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79
078
천우진과 승구가 와준 덕분에 태성은 짐 정리를 꽤나 빨리 끝낼 수가 있었다.
애초에 짐 자체가 별로 없었기에 정리할 것도 없긴 했지만.
“대충 끝났겠다, 바에 가서 와인이나 한 잔씩들 할까?”
천우진이 제안했다.
“그럴까?”
이재상 메카닉의 휴가로 아직 오우거의 설치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태성은 딱히 천우진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근데 나 와인 안 마셔 봤는데….”
태성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와인 별거 없어. 니가 먹어보고 맛있는 게 좋은 와인인 거다. 가끔 돈도 별로 없는 애들이 쓸데없이 비싼 거나 마시면서 와인이 어쩌니 저쩌니 궁시렁거리는데, 그거 다 개소리야. 불우이웃들의 허세지.”
리얼 부(富)를 이룩한 자의 말인지라 뭔가 설득력이 있었다.
“자산 5,000억 미만은 다 닥쳐줬으면 좋겠더라고.”
“졸부 보소?”
“졸부긴 하지. 대한민국에서 현금 제일 많은 졸부.”
“…….”
“빨리 움직이자. 백화점부터 들러야 하니까.”
“웬 백화점?”
“너 말야, 너.”
천우진이 태성을 가리켰다.
“내가 뭐?”
“쪽팔려.”
“쪽팔리다고? 내가? 왜?”
“옷 말야, 옷.”
그렇게 말하는 천우진의 시선은 목이 쭈글쭈글하게 다 늘어난 태성의 티셔츠를 향해 있었다.
“뭐 어때서.”
태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옷이 밥 먹여 주냐. 대충 가자.”
“안 돼.”
“왜 안 돼?”
“끝나고 클럽도 갈 건데 그 복장으로 갈래?”
“클럽도 가자고? 그럼 좀 그렇긴 한데….”
“쇼핑 갔다가 놀자.”
“그래.”
태성은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외모 관리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쇼핑가자는 천우진의 제안을 수락했다.
“캬! 우리 형님 판단 오지구요 지리구요! 안 그래도 너무 검소해 보이셨던 부분!”
승구가 태성의 쇼핑을 반겼다.
사는 집의 럭셔리함에 비해 태성의 옷차림이 너무나도 허름했기 때문이었다.
“가자. 백화점으로.”
“가시죠, 형님.”
천우진과 승구가 태성을 잡아끌었다.
“야, 근데 지금 좀 늦지 않았냐? 열 시인데? 문 닫았을 텐데….”
“상관없어.”
천우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는 24시간이야.”
“요즘은 백화점도 24시냐?”
“가 보면 알아.”
태성은 천우진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며 그가 모는 차량에 탑승, 잠실에 있는 L백화점으로 향했다.
***
‘나한테는 24시간’이라던 천우진의 말은 진짜였다.
오후 열 시.
정상적인 백화점이라면 진작에 문을 닫았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천우진에게는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일반 고객은 절대로 이용할 수 없는 문 앞에서 직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돈 벌면 이렇게 되려나?’
태성은 굳이 이러한 서비스가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부자가 된다면 이렇게 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벌어 보면 알겠지만.
“맘껏 쇼핑해.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내가 거지냐? 내 돈으로 사.”
태성이 천우진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준다는 데도 싫어?”
“돈 벌고 첫 쇼핑인데 얻어먹을 수 있나. 내 돈으로 살 테니까 넌 퀘스트나 줘. 뭐 괜찮은 퀘스트 없냐? 있으면 좀 줘봐.”
“…당분간은 없다니까.”
천우진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이가 없었다.
명품관 쇼핑을 시켜 주겠다는데 거절하고 퀘스트나 내놓으라니… 천우진은 태성이 자신만큼이나 BNW에 미쳐 있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만큼 미쳐 있었으니 몰락 후 여기까지 다시 올라올 수 있었을 테지만.
“필요 없으면 얘 사준다?”
천우진이 승구를 가리켰다.
“그래. 승구야. 저 졸부가 오늘 너 쇼핑시켜 준다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맘껏 질러.”
“그게 정말이십니까?!”
태성이 떡을 돌리자 승구의 눈이 커졌다.
“뜯어먹을 수 있을 때 왕창 뜯어먹어. 쟤 돈 많으니까.”
“그, 그래도….”
승구가 머뭇거리자 천우진이 자신의 카드를 슥- 하고 내밀었다.
“자, 카드.”
“우진 형님!”
“맘껏 질러. 한태성이 싫다니까 한태성 몫까지. 한도는 없다.”
“예, 형님! 제가 오지게 한번 질러 보겠습니다!”
승구가 좋다고 천우진의 카드를 받았다.
그렇게 쇼핑이 시작되었다.
“이따 보자.”
태성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태성이 향한 곳은 남성복 브랜드가 아닌 여성 명품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샤넬’이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어머니 선물해드릴 가방 좀 보고 싶은데요.”
“이쪽으로 오세요.”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온 쇼핑에서, 태성의 선택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드릴 선물부터 고르는 것이었다.
***
쇼핑이 끝난 후.
“뭔데?”
“형님? 쇼핑하신 거 맞습니까?”
천우진과 승구가 태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양손으로 들어도 모자랄 만큼의 많은 쇼핑백을 든 그들에 비해 태성의 손에는 샤넬의 쇼핑백 두 개와 유니클로의 쇼핑백 한 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아, 이거.”
태성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 가방이랑 여동생 백팩. 선물하려고.”
“아니, 그거 말고. 그거 뭐냐고.”
천우진이 샤넬이 아닌 유니클로의 쇼핑백을 가리켰다.
“뭐긴. 내 옷이지.”
“명품 사라니까?”
“나중에. 인제 돈 벌기 시작한 주제에 명품질이 웬 말이냐? 난 이걸로 충분하다.”
“…….”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태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우진의 차 뒷좌석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휴.”
천우진은 태성이 정말로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
그날 밤.
태성은 천우진, 승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담 없이 가볍게 먹을 수 있을 만한 음식들과 함께 와인을 마셨고, 자리를 옮겨 위스키도 좀 마셨다.
그리고 클럽 헤븐으로 자리를 옮겨 쫙 깔린 샴페인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러다 보니 태성은 어느새 취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흔들흔들.
태성은 취했지만, EDM 사운드에 적당히 몸을 맡긴 채 클럽의 분위기만을 즐겼다.
여자는 필요치 않았다.
‘나도 이렇게 마음 편히 놀아 보는구나.’
그저 빚에서 해방돼 이렇듯 즐겁게 놀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았다.
그리고 딱히 태성에게 눈길을 주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클럽 헤븐은 늑대와 여우들의 전쟁터.
내면보다는 겉모습만이 중요한 이곳에서, 태성은 그리 특별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태성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태성으로부터 두어 걸음쯤 떨어진 곳.
한 여자가 태성의 옆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오전.
태성은 깨질 듯한 머리를 움켜쥐며 잠에서 깨었다.
“으. 얼마나 마신 거야.”
그만 필름이 끊겨버려서,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두 시간 동안의 기억이 흐릿했다.
문득 드는 기억이라고는….
[괜찮아요?]클럽 밖으로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는데, 어떤 여자가 살갑게 다가와 준 기억이 났다.
“왠지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태성은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필름이 끊겨버려서 ‘그녀’의 얼굴이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마신 거예요. 이리 와요. 여기, 저 잡아요. 영차!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어휴, 내가 못 살아. 집 어디예요? 데려다줄게요.]그나마 기억이 나는 건 ‘그녀’가 굉장히 예뻤다는 것과 술에 취해 힘들어하는 태성에게 매우 친절하게 굴었다는 게 전부였다.
왜일까?
온갖 셀럽들 사이에서 왜 하필 평범 그 자체인 태성에게 다가와 주었을까?
도통 모를 일이었다.
“설마 진짜로 날 데려다준 건가?”
태성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갈게요.”
저 멀리 현관 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태성이 소스라치게 놀라던 순간.
“누구긴요. 하룻밤 상대죠.”
“예?! 그, 그게 무슨 말씀….”
“걱정 마요. 아무 일 없었으니까.”
목소리가 태성을 안심시켰다.
“그쪽 데려다주고 나서 저도 좀 피곤했거든요. 잠깐 쉬었다 가는 게 다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옷 아직 입고 계시잖아요.”
“으음!”
확인해보니, 다행히도 어젯밤 입고 있던 셔츠와 바지가 그대로였다.
“휴!”
셔츠의 단추가 몇 개 풀어헤쳐져 있긴 했지만, 이만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말이 충분히 납득이 갈 정도였다.
“즐거웠어요. 그럼, 가볼게요.”
“저, 저기요!”
태성이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떠나는 정체 모를 여성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만을 남긴 채….
“뭐, 뭔데…?”
태성은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태성은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전화번호도 몰랐으니까.
아는 건 오직 목소리뿐.
그마저도 금방 잊어버릴 테지만.
위잉!
그때, 전화기가 진동을 울렸다.
[너 어디야?] [어제 왜 말도 없이 사라진 거냐?] [술 깨면 연락해라.]– 재수 없는 놈
[형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예쁜 아가씨랑 같이 나가신 겁니까? @.@] [걱정됩니다!]– 승구
천우진과 승구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으. 내가 미쳤지.”
태성은 어젯밤 과음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필름이 끊기고, 웬 아가씨의 에스코트를 받아 집까지 오게 되었을 줄이야….
의도치 않게 취중 만리장성(?)을 쌓지 않은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랄까?
아마도 오래간만에 마음 편히 놀다 보니 잠깐 긴장이 풀렸었던 모양이었다.
“근데 누구였지. 고맙단 말도 못 했는데. 휴.”
태성은 마치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린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는 취할 때까지 마시지 말자.”
원래 술을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었지만, 태성은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탕한 생활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
그로부터 두 시간 후.
“또 옮기셨군요. 하하하….”
태성의 캡슐 설치 담당 메카닉인 이재상이 집 내부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몇 개월 사이에 이사를 두 번씩이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많이 버셨나 봅니다.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반지하 원룸부터 이곳 고급 오피스텔까지.
이재상 메카닉은 태성의 집 변화를 쭉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부자가 되고 있는 거지?’
문득 태성의 월수입이 궁금해지는 이재상 메카닉이었다.
***
‘오늘부터 빡 사냥이다.’
지크는 오늘부터 영토 내의 던전들을 차례차례 클리어하며 레벨 업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전하!!”
그때, 오스칼이 다급히 다가와 지크에게 보고했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군복이 아닌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상태였다.
“아, 오스칼 경. 무슨 일입니까.”
아직 숙취가 채 풀리지 않은 지크가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북서쪽 야만 부족이 본국의 마을 세 개와 요새 한 개를 점령했습니다.”
“예?”
“전령에 의하면….”
그 순간.
콰앙!
굉음과 함께 지크의 집무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 뭔데!’
지크는 곧장 몸을 날려 무너져 내리는 집무실에서 대피하는 한편, 오스칼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저, 전하! 저기를!”
오스칼이 저 멀리 군주의 홀이 자리한 건물을 가리켰다.
“뭔데, 저건.”
지크가 황당하다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웬 녹색 드래곤 한 마리가 군주의 홀 지붕 위에 앉아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