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75
375화
콰직, 칼끝이 녹아내린 땅에 비스듬히 박혔다. 동시에 검면에 새겨진 진언 회로가 짧게 명멸하며 완전히 빛을 잃었다.
웅크리듯 착지한 이안이 뒤로 힘껏 몸을 날리며 바닥을 구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쿠드득, 쿠웅-
머리에서 완전히 분리된 거대 마수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머리와 목의 잘려나간 단면에서 새카만 체액이 석유처럼 쏟아졌다.
튀어 오르듯 일어선 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남은 것들이 있었다. 익룡 마수들.
“……!”
하지만 하늘을 올려다본 이안은, 이내 슬쩍 미간을 좁히며 검을 늘어뜨렸다.
익룡 마수들이 피막 날개를 퍼덕대며 속도를 줄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 마수가 죽어서인지, 이안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판단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솨아아….
축 늘어진 거대 마수의 전신에서 자주색 빛무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빛무리는 곧 선명한 아지랑이가 되어 뿜어져 나왔다.
“……!?”
엄청난 기세로 솟구치는 자줏빛을 잠시 올려다본 이안은, 자신이 놈의 몸에 새겨 넣은 상처를 따라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게 전부 거대 마수가 품고 있던 마력과 혼돈이라는 것도.
솨아아아-
자줏빛 아지랑이는 잘린 머리와 목의 단면에서도 터져 나왔다. 다른 점은, 몸에서처럼 하늘로 치솟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안의 주위로 빨려들듯 휘어져, 커다란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쿠구- 쿠구-
혼돈의 파편이 토해내는 울림이 삽시에 이안의 전신으로 번졌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밀려드는 아지랑이를 받아들였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파편이 지나치게 탐욕스럽게 굴면 마력을 끌어올려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더럽게 끈적하네.’
밀려드는 자줏빛은 순수한 혼돈력이 아니었다. 혼돈력이 섞인 오염된 마력. 하지만 파편은 사금을 채취하듯 그 사이에서 혼돈력만을 빨아들였다.
“……!?”
이안의 눈매가 꿈틀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쩌적, 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내면을 울렸기 때문이다.
파편에서 번진 소리였다. 뒤이어 폭발하듯 혼돈력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한 고통. 한순간 새카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삽시에 되돌아왔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게 분명한 보라색 연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그를 감쌌던 아지랑이는 어느새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퀘스트 완료창이 떠올랐다. 혼돈의 씨앗. 물론 받은 적 없는 퀘스트였다.
파편이 온전한 형태를 이뤘다는 게 설명의 전부였다.
‘…그래, 친절할 리가 없지.’
생각하며, 이안은 반사적으로 내면을 관조했다.
언제 폭발했었냐는 듯 고요해진 파편은, 설명대로 느껴지는 형태가 달라졌다. 더 균일하고, 심지어 작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내부에 고인 혼돈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어 있었다. 파편 역시도.
‘온전한 정수가 된 건가.’
타락자로서 한 걸음 더 진일보했다는 의미일 터였다.
그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왜 하필 지금 파편이 완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공교로운 우연일지도. 이곳의 환경이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킨 것일지도.
물론 당장은 답을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는 의문이었다.
‘어쨌든… 다른 완료창은 안 뜨네.’
능력치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상태창까지 확인한 이안이, 백금 방벽을 거둬들이며 눈을 떴다.
상태창의 모든 수치는 그대로였다. 표기되지 않는 달라진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건 어차피 확인이 불가능했다.
대신 경험치가 상당히 늘어났고, 능력치 포인트도 하나 더 생겼다.
아마도 아까 완료된 퀘스트의 보상과, 마수들을 죽인 결과일 터였다.
하지만 어쨌건, 거대 마수까지 뭔가 받은 적 없는 퀘스트를 완료시켜주지는 않았다.
역시. 게임의 놈은 죽이라고 만들어진 놈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애초에 지금 상황 자체가 게임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지 않았을 터였다.
끼아아아- 꺄아아아….
상공에서 소란이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은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확연히 날갯짓이 느려진 익룡 마수들.
‘저 아지랑이에 휩쓸린 건가.’
이안의 시선이 놈들을 지나쳐 솟구치는 자줏빛 아지랑이를 훑었다. 오로라처럼 넘실대는 빛은, 곧 빙글빙글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한 익룡 마수들에게 가려졌다.
이안이 놈들의 안광이 자줏빛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쯤, 새 떼처럼 방향을 돌린 마수들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
이안의 고개가 슬며시 기울어졌다.
놈들이 계곡을 거슬러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그리고 저 너머에는, 그림자처럼 아른거리는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심연의 속삭임에 홀려 버렸나 보군….
나지막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동시에 이안은 자신의 어깨에 재구성되는 요그의 기척을 느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심연의 속삭임?”
-그래… 너에게는 안 들리나 보군. 저 어둠이 부르는 소리가 말이야.
이안은 넘실대는 어둠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어떤 속삭임도 들리지 않았지만, 검은 벽을 넘어 침공해 왔던 마물과 마수들을 떠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하나같이 끔찍하게 변이되고, 광기에 완전히 잡아먹힌 것들. 심지어 마족이었던 제사장조차 광기에 완전히 휩쓸린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게 벽을 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반대로 광기에 완전히 잡아먹혀서 검은 벽의 부름에 이끌린 건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이제야 왜 그렇게 다양한 마물과 마수. 심지어 이종족들까지 뒤섞여 있었는지를 알 것 같아서였다.
-약한 것들일수록 사로잡히게 되겠지. 혼돈에서 태어난 나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말이야. 그래… 그래서 네게도 들리지 않는 거군….
놈들은 광기에 잡아먹힌 채 저 어둠 속을 배회하다가, 때가 되면 밖으로 내보내지는 것이다. 더는 쓸모가 없어진 것들을 배설하듯이.
어쩌면 그게,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운명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저 망아지 같은 녀석도 무사하고.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저만치에서 루시아가 달려오고 있었다. 눈을 불그스름하게 빛내면서.
-생각보다 훨씬 더 쉽지 않았다고. 평소랑은 완전히 딴판이라서 말이야.
그랬겠지.
이안은 짧은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루시아는 요그의 속삭임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앞에 멈춰섰을 뿐이었다.
“정말 대단하셨어요…! 그 마법도, 이런 엄청난 괴물을 끝장내 버리신 것도요! 심지어 여기선 카르하의 도움도 없… 이, 이안 님?!”
흥분한 듯 떠들어 대던 녀석이 화들짝 이안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비틀대며 뒤로 넘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이안을 끌어안은 그녀가 부축하듯 옆구리로 파고드는 사이.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야.”
녀석의 어깨를 움켜쥔 이안이 내뱉었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현기증과 두통이 밀려들었을 뿐이었다.
기절할 걱정은 없었다. 온몸에서 번지는 통증이 오히려 그럴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아예 만신창이가 되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루시아의 눈을 내려다본 이안이 덧붙였다.
“그보단, 네가 진정하는 게 우선일 것 같다. 마법사.”
“…아. 네. 그럴게요.”
그제야 눈을 깜빡인 루시아가 심호흡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아른거리던 마력이 흐릿하게 잦아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평소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돌아온 녀석이 덧붙였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까는 경황이 없었어요.”
“미안할 거 없어. 잘못한 것도 없고.”
“…중첩된 마력의 양이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아요. 전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세밀하게 통제할 수도 있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이어진 루시아의 설명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신의 사도가 되었으니 그런 거겠지.”
성흔 자체가 도움이 된 것은 아닐 터였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육체와 영혼이 더 강하게 재구성된 덕분이리라.
그게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건, 이미 이안이 스스로 경험해 알고 있지 않던가.
“…그 얘긴 나중에 다시 하자.”
루시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러난 이안이, 진은 강철 검을 아공간에 밀어 넣으며 몸을 돌렸다.
“계속 여기에 있다간, 경계에 사는 다른 것들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니까.”
거대 마수의 시신을 눈에 담으며 덧붙인 그가, 절뚝대며 걸음을 옮겼다.
“…네.”
철퇴를 허리춤으로 되돌리며 빛무리가 흐릿하게 멀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본 루시아도, 이내 그의 뒤를 따랐다.
난장판이 된 계곡과 거대한 마수의 시체만이, 온갖 색이 넘실대는 검은 하늘 아래 덩그러니 남겨진 채였다.
***
이안은 절뚝대면서도 몇 시간을 멈추지 않고 계곡을 내려갔다.
그가 멈춘 건, 계곡을 가르는 성벽의 잔해에 도달했을 때였다.
한때 이 일대를 지켰을 성벽은 곳곳이 무너지고 기울어진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물은 커녕, 마수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아까 거대 마수들의 싸움이 만들어낸 여파인지도 몰랐다. 어쨌건, 하룻밤을 보낼 안전한 은신처로는 딱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이안이 이곳을 야영지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웩…. 콜록, 콜록… 읍… 으윽….”
이동하는 동안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던 루시아가, 이윽고 걸음걸이까지 휘청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안의 인도에 따라 성벽 뒤편까지 간신히 이동한 녀석은, 곧바로 주저앉아 토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검은 피였다.
이윽고 숨을 헐떡댄 녀석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이안 님. 저 때문에 또… 읍.”
녀석이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저 옆, 성벽의 잔해에 기대앉은 이안이 녀석의 등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거의 다 내려왔어. 나도 슬슬 한계였고.”
위로처럼 들리겠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무너진 성벽을 발견했을 때, 그 역시 긴장과 안도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지 않았던가.
욱신대는 옆구리에 손을 얹었던 그가, 옆으로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뽑혀 나온 이빨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싸우는 동안 부러지거나 으스러졌던 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뽑혀 나오고 있었다.
다시 온전하게 돋아나기까지 며칠은 필요하리라.
‘뼈도 최소한 서너 군데는 금이 갔고…. 하지만 아예 부러진 곳은 없네.’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지.
생각하며 너덜너덜해진 옷소매와 장화를 내려다본 이안이, 이내 미련을 떨치듯 시선을 돌렸다.
휘오오오….
계곡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성벽을 등지고 잔해들 사이에 앉은 덕에, 흐릿한 어둠과 안개가 넘실대는 계곡 너머의 풍경이 조금은 눈에 들어왔다.
구불구불하게 솟은 형체들. 마경의 숲이었다. 저기 어떤 것들이 살고 있을지는 뻔했다.
물론, 저게 선택지의 전부는 아니었다. 계곡 가장자리로 이동하면, 부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온 능선으로도 진입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알 수 없는 산이었다.
‘…이상하게 저쪽이 더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생각하며 아공간을 훑은 이안이, 흑검과 진은 강철 장검을 차례로 꺼내 땅에 꽂았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금속 보관함이 놓였다. 힘겹게 뚜껑을 연 그가 술병을 집어 들 찰나.
“하아… 하아… 후우….”
마침내 팔로 입을 훑으며 루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창백한 안색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탈진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탈진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입안의 통증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비틀비틀 일어선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탈진 상태가 아니라고요…?”
“그 반대인 것 같다. 여긴 바깥보다 마력이 풍부하지만, 동시에 오염되어 있으니까.”
이안이 보기에 루시아의 증상은 마력 중독에 가까웠다.
게임에서처럼 착란이나 공포, 혼란 같은 상태 이상을 촉발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마법사들에게나 해당되는 증상일 터였다.
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루시아는 신의 사도가 아닌가. 오염된 마력에 중독되는 대신,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이리라.
-제법 똑똑하군… 친구….
나른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상자를 뒤적이던 이안이 멈칫했다.
“자는 줄 알았는데.”
-그랬지. 그 안에 들어가기 건까진.
물건들을 꺼내기 위해 아공간을 뒤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잠깐이었는데, 엄살은.
생각한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내가 또 넣어 버릴 게 어지간히 무섭나 보군.”
-…싫은 거라고 해 두지. 나한테 공포라는 감정은 없다고.
없긴, 개뿔.
이안이 코웃음을 치는 사이, 앞에 주저앉은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앞으로 계속 이럴 거란 말씀이신가요?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글쎄. 아마도.”
대답하며 수통을 꺼낸 이안이 루시아에게 내밀었다. 루시아가 미간을 좁힌 채 수통을 받아드는 사이, 요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지금처럼 고통스러운 게 다행이라 여기게 될 날도 있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통의 뚜껑을 연 루시아의 미간이 조금 더 좁아졌다. 다시 상자를 뒤적이던 이안도 움직임을 멈추고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네 몸이 불순물을 거부하고 있는 거니까. 네가 스스로 오염을 정화하고 있다는 뜻이야. 하지만 만약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된다면….
“마력을 오염된 그대로 축적하게 될 거란 거군요.”
요그가 키득대자, 루시아가 비로소 알겠다는 듯 읊조렸다. 요그가 혀를 날름댔다.
-그래. 어쩌면 이미 전부 정화하고 있지는 못한 걸지도 모르지. 느끼지도 못할 만큼 조금씩, 네 영혼과 육체에 찌꺼기가 남고 있는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