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87
387화
“의외네요.”
루시아가 문득 읊조렸다. 잿빛 안개가 스멀스멀 짙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뭐가.”
나란히 걷던 이안이 물었다. 앞장선 디아나도 걸음을 늦추며 돌아보는 가운데,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적어도 한 번은 습격당할 줄 알았거든요. 생각 외로 너무 평화롭네요.”
무슨 얘길 하려나 했더니.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짙어지는 안개 사이로 황무지 같은 평야가 끝없이 이어졌다.
어두컴컴한 하늘에는 남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빛무리가 기름띠처럼 넘실댔다. 버석버석한 흙. 비쩍 마르고도 여전히 살아있는 마경의 나무들과 크고 작은 바위들.
야영지를 떠난 이래 한결같이 이어진 풍경이었다.
“뭐….”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낮은 자세로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 요정에게서 멈춰 섰다.
“길잡이가 안내를 잘한 모양이지.”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인 듯, 디아나의 눈이 순간 커졌다. 하지만 딱히 빈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길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으니까.
“뭐, 그야 물론이지.”
거만한 말투와 달리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디아나가 대답했다.
“나 같은 숙련된 파수꾼은, 무의미한 싸움 같은 건 만들지 않아.”
겸손이라는 걸 모르는군.
짧게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다시 루시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기척도 거의 느끼지 못한 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디아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멈칫했다. 가면을 고쳐 쓰듯 습관적으로 얼굴을 만지며 그녀가 내뱉었다.
“이 일대의 짐승들은 외곽의 숲에 사는 것들처럼 요란스럽지 않아. 사실, 그렇게 시끄러운 것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하지. 오래 산 것들일수록 은밀하고 신중해.”
…아무리 은밀해도 요그까지 속일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그는 오늘 내내 심심하다는 둥 지루하다는 둥 중얼대지 않았던가. 뭔가를 느꼈는데도 알려 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애초에 그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아니라면, 그다지 자신의 역할에 성실하지 않은 놈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거의 도착했으니, 불필요한 걱정이야.”
덧붙인 디아나가 안개가 자욱한 뒤편을 돌아보았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균열의 권역이야. 이 균열은 일대에서 가장 크지. 저번보다 더 거칠 거다. 잡념은 버리는 게 좋아.”
“…전 속도 비워 뒀으니까요.”
루시아가 한숨 쉬듯 읊조렸다. 이안도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준비됐어.”
루시아가 빨리 해치워 버리자는 듯 앞으로 나서는 가운데, 녀석과 이안을 번갈아 돌아본 디아나가 내뱉었다.
“주의 사항, 잊지 마라.”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몸을 돌린 디아나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와 루시아의 뒤통수를 눈에 담으며 이안도 앞으로 나아갔다.
시야 가장자리를 덮은 안개가 삽시에 자욱해지고, 뒤이어 조금씩 왜곡되듯 일그러졌다.
‘…확실히, 크기에 따른 차이점이 존재하긴 하네.’
육감이 뒷덜미가 오싹할 정도의 경고를 보내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휘몰아치는 안개와 그 안에 뒤섞인 마력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거대한 토네이도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조금 재미있어지는군.
요그가 킥킥대며 속삭였다.
이안은 미간만 찌푸릴 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실, 녀석의 헛소리를 신경 쓸 상태도 아니었다.
콰… 아아아….
밀려드는 마력이 전신을 울리고 있었으니까. 물살을 뚫고 나아가는 듯한 압력. 땅이 울렁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방향 감각과 균형 감각이 가장 먼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래… 확실히 더 재미있어. 훨씬 더 위험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안은 오히려 전보다 빠르게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시선을 루시아와 디아나의 뒷모습에 고정하고 있는데도, 주위에 휘몰아치는 마력의 결이 눈에 보이듯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땅이 울렁이는 듯한 감각 역시 훨씬 더 굴곡이 크게 느껴져서 오히려 적응하기 쉬웠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네.’
이안은 어제보다 덜 비틀대는 루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느낌 역시 어제보다 느렸다.
어쩌면 그들의 적응력이 뛰어난 건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 해도 위험천만한 건 마찬가지였다. 혼돈이 짙게 뒤섞인 마력의 흐름은 전신을 짓눌렀고, 감각은 끊임없이 어긋났다. 마력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는다면 삽시에 방향 감각을 잃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터였다.
‘…역시, 매번 할 만한 짓은 못되네.’
같은 결론을 내리면서도, 이안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디아나의 뒤통수와 마력의 흐름에 의식을 집중한 채였다.
“뭐… 지…?”
집중을 깨뜨린 건 디아나의 목소리였다.
웅얼대는 듯한 다소 부정확한 발음. 귀 바로 옆에서 읊조리는 것처럼 들리는 건 감각이 왜곡되어 만들어진 현상일 터였다.
그리고 이안은, 그녀가 중얼댄 이유를 곧바로 깨달았다.
솨아아….
저 앞, 넘실대는 안개에 청록색 빛이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뼈가 맞부딪치는 듯한 달그락대는 소리가 거리를 가늠할 수 없게 커졌다가 작아지며 귓가를 울렸다.
“유랑… 단…? 대체… 어떻게…?”
디아나가 경악한 듯 읊조리는 가운데,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균열 지대의 함정.
‘…함정?’
가뜩이나 좁아져 있던 미간이 절로 더 구겨졌지만, 퀘스트의 내용이나 확인할 때가 아니었다.
그사이 청록색 빛무리가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잦아들더니, 절그럭대는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안이 퀘스트 창을 닫아버리는 사이.
“…말도 안 돼.”
완전히 멈춰선 디아나가 망연자실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시선은 저 앞, 빠른 속도로 선명해지고 있는 청록색의 물결에 홀린 듯 고정되어 있었다.
아지랑이 일부가 도깨비불처럼 훌쩍 솟구쳐 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하강을 시작한 궤적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선명해 졌다.
‘저런 미친…?’
이안의 긴장감과 집중력을 단숨에 최고조로 치닫게 만들기에도 충분한 광경이었다. 신경이 달아오르면서 육감이 예리하게 돋아나고, 동시에 어긋나있던 감각들이 억지로 조금씩 제자리를 되찾아갔다.
뇌가 달궈지는 것처럼 머릿속이 삽시에 뜨끈해졌다.
-구경만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친구.
나도 알거든?
속으로 씹어 뱉으며, 이안은 아공간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다행히 아공간은 의지대로 열 수 있었다.
손아귀에서 서늘한 자루의 감각이 번졌다. 힘껏 움켜쥔 이안이, 둔탁하게 몸을 비틀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솨아아아-
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튀어나온 새카만 검날에 보랏빛 아지랑이가 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루시아와 디아나를 앞질러 달려나간 이안이, 유성 같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것들을 눈에 담았다.
뼈만 남은 채로도 짐승처럼 달려들고 있는 망자들. 심지어 마물의 골격 같았다. 청록색 빛은 놈들의 두개골에 뚫린 모든 구멍에서 연기처럼 번져 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내뻗은 날카로운 손톱에서도.
쿠- 확-!
뼈만 남은 사지를 활짝 펼친 채 포탄처럼 떨어지는 놈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힘껏 땅을 박찼다.
밀려드는 마력의 흐름이 전신을 짓누르는 가운데에도, 그의 몸이 물살을 가르듯 솟구쳐 올랐다.
콰지지지직-!
톱날 같은 보랏빛 궤적이 달려드는 해골을 비스듬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놈의 거무스름한 뼈가 산산조각으로 찢겨 나가고, 궤적의 가장자리에 휘말린 두개골이 청록색 빛을 뿜으며 퍽, 터져 나갔다.
“……!”
허공에서 그대로 분리된 뼛조각들이 이안에게 마주 쏟아졌다. 이안은 치켜든 오른팔로 그대로 얼굴을 가렸다.
뼛조각들에 얻어맞으며 추락한 이안이 바닥을 굴렀다. 통증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둔탁한 충격과 함께 시야가 한차례 휘청댔을 뿐이었다.
‘시발…!’
그대로 땅을 구른 이안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어긋난 감각이 무의식중이 조정되긴 했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다. 움직임이 둔했다.
몸 곳곳이 마취된 채로 물속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빠르게 흐르는 물속에서.
콰장창- 퍼서서석-!
그나마 다행인 건, 포탄처럼 떨어져 내리는 해골들의 조준이 형편없다는 사실이었다.
정확히 일행을 노린 건, 방금 이안이 썰어버린 한 놈 뿐이었다.
나머지 해골들은 유성우처럼 일행의 후방과 측 후방에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물론 저것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절그럭- 절그럭-
뼈 소리를 내며 몇 마리가 여전히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놈들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왼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에서 황금빛이 번지더니, 삽시에 육각형을 그리며 피어올랐다.
쿠- 확-!
안개를 뚫고 해골 한 마리가 달려든 건 거의 동시였다. 양손을 내뻗으며 몸을 날린 것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골격이었다. 쩍 벌어진 턱뼈 사이로 청록빛 마력이 연기처럼 뿜어나왔다. 내뻗은 주먹은 청록색 불길이 이글대는 것처럼 보였다.
카가가각-!
좌에서 우로 크게 그어진 보랏빛 궤적이, 내뻗는 손과 그 너머의 두개골을 동시에 갈랐다. 해골이 달려들던 그대로 수많은 파편으로 화해 흩어졌다. 백금 방벽을 들어 얼굴 앞을 가리면서,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뭐해! 계속 걸어!”
불과 몇 걸음 앞으로 지나쳤을 뿐이건만. 디아나는 거의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만큼 뒤에 있었다.
“……!”
금빛 방패를 치켜든 이안을 넋을 잃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가,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제대로 걷는지 확인할 틈은 없었다.
쿠화악-!
또 다른 해골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왼팔을 떨치듯 휘둘렀다. 백금 방벽의 표면이 달려드는 해골의 팔뚝을 쳐냈다. 내뻗은 양팔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그 너머로 뾰족한 이빨이 듬성듬성 솟은 두개골이 훤히 드러났다. 변이된 고블린 정도로 추정되는 골격이었다. 그 옆으로 달려드는 또 다른 해골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상반신의 회전을 고스란히 실어 흑검을 내뻗었다.
카가가가각-
보랏빛 궤적이 달려들던 해골에 이어, 팔이 떨어져 나간 해골의 두개골까지 전부 찢어발겼다. 퍼벅, 청록색 빛이 점멸하면서 해골들의 몸이 파편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게 대체… 유랑단이… 어떻게…?”
바로 뒤에서 웅얼대는 듯한 목소리가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옆으로 물러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디아나가 그의 바로 뒤에 있었다. 허물어지는 뼈 더미를 응시하는 요정의 눈동자에는 경악과 공포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루시아가 여전히 뒤따르고 있다는 것까지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내뱉었다.
“하수인 몇 마리일 뿐이야.”
디아나와 달리, 이안의 말은 상당히 또박또박하고 빨랐다.
“잡생각은 미뤄 둬. 지금은 여길 무사히 빠져나갈 생각만 해라. 집중하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
눈을 부릅뜬 디아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루시아의 억눌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혼자서는… 위험해요…. 같이…!”
그녀를 돌아본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루시아의 눈동자에 불그스름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춰라, 루시. 여기서 마법은-”
하지만 이미 루시아는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물론, 뿜어져 나온 마력은 그대로 휩쓸리듯 흩어져 버렸다.
“어…?”
탄식한 루시아가 비틀댔다. 녀석의 눈동자에 맺힌 마력 역시 단숨에 빛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마력 역류 현상이었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여긴 오염된 마력이 맹렬하게 휘몰아치고 있으니까.
높은 밀도를 가진 용의 마력이나 혼돈력, 신성력이 아니라면 휩쓸려 역류할 수밖에 없었다.
백금 방벽을 거둬들이며 다급하게 손을 뻗은 이안이, 주저앉은 루시아를 팔로 받아들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디아나 쪽으로 돌아갔다.
“루시를 데리고 가. 혹시라도 루시가 낙오되면 뒈질 줄 알아.”
“……!”
에둘러 타이를 때가 아니었다. 이안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숨을 헐떡인 디아나가, 뒤이어 삐걱대며 몸을 돌려 루시아를 양팔로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어깨에 상반신을 기대면서, 루시아가 더듬댔다.
“혼자서는… 위험해요….”
“저것들을 그대로 두는 것도 마찬가지야.”
내뱉은 이안의 시선은 이미 일행의 뒤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절그럭대는 소리와 함께 청록색 빛무리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추락했던 것들이 다시 재조립되어 일어선 게 분명했다.
“따라가면서 싸울 거야. 걱정마.”
“대체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는 건진… 모르겠지만….”
디아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번졌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마라….”
“나갈 길이나 제대로 찾아라.”
이안이 움켜쥔 흑검을 잠시 바라본 그녀가, 이윽고 숨을 고르며 시선을 돌렸다. 자욱하게 휘몰아치는 안개를 뚫어질 듯 노려본 것도 잠시.
“…….”
디아나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둔탁하게 뒷걸음질 치며 따라가면서, 이안은 점점 선명해지는 청록색 빛들을 눈에 담았다.
집중력과 육감이 최고조로 치달은 상태로도, 그의 감지 범위는 극도로 좁았다. 바로 뒤, 디아나의 존재를 느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절그럭- 절그럭-
그에 반해 저 망자들은 이 권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꼭두각시들이기 때문이리라. 이 안에서도 주문이 흩어지지 않는 건, 저놈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혼돈력이어서일 터였다.
이안이 재생성한 백금 방벽을 얼굴 앞까지 치켜드는 사이.
-떨어지면서 대가리가 깨진 놈들도 있나 보군. 숫자가 줄었어. 셋… 아니, 넷 정도인가.
요그가 속삭였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이안의 뇌리로는 전혀 따른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이거, 싸우는 게 아니라 일단 균열 밖으로 도망치는 퀘스트였나?’
조금 강한 언데드 정도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온갖 상태 이상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지금은 네임드 못지않게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여기선 마법도 사용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퀘스트의 내용을 다시 확인할 수도, 디아나를 재촉할 수도 없었다.
쿠화악-!
이미 안개를 가르며 두 마리의 거무스름한 해골이 달려 나오고 있었으니까. 둘 다 2 미터는 되어 보였다. 이안을 향해 내뻗는 거대한 손아귀 사이사이로 청록색 마력이 이글댔다. 보랏빛 아지랑이를 토해내던 흑검이 반사적으로 뿜어져 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카-드드드득-!
사선을 그리는 궤적이 해골 두 마리를 다 휩쓸고 지나갔다. 갈비뼈와 척추가 박살 난 것들이 그대로 널브러졌다. 퍽, 땅에 떨어진 한 놈의 머리가 청록색으로 번쩍이며 터져 나갔다.
콰지직- 콰직-
허물어지는 뼈 무더기를 짓밟으며 또 한 놈이 튀어나왔다. 몸쪽으로 치켜든 오른팔을 힘으로 간신히 멈춘 이안이, 이를 악물며 다시 몸 바깥쪽으로 힘껏 휘둘렀다.
감각이 둔한 탓에 단순한 공격밖에는 할 수 없었지만, 움직임이 단순한 건 언데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카가가각-!
이안에게 뻗어 나오던 팔뚝이 갈비뼈와 함께 찢겨 나갔다. 비스듬하게 허물어지는 놈의 두개골로, 이안이 내뻗은 방패 날이 틀어박혔다. 퍼석, 두개골이 터져 나가면서 뼛조각이 와르르 허물어졌다.
-아무래도 이것들, 널 죽이려는 게 아니라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냥, 살려만 둬서.
요그의 속삭임을 들으며, 이안은 오른발을 치켜들었다. 상반신만 남은 해골이 양팔로 땅을 기어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발목으로 팔을 휘두르기 직전이었다. 덩치 큰 놈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하고 발목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콰직, 짓밟힌 두개골이 박처럼 박살 났다. 부스러지는 뼛조각 사이로 청록색 연기가 번쩍이며 흩어졌다.
이것들이 약해서 계속 일격에 부서지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안은 힘 조절이 불가능했다. 모든 공격이 전력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방금만 해도 땅에 움푹, 깊은 발자국이 새겨질 정도였다. 물론, 그런 만큼 매번 동작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고개 들어.
이어진 속삭임에, 간신히 다시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앞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때는 이미, 몸을 던지듯 달려드는 해골이 코앞에 있었다. 청록색 마력이 이글대는 손아귀를 앞으로 내뻗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