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77
176
쟁탈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계속 쫓아다녔다간 내가 먼저 뻗겠는데?’
거의 한 시간 동안 성궤를 쫓아다니던 지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쟁탈전에서 잠시 이탈해 풀숲에 몸을 숨겼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성궤를 놓고 계속 싸워 댔다가는 자칫 사망해 이 쟁탈전에서 탈락할 수도 있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킁킁! 주인 놈아! 여기 있었냐! 햄찌가 다 주워왔다!”
“헉헉… 전하… 제발 천천히 좀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헉헉….”
지크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햄찌와 그랭구아르가 합류했다.
“쉿.”
지크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조용히 좀 해봐.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보게.”
햄찌와 그랭구아르에게 주의를 준 지크는 그저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 결과.
히든 클래스가 담긴 는 약 세 시간 만에 무려 31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기염을 토했다.
“다들 미쳤구나… 하하하, 하하하하!!”
그 과정들을 모두 지켜본 지크가 반쯤 질렸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지크뿐만이 아니었다.
“탐욕이란 무서운 거다… 뀨우.”
“마치 좀비들의 아귀다툼을 보는 것 같군요.”
햄찌와 그랭구아르 역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쟁탈전은 치열했다.
그 짧은 순간 무려 31명이 죽었고, 땅바닥에는 그들의 시체와 떨군 랜덤 드랍 아이템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나도 저랬겠지.”
지크는 아귀다툼을 벌이는 게이머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크프리트가 아닌 태성은 저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달랐다.
만약 듀얼 클래스로 히든-히든을 이룬다면 사상 최강, 최악의 게이머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러나 지금의 지크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네시스 길드, 특히 길드 마스터인 채형석이 성궤를 차지하지 못하게 막는 거였다.
‘제일 좋은 시나리오는 내가 성궤를 먹는 거고… 차선책은 누가 먹더라도 채형석만 안 먹으면 되는 거니까. 일단은 지켜보는 게 최선이긴 해. 지금 말려들었다간 뼈도 못 추려.’
어떻게든 저 아귀다툼에 끼어들었을 태성과는 다르게, 지크프리트는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판단할 줄 알았다.
‘점점 더 몰려들 거다. 쟁탈전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무조건 버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먹고 날라야 돼.’
일단 큰 그림을 그려놓은 지크가 햄찌를 돌아보았다.
“햄찌야.”
“뀨?”
“너 혹시 견과류 가진 거 있냐?”
“당연히 있다!”
“좀 꺼내 봐.”
“뀨우?”
“아. 좀 꺼내 봐.”
지크가 재촉하자 햄찌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주머니-순간 지크는 햄찌가 가죽을 벗으면 그 안에서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를 주섬주섬 뒤적여 각종 견과류가 잔뜩 든 봉지를 꺼냈다.
“여기 있다. 근데 뭐 하려고 그러냐?”
“뭐 하긴.”
지크가 견과류 봉지를 집어 들고는 아몬드 하나를 꺼내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먹으려고 그러지.”
“뀨, 뀨우?!”
“견과류나 씹으면서 구경이나 하자.”
“안 된다!”
“왜 안 되는데?”
“그거 햄찌 거다! 주인 놈 먹지 마라! 왜 뺏어 먹냐!”
“와. 너 치사하게 이럴래?”
“뭐가 치사하냐! 견과류는 햄찌 거다! 건들지 마라!”
“거 더럽게 치사하네….”
그때, 그랭구아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지크에게 내밀었다.
“전하, 드셔 보시겠습니까?”
“이게 뭡니까?”
“팝콘입니다.”
“파, 팝콘이요?”
“제가 캐러멜 팝콘을 좋아해서 평소에 조금 들고 다닙니다.”
“팝콘은 눅눅해지면 맛없는데….”
“마법의 주머니에 있던 거라 괜찮습니다. 드셔 보시죠.”
“그럴까요?”
지크가 캐러멜 팝콘이 든 봉지를 받아들고는, 햄찌에게 견과류가 담긴 봉지를 던져주었다.
“야. 치사해서 안 먹는다, 안 먹어.”
“그래라! 뀨!”
햄찌가 견과류를 든 봉지를 소중히 끌어안고는 털을 곤두세웠다.
“아, 그리고 그랭구아르 사관님.”
“예?”
“죄송하지만 본국에 좀 다녀오셔야겠습니다.”
“본국에요? 하지만 저는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이건 국익이 걸린 아주 중대한 일입니다.”
“저 성궤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입니까?”
“예.”
“그럼, 신 그랭구아르. 전하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랭구아르 사관님.”
“별말씀을….”
“지금부터 제가 얘기해 주는 내용을 미켈레에게 전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하시지요.”
“그게 그러니까….”
지크가 그랭구아르의 귓가에 미켈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속삭였다.
***
그랭구아르가 떠난 후로도 쟁탈전은 계속되었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여덟 시간.
필드에 어둠이 아스라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지만, 성궤의 주인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얼마나 많은 게이머의 손을 거치고 또 거쳤던지, 지크는 성궤를 잠시나마 차지했던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를 새는 걸 아예 포기해 버렸다.
지금도 마찬가지.
지크가 최초로 쟁탈전을 목격한 후 무려 열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성궤의 주인은 바뀌고 있었다.
“악!”
이름 모를 제네시스 길드원이 쓰러지고.
“지독한 새끼들….”
역시나 이름 모를 제네시스 길드원이 으르렁거리며 성궤를 주워들려던 순간.
화르륵, 퍼엉!
어디선가 날아온 마법이 성궤를 줍던 이름 모를 제네시스 길드원을 통구이로 만들어버렸다.
쿠웅!
성궤가 또다시 땅바닥에 떨어지던 순간.
“……!”
“……!”
“……!”
“……!”
“……!”
풀숲을 뛰쳐나온 다섯 명의 게이머들이 성궤를 가운데 두고 딱 마주쳤다.
그들은 모두 풀숲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뛰쳐나온 이들이었다.
마치 지크처럼.
물론 지크와 다른 점이라면 그새를 못 참고 섣불리 뛰쳐나오는 바람에 1:1:1:1:1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주, 죽어!”
“이런 개 같은!”
“죽어 보자, 이 새끼들아!”
“꺼져!”
“어딜 손을 대!”
잠시 서로를 보고 굳어버렸던 다섯 명의 게이머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실력도 없는 X밥 새끼들이 히든 클래스는 뭔 얼어 죽을 히든 클래스냐?”
누군가 비아냥거림 가득한 말을 뱉어내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v지존헤샷v]•존재 구분 : 모험가
•레벨 : 245
•클래스 : 슈팅스타
•칭호 : 별을 쏘는 자 / 반짝반짝★ / 숙련된 명사수
ID가 심각하게 중2병스럽긴 했지만, 일부러 그런 컨셉을 노리고 만든 사람 같았기에 굳이 딴지를 걸 필요는 없었다.
관건은 레벨.
지존헤샷은 245레벨로서, 195레벨인 지크보다 무려 50이 높았다.
또, 현재 쟁탈전을 벌이던 다섯 명의 게이머들보다도 높았다.
진짜 고레벨 게이머가 등장한 것이다.
“다 뒤져.”
그렇게 말한 지존헤샷이 양손에서 마나로 이루어진 에너지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팡, 파앙, 팡, 팡, 파앙!
슈팅스타라는 클래스답게, 마치 별빛처럼 반짝이는 에너지 탄환들은 쟁탈전을 벌어진 게이머들의 머리통을 차근차근 박살 냈다.
압도적인 데미지.
과연 고레벨다운 딜링이었다.
“다들 잘 들어라. 이거 내가 먹을 테니까, 불만 있는 새끼는 기어 나와.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한 번 패기를 발산한 지존헤샷은 아무도 나오지 않자 발걸음도 당당하게 성궤를 향해 걸어가 그것을 등짝에 둘러맸다.
“따라오는 새끼들은 다 뒤질 줄 알아. 대갈빡 부숴버린다.”
그렇게 말한 지존헤샷이 가벼운 뜀걸음으로 수십 구의 시체와 랜덤 드랍 아이템이 쌓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기회를 노리던 자들이 결코 얌전히 있지 않았다는 것.
스륵, 스르륵!
풀숲 곳곳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추격.
지존헤샷이 워낙에 고레벨이라 대놓고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결코 그냥 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 것이다.
마치 먹잇감을 물고 가는 사자를 뒤쫓는 하이에나들처럼….
“햄찌야.”
“뀨우?”
지크의 부름에 졸고 있던 햄찌가 눈을 비볐다.
“지금 풀숲에 숨어서 움직이는 게 몇 명이나 되는 거 같아?”
“한….”
햄찌가 귀를 쫑긋거린 뒤 대답했다.
“정확히 42명이다.”
“아직 안 움직이는 건?”
“일곱 명이다.”
축생답게 햄찌의 감각은 마치 면도날처럼 예리해서, 숨어 있는 자들의 기척을 귀신같이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근데 주인 놈은 안 움직이냐?”
“내가 움직일 게 뭐가 있어. 어차피 멀리 못 갈 텐데.”
지크는 조금 더 기다렸다.
지존헤샷이 사라진 지 5분쯤 지났을까?
스륵, 스르륵.
풀숲에 숨어 있던 게이머 하나가 슥 하고 나타나는 것을 시작으로 또 다른 쟁탈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서 성궤를 잠시 차지했던 자들이 드랍한 랜덤 드랍 아이템들을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한 명… 두 명… 여섯 명… 일곱 명… 지금이다.’
숨어 있던 마지막 게이머까지 등장했을 때.
우웅!
풀숲을 나선 지크가 과 를 동시에 전개한 뒤 경쟁자들을 향해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부었고.
[알림 :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 악행이 아닌 PVP는 업보가 오르지 않습니다!] [알림 : 196레벨 달성!]지크는 일곱 명의 적들 중 다섯 명-두 명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었다-을 처치하고 레벨 업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룰루랄라.”
덕분에 경험치도 챙기고 거의 50개에 달하는 랜덤 드랍 아이템들도 챙기게 된 지크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주인 놈….”
햄찌가 그런 지크를 보며 생각했다.
“점점 더 약삭빨라지고 사악해지는 것 같다.”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줍자.”
“알겠다! 뀨-!”
지크와 햄찌가 땅에 떨어진 랜덤 드랍 아이템들을 줍기 시작했다.
***
경쟁자들을 처치하고 랜덤 드랍 아이템들을 모조리 주워 먹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알림 :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알림 :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중략)….
[알림 :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랜덤 드랍 아이템들을 모두 챙긴 직후.
[알림 :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알림 : 칭호의 효과로 인해 인벤토리 용량이 50kg 증가했습니다!]지크는 새로운 칭호를 획득하게 되었다.
[대머리독수리]랜덤 드랍 아이템을 500개 이상 주워 먹은 게이머에게 주어지는 칭호. (대머리독수리는 죽은 동물들의 시체를 주워 먹고 사는 스캐빈저(청소부) 계열의 맹금류입니다!)
•타입 : 칭호
•등급 : 유니크
•효과 : 아공간 인벤토리 용량 추가 +50kg
효과 자체는 꽤 쓸 만한 칭호였지만, 문제는 그 명칭.
대머리독수리란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자업자득.
랜덤 드랍 아이템을 하도 주워 먹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예. 저는 절륜한 왕에다 대머리독수리입니다.’
이미 이미지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더는 회복이 불가능했기에 자포자기해 버린 지크였다.
“주인 놈아? 갑자기 왜 그러냐? 우는 거냐?”
햄찌가 지크에게 물었다.
주르륵~.
무엇인가 또르르 흘러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알림 : 74구역의 보스 몬스터인 를 처치하셨습니다!] [알림 : 3개의 구역을 클리어해 귀환석을 획득하셨습니다!]민우로부터 히든 클래스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던 채형석은, 휴식마저 잊은 채 진행하던 던전을 마저 클리어하고 귀환석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어? 형님! 어디 가십니까!”
함께 던전을 돌던 제네시스 길드 소속의 운영진 중 하나가 채형석을 향해 물었다.
채형석이 귀환석을 획득하자마자 귀환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수고했어.”
채형석은 그렇게 말한 뒤 곧장 를 나서 가장 가까운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행선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대 신의 성궤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광기의 유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