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203
1202
그리칼레의 소멸로 무(無)의 세계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고, 태풍은 자취를 감추었다.
태풍은 프로아 제국의 국경선을 약 150킬로미터 앞두고 사라졌다.
그렇다는 말은, 태풍이 마우레키온 제국의 서쪽 지역만을 초토화시킨 후 사라졌단 이야기가 되었다.
즉, 태풍의 방향을 바꾸어 프로아 제국을 멸망시키겠단 마우레키온 제국의 음모가 결국 박살이 난 것이다.
그것도 프로아 제국은 피해를 전혀 입히지 못한 채로, 오직 마우레키온 제국만 막대한 손해를 입은 꼴이었다.
만약 태풍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바꾸었더라면 피해가 적었을 텐데, 일부러 프로아 제국이 있는 서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마우레키온 제국만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서쪽에는 마우레키온 제국의 금융 중심지가 되는 대도시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이번 태풍으로 인해 초토화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슈트카르트 황제는 갑작스레 올라온 보고를 받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깜짝파티라도 하는 건가? 짐의 권태로움을 달래주기 위해서?”
슈트카르트 황제는 세계 최강대국의 군주답게,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단지 이 황당무계한 보고에 유감을 드러냈을 뿐….
“폐, 폐하….”
반대로, 나이델베르크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후들후들!
나이델베르크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제국의 2인자?
심기 불편한 슈트카르트 황제 앞에서,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였다.
나이델베르크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슈트카르트 황제는 자신의 혈육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렸을 정도로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런 슈트카르트 황제가 분노했으니, 나이델베르크가 공포에 떠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슈트카르트 황제는 황위에 오른 직후 단 한 번도 엿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엿을 먹어보기는커녕, 뭔가 일을 진행함에 있어 실패해본 적조차 없었다.
슈트카르트 황제는 지난 20여 년 동안 언제나 완벽했고, 하고자 했던 모든 걸 순조롭게 이루었다.
그런 슈트카르트 황제로서는 이번 의 실패가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마우레키온 제국이 일방적인 손해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인가.”
슈트카르트 황제가 다시 물었다.
“그, 그러하옵니다. 존엄하신 폐하.”
나이델베르크가 바짝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잘 나아가던 태풍이 프로아 제국을 150킬로미터 앞두고 사라졌다…?”
“폐하….”
“어떻게 생각하나.”
슈트카르트 황제가 물었다.
“그, 그것이….”
나이델베르크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가 나선 게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그가 태풍마저도 잠재웠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자연적으로 사라졌다고밖에 볼 수 없사옵니다. 허나 그 태풍은 고대던전의 폭주로 인해 생성된 것이니만큼, 자연적으로 사라졌을 가능성은 없사옵니다.”
“결국 또 그라는 거군.”
“예, 폐하….”
“덕분에 짐이 이렇게 손해를 보게 된 것이고?”
“폐하….”
“하하하.”
슈트카르트 황제가 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외통수를 맞았기에, 그저 황당해서 웃은 거였다.
황위에 오른 후 실패 비슷한 것조차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분노보다는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의 실패는 또 다른 손해를 낳았다.
마우레키온 제국은 프로아 제국이 멸망할 줄 알고, 그곳에 주둔 중이던 제8군단을 철수시켰다.
본래 프로아 제국을 침공할 때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려던 병력들을 뺀 것이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제8군단을 다시 파견할 수도 없으니, 아주 꼴사납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이델베르크.”
“예, 폐하.”
“이번 실패는 특별히 용서해줄 것이다.”
“성은이 망극, 또 망극하옵니다!”
나이델베르크는 슈트카르트 황제가 자비를 베풀자 바닥에 연신 머리통을 세게 내리찍으며, 은혜에 감사했다.
그만큼 슈트카르트 황제의 권위는 높았고, 권력은 무소불위였다.
2인자인 나이델베르크조차 벌벌 떨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번에는 우연찮게 진행했던 작전이니, 정상 참작을 해주겠다. 하지만 다음번엔 달라야 할 것이다.”
“예, 폐하.”
“새로운 공작을 준비하라.”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폐하!”
그렇게 슈트카르트 황제는, 나이델베르크에게 프로아 제국을 압박하여 무너트릴 계략을 명령하면서 회의를 끝마쳤다.
***
한편, 이건은 지크와의 재대결에 앞서 폐관 수련을 하다가 소식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개똥도 쓸 데가 있다더니.”
이건은 지크가 살아남은 게 반가웠다.
지크가 예뻐서?
그럴 리가.
이건은 지크가 망하길 그 누구보다 원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이건은 지크가 마우레키온 제국과 신나게 치고받고 싸우다가, 함께 망하기를 바랐다.
당장 싸움을 걸어서 지크를 쳐부술 자신이 있었음에도, 굳이 거리를 두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마우레키온 제국과 싸우라고.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내가 될 테니까. 큭큭큭.”
이건은 그렇게 혼잣말하며, 프로아 제국이 무사하단 소식에 기뻐했다.
***
태풍을 잠재운 지크는 즉시 프로아 제국으로 귀환했고, 크반트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땅! 따앙!
언제나 그렇듯이, 크반트의 대장간에는 망치질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후후후.’
지크는 대장장이들에게 쉿!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하고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크반트의 뒤로 다가갔다.
땅! 따앙! 땅! 땅!
크반트는 망치로 정체 모를 금속을 두드리는 데 집중하느라 지크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지크는 그런 크반트의 등 뒤에서, 그의 눈을 가렸다.
“……?”
의아해하는 크반트.
“누구우~ 게에~?”
지크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크반트가 지크의 목소리를 단숨에 알아듣고는 말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
“음?”
지크는 돌아선 크반트가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듯 정색을 하자 살짝 당황했다.
“재, 재미없었습니까?”
“…….”
“죄, 죄송….”
“어쩐 일이십니까.”
크반트가 지크에게 물었다.
‘뭐지? 무슨 일 있으신가?’
지크는 크반트가 평소와는 다르게 기분이 언짢아 보이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크반트는 성격이 매우 밝은 편이라서, 지크가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 건네도 늘 껄껄 웃으며 받아주곤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지크가 크반트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심기가 불편하신 거 같은데요?”
“별일 아닙니다.”
“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크반트는 확실히 평소보다는 어두웠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무슨 일 있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정말 아무 일 없습니다.”
“정말로요?”
“그저….”
크반트가 다소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장장이로서 벽에 부딪힌 기분이라서 그렇습니다.”
“음?”
“망치를 쥐고 산 지가 어언 150년인데, 요즘 들어 한계를 느낍니다. 과연 제가 대장장이로서 더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고나 할까….”
크반트의 고민은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거였다.
예컨대, 마치 오랜 세월 무(武)를 갈고 닦아온 무인이 에 부딪혀 고뇌하고 절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크반트 역시 딱 그런 상태인 모양이었다.
“요즘엔 영감도 잘 떠오르지 않고… 꾸역꾸역 현상 유지만 하는 느낌입니다. 허허허.”
게임 속 세상인 뉘르부르크 대륙의 대장장이들은, 단순한 대장장이가 아닌 종합예술인에 가까웠다.
아이템을 만드는 일은 쇠를 다루는 기술부터 재료를 가공하는 기술, 세공술, 조각 등등의 여러 가지 예술적인 능력치가 필요했다.
그러니 영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 충분히 나올 법한 것이다.
“아. 그렇군요.”
지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할 게 없겠는데요?”
“예?”
“제가 영감이 팍팍 떠오르게 만들어드릴 거거든요.”
“허허.”
크반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폐하, 영감이란 것은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심오한 정신적….”
바로 그때.
“이게 뭘까요?”
지크가 을 크반트에게 들이밀었다.
“음?”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지크가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보세요. 직접.”
“으음!”
크반트는 지크의 말에 과 비슷한 기능이 담긴 안경을 꺼내 을 비추어보았다.
지크가 내민 을 감정해보려는 것이다.
그로부터 약 3초 후.
“……!”
크반트의 눈이 크게 떠짐과 동시에 이 땅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놀란 크반트가 그만 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히익?!”
지크가 반사신경을 발휘해 땅에 떨어질 뻔했던 을 가까스로 받아내었다.
“으악!”
만약 이 땅에 떨어져 깨지기라도 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프로아 제국의 수도 프로이센 한복판에서 거대한 태풍이 생성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폐, 폐하…!”
크반트가 너무나도 놀라서, 지크에게 말했다.
“태, 태풍… 태풍의… 누, 눈을….”
얼마나 놀랐느냐 하면,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만큼 을 확보한 건 크반트에게 있어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비머리언 공방에서 수백 년 동안 갈망하던 세계 등급의 무기를 제작할 마지막 열쇠를 가져왔으니, 크반트로서는 인생에 다시없을 큰 이벤트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헤르베르트의 미완성 유작을….”
거기까지.
털썩!
크반트는 놀라움이 넘쳤는지 그만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헤르베르트의 미완성 유작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단 사실이 너무나도 기쁘고, 또 놀라워서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
그로부터 2시간 후.
“맙소사… 헤르베르트의 유작을….”
깨어난 크반트는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떨떨해 했다.
“이제 좀 영감이 떠오르세요?”
지크가 웃으며 크반트에게 물었다.
“설마 이 정도로도 부족한 건 아니겠죠?”
“그, 그럴 리 있겠습니까!”
기절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에 부딪힌 사람처럼 우울해 보였던 크반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생기가 넘쳐 보인다고나 할까?
하기야, 잔뜩 흥분한 상태이니 생기가 없어 보이면 그게 더 이상하기도 했다.
“잘 제작해주실 수 있죠?”
지크가 크반트에게 물었다.
“저 이거 다 모으는 데 거의 4년 걸렸어요. 고생한 만큼, 결과물이 좋았으면 합니다.”
“아무렴! 믿고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세계 등급의 무기를 제작해서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크핫핫핫핫~!!!”
“기대할게요.”
크반트가 잔뜩 흥분한 만큼, 지크 역시 기대감이 엄청나게 컸다.
이제 곧 세계 등급의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천하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세계 등급의 무기를 손에 넣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 되는 무기를 가지고도 누군가에게 패배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무능하기 짝이 없는 꼴일 테니까.
“그럼, 저 갑니다.”
“예, 폐하. 제작 상황은 틈틈이 보고 드리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괜히 건강을 해칠까 걱정되네요.”
“아닙니다! 우리 공방의 숙원을 이루는 일인데, 지칠 리가 있겠습니까! 크핫핫핫핫!”
“보기 좋네요. 아무튼, 저 진짜 가요.”
“예! 폐하!”
그렇게 지크는 크반트에게 전설의 대장장이 헤르베르트의 미완성 유작을 완성하란 지시를 남기고, 비머리언 공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