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27
327화
“사명 같은 소릴….”
반사적으로 내뱉던 이안이 멈칫했다. 이제 도움을 거절할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최전선에서 싸우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를 바라보던 루시아가 재빨리 덧붙였다.
“저는 장벽 후방을 오가면서, 성화를 지피는 데에만 집중할게요. 아마 그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거예요.”
이안의 미소가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라 여긴 것이리라.
물론 오해였다. 그는 루시아의 말 때문에 입꼬리를 말아 올린 게 아니었다.
‘할 거면 하나만 하던가.’
얄팍하기 그지없고 모순된 자기 자신에 대한 조소였다.
이 순간에도 한때 자신이 지켜냈던 이 무표정한 얼굴의 소녀를 그 끔찍한 전장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후자가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결국, 그 역시 황실과 교단과 다름없는 위선 덩어리인 것이다.
동시에 요정 못지않은 거짓말쟁이이자 난쟁이 못지않은 속물. 수인 뺨치는 살인마이자 여느 주문쟁이와 다름없는 자기 합리화의 화신이기도 했다.
지금도 자신이 루시아를 전장으로 데리고 가는 건, 황제와 교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안 돼.”
이안이 내뱉었다. 멈칫한 루시아의 눈썹 끝이 조금 쳐졌다.
“하지만 이안 님-.”
“순서가 잘못됐다. 내가 아니라 사원의 허락이 우선이야. 넌 지금 사원 소속이니까.”
“……!”
“게다가 편지만 남기고 멋대로 날 만나러 뛰쳐나오기까지 했지. 그런데 전장에까지 무허가로 데리고 갈 수는 없어.”
이렇게 원론적인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더 효율적인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전선은 길고 험난하지. 어디에 어떻게 성화를 지필 건진 몰라도, 직접 전선을 오가면서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건… 그렇긴 하지만요.”
뭔가 생각하듯 읊조린 루시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어차피 우리가 돌아갈 때쯤엔, 정착지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용병들을 통해서 사원에 소식을 전했으니까, 틀림 없이요. 그분들께 동의를 구하고 방법도 모색해 볼게요. 어쩌면….”
이안을 바라본 루시아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이미 원장님께서 생각이 있으실지도 모르고요. 아마도 저랑 같은 생각을 하실 테고, 경험은 저보다 훨씬 많으시니까요. 그렇다면, 정착지에 부원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게 분명해요.”
어떻게든 따라오겠단 거군.
이안은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면, 오히려 화로의 성녀가 루시아를 전선으로 보낼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구엘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양반이랑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는군. 아마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간 깐깐한 양반이 아니오. 깐깐한 데에 열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따지는 것도 많고, 잔소리는 특히 더 많소.”
“제대로 된 사제라는 뜻이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그건 사실이지. 내가 보기엔 그자도 언젠가는 계시를 받을 거요. 지금도 불씨를 무지막지하게 머금을 수 있지.”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말한 미구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신께서 직접 은총을 내리시기도 하고 말이오. 게다가, 싸움도 엄청나게 잘하지. 여러 번 붙었는데, 이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소.”
“널 상대로도…?”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물론 미구엘은 싸움 실력이 특출난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 용병 출신이었다. 사원에서 수행이나 하는 자가 손쉽게 제압할 만한 상대는 아닌 것이다.
“그쪽 사제들은 싸움 실력이 다들 대단한가 보군.”
결론을 도출한 이안이 읊조렸다.
루시아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화로의 사원이 가장 번성했던 때가 전쟁의 시대라는 걸 알고 계신가요?”
“아니.”
“타오르는 여신의 가르침이 미덕이라 여겨지던 시절이죠. 그리고 그분을 섬기는 사제들은 성기사나 성전사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고 해요. 물론, 역할도 비슷했고요.”
“그래서 너희들이 사제 중에서는 가장 잘 싸운단 거군.”
루시아가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표정 변화가 크지는 않았지만,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네. 성화를 전투에 활용하는 방법도 많은 발전을 이뤘고요. 사실, 열정이 과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요. 그 폐단이 검은 벽이 솟은 이후로 드러나게 됐던 거고요.”
이러다 또 역사 강의가 시작되겠군. 생각하며 이안이 말을 잘랐다.
“어쨌든, 그때 발전한 기술들이 아직도 전승되고 있단 거지.”
“모든 사제들이 익히고 있죠. 물론 저랑 미구엘도 그래요. 아직 달인이라기엔 손색이 있지만요.”
이안은 숙주 거미들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거미들을 숯덩이로 만들어 버리던 불길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보이던 것과 달리, 막상 주변의 부가적인 피해는 거의 만들어내지 않았다. 루시아와 미구엘의 움직임 역시 전혀 어설프지 않았었고.
‘전투 사제라…. 수행 사제가 선택 가능한 테크 트리 중 하나였나.’
나중에 알게 된 바로, 수행 사제는 모든 분야에 가장 균형이 잘 잡힌 직업이었다. 초보자에게 가장 적합한 두 개의 직업 중 하나였던 것이다.
스킬 트리에 따라 수비적으로도, 공격적으로도 키울 수 있었다. 루 엔테르를 섬기는 건 후자 쪽이었으리라.
“그러니까 사제단을 잘 쪼개서 배치하면, 성전사단의 공백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성화를 충분히 지필수만 있으면, 그 이상도 가능할 테고요.”
“암.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하지. 방패와 철퇴를 든 사제들이 성스러운 불길까지 토해내는 거니까.”
미구엘이 첨언했다. 그 역시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안이 턱짓했다.
“그럼 너는. 은총을 받지 못했어도, 성화는 다룰 줄 아는 거냐?”
“말했잖소. 난 그런 거 없다니까. 난 그걸 어떻게 하는 건지 아직도 전혀 모르겠소.”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답한 미구엘이 미소 지었다.
“이해가 안 된다니까. 다들 그 뜨거운 걸 잘만 품던데. 나는 숨이 턱턱 막히기만 하지, 아무리 집중해도 안 된단 말이오. 멍청해서 그런가.”
이안의 고개가 슬며시 기울어졌다.
‘신앙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는 짓을 보면 신들의 미움을 살 놈도 아닌데….’
이안의 표정을 본 미구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보실 것 없소.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기대가 있어야 실망도 있는 법 아니겠소? 애초에 난 루시 덕분에 사제가 된 거요. 이것만 해도 출세했지. 게다가 대신, 이게 있잖소.”
미구엘이 왼팔의 강철 의수를 보란 듯 들어 보였다.
“싸움에는 이게 엄청나게 도움이 된단 말이오. 적어도 우리 차기 성녀님을 호위할 시간 벌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지. 거기다 비장의 한 수도 있고.”
이제 보니, 루시아를 걱정하는 그를 안심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잘도 끼워 넣네. 생각하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내뱉었다.
“그걸, 아직도 가지고 다니냐?”
“아무렴. 이건 내 행운의 부적이잖소. 부적은 절대로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아야 하고.”
미구엘이 등자에 얹어 두었던 오른발을 옆으로 들며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다.
“이번엔 아끼지 말고 써라.”
이안이 말한 건 그때였다. 미구엘이 멈칫하는 가운데, 그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만에 하나라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망설이지 말고 써. 아끼다 똥 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 거….”
미구엘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아직 길고 짧은 걸 대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런 말씀부터 하고 그러시오? 불길하게. 심지어 북부의 대전사께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나랑 루시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단호하게 덧붙인 이안이 턱짓했다.
“아끼지 마라. 오른팔이나 다리까지 강철로 덮고 싶지 않으면.”
“거, 말씀을 하셔도 꼭…. 하여간, 요지는 알겠소. 내가 제일 약하니까, 나대다가 죽지 말고 살 궁리만 하란 말씀이잖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한 미구엘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쯥, 하고 입맛을 다신 그가 덧붙였다.
“그렇게 하겠소. 이번엔 특히. 다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나도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한 놈이오. 루시가 위험한 것도 아닐 텐데, 내가 뭐하러 굳이.”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그래. 말귀 하나는 찰떡 같이도 알아듣는군.”
“찰떡…? 그게 뭐요?”
“맛있는 거.”
“……?”
미구엘이 괴상한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돌렸다.
굳이 뭔가 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미구엘이 대답한 순간, 그를 바라보는 루시아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스치는 것을 보았으니까.
미구엘 때문에 그녀가 위험에 몸을 던지는 상황만큼은 피할 수 있으리라.
‘안 데리고 가는 거면 모를까.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것 정도는 해 줘야지.’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여가는 숲을 눈에 담았다.
그의 뇌리로 지난 이틀간 수없이 상상했던 전장의 모습이 다시 한번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벽 위에 주문쟁이 들과 전투 사제들이 더해진 광경이었다.
***
눈은 해가 지기 전에 잦아들었다.
하지만 주위는 여전히 어둑어둑했고,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금방이라도 다시 눈보라를 토해낼 것처럼 두꺼웠다.
새하얀 주위 풍경이 차라리 더 밝게 느껴져서, 하늘과 땅이 뒤집힌 듯한 묘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묻고 싶은 게 있소. 형씨.”
미구엘이 불쑥 입을 연 건, 적당히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완만한 오르막을 한참 올라가던 때였다.
이안이 바라보자,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덧붙였다.
“자신이 다스리던 땅에 도착한 기분이 어떠시오?”
“……!”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드넓은 영지를 손에 넣었지만, 모든 설원 지대가 그의 땅인 건 아니었다.
“지도상으로는 사실 들어온 지 몇 시간쯤 지났소. 여긴 갤 마로요. 아마도.”
이어진 미구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의 시야가 탁 트였다.
굽어진 길을 이동하면서도 조금씩 고지대를 오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위에 덮인 눈이 고도에 대한 감각을 특히 더 무디게 만든 것이리라.
오늘 한 번도 뒤를 돌아본 적 없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뇌리를 스쳤다. 루시아도 미구엘도 그의 앞에 있는 데다, 어딜 봐도 새하얄 뿐이니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정말 깊숙이 들어왔군.”
읊조리며, 이안은 저 아래를 사선으로 가르며 이어진 거뭇한 장벽을 눈에 담았다.
꽤 먼 거리인데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만큼 높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새하얀 눈밭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쪽이 불쑥 솟은 이름 모를 장벽 요새. 때때로 이가 빠진 것처럼 무너진, 아직 복구가 덜 끝난 지점들도 눈에 띄었다.
만약 전선이 무너진다면, 이제 반대로 설원 지대를 본령으로부터 차단해줄 장벽이 되어줄 터였다.
한때 북부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던 설원 지대가, 이제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한 지역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미구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보이는 곳이 전부 형씨 땅일 거요. 그래서 늦게 말씀드린 거고. 흐흐. 대단하지 않소?”
다시 앞을 바라보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단하긴 하군.”
“…그게 끝이오?”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지?”
“참 나. 하여간….”
흥이 팍 식은 얼굴이 된 미구엘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안이 보기엔 주둥이에 한 방 먹여 주고 싶은 표정이었다.
“형씨는 너무 메마르셨소. 아무리 춥고 별 쓸모없는 땅이라지만, 형씨의 땅이잖소. 응? 나라면 땅에 입이라도 맞출 거요. 잘 부탁한다고.”
“네 입맞춤이 그 소원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저주라면 모를까.”
“말이 그렇단 거요. 말이. 그리고 내가 뭐가 어때서. 남자답게 잘만 생겼구만. 안 그러냐, 루시?”
미구엘의 시선에 루시아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녀가 미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구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니, 대답은 안 하고 왜 그렇게 보기만 해?”
“네가 갑자기 시련을 안겨 주니까 그런 거겠지.”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미구엘이 말아쥔 지도를 턱짓했다.
“길이나 똑바로 찾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염려 마시오. 제대로 가고 있으니까.”
한 손으로도 능숙하게 지도를 펼치면서,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돌아간 원주민들이 세 개의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 흩어졌다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시오?”
“그래.”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닝글로슬에서 설원지대를 들락거리던 북부인 용병들에게도 이미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정착지를 떠나 돌아간 야인들은, 부족의 구별 없이 연합해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고향을 평화롭게 되돌리는 건 물론이고, 아직 남아 있는 야인 부족들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대로 설원 지대에 남는 걸 선택한 야인들도 꽤 많은 생존자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안은 망자 군단이 설원 지대 전체를 휩쓸고 내려온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하긴. 타후므리트의 목적은 복수였으니, 남침 경로 밖의 야인들 따윈 관심 밖이었을 터였다.
“그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 머지않았소. 듣자 하니 자치령과의 교두보 역할을 하려고 잡은 자리라던데.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예전보다는 다들 마음이 열리긴 한….”
주절대던 미구엘의 목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한순간 세상이 밝아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섬광은 눈을 선홍빛으로 물들이며 잦아들었다.
“…검은 벽이 또 발작하기 시작했어요.”
우측으로 고개를 홱 돌린 루시아가 내뱉었다. 빛의 근원지인 동쪽이었다.
…그러게. 또 시작이군.
이안도 내심 읊조리며 고개를 돌릴 찰나.
콰르릉- 쿠과광-!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루시아와 미구엘이 탄 말들이 절로 속도를 줄이며 헐떡댔다. 발광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게 분명했다.
닐라는 늘 그렇듯, 그저 콧김만 뿜어댈 뿐이었다.
“워, 워워….”
“진정해… 괜찮아. 진정….”
말들을 다독이는 미구엘과 루시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안은 붉은 섬광이 잦아드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발작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침식이 시작될 때쯤에 하루 종일 붉은 빛이 번쩍이리라.
잦아들던 섬광이 다시 붉게 빛났다. 어느 한 지점이 아니라, 동쪽 지평선 전체가 붉게 물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
동시에 이안의 눈이 설핏 커졌다.
동쪽 하늘에서 시작된 붉은 빛이 먹구름 속을 꿰뚫듯 뻗어 나왔기 때문이다.
물결치는 먹구름 속으로, 굵고 붉은 뇌전이 혈관처럼 뻗어 나와 일행의 머리 위까지 지나쳤다.
‘지금까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온몸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붉은빛이 먹구름 전체로 흩어지듯 번졌다. 하늘 전체가 먹빛과 붉은빛이 뒤섞여 파도치듯 일렁였다.
“이런 시부럴… 루 엔테르여….”
미구엘이 탄식했다. 그는 어느새 말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였다.
루시아도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자세를 낮춘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위가 아니라 뒤편이 붉게 번쩍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콰릉-!
벼락 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와 달리,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