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76
376화
“그러길 바라는 것 같은 말투네.”
육포를 감싼 천을 펼치며, 이안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럴 리가.
곧바로 대답한 요그가, 이내 혀를 날름댔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걸 바라는 건 아니라고. 친구.
육포를 쭉 찢어 든 이안이 코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그런 걸 보통 바란다고 표현하지.”
말하며 천을 다시 잘 감싸 상자 안에 넣은 그가, 루시아에게 육포 조각을 내밀었다.
“……!”
수통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던 루시아가 멈칫했다. 녀석의 시선은 육포가 아니라 그걸 쥔 이안의 손아귀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상으로 피부가 다 눌어붙고 벗겨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녀석의 시선을 깨달은 이안이 피식 웃으며 육포를 까딱였다.
“회복되고 있으니까 걱정마. 이거나 받아. 먹어야 회복하지.”
“…네.”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루시아가, 이윽고 대답하며 육포를 받아들었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뇌리로는 요그의 속삭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네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넌 절대 루시가 망가지게 둘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루시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아.
하여간, 주둥이질은.
핀드렐의 궐련함을 꺼낸 이안이 보관함의 뚜껑을 닫으며 내뱉었다.
“그럼 어디 떠올려 봐. 루시의 몸속에 혼돈의 찌꺼기가 쌓이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는지.”
-글쎄…. 가장 간단한 건 역시,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거겠지.
궐련함을 보관함 위에 놓은 이안이, 술병을 집어 들며 읊조렸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긴 하네.”
늘 마력이 최대한 중첩되어 있다면, 외부의 오염된 마력이 흘러드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대기 중의 오염된 마력이나 하늘에 넘실대는 혼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건 이 마경에 존재하는 한 당연히 수반되는 위험이었다.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현재로선 혼돈의 정수를 품고 있는 이안뿐 일터였다.
검은 벽을 넘은 후유증이 남지 않은 것도, 마력 중독 상태가 일어나지 않는 것도 그래서이리라.
‘아마 게임에선 타락자의 특혜였겠지.’
이안은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검은 벽 밖에서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을 테니까. 반대로 이곳에서는 아무런 페널티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후로도 그럴지도 몰랐다. 대륙 역시 점점 신들의 영향력이 약화 되고 있지 않던가.
“아쉽네요.”
이안이 술병을 내려놓자, 루시아가 툭 내뱉었다. 이안의 시선에, 녀석이 덧붙였다.
“주문들을 실제로 사용해볼 기회가 드디어 생긴 건데 말이에요.”
…역시, 주문을 알고 있었구만.
이안이 궐련함을 열며 물었다.
“원장님께 배운 거냐?”
“네. 제가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으니까요. 가장 기초적인 이론과 지식. 그리고 하위 주문들을 몇 가지 알려주셨었죠.”
“간도 크네. 적색 마탑에서 알게 된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작은 비밀로 남을 수 있을 정도로만 알려 주셨어요. 어차피, 제가 다시 마법을 사용하게 될 일도 없었고요. …그런 줄 알았던 거지만요.”
루시아의 눈빛이 순간 가라앉았다. 다시 한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각한 것일 터였다.
“뭐, 어쨌든… 덕은 톡톡히 봤네.”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이 궐련을 꺼내 들었다.
오늘 푹 잠들기 위해서라도 한 대 피워둘 필요가 있었다.
요정의 궐련은 정보창에 표기된 능력치 상승 외에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신의 고통을 조금 줄여 주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다른 요정들에게 뜯어냈던 한 갑도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던가.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내가 아니었다면 동굴을 나올 수도 없었겠고.
요그가 나른하게 덧붙였다.
멈칫한 이안이 짧게 혀를 차고는 궐련을 입에 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화륵, 궐련 앞에 불꽃이 피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방금 마력을 쓰지 말자는 얘길 했던 것 같은데.”
재빨리 궐련에 불을 붙인 이안이 루시아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녀석이 불꽃을 흩어버리며 미소 지었다.
“그러겠다고 하진 않았잖아요.”
“…….”
“최소한으로만 사용할게요. 써야 할 상황에서만.”
연기를 들이마시는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 속내를 짐작한 듯, 루시아가 덧붙였다.
“아예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을 거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 알지.”
이안이 한숨을 내쉬듯 연기를 내뱉으며 읊조렸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가진 힘을 아낄 만큼 녹록지 않았으니까.
물론 오늘 상대한 거대 마수 같은 놈들이 즐비하지는 않겠지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분명 비슷한 수준의 적들을 또 마주칠 일이 있을 터였다. 혹은, 그보다 더 강하거나.
“윽….”
그때, 고개를 돌린 루시아가 다시 검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까만큼 괴로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마력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간헐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일 터였다.
“다른 방법은 없겠냐? 안 쓰는 것 말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자신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은 듯, 요그가 낮게 웃음 지었다. 아주 나른하고 피곤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통했군.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서 말이야….
“방법이 있긴 하단 거군.”
-하나는 정제된 근원의 힘을 빌리는 거지. 너희들의 신이 가진 힘 말이야. 신성. 애석하게도,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이 새낀 꼭 일부러 이러더라.
혀를 차며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신 이안이 덧붙였다.
“다른 하나는.”
-더 큰 혼돈으로 휩쓸어서 삼켜버리는 거지.
연기를 내뿜던 이안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절로 손가락에 감긴 요그에게로 내려갔다. 요그가 느긋하게 혀를 날름댔다.
-그래… 네가 품은 혼돈을 말하는 거야. 친구.
이안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혼돈을 흡수한 상대는 전부 이미 죽었거나 곧 죽던데.”
“……!”
잔기침을 이어가던 루시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저 와중에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건 네가 강제로 혼돈을 취해서가 아닐까?
낮게 키득댄 요그가 덧붙였다.
-네가 품은 씨앗은, 너를 닮아서 아주 거치니까.
“상호 동의하에 한다면 다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건 네가 혼돈을 얼마나 섬세하게 다루느냐에… 호오.
순간 말을 멈춘 요그가 이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달라졌군. 친구. 네 안의 혼돈이… 흠. 자세히 봐야겠어.
동시에 녀석의 움직임이 스르륵 멎었다. 이안은 놈이 멋대로 내면으로 침잠했음을 깨달았다.
아마 그의 내면을 훔쳐보기 위해서일 터였다.
…할 말 다 했다 이거지.
코웃음과 함께 궐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이안이, 옆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굳이 이 녀석을 억지로 깨울 생각은 없었다. 이 뱀 새끼가 또다시 그가 알지 못하던 뜻밖의 정보를 물어올 수도 있었으니까.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이안은 혼돈의 정수를 다시 한번 관조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아니었지만, 녀석의 매끈하게 변한 형상이 그려졌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불안정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주 고요하게 안정되어 있었다.
‘이러다 결국 마족이 되는 건가? 그게 타락자의 최종 단계고…?’
타락 DLC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아쉬워졌다.
혼돈력의 총량을 늘리는 것 말고도, 정수를 키워가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혼돈과 융합한 적도 몇 번이나 있지 않던가.
종종 융합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진짜 마족이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도, 방법이 생겼네요.”
루시아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녀석은 어느새 잔기침을 멈추고 다시 육포를 씹고 있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이 술병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검증되지 않은 방법이야. 너무 위험해.”
지금은 혼돈력을 전보다 더 섬세하고 세밀하게 다룰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그가 밀어 넣은 혼돈이 루시아의 영혼을 물들일 위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죽는 것보다 나빠질 수도 있어.”
“…그럼, 제게 다른 주문을 가르쳐 주실 생각도-”
“물론 없지. 알면 쓰고 싶어질 테니까. 꿈도 꾸지 마.”
“…….”
잠시 이안을 바라본 루시아가, 이윽고 체념한 듯 다시 육포를 입에 물었다.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가르쳐줄 생각도 없지만, 사실 가르쳐줄 방법도 없었다.
그는 그저 스킬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던가. 주문의 구동 원리나 공식 따위는 여전히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안 님.”
“뭐라고 말해도 안 돼.”
“아뇨. 그 얘기가 아니에요.”
이안이 눈동자만 굴려 바라보자, 루시아가 덧붙였다.
“이안 님은 안 드세요? 벌써 몇 끼 째, 제대로 드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제대로 먹고 있잖아.”
이안이 술병을 흔들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이안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에는 농담으로 넘어가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이내 입맛을 다신 이안이 궐련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지금은 먹고 싶어도 못 먹어.”
그가 입을 쩍 벌려, 엉망진창인 입안을 보여 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가 몇 개는 더 빠져서 더 개판일 터였다.
“세상에….”
루시아가 탄식했다. 녀석의 눈빛이 더 심각해지는 것을 본 이안이 씩 미소 지었다.
“며칠이면 다시 다 나올 거다. 내 손바닥처럼.”
그가 오른손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벌써 익어버린 피부 표면이 조금씩 벗겨지고, 진물과 함께 새 살이 돋고 있었다.
흉터까지 완벽하게 사라질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아무리 그래도, 그동안 아예 안 드실 수는 없잖아요.”
“최소한으로만 먹으면 돼.”
“그래도 다 회복하실 수 있다고요…? 대체 어떻게.”
“잘.”
“…….”
루시아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달싹였다. 보관함을 연 이안이, 녀석에게 모포를 내밀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마저 먹고, 푹 자라. 경계에서 꽤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너무 오래 쉴 순 없으니까.”
“…네.”
멍하니 모포를 품에 안은 루시아가, 다시 육포를 입에 넣었다.
비로소 시선을 돌린 이안이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가 음식을 먹지 않는 건, 물론 입안이 다 터져서만은 아니었다.
보급이 불가능한 상황이 아닌가.
가진 식량을 전부 루시아에게 먹인다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특히 물이 그랬다.
그러니 그라도 음식 섭취를 최소화해야 했다. 지금처럼 술을 물 대신 마시면서.
물론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게임이었다면 모를까. 현실이 된 지금은 체력 수치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결국은 먹어야 했다.
다만 그게 육포는 아닐 터였다.
‘진짜 별짓을 다 해야 되네….’
그는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서.
“……?”
한숨과 함께 술을 들이켜던 이안의 눈매가 꿈틀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하늘의 변화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저랬지?’
새카만 하늘에 불길한 무지개처럼 일렁이던 빛들이, 기름띠가 번지듯 퍼져나가고 있었다.
훨씬 더 밝게 일렁이며, 나이테 같은 무늬를 그리듯이.
“마경에도 날씨의 변화가 있는 걸까요…?”
어느새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루시아가 읊조렸다.
-저건 너희가 만들어낸 변화야.
요그의 속삭임이 불쑥 번졌다.
잠깐 사이에, 녀석의 속삭임은 더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아까 그놈이 토해낸 혼돈 때문이란 거냐?”
-호수에 돌을 던진 셈이지….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낸 거야. 고여있던 혼돈을 다시 흐르게 하는. 아직은 작은 파문이지만….
뭐 지구 반대편에서는 해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건가.
짧게 콧방귀를 뀐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별 의미는 없는 변화였군.”
-글쎄… 퍼져나간 물살은 어딘가에 다시 고이게 마련이지…. 때로는 고인 것을 넘치게도 하겠고….
요그의 속삭임이 점점 느려졌다.
반쯤 잠에 취해, 떠오르는 대로 떠드는 듯한 말투였다. 미간을 좁힌 이안이 내뱉었다.
“쉽게 말해. 빙빙 돌리지 말고.”
-그게 너를 인도할 이정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제야 이안의 눈이 번뜩였다.
결론만 툭 던진 듯한 말이었지만, 짚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혼돈력을 끌어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물론… 새로운 혼란을 낳게도 되겠지만… 그건 불가피한….
요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보랏빛으로 물든 눈으로 하늘을 뚫어질 듯 응시할 뿐이었다.
이내 그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정말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더 선명하게 혼돈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력 탐지를 활성화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고개를 갸웃하던 루시아가 물었다.
“…저게 왜 우리의 이정표가 되어준다는 거예요?”
“무거운 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끌어당기니까.”
하늘 너머를 응시한 채, 이안이 현대인의 지식으로 말했다. 루시아를 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이안이 다시 궐련을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마경에는 그런 무거운 게 여럿 존재하고 있겠지. 마족이라던가. 아까 본 것 같은 끔찍한 마수라던가. 혹은….”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신 그가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이 마경의 근원이라던가.”
“……!”
그제야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연기를 토해내며 덧붙였다.
“한 번에 찾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계속해서 파문을 만들어내고 그게 흘러드는 곳을 찾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찾던 목표에 도달할 수도 있겠군요.”
정말이지 내키지 않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해야만 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우선은, 저 파도를 따라가 보자.”
“그래요. …기대되네요.”
읊조린 루시아가 그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릿한 어둠과 흙먼지 같은 뿌연 안개에 뒤덮인 거대한 마경이, 조용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밤. 화로의 사원.
먹구름 낀 하늘의 번쩍임이 책상과 의자. 작은 화로와 낡은 책장만 놓인 검소한 집무실을 밝혔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사원장, 체르윈. 그리고 앞에 서서 입을 달싹이던 사제의 얼굴에도 짙은 음영이 스쳤다. 멋대로 자란 수염과 한쪽 얼굴을 가르는 곰이 할퀸 듯한 흉터가 한순간 도드라졌다.
쿠르릉. 이어진 천둥소리에 사제의 입술이 멈췄다.
“그날. 한순간 성화가 아주 격렬하고 새하얗게 타오르더군요.”
적막을 깬 건 체르윈이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앞에 선 사제, 미구엘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침식이 일어난 지 삼 주 가까이가 지난 오늘에서야 홀로 돌아왔다.
북부에 번지고 있는 소문이 체르윈의 귀에 들어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방금, 그 소문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던 참이었다.
“여신의 뜨거운 분노가 느껴졌죠. 그때 이미 직감했어요. 많은 피가 흘렀음을. 우리의 불씨에, 큰 변고가 생겼음을.”
“…전부 제 잘못입니다.”
잠시 입술만 달싹이던 미구엘이, 고개를 숙이며 내뱉었다. 그의 눈두덩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으스러질 듯 움켜쥔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루시가 아니라 제가 차라리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았어야-”
“당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요. 미구엘 사제.”
체르윈이 말을 잘랐다.
“살아남은 건 죄가 아닙니다. 게다가 책임도, 이미 과할 정도로 짊어지고 돌아온 것 같군요.”
그녀의 시선이 미구엘의 야윈 볼을 훑었다. 비단 마음고생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지난 이주가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지 않았던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시부럴….”
미구엘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읊조렸다. 그의 전신에 숨길 수 없는 슬픔과 죄책감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꾹꾹 억누르고 참아온 모든 감정이 한 번에 밀려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체르윈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좀 전에, 루시가 살아있을 것이며 반드시 살아 돌아오리라 믿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물론입니다.”
간신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무사히 벽을 넘었을 것이며, 살아있을 겁니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루시의 곁에는 형씨… 아니, 북부의 초인이 있을 테니까. 다만, 그게 언제일지는-”
“그럼 고개를 숙이지 마세요.”
미구엘의 눈을 뚫을 듯 바라보며, 체르윈이 말을 잘랐다.
“죄인처럼 굴지 말아요. 믿음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도록 하세요. 다른 이들이 당신에게서 희망과 믿음을 얻도록. 모든 일의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당신은, 이제 그래야만 합니다. 미구엘 사제.”
“…….”
눈에 이채가 서린 것도 잠시. 이윽고 미구엘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체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구엘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자, 그녀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귀환이 늦어진 가장 큰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잖아요. 붉은 군단의 문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