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57
357화
‘쓸데 없는 걱정을 했네.’
헛웃음을 흘린 미구엘은 이내 다시 저 앞, 성화의 장막 덕분에 이글대는 것처럼 보이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콰치치치칫-
하늘을 향해 뇌전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는 뒷모습이 선명해졌다.
미구엘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오른손에 쥔 집채만 한 대검을 늘어뜨리고 전신에 붉은 신성을 머금은 그 뒷모습은, 그가 보기에도 마법사보다는 천둥과 벼락을 부리는 신의 화신 같아 보였다.
‘하긴. 정말 반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신들의 사랑을 받는, 심지어 투쟁의 신의 대전사이기까지한 마법사.
사원에서 잉크 냄새를 맡으며 산 덕분에, 미구엘은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를 예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
심지어 루시아는 아직도 그가 전설 속의 백색 마법사라 믿고 있지 않던가.
물론, 미구엘은 그런 사실에 새삼스러운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에, 이안을 초인이라 부르는 것일 테니까.
파치칫….
그때, 이안이 토해내던 뇌전이 잦아들었다.
물론 낙뢰의 비는 아직도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래로 매캐한 연기를 흩뿌리는 심연 아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파사사삿-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여전히 적지 않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기아아아아-”
“기아악-!”
머릿속을 긁어내는 듯한 비명이 가까워졌다.
그 와중에도 이안을 노리는 놈들은 없었다. 급강하하기에는 늦었거나, 분수처럼 흘러내리는 성화의 빛이 저것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미구엘이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온다-! 준비해!”
“대전사께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마라!”
“천둥의 대전사를 위하여-!”
군단병들이 소음을 뚫고 일갈하며 저마다의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그들의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이 한층 더 진하게 타올랐다.
사제들도 놀람을 억누른 듯 눈을 감고 기도문을 중얼대기 시작하고, 루시아 역시 비스듬하게 위로 내뻗은 오른손을 더 활짝 펼쳤다.
“내면의 삿된 어둠을 불사르는 열정의 불꽃이여….”
분수처럼 솟구쳐 흘러내리는 성화의 빛이 한층 더 밝아졌다.
심연 아귀 무리가 장막에 다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콰르르르르-
격렬하게 일렁이는 성화의 장막은, 괴물들을 막아내거나 튕겨내지 않았다.
“기아아아아아-”
“갸아아아아-”
그저 뚫고 들어온 모든 것들을 불덩이로 만들었다.
불붙은 날개를 팔딱대는 심연 아귀들의 비명이 사방에 몰아쳤다.
콰직-! 콰지직!
그리고 군단병들이 내뻗은 창날이, 놈들의 몸통에 크게 벌어진 아가리를 맞이했다.
“쑤셔-!”
창날은 불붙은 심연 아귀들을 꼬챙이처럼 꿰어 버렸다. 그리고 나면, 다른 군단병들이 내뻗은 날붙이들이 연달아 놈들의 전신을 유린했다.
“뒈질 때까지 찔러!”
“촉수를 조심해! 잘라 버려!”
“이 역겨운 새끼들아-!”
성화를 뒤집어 쓴 심연 아귀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군단병들은 난자당한 심연 아귀가 축 늘어지면, 성화의 장막이나 전열 바깥쪽으로 패대기치듯 던져 버렸다.
“기아아악-”
인근의 땅에 떨어져 바둥대는 놈들에게도, 여지없이 도끼나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군단병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콰지직!
심연 아귀를 태우는 주황색 성화는, 군단병들에게는 전혀 옮겨붙지 않았다. 오히려 투쟁의 가호와 감응하듯 뒤엉켜, 전사들에게 열기를 더해줬다.
“이것들도 쑤시면 뒈진다고! 계속 쑤셔!”
“덤벼라-! 이 공허의 악귀들아!”
타들어 가는 불길과 번뜩이는 뇌우. 펄떡대는 불덩이들과 전사들이 내지르는 고함까지.
“살벌하고만….”
마부석에 선 채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던 미구엘이, 이윽고 다시 저 앞을 바라보았다.
넘실대는 불길의 장막 너머, 이안이 다시 빛을 머금은 왼손을 치켜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릉-! 콰치치칫-
그가 토해낸 굵직한 번개와 그 이후에 거미줄처럼 흩어지는 뇌전이, 일대의 혼란에 더해졌다.
“…거참.”
미구엘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풀썩 웃어 버렸다.
신에게 작은 축복조차 받지 못한, 자신 같은 평범한 인간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금 뇌리를 스쳐서였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북부의 대전사와 그의 군단. 그리고 차기 성녀를 필두로 한 사제들의 모든 위업을 한복판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은총과 가호, 축복으로 말미암은 고양감이나 흥분에 휩싸이지 않은 채로.
그리고 모든 전설과 신화는, 늘 이름 없는 목격자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법이지 않던가.
‘내가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자신이 기꺼이 그 이름 없는 목격자가 되리라, 미구엘은 내심 다짐했다.
물론 많은 전설과 신화가 그렇듯, 약간의 양념을 더하긴 하겠지만.
***
굉음과 섬광. 고함과 비명이 어느 순간 잦아들었다.
콰르르….
뇌우를 쏟아내던 먹구름이 단말마와 같은 번뜩임과 함께 힘을 잃고 흩어졌다.
상공을 뒤덮었던 심연 아귀는 어느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끝… 났다!”
“오- 오오오오-! 우리가 공허의 악귀들을 물리쳤노라-!”
“위대한 천둥의 대전사를 위하여-!”
잠깐의 적막 끝에, 군단병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이안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하….”
곁에 세워 둔 대검에 기댄 그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듯한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한 여파였다.
‘아슬아슬했네, 시발….’
소모 값이 가장 컸던 건 물론, 낙뢰 구름이었다.
꽤 오래전에 배웠지만, 딱히 쓸 일이 없었던 상위 회색 마법.
고위 마법인 낙뢰 폭풍 못지않은 광범위한 주문이 된 건, 혼돈력과 보옥의 증폭을 연달아 거친 결과였다.
물론 그만큼 활성화한 동안의 마력 소모량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연쇄 번개까지 연달아 시전해 댔으니, 마력 탈진에 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의 군단이 입은 피해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보아하니, 가타부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이안은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고 있는 군단을 돌아보았다.
그를 지칭하는 게 분명한 거슬리는 단어들이 들리긴 했지만, 염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마법에 혼돈력이 섞였다는 건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예상대로인 반응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
성화의 장막이 잦아들면서, 화로 주위에 선 사제들의 모습도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충격과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소 걱정스러운 눈빛인 루시아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미구엘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뒷수습은 염려 말라는 듯이.
‘저 녀석도 자리를 잘 지키고 있고.’
마차 옆에 딱 붙어 선 닐라까지 눈에 담은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조용.”
대기가 울리자, 두통을 더해주던 고함이 칼로 자른 듯 잦아들었다.
이안을 주시하는 전사들의 눈빛은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역시, 반신이니 천둥과 벼락의 아들이니 하는 소리는 전부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탄생 설화가 또 하나 늘겠군. 생각하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하늘의 저 통로를 반드시 닫아야 돼. 그러니 계속….”
이안이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홱, 다시 전면으로 돌아갔다.
파사삿- 파삿-
일렁이는 검은 안개 너머로 다시 날갯짓 소리가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연 아귀들의 날개와 촉수에 맺힌 자줏빛이 안개 곳곳에서 다시 번져 나갔다.
‘…아, 그래. 다 뒈진 건 아니군.’
그저 마비 상태에 빠졌던 놈들도 여럿인 모양이었다. 하긴. 낙뢰에 직격당하지 않은 놈들도 우수수 떨어져 내리지 않았던가.
내심 혀를 찬 이안이 대검을 뽑아 들 찰나.
“먼저 가세요, 군단장님!”
루시아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다시 왼손을 가슴 앞에 얹은 녀석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말씀대로 저 통로를 닫는 게 우선이에요! 느낌이 좋지 않아요. 그러니 군단장님은 하시려던 일을 하세요. 뒤는, 저희들에게 맡기시고요!”
“가십시오! 대전사!”
“죄다 쳐 죽이면서 따라가겠습니다!”
백인장과 군단병들이 곧바로 말을 받아 소리쳤다. 동시에 루시아가 허공으로 오른손을 내뻗었다.
화르르르-
삽시에 솟구친 성화가 다시 한번 분수처럼 장막을 그려냈다. 심연 아귀들의 시선을 잡아끌려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다른 마물들도.
입꼬리를 살짝 꿈틀댄 이안이 내뱉었다.
“대신, 멈추지 말고 따라 와라.”
그의 시선을 받은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병들이 손에 든 무기를 고쳐 쥐는 가운데, 이안이 곧바로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탓-
그는 땅에 수 없인 널브러진 심연 아귀들. 그리고 타들어 간 채로 다시 날아오르는 놈들 사이를 그대로 지나쳤다.
“전군- 전진!”
뒤에서 미구엘의 외침과 함께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척- 척-
뒤이어 군단병들의 발소리가 안개를 뚫고 번졌다. 보폭을 맞춰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리라.
…최고의 훈련은 실전이라더니.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결국 호선을 그렸다.
군단이 뒤를 지켜주는 건,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 함께하는 것과는 또 다른 든든함이 있었다.
물론,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이안이, 두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루시아의 말대로, 지금은 저 소용돌이를 없애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 많은 공허 날벌레들을 죽이고도 불길한 예감은 전혀 희석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었다.
‘역시, 그냥 무작정 통로를 연 게 아닌 건가.’
이안은 자줏빛이 일렁이는 소용돌이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이상하게 가깝게 느껴졌다. 소용돌이 역시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콰- 아아아아-
자줏빛 장막을 뚫고 나온 불덩이가 빛나는 궤적을 그리며 멀어지고, 생기다 만 익룡 같은 괴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멀어졌다.
계곡 너머, 다른 전장으로 날아가는 게 분명했다.
확실한 건, 저것들은 아무런 통제도 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일종의 의식의 부산물에 가까운 존재들인 게 분명했다.
“그워억-!”
안개를 뚫고 번지는 비명에, 이안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마력 탐지를 활성화한 그의 눈에, 달려오는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변이된 오거. 놈의 뒤로 제멋대로 달려나가는 다른 마물들의 실루엣도 아른거렸다.
타타탓-
자세를 낮춘 이안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오거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키에에엑-!”
“그어어어!”
다행히 마물들은 그가 스쳐 지나가도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비명을 내지르며 마저 내달릴 뿐이었다.
저것들은 모두 군단의 몫이었다.
그는 최대한 빨리 제사장을 찾아 처리해야 했다.
‘저기서 뭔가 개 같은 게 튀어나오기 전에.’
그러면 이 불길함도 사라지리라, 이안은 내심 확신했다.
그 뒤엔 침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 될 터였다.
게다가 다행히도 여전히 온몸에 힘이 넘쳤다. 어느새 두통도 상당히 잦아든 뒤였다.
투쟁의 축복과 집중력이 고통을 마비시켜서가 아니었다. 마력이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이 안개 덕분인가? 아니면, 침식 중인 검은 벽?’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숨을 쉴 때마다 심상에 빠른 속도로 마력이 중첩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긴. 게임에서도 몇몇 마경이나 검은 벽 너머에선 마력 회복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었다.
대신 스킬을 난사하다 보면 마력 중독이나 혼란, 착란 같은 일시적인 상태 이상에 빠지곤 했지만.
‘아차 하면 뒈지는 귀찮은 패널티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오염된 마력을 흡수한 여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부작용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두근- 두근-
아까부터 혼돈의 파편이 공명하면서, 마력을 빨아들였다가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검은 벽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오염된 마력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무슨 필터도 아니고….’
마력의 황혼기가 찾아오기 전에는 늘 이런 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마탑에 틀어박힌 미치광이들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실감과 위기감이 엄청났을 테니까.
“……!”
지잉, 이안의 왼손에 백금 방벽이 피어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쒸에엑-
섬뜩한 파공음이 넘실대는 안개를 뚫고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카가가각-
비스듬하게 가져다 댄 백금 방벽에서 금빛 불똥이 튀었다.
날아든 자줏빛 촉수가 표면을 할퀴듯 훑고 지나간 결과였다. 뚫어 버리고 싶었겠지만, 백금 방벽 표면에는 흠집도 남지 않았다.
‘슬슬 날아들 것 같았지.’
이안의 자세가 더 낮고, 더 빨라졌다. 늘어뜨린 대검의 검날에도 백색 불길이 피어올랐다.
흐릿한 안개 너머로 자주색 안광과 실루엣, 그리고 또다시 날아드는 궤적들이 선명해졌다.
쒸에에엑- 카가가각-
어깨를 비틀어 피하고 백금 방벽으로 쳐낸 이안이, 바람 칼날을 시전하며 땅을 박찼다.
슈화아악-!
그가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자, 좌우에서 교차하듯 날아든 두 개의 촉수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검을 치켜들면서, 이안은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공허의 괴물을 눈에 담았다.
껍질을 벗긴 것처럼 자주색 근육의 결을 올올이 드러낸, 3 미터는 될 법한 키. 역 관절이 하나 더 달린, 곤충의 그것이라 해도 믿을 법한 두 다리.
기다란 뼈 칼날이 돋은 네 개의 팔과 몸 곳곳에 멋대로 돋아난 여러 개의 기다란 촉수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도 짤막한 촉수가 튀어나와 꿈틀댔다.
지렁이처럼 근육이 꿈틀대는 가슴 한복판에, 세로로 길게 벌어진 눈알이 끔뻑댔다. 가로로 긴 동공이 자줏빛으로 일렁였다.
파괴와 살육만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누구나 본능적인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낄 모습이었지만.
‘거, 징그럽긴 하네.’
이미 더 끔찍한 공허의 족속들을 여럿 봐 온 이안에게는 그다지 대단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심지어 예상대로, 게임에서 마주쳤던 놈과 비슷했다. 그때보다 작아 보이긴 했지만.
심연의 파수꾼. 그때 보았던 이름을 떠올리며 마저 몸을 비튼 이안이, 되돌아가는 촉수 사이로 힘껏 검을 휘둘렀다.
콰과과과-
검신을 타고 솟구친 바람 칼날이, 새하얀 불길의 궤적을 허공에 길게 아로새겼다.
파수꾼을 할퀴고 지나간 궤적이 안개를 불사르며 멀어졌지만, 이안은 가까워지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파수꾼은 백색 겁화에 휩쓸린 와중에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놈에게는 입이 없었다.
-■■ ■■-!
대신 기분 나쁜 정신파를 뿜어낼 뿐이었다. 동시에 놈이 네 개의 다관절 팔에 달린 칼날을 일제히 휘둘렀다.
하지만 이안이 조금 더 빨랐다. 정확히는 오른팔의 원심력을 고스란히 더해 내뻗은 그의 왼팔이.
퍼석-
백금 방벽의 방패 날이 파수꾼의 눈알 한복판에 깊숙이 박혔다.
이안은 팔을 끝까지 내뻗었다. 놈의 눈알이 퍽 터져 나가고, 뒤이어 이안의 왼 주먹까지 그 흐물흐물한 단면 안으로 푹 들어갔다.
‘시발.’
기분 나쁜 감촉 속에서도, 이안은 왼손을 활짝 펼쳤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다시 잿빛을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쩌엉-
속에서 터져 나온 진공 폭발이, 눈알과 함께 놈의 가슴 한복판을 으깨 버렸다. 내뻗던 칼날과 촉수가 축 늘어지면서, 파수꾼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쿠웅….
이안은 놈의 몸을 짓밟으며 함께 착지했다. 왼손은 여전히 놈의 으깨진 눈알에 쑤셔 넣은 채였다.
주위에는 체액을 전부 빨아 먹힌 몰골인 마물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촉수에 꿰뚫렸다면 그 역시 저런 몰골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이안은 그것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쉬하아아-
불현듯 뿜어져 나온 돌풍이, 백색 궤적을 완전히 흩어버리고 있었으니까. 안개가 넘실대면서, 저 너머에 날개를 활짝 펼친 실루엣이 일순간 선명해졌다. 일렁이는 자줏빛 안광.
환영에서 본, 제사장과 하나로 융합된 그리핀이었다.
‘반갑다, 새꺄.’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한 기척들을 느끼면서도,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핀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불길을 머금은 것처럼 달아오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