 엘리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지금 상황은 그저 흥미로운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둘의 시선에, 이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쓸데없이 일찍 제도에 가게 생겼군.”
물론 그건, 그에게만 달갑지 않은 일일 터였다.
빙긋 미소 지은 필립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엘리의 장비와 연맹의 휘장이 모레 아침에나 완성될 예정이니까. 저쪽이 원하는 만큼 빨리 떠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 봐야 하루 차이지.”
“황제 폐하는 이안 님과 손을 잡고 뭘 하시려는 걸까요.”
엘리야가 덧붙였다. 황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호기심이 넘어간 것이리라.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뭔가 부탁이라도 하겠지.”
“아마, 상징적인 칙령을 내리실 겁니다. 나리가 황실과 뜻을 함께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요.”
필립이 대답했다.
머리 쓰는 척하긴.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직 침식이 시작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황제의 머릿속엔 이안을 써먹을 방법이 여러 개는 들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분명, 하나같이 위험한 것이리라. 이안을 바라보는 필립의 시선에 불안이 묻어나는 것도 그래서일 터였다. 심지어 그때는, 이안도 다시 혼자가 되지 않던가.
“징그러운 눈빛 하지 마라. 뭐건, 들어 보고 결정할 거니까.”
“…아. 의뢰는 폐하를 만나는 거였지, 칙령을 받드는 게 아니었죠. 그렇게 말씀도 하셨고요.”
엘리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필립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역시, 진심으로 한 말씀이셨군요. 저쪽에선 나리가 정말 칙령을 거절하실 수도 있으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하고 있겠습니다만.”
“그거까진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어차피 황제도 무작정 밀어붙이진 못할 거야. 그러다 내가 교단 쪽에 붙어 버리면, 오히려 더 거슬려질 테니까.”
“설마, 대교회와 손을 잡으실 생각도 있으신 겁니까? 정말로요?”
필립이 오히려 이게 더 놀랍다는 듯 물었다.
갈수록 성기사 답지 않은 말을 한다니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긴, 필립도 이젠 교단에 대한 불신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안 그러긴 할 거야. 하지만 그걸, 저쪽은 모르니까.”
“웬만하면 이라니…. 교단에서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보내면, 일단 대화는 나눠 보시겠단 거군요.”
“왜 아니겠어? 계약에 그러지 말라는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다, 저쪽에서 엄청난 조건을 제시하기라도 하면요?”
“그럼 뭐….”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며 술잔을 들었다. 엘리야가 덧붙였다.
“그게 용병의 방식이니까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필립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탄식했다.
“루 솔라 맙소사…. 이제 정말 어지간한 건 다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제 오만이었나 봅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죠.”
한 마디씩 잘도 거드네.
피식 웃으며 빈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내뱉었다.
“염려 마라. 너희한테 불똥 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
필립의 입이 닫혔다. 문이 열리고, 쟁반을 든 파엘이 식당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안이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남은 시간 동안 먹고 마시기나 하자고. 아무리 봐도 여길 떠나면, 노숙이나 하면서 제도로 직행하게 될 것 같으니까.”
“…예. 그러시죠.”
그리고 정말, 도시에서의 남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
다각- 다각-
상단 행렬의 뒤를 따라, 이안이 탄 마차가 성문을 지나쳤다. 높고 두꺼운 성벽이 멀어졌다.
미드퍼트를 떠나는 순간이었다.
‘짧고 굵게 머물다 간다고 해야 하나.’
계획은 다 틀어졌지만.
창가에 턱을 괴고 앉은 이안은, 남부의 담금주를 병째로 한 모금 들이켜며 생각했다.
계획이 틀어진 건 출발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도시를 떠나게 된 것이다.
어젯밤 있었던 연회의 여파였다.
다들 만취할 만큼 먹고 마신 탓에, 이안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아침 내내 골골댄 것이다.
반쯤 기절했던 파엘은, 뒤늦게 떠날 채비를 하느라 이안과 이렇다 할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안 일행은 상대적으로 느긋하고 확실하게 채비를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어색하냐?”
옆에서 계속 이어지는 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돌리며 내뱉었다.
망토까지 벗어 둔 채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던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네요. 갑갑하고.”
그녀는 옷 위에 보호 장구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잘 무두질 된 가죽에 얇고 정교한 사슬을 덧대 만든 것들이었다.
오늘 아침에 찾아온 맞춤 장비들.
파엘의 안목이 쓸만하다는 필립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나같이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고, 별다른 추가 옵션이 없는데도 희귀 등급이었다.
물론 게임일 때와 달리, 이안이 저것들을 착용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아무리 좋은 맞춤 장비라도 평상복만 걸친 것처럼 편할 수는 없었다.
“고정부를 느슨하게 풀고 있어. 아예 벗지는 말고. 몸에 익을 시간이 필요하니까.”
“네. 그럴게요.”
“익숙해지면, 그 답답함이 든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거다.”
고개를 끄덕인 엘리야가 장비의 이음매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이안은 잠시 그녀를 눈에 담았다.
황녀의 등장으로 곧바로 향하게 된 지금, 사실 엘리야의 보호 장구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이 녀석은 분명히 암시장을 들락거릴 테니까. 그때라도 유용하게 써먹겠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가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늘하고 눅눅한 바람이 마차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탁 트인 평야. 그리고 먹구름이 저 너머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뇌우를 토해낼 것 같은 하늘이었다.
중앙에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일상 같던 광경.
‘지금쯤이면, 진작 다들 목적지에 도착했겠지.’
헤어진 이들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쳤다.
샬롯과 테사이아는 각자의 길로 흩어졌으리라. 이 순간 샬롯은 일족의 광전사들과 혈투를 벌이고, 테사이아는 요정 사회를 장악할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 다 앞날이 순탄하진 않겠지만, 전처럼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 녀석들이라면 어떻게든 해내리라는, 전에는 들지 않았던 막연한 믿음이 들었다.
오히려 불안한 건 메브였다.
그녀는 기어코, 변방으로 돌아갈 것 같았으니까.
루시아와 미구엘이 그녀를 잘 설득했길 바랄 뿐이었다.
화로의 사원에 남는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일찍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내가 지금 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지.
이안은 문득 낮게 실소했다.
엊그제의 기억이 무의식중에 남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정도 들었겠다, 뭐, 이젠 이 세계에 남고 싶어지기라도 한 거냐?’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차가 멈췄기 때문이다.
드륵, 마부석의 간이 창문이 열리고,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갈림길입니다. 내리시죠, 나리.”
이안은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시 망토를 걸친 엘리야가 고개를 마차 문을 열었다.
이안은 아공간에서 검은 천에 두 겹으로 싸인 보따리를 꺼내 문 앞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
흐린 하늘을 올려다 본 이안이, 이내 마차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마차가 멈춰서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페이든의 종자인 쉘비가 앉은 채였다.
뒤이어 마차 문이 열리더니 다소 퀭한 얼굴의 페이든이 내렸다.
똑같은 회색 두건을 걸친 두 여인이 그의 뒤를 따라 땅을 밟았다.
신장이 다르긴 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가 세라스이고 누가 아스메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같은 망토를 걸친 것일 터였다. 위급한 상황에, 적들이 누가 진짜 황녀인지를 알아볼 수 없도록.
‘그런 간 큰 놈들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생각하며, 이안은 마차 앞쪽을 돌아보았다.
갈림길 앞에 멈춰선 상단 행렬 옆으로, 파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숙취와 남은 일 처리로 정신이 없어 보이더니. 지금은 평소의 모습과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별의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오다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경.”
내뱉으며 이안의 앞에 멈춰 선 파엘이, 이내 덧붙였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제도까지 따라가고 싶군요.”
“후회하실 거요. 지금도 돌아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실 텐데.”
이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벌써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파엘이, 이내 양손을 앞으로 모아 쥐었다.
“경.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동안, 진심으로-”
“낯간지러운 소리는 그만합시다. 어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잖소.”
이안이 말을 잘랐다. 아닌 게 아니라, 파엘은 어젯밤 연신 건배사로 이안 일행에게 감사를 전했다. 물론, 자리를 빛내 준 황녀에게도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상단의 직원들은 세라스를 제도 유력가의 공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럼, 드리기로 했던 선물로 감사 인사를 대신 해야겠군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한 파엘이, 품에서 꺼낸 목함을 양손으로 공손하게 내밀었다.
겉을 아주 매끈하게 다듬은, 궐련함 정도 크기의 목함이었다.
“아, 이게 그 황금 휘장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