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61
361화
화신체는 비스듬하게 토막 난 채로 널브러졌다. 잘린 단면 내부는 자줏빛이 일렁일 뿐, 내장이라 할 만한 걸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보다는 작아졌어도 여전히 웬만한 대형 마물보다 거대한 몸통을 단칼에 토막 냈건만.
“…….”
걸음을 옮기는 이안은 더 이상 놈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잘린 촉수와 함께 떨어져 나뒹군 루시아가, 꿈틀대는 촉수를 간신히 벗어나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대는 녀석의 팔을, 이안의 왼손이 붙잡았다.
“가, 감사해요. 저는 괜찮….”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이안을 올려다본 루시아가 멈칫했다.
자신의 얼굴 상태를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던 이안이 쓴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최악이냐?”
루시아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달싹였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안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의 상태가 더 세밀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광대뼈 아래부터 걸쭉한 보랏빛 섬유질이 얼굴을 대신했는데, 신성에 계속해서 타들어 가면서도 꿈틀대며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흐릿한 보랏빛 아지랑이가 붉은 신성에 녹아들었다. 톱날처럼 맞닿은 이빨도 섬뜩하게 날카로웠다.
본래 얼굴에 아주 정교하고 징그러운 가면을 얹은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눈은 여전히 붉은 신성을 머금은 인간의 그것이라 더더욱.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
“…네?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끝낼 일이냐는 듯,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아마 지금은 의도와 달리 아주 섬뜩하거나 끔찍한 모습일 터였다.
“걱정마.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아마도. 전에도 그랬듯이.
이안은 화신체가 남기고 간 빛무리의 폭격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빛의 장막이 간신히 첫 폭발을 막아내 주는 사이, 백금 방벽을 들어 얼굴 앞을 가린 게 전부였다.
폭발이 끝났을 때, 그는 말 그대로 넝마가 되어 있었다.
빈사 상태. 죽지 않은 것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높은 저항력과 각종 축복. 그리고 백금 방벽과 백린 갑옷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방어구가 부실한 오른팔이나 다리, 그리고 폭발이 할퀴고 간 얼굴에는 감각이 아예 없었다.
회복이 가능할까 싶은 치명상.
백금 방벽 덕분에 비교적 멀쩡했던 왼팔에서 신성력이 밀려든 것과, 혼돈의 파편이 마력을 흡수하며 응축했던 혼돈력을 토해내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게임에서 이런 게 있지는 않았었겠지.’
아마 있었더라도 각기 다른 종류의 이벤트였으리라. 전자는 야만 전사. 후자는 타락자.
둘 다인 이안에겐 게임에서 없었던 상황이 일어나게 된 것이리라.
어쨌건 그는 둘 다 거부하지 않았다. 의식을 붙잡고 있는 게 고작이라,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고통스러운, 아주 고통스러운 변이의 과정을 견뎌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까드득-
이안은 늘어뜨린 광검의 자루를 고쳐 쥐었다. 크고 단단해진 손끝, 날카로운 손톱이 의도치 않게 자루를 긁었다.
원리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혼돈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팔이었다. 결손 되거나 치명상을 입은 부위가 전부 변이되어 재구성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카르하가 투쟁의 축복을 거두지 않은 건,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놈이라면 이 상황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건, 덕분에 이안의 능력치는 본래의 상태보다도 훨씬 더 높아진 상태였다. 변이되면서 오른 능력치에, 투쟁의 축복의 추가 능력치까지 더해진 것이다.
물론, 대가는 있었다.
고통. 지금 이안은, 신성이 변이된 부분을 계속해서 태워버리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뼈가 다 드러난 상태로 굴러다니는 것보다야 낫긴 하지만… 시발.’
이런 설명을 구구절절 해 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루시아의 창백한 안색을 응시한 이안이 덧붙였다.
“너야말로 광기에 휩싸였던 것 같은데.”
“그게….”
또 한번 멈칫한 루시아의 입술 끝이, 금방이라도 울 듯이 아래로 쳐졌다.
“사제님들이… 저 때문에….”
이안은 그제야 자욱한 피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고통스러운 변이 과정을 거치느라, 사제들이 목숨을 잃는 모습은 보지 못한 그였다.
…정말 약속을 지켰군. 이런 건 굳이 증명할 필요 없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덧붙였다.
“미구엘도?”
“미구엘은 뒤에… 기절해 있어요. 군단도… 너무 많이 죽고 다쳤어요. 죽고 나서도 저렇게… 전부 저 때문이에요. 제가-”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
이안이 말을 잘랐다.
“넌 네 몫을 다 했다. 책임은 나한테 있지. 내 군단이니까.”
빈말이 아니었다.
신성이 살을 태우는 고통보다도 큰 분노가 가슴 속에 이글댔다.
이안은 이 상태가 되고서도 군단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었다. 군단은 사할 가까이가 죽거나 크게 다친 상태였다.
그의 육체가 재구성되는 시간 동안 누적된 피해이기도 하리라.
그리고 그건, 이안에게 신체의 일부를 잃은 것과 비슷한 상실감을 남겼다.
“…이안 님.”
하지만 루시아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이들을 잃었을 터였다.
녀석의 흔들리는 눈을 똑바로 내려다본 이안이, 굵어진 혀를 날름대며 덧붙였다.
“그리고 복수도 내 몫이지. 물러나 있어라. 아직 안 끝났으니까.”
“……!”
그제야 멈칫한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토막 나 허물어져 있던 화신체 덩어리가, 그들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꿈틀대더니 빠르게 하나로 뭉쳤다.
죽은 척 방심을 유도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놈을 향해 몸을 돌리며, 이안이 덧붙였다.
“물러나 있어. 미구엘 챙기고.”
“…네.”
선선히 물러난 루시아가, 이내 다시 이안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반드시 해주세요. 복수.”
이래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붉은 머리의 여기사를 떠올린 이안이,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
“최선을 다하지.”
목소리에 저주파가 섞였다.
끔찍한 모습이련만, 루시아는 입꼬리를 살짝 당기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안의 시선이 저 멀리, 홀로 널브러져 있는 미구엘을 일별했다.
‘혼자 꿀잠이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콧방귀를 뀐 이안이, 곧바로 땅을 박찼다.
쿠확-
변이된 하반신의 각력은 인간을 한참 초월한 상태였다.
제법 먼 거리를 단 두 걸음 만에 좁힌 이안이, 광검을 치켜들었다.
‘어디 한 번 보자. 씹새야.’
혼돈력이 더해진 붉은 신성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뒤이어 샛노란 광검이, 용암처럼 이글대며 솟아오르는 거대한 덩어리 한복판으로 직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과-
광검은 거의 형태를 완성해가던 덩어리를 단숨에 갈랐다. 동시에 이안의 눈에 불길이 일렁였다.
콰- 아아아-!
검날을 타고 불기둥이 치솟았다. 일점 폭발. 반으로 갈라진 화신체가 너덜너덜하게 치솟았다.
“으오- 오오오오-!”
군단병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여전히 변이체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만 상황은 방금 전까지와 전혀 달랐다. 이안이 내지른 전투 포효가, 그들의 가호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이다.
“대전사…? 저 모습은 대체….”
“공허의 저주를 이겨내신 건가?”
“초월… 인간을 초월하신 거야….”
머지않은 거리, 이안의 모습을 발견한 몇몇이 놀란 듯 읊조렸다.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건 그의 전신에는 카르하의 신성이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마족이라 여기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설명할 수도 없으니, 멋대로들 생각하게 둘 수밖에 없었다.
콰과과과-
폭발이 잦아들기도 전에, 이안은 광검을 다시 몇 차례 휘둘렀다.
동시에 그의 붉은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섞여들었다.
파치치칫-
검을 휘두르는 이안의 왼손에 뇌전이 모여들었다. 몇 번의 칼질 끝에, 이안이 손을 내뻗었다.
콰릉-! 콰치치치칫-
토막난 덩어리 위로 눈부신 뇌전이 뒤덮였다. 꿈틀대는 표면에 자줏빛이 번뜩였다. 놈을 노려보는 이안의 눈동자는 이미 푸르스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허공에 한기가 휘몰아치더니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형성됐다.
카드드득- 쩌저정-!
덩어리를 뚫고 들어간 칼날이, 내부에서 폭발해 한기를 흩뿌렸다.
다시 달려들어 광검을 휘두르는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이래서 퀘스트 내용이 그랬던 거네.’
물리 공격은 물론, 어떤 속성의 마법을 펼쳐도 놈이 치명상을 입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물론 놈을 구성한 혼돈력이 증발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남은 양은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커다란 호수에서 수저로 물을 퍼내는 듯한 느낌.
‘게임에서도 이놈은, 죽이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었던 거야.’
퀘스트의 완료 조건은, 화신체가 죽을 때까지 생존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침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면, 그때부터 자멸하기 시작하는 식의 구조이리라.
1챕터의 중간보스였던 피 흘리는 복수자, 메브가 그랬듯이.
세상의 법칙에 어긋나는 놈이니, 신들이 개입해 처리하는 것을 돕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때까지 이놈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콰과과과-
침식이 끝나기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은 남아 있었으니까.
이안의 육체를 구성한 혼돈력이 그때까지 버틸 수는 없으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파편은 계속해서 혼돈력을 토해내면서, 신성으로 타들어 가는 육체를 수복하고 있었다.
침식이 끝날 때까지 버틴다 해도, 그 후엔 신들이 천벌을 내릴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물론 전처럼 카르하가 변이된 부분을 태워줄지도 몰랐지만. 그 아래의 본래 육체가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건 이성적인 이유고.’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이안은 그르렁대는 숨소리를 토해냈다.
그의 투쟁심. 그리고 마음에 이글대는 분노는, 죽은 군단병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투쟁의 축복이 만들어낸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죽은 이들이 그의 군단이며,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하다못해, 죽었을 게 분명한 닐라의 복수도 해 줘야 했다.
‘그러니까, 누가 먼저 쓰러지나 해보자. 새꺄.’
생각하며, 이안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잘게 난도질 된 화신체의 조각이 사방에 흩날렸다.
슈화아악-
그 모든 조각이 눈부신 자줏빛을 머금은 건 그때였다.
콰과과광-!
바로 다음 순간 터져 나온 거대한 폭발이 이안을 집어삼켰다. 이안이 뒤로 튕겨 올랐다. 어느새 백금 방벽을 피워 얼굴 앞을 가린 채였다.
그가 뒤로 공중제비를 도는 사이.
쿠-와아-!
자욱한 폭발을 뚫고, 화신체가 용수철처럼 튀어 나왔다. 그 짧은 사이에 대충 형태를 완성하고, 자주색이 이글대는 거대한 주먹을 내뻗은 채였다.
‘너도 열 받았단 거지?’
가까워지는 주먹을 응시하던 이안이 왼팔을 옆으로 떨쳤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완성된 돌풍이 그의 손길을 따라 터져 나왔다.
푸확-!
이안의 궤적이 왼쪽으로 확 꺾였다. 동시에 그의 몸이 시계 방향으로 빙글 돌아갔다.
콰아아-
화신체의 거대한 주먹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안이 할 건, 그대로 광검을 앞으로 내뻗는 것뿐이었다.
콰과곽-
샛노란 궤적이 화신체의 굵은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대로 마저 몸을 돌린 이안이 미끄러지듯 착지하는 사이, 화신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비스듬하게 어긋났다.
슈확-
화신체의 허리를 따라 여러 개의 촉수가 뿜어져 나온 건 그때였다. 비스듬하게 어긋난 하반신으로 이어진 촉수들이 그대로 끌어당겨 이어 붙었다.
콰드드득-
동시에 몸을 앞으로 확 구부린 화신체가 넘어지지 않고 착지했다. 인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움직임.
‘촉수 다리는 안 쓰기로 한 건가?’
지금 저건 내 다리를 따라 하는 것 같은데. 내심 덧붙이며 멈춰선 이안이, 곧바로 다시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착지한 화신체의 등 뒤에서 십여 개의 촉수가 날개처럼 뿜어져 나온 건 그때였다.
슈화아아악-!
촉수들이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자줏빛 마력이 이글이글 맺힌 채였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한 이안은 그 모든 궤적을 인식할 수 있었다.
게다가 투쟁의 축복에 더해 반쯤 마족화까지 이룬 지금은, 집중력을 너끈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육체적인 능력도 갖춘 상태였다.
콰- 과과과과과-
덕분에 이안은 날아드는 촉수들을 피하는 대신, 반쯤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댔다.
“…루 엔테르 맙소사.”
뒷걸음질 쳐 미구엘을 질질 끌고 가던 루시아가 낮게 탄식했다.
지금 그녀는 이안이 휘두르는 검을 제대로 따라갈 수도 없었다. 그저 일직선으로 달리는 그의 주위로 눈부신 황금빛 잔상이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잘려나간 촉수들이 후두둑, 휘몰아치듯 사방으로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