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90
090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은 상태 창과 스킬 창을 차례로 확인했다.
추가 포인트가 들어와 있었다.
퀘스트가 아닌 레벨 업으로 포인트를 얻었다는 사실에, 어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작은 기쁨이 샘솟았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찰나에 불과한 감흥이었다.
“…….”
모든 창을 닫으며 군단장의 시신을 지나친 그는, 놈이 앉아 있던 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왕의 왕좌가 그러했듯, 특별할 것 없는 의자였다.
상형 문자와 기호, 도형으로 이루어진 고대 주문 회로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내부에서 여전히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지하 궁전이랑 동력원이 같은 건가…?’
이안은 새삼,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 보이는 마력의 원천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는 몰라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력의 황혼기인 지금은 더더욱.
‘용의 힘을 쓴댔지… 설마 정말 용이 동력원이기라도 한 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추측은 그것뿐이었다.
용은 살아 있는 마력 덩어리 같은 존재였으니까. 오래 산 용의 유해 같은 것에서 마력을 뽑아내고 있는 거라면, 이런 유적을 천 년도 넘게 유지시킬 수 있으리라.
‘언젠가 용과 싸워서 이기게 된다면… 반드시 그놈의 마력의 근원을 찾아내야겠군.’
마력의 제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세계가 끝나는 순간까지 살아남는 것도 더 이상 막연한 목표는 아닐 터였다.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용의 근원을 손에 넣어도 그걸 그가 사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의자에서 더는 건질 게 없다는 걸 확인한 이안은, 주변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군단장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영혼은 물론 품고 있던 마력까지 모두 잃은 군단장은, 아주 오래된 미라처럼 변해 있었다.
“흐음….”
절그럭, 이안은 놈의 허리춤에서 쌍검을 분리해 냈다.
거의 그의 키만 한 칼이었다.
날이 끝부분에서 살짝 휘어지는 외날 검.
심지어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군단장의 대검.
‘인간에겐 양손 검이다, 이거지.’
무려 유일 등급. 몇 가지 능력치 보정에, 냉기 칼날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면이 넓적한 날을 검집에서 뽑아 쥐어 본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검집에 되돌렸다.
억지로 쓰라고 한다면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몸처럼 휘두르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걸로 누굴 후려친다면 베는 게 아니라 때려죽이는 것이 되리라.
‘비슷한 걸 무슨 만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검 하나를 아공간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두 개를 다 넣을 수는 없었다.
사실 검의 크기를 봐선, 하나라도 들어가진 것이 기적이었다.
다음은 전투 망치였다.
이건 도저히 인간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군단장조차 양손으로 쥐고 둔중하게 휘둘러 대던 물건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도 정보를 볼 수 있다고…?’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군단장의 전투 망치. 유일 등급이었고, 충격파 스킬이 옵션으로 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걸 대체 누가 쓸 수 있단 거지. 거인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획득 가능한 전리품은 그 정도였다. 갑옷은 정보 확인도 불가능했고, 벗겨 봐야 쓸 수도 없었다.
정수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생한 보람이 없진 않네. 왕관에 단검에 대검에, 스킬 포인트에….’
거기다 혼돈의 파편도 커졌고, 군단장을 죽인 보상으로 냉기 저항력도 조금 올랐다.
추가적인 저항력은 스킬 포인트보다도 드문 보상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챙겨 가야겠지.”
이안은 군단장의 잘린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비쩍 말라서인지 덩치에 비해선 작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들고 다닐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봉인함에 잘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군단장의 머리를 양손에 든 이안이 중얼댈 때였다.
“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테사이아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눈을 끔뻑이는 그녀의 표정은, 말 그대로 얼떨떨해 보였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주위를 돌아보던 그녀의 시선이, 이윽고 이안에게서 멈췄다.
“멀쩡해 보이는군.”
이안이 내뱉었다.
크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목소리가 웅웅 울리면서 번져 나갔다.
“그러게.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야.”
그녀가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즉사하고도 남았을 상태였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이안을 잠시 바라본 테사이아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 머리는 왜 들고 있는 거야, 이안?”
“전리품으로 들고 갈 거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테사이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거, 샬롯한테 배운 거야?”
“…….”
***
“뭐, 그래도 아예 은혜를 모르는 짐승은 아니네.”
이안이 봉인함에서 꺼내 건네준 옷을 걸치면서,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눈을 뜨자마자 어떻게 된 거냐며 떠들어 댄 그녀는, 결국 이안의 입에서 그 후의 전말을 끄집어냈다.
물론 아주 간소화된 얘기였지만.
테사이아는 또다시 그것만으로도 한참을 떠들어 댔다.
아예 적막한 것보다는 나쁘지 않아서,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으쓱이는 식으로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부지깽이로 쓰던 단죄의 검 검날을 더러운 천으로 닦아 내면서.
티르 엔의 신도들이 봤다면 참담한 심정이 되었을 행동이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랑 함께 다니려면 목숨이 두어 개여도 부족할 것 같아, 이안.”
테사이아가 문득 말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악의 없는 얼굴.
“그렇잖아. 타락자에 마물에 마족에… 이젠 네 손으로 고대 거인인지 뭔지 하는 것들까지 죄다 죽여 버렸으니까.”
“마족은 내가 아니라 널 따라온 놈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만… 이러다 언젠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아니라, 여기 이 야옹이가.”
테사이아가 잠든 샬롯의 종아리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샬롯은 입맛을 한 번 다셨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테사이아를 바라보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그래서, 후회하냐?”
“뭘 후회해?”
“날 따라온 거.”
“그건 아니야. 그러지 않았다면, 난 이미 예전에 루 사드로 끌려갔을 테니까.”
“…….”
이안은 그녀가 애초부터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스스로 심판자를 이겨 낼 힘을 키울 수 있으리란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악점이 명확할 뿐, 어떤 의미론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었으리란 사실도.
그녀가 선택한 일이었고, 동시에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끝내 반드시 그의 손에 죽게 되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생존이란 측면에선 최악의 결말은 피한 셈이었다.
물론 끝까지 그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널 떠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안. 혼자서 저런 거인을 상대하는 전사… 아니, 마법사… 아니, 아무튼. 대륙에 너보다 강한 존재가 과연 있을까 싶거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그래도 뭐, 네 뒤에 잘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긍정적이군. 어떤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미래는, 루 사드로 다시 잡혀가는 게 아니라 네가 내 목숨을 노리는 거야.”
테사이아가 차분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난 네가 제일 무섭거든. 물론, 제일 맛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편하게 욕망을 억누를 수 있지.”
약발이 잘 먹힌다니 다행이군.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당장은 저 문밖에 있는 것들부터 무서워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린 아직 유적을 나간 게 아니니까.”
“…문밖?”
테사이아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밖에, 뭐가 더 있어?”
“봐서 알겠지만, 저놈은 군단을 이끄는 대장이었다. 그런 놈이 혼자 이곳에 묻혀 있었을 리가.”
“…….”
테사이아의 입이 벌어졌다.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또 목숨 건 싸움을 하게 될 수도 있겠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샬롯이 푸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직 반나절까진 안 된 것 같은데.”
이안의 말에,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쉬었다.”
“뭐라는 거야. 살이 쪽 빠졌는데.”
테사이아가 비웃듯 말했다. 그녀를 슬쩍 돌아본 샬롯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머, 샬롯. 그게 전부야? 내가 또 네 목숨을 구했는데?”
“네 입가에 묻은 피가 누구 것일지 생각해라. 그만하면 빚은 충분히 갚은 것 같은데.”
이안은 군단장의 머리를 봉인함에 담아 아공간에 넣었다.
움직일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일행이 높다란 대문 앞에 섰다.
질렸다는 듯 문을 올려다 보면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이제 거인이라면 지긋지긋해. 다신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그 부분은 나도 동감이야.”
내뱉으며, 이안은 대문을 힘껏 밀었다.
테사이아의 염원 덕분인지, 이어진 방마다 놓인 석관들은 단 하나도 움직이거나 열리지 않았다.
군단장을 잃은 거인 군단은, 끝내 깨어나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데.”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몇 시간 후.
쿠구구구….
느릿느릿 열리는 대문 너머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폐를 얼릴 듯한 한기도.
“햇빛이 반가운 날이 있을 줄은 몰랐어.”
망토의 두건을 눌러쓰면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문밖으로 나서며 샬롯이 피식댔다.
“마족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소릴 하는군.”
“입들 다무는 게 좋을 거다.”
이안이 말을 잘랐다.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며, 그가 덧붙였다.
“여기서 무사히 내려가려면, 말할 힘도 아껴야 할 테니까.”
아공간에서 설표 망토를 꺼내 목에 두른 이안이, 유적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흰색과 검푸른 색으로 뒤덮인 험준한 산이, 거친 바람과 혹한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
“후….”
소년, 아스켈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슬슬 숨소리를 조심해야 할 시점이었다. 귀 밝고 겁 많은 짐승들을 죄다 쫓아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깨에 걸치고 있던 활을 꺼내 들면서, 아스켈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앙상한 나무와 바위, 창백한 눈이 덮인 산기슭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둘러야겠네.”
눈을 한주먹 문 그가 읊조렸다.
이른 아침에 마을을 나섰건만.
어느새 해가 중천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제 꿈이 좋았으니까. 오늘은 허탕은 아닐….’
생각하던 아스켈의 고개가, 득달같이 계곡 위로 돌아갔다.
버석대는 발소리들이 귓가를 스쳤기 때문이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아스켈은 판단과 동시에 움직였다.
근처의 바위 뒤로 달려간 그는 재빨리 퇴로를 살피고, 몸을 숨긴 채 계곡을 노려보았다.
곧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아스켈의 눈이 커졌다.
짐승이 두 발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는 늑대 털로 만든 망토를 두르고, 그 아래로는 인간처럼 갑옷까지 걸치고 있었지만.
갈기가 풍성하게 돋은 얼굴은 분명 육식동물의 그것이었다.
저건 가면 따위가 아니었다.
두 발로 걸으며 사람 말을 하는 짐승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아스켈이, 속으로 탄식했다.
‘마족…!’
그 옆에 걷는 회색 머리칼의 여자도 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핏기없는 창백한 피부. 끝이 삐죽 튀어나온 귀. 심지어 이 산속을 맨발로 걷고 있었다.
앞장선 흑발의 남자는 인간 같았지만,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
사람 가죽만 뒤집어쓴 것처럼.
결정적으로, 저긴 산맥 쪽이었다.
산맥에서 온 자들이 평범한 인간일 리 없었다.
‘어떻게 대낮부터 돌아다니는 거지…?’
생각하며, 아스켈은 바위 뒤에 바싹 몸을 숙였다. 숨을 느리게 쉬면서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저벅- 저벅-
괴인들의 발소리가 아스켈이 숨은 바위 근처를 지나쳤다. 숨을 참고 있던 아스켈은, 그들이 지나치고 나자 비로소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두 괴인이 멀어지고 있었다.
‘…둘?’
아스켈이 굳어졌다.
“도적이라도 있는 건가 했더니.”
위에서 그르렁대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 직후였다.
“헉…!”
숨을 삼킨 아스켈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었건만.
어느새 그 새카만 마족이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주황색 눈동자 한복판.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아스켈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여기 숨어서 뭘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