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28
328화
“……?!”
이안은 물론, 미구엘과 루시아도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섬광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남은 건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느껴지는 불길한 적막뿐.
“방금 그거… 벼락이 친 거요?”
미구엘이 멍하니 읊조렸다. 물론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검붉게 넘실대는 먹구름을 훑는 중이었다.
콰릉-!
또 한 번 세상이 밝아진 건 그때였다. 이번에는 일행 모두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먹구름 사이를 뚫고 지상으로 내리 꽂히는 붉은 벼락을.
장벽 너머, 자치령 한복판 어딘가였다.
땅에 내리친 벼락은 한 차례 더 번쩍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안의 미간이 패인 골이 조금 더 깊어질 찰나.
“그러니까 저게… 땅으로도 떨어지는 거였다고…?”
미구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는 거의 눕듯이 말의 목을 끌어 안은 채로, 목만 꺾어 고개를 돌린 괴상한 자세였다.
“저, 저도 저런 건 처음 봐요….”
루시아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붉은 천둥은 검은 벽이 발작하며 만들어지는 현상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현상에 불과한게 아니면, 뭐?”
미구엘이 말의 목을 감싼 팔을 조금 풀며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이안도 다시 앞을 바라보는 가운데, 루시아가 잠시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녀의 주황색 안광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광기를 토해내고 있는 것 같단 얘기군.”
이안이 말을 맺었다.
루시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눈을 치켜뜬 미구엘이 탄식했다.
“뭐라고…? 아니 시부럴, 그럼, 방금 그게 검은 벽의 광기를 잔뜩 머금은 벼락이었단 말이오?”
루시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저 불길한 벼락에 불과하고, 저게 떨어져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죠. 누군가 맞은 것만 아니면요.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두건을 뒤집어쓴 그녀의 전신에 한순간 짙은 음영이 졌다. 저 앞에서 붉은 섬광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콰르릉-!
“으악-! 이런 개 미친-!”
미구엘의 비명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가 탄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멈춰 섰기 때문이다. 루시아가 탄 말도 마찬가지였다. 반사적으로 목을 끌어안거나 미리 자세를 낮춘 상태가 아니었다면, 둘 다 낙마하고 말았을 터였다.
난리를 피우지 않은 건 닐라 뿐이었다. 물론 녀석 역시 우뚝 멈춰선 채, 고개를 땅에 떨구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뒈, 뒈질 뻔했네…! 시벌, 우리 앞으로 떨어지다니!”
말을 간신히 진정시킨 미구엘이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루시아도 흥분한 말의 목덜미를 연신 쓰다듬으면서, 다시 어둠에 휩싸인 전면을 놀란 듯 응시했다.
“그냥 벼락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보면 되겠군.”
이안의 덤덤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미구엘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그에게로 돌아갔다.
“직접 확인이라니 그게 뭔. …어딜 보고 계신 거요?”
“방금 벼락이 떨어진 곳.”
이안이 즉답했다. 그의 시선은 숲의 저 너머에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마침 앞을 바라보고 있었던 덕분에, 그는 벼락이 떨어진 방향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그걸 또 보셨다고…?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어느새 눈동자에 흐릿한 광채를 머금은 이안을 바라보던 미구엘의 얼굴이, 비로소 일그러졌다.
“벼락이 친 곳으로 가겠단 말씀이시오? 지금? 직접?”
“그렇게 멀지 않아. 우리가 가야 할 길에서도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을 것 같고.”
대답하며, 이안이 고삐를 당겼다.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던 닐라가 반항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킁, 코로 새하얀 콧김을 뿜어내는 채였다. 이제 괜찮다는 듯이.
“못 봤으면 모를까. 내 영지에서 괴상한 일이 일어난 걸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아니… 그야 그렇소만…. 그럼 일단 마을에 먼저 들러서, 전사들을 데리고 나오면….”
인상을 구긴 미구엘이 더듬댔다.
루시아가 자세를 고쳐 앉은 건 거의 동시였다.
“확인해보자고요. 조금 돌아가는 것뿐이잖아요.”
고삐를 쥔 그녀가, 신성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만약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면, 시간을 줘서 좋을 것도 없겠고요.”
결국 눈을 질끈 감은 미구엘이 탄식했다.
“하… 루 엔테르여….”
“걱정마라. 너희들한테 싸우라고 하지는 않을 거니까.”
덤덤하게 내뱉으며, 이안은 둘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허리춤에서 진은 강철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새하얀 검날에 선홍색 섬광이 반사되어 번쩍였다.
쿠르릉-
굉음과 함께, 시야가 한층 더 어둑어둑해졌다.
먹구름에 맺혀 일렁이는 선홍빛이 옅게 흩어지고 있었다.
검은 벽의 발작이 잦아든 것이다.
“빠르게 확인할 거다. 그러니까, 알아서들 잘 따라와.”
미구엘을 돌아보며 내뱉은 이안이, 왼손에 쥔 고삐를 후려쳤다.
닐라가 기다렸다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
다그닥- 다그닥-
굽이진 길을 벗어난 닐라가, 눈 덮인 숲으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아직은 땅이 그리 미끄럽지 않았다. 눈이 빛을 반사해 주는 덕분에, 시야가 아예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물론, 닐라에 타고 있기에 다행인 부분이었다.
이안은 이보다 더 어둡더라도 시야를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지만, 닐라는 아닐 테니까.
‘그래… 정말 뭐가 있긴 하네.’
마력 탐지까지 활성화한 이안의 눈은, 지금 저 멀리서 번져 나오고 있는 심상치 않은 파장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뒤죽박죽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오염된 마력보다 더 날것처럼 느껴지는 파장이었다.
마력보다는 혼돈력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조금씩 잦아들고 있긴 한데….’
루시아의 추론은 아마도 사실일 터였다. 검은 벽은, 파괴적인 혼돈만을 낳을 광기를 곳곳에 흩뿌린 것이다.
비단 북부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닐 터였다. 동부와 남부 전선에 인접한 지역들에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으리라.
‘게임에서도 이랬나…?’
닐라의 말머리를 옅어지는 파장의 중심부로 인도하면서, 이안은 과거의 기억을 곱씹었다.
침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정예 수준의 필드 네임드가 튀어나오거나 뜻밖의 장소에서 마경을 마주치곤 했던 건 사실이었다.
준 보스급 정예 마물이 도사린, 일종의 랜덤 생성되는 미니 던전.
그때는 파밍과 레벨업 노가다를 돕기 위한 요소에 불과하다고 여겼었는데. 현실이 되면서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본, 다른 많은 부분들이 그랬듯이.
“……!”
이안의 눈빛이 번쩍인 건 그때였다. 파장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근원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눈 덮인 바위가 곳곳에 튀어나온 계곡 너머였다.
완만한 오르막인 덕분에 반대쪽이 보이진 않았지만, 파장이 사라진 뒤에도 육안으로도 벼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닐라가 그걸 느낀 것처럼 속도를 높였다.
다그닥- 다그닥-
어느새 주위의 나무가 듬성듬성해지고, 대신 곳곳에 바위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주위에도 비교적 가파른 비탈길들이 보였다.
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 계곡중 하나였다.
눈이 수북하게 덮여 있었지만, 닐라는 전혀 균형을 잃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빠르게 달려나갔다. 방한 장구 사이로 마석이 만들어 내는 은은한 광채가 번졌다.
미구엘과 루시아가 따라오지 못할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미구엘은 북부의 숙련된 사냥꾼 출신이 아니던가. 막 내린 눈이 덮인 숲에서 그의 흔적을 따라오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끄르르… 끼아악…. 끼악-
은은하게 번지는 괴성이 귀를 파고든 건 거의 동시였다. 이안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파장에 홀린 놈들이 다가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데.’
게다가 소리로 봐선 설원 오거가 분명했다. 심지어 새끼들 같았다.
성체가 되기 전의 놈들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높고 듣기 싫은 소리를 냈으니까. 물론 어미의 귀에 소리가 잘 들리게 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지금 소리를 내고 있는 놈들의 어미도 근처에 있으리라. 이미 함께 있거나.
다그닥- 다그닥-
닐라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이안의 고막을 간지럽히던 소음이 칼로 자른 것처럼 잦아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발굽 소리를 들었군.’
동시에 저 앞, 눈 덮인 바위틈에서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슬쩍 솟아올랐다. 역겨운 이목구비를 가진 새하얀 얼굴들. 놈들의 머리는 곧바로 다시 바위 너머로 사라졌다.
“…….”
물론 물러나거나 숨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좌우의 비탈길 너머로 두 놈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두 놈이, 소리도 기척도 없이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웬만한 성인 만한 체구에 우락부락한 팔근육. 역시, 설원 오거 새끼들이었다.
본래 이족 보행인 놈들은 지금, 네 발로 기면서 눈밭의 일부인 양 자신들의 존재를 위장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도 속도는 꽤 빨라서, 자세히 보면 눈덩이가 꾸물대며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이 자신들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을 터였다. 자신들의 눈알에 선홍색 안광이 맺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안광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다그닥- 다그닥-
이안만 놈들의 기척을 눈치챈 게 아닌 모양이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가던 닐라 역시, 목을 살짝 낮추면서 언제든 이안이 검을 휘두르거나 뛰어내릴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꿨으니까.
‘똑똑한 녀석이라니까…. …그나저나.’
왜 새끼들뿐이지.
등자에서 슬며시 발을 빼면서, 이안은 주위의 기척을 세밀하게 훑었다.
지금쯤 정면에서 어미 오거가 튀어나오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설원 오거들은 덩치와 달리 꽤 능숙한 사냥꾼들이었다.
사냥감을 정하면 새끼들이 좌우로 소심스럽게 흩어져 포위하고, 정면에서 어미가 시선을 끌었다.
사냥감의 이목이 집중된 사이 새끼들이 퇴로를 차단하고 나면, 비로소 포위해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두 마리는 포위망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사선을 그리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다급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까워질수록 발소리를 다 숨기지도 못한 채였다.
‘어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어쩌면 벼락을 맞은 걸지도.
만약 그렇다면 곧바로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광기가 응축된 벼락은, 일개 마물 따위가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을 테니까.
…보면 알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진은 강철 장검을 옆으로 슬쩍 뻗었다.
솨아아-
검신에서 번진 황금빛이 삽시에 검날 전체로 퍼져나갔다.
광검이 만들어 낸 빛이, 꾸물대며 달려오던 새끼 오거 한 마리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들켰다는 사실을 직감했는지, 네발로 달리던 놈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역겹게 생긴 머리 한복판, 깨진 유리 조각 같은 이빨이 가득한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끼- 아아아악-!”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감각을 어지럽혀 혼란 상태를 유발하는 비명이었다. 반대편의 또 다른 새끼도 기다렸다는 듯 울부짖어서, 놈들의 비명이 사방에 공명하며 메아리쳤다.
물론 이안에게는 그저 소음일 뿐이었다. 마법 마갑으로 보호받는 닐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마갑에 박힌 마석의 빛이 조금 더 밝게 번쩍일 뿐이었다.
‘하여간 시끄럽긴.’
생각하며, 이안은 안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관성이 더해진 그의 몸이 아슬아슬한 궤적을 그리며 새끼 오거를 향해 뻗어 나갔다.
“끼아악-!”
비명을 멈춘 놈이 벌떡 일어서며 양팔을 내뻗었다. 반사적인 행동 같았다.
물론, 혜성의 꼬리처럼 이안에게 따라붙는 샛노란 궤적을 막아내기에는 턱도 없는 저항이었다.
서걱-
궤적이 새끼 오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의 속도가 줄어들지 않은 터라, 이안은 비스듬하게 떨어져 그대로 눈밭을 튕기며 굴렀다.
온몸에 둔탁한 감촉이 번졌다. 눈밭 아래는 자갈이 가득했다.
‘칼이 너무 잘 들어도 문제네… 시발….’
이안이 이를 악물며 나뒹구는 사이, 새끼 오거는 몇 걸음을 더 달리고서야 허물어지며 쓰러졌다.
털썩-
놈의 머리는 턱 윗부분이 단면을 훤히 드러낸 채 잘려나가 있었다. 단면에서 솟구친 피가 새하얀 눈을 물들였다. 그보다 훨씬 뒤에 떨어진 머리 반쪽에서는 새하얀 뇌수와 피가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퀭하게 풀리는 눈동자 한복판에서 선홍색 광채가 바스라졌다.
“끼- 에에에-!”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새끼가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냈다. 눈앞에서 형제가 죽음을 맞이한 모습에, 두려움보다는 더 큰 분노를 느낀 모양이었다. 놈은 고릴라처럼 양팔로 땅을 박차 추진력을 더하면서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멈춰선 이안이 몸을 일으킨 건 그때였다. 푸스스, 망토 표면에 덮였던 눈가루가 흩날렸다.
쿠구구구-
저 멀리에서 홀로 선회하는 닐라를 확인하며 몸을 돌린 이안이, 달려오고 있는 새끼를 마주 보았다.
황소처럼 돌진하는 놈의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놈의 눈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선홍색 안광이 또렷해졌다.
과거에 북부에서 마주쳤던 오거들에게선 본 적 없는 안광이었다.
조금 전에 떨어진 붉은 벼락의 영향이리라는 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었다.
‘어미는 벼락을 맞고 뒈지고, 곁에 있던 이것들은 광기를 흡수해 버린 건가?’
그렇다면 저놈의 돌진이 새끼 치고는 빠르고 맹렬하다는 것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면, 아마도 이것들은 굉장한 변종 오거 형제로 자라나게 되었을 터였다.
물론, 일어나지 않을 미래였다.
서걱-!
마주 달려간 이안이 만들어 낸 샛노란 궤적이, 양팔을 내뻗는 오거의 몸을 그대로 훑고 지나갔으니까.
용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빛의 검날은, 두툼하고 육중한 상반신을 깨끗하게 하반신에서 분리했다.
철푸덕-
놈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각기 다른 위치에 떨어졌다. 잘려나간 단면에서 피와 내장 조각이 새하얀 김을 뿜으며 쏟아졌다.
창백한 흰 피부와 달리, 놈들의 피는 인간의 그것처럼 붉었다.
파스슷….
광검을 늘어뜨린 채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이안이, 백금의 발톱을 거둬들이며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에서 닐라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여준 것도 잠시.
“……!”
이안의 고개가 불현듯 다시 돌아갔다. 반 토막 난 새끼 오거의 상반신에서 불현듯 혼돈력의 파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땅에 처박힌 놈의 머리에서 선홍색 안광이 다시 피어올랐다.
“끼- 아아아아악-!”
뭔가 해보기도 전에, 쩍 벌어진 놈의 아가리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쪽 얼굴을 여전히 바닥에 처박힌 채로 내지른, 아주 구슬프고 처절하게 느껴지는 비명이었다.
단말마에 불과했던 듯, 비명은 이내 다시 잦아들었다. 놈의 안광에 맺혀 있던 선홍빛은 이미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
하지만 이안은 이미 놈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저 옆, 아까 새끼들이 기어 나왔던 계곡 쪽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검 자루를 쥔 손아귀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죽은 게 아니었나.”
흐릿하게 잦아들었던 파장이 다시 선명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노를 머금은 것처럼 거칠고 맹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