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283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83화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쾌적했다.
전직 국가대표가 자주 가는 곳이라고 하길래 지옥의 바위 타기 같은 걸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여기 괜찮지?”
“예.”
나는 발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여긴 차로 한 시간 좀 안 되게 달려서 도착한 경기도 외곽의 등산로였다.
특별히 잘 정비되어 있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걸을 만했다.
‘…봐주는 건가.’
지난번 무인도 등산 때가 이놈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넌… 이미 후유증으로 체력이 떨어진 상태야. 예전이었으면 이 정도 등산은 그렇게 숨이 차지도 않았을걸.
여러 부분에 오류가 있는 추측이다만, 나는 굳이 반발하지 않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론 내렸다.
‘자존심보단 워라밸이지.’
다만 의아한 점이 있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별로 없네요.”
지금 시야에 장년층 몇 명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평일 낮이라도 이 정도면 등산하는 사람이 제법 보일만도 한데 말이다.
“아, 이 옆이 공사를 했었거든. 보여?”
류청우가 손으로 왼쪽의 작은 하천을 가리켰다.
그물과 공사 자재가 길을 따라 드문드문 놓여 있다.
“그래서 대부분 반대 방향으로 가시나 봐. 거기가 길도 더 잘 닦여 있다고 해.”
“아.”
“음, 애초에 동네 산이라 그렇게 사람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라더라. 약수터나 바위도 없어서.”
“잘 아시네요.”
“여기가 어릴 때 살던 곳이거든.”
류청우가 멋쩍게 웃었다.
“다니던 양궁장이 이 근처라 이사 간 뒤에도 계속 왔었어.”
“…….”
후유증으로 제대로 쏘지도 못하는 놈이 굳이 단골 양궁장 근처를 왔던 건… 됐다.
‘저놈이 지금 동정받을 처지도 아니고.’
나는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설이 괜찮은 곳이었나 봅니다.”
“그것보단 뭐, 추억이지.”
류청우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한 박자 늦게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에 애들이랑 와봐도 괜찮을 것 같아. 사장님이 친절하시거든.”
이걸 딱 잘라 거절하면 사회성을 불구덩이에 처넣은 놈일 것이다.
“그러죠, 뭐.”
“좋아.”
류청우는 빙긋 웃었다.
“투어가 끝나니까 우리가 따로 나가서 놀 일이 없었는데, 잘됐다. 너희가 며칠 전에 나갈 때도 나는 스케줄이 있었고.”
아. 그거 말이군.
나는 선아현의 생일 날짜에 맞춰 멤버 몇 명이 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류청우와 몇 명은 따로 스케줄이 있어서 못 갔던가.
“별거 안 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하하, 그런 것 치고는 인증샷까지 남겼던데?”
“…….”
나는 큰세진이 방탈출 후 남겼던 폴라로이드를 떠올리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테스타 우정 포에버☆ 5/7
아현아 생일 축하한다!
그게 그렇게 바로 인터넷에 글이 올라올 줄…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겠다만, 어쨌든 팬들은 좋아했으니 됐나.
“그거 남기고 바로 숙소 복귀했습니다. 사람이 몰려서요.”
“그랬구나. 확실히 이 직업이 보람은 있는데, 그런 점이 힘든 것 같아. 외출이 곤란해진다는 거.”
“그렇죠.”
나는 길을 따라 가볍게 뛰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이거 안 했어도 형은 마찬가지였을 것 같은데요. 양궁 국대면 뭐.”
“뭐? 하하!”
류청우는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웃음을 멈췄다.
“맞아. 그런 게 별로 적성에 맞진 않는데 말이야. 예체능은 어쩔 수 없나 봐.”
류청우의 말투는 한탄이나 투덜거림이 아니라 시원하게 들렸다. 뭐, 성공의 증거기도 하니까.
‘승자만 할 수 있는 고민이라 이거지.’
나와 류청우는 승자의 부작용 때문에 찾은 외곽의 등산로를 계속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후우.”
올라갈수록 경사는 가팔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 심호흡하다가, 꽤 키워둔 내 체력 바가 절반 이상 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정도면 무조건 성인 남성 평균 이상일 텐데.’
게다가 주변을 보니 아무래도 여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썩 없는 것 같다.
…더군다나, 달려서 올라가는 건 우리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속았다.’
평탄한 산책로부터 교묘히 각도가 가팔라져서 끓는 물에 잠긴 개구리처럼 계속 등산하게 만드는 거였군….
평탄한 등산로는 배려가 아니라 미끼던 것이다. 나는 신음을 참았다.
하기야 류청우가 바보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운동하는 걸 봤는데 당연히 체력이 늘었다는 걸 알겠지.
‘제대로 놀아났군….’
정상까진 안 봐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군소리해도 사회적 지위만 상하고 하산은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냥 입 닥치고 발이나 옮기기로 했다.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
‘운동 한번 거하게 한다.’
나는 묵묵히 위를 쳐다보며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어깨를 툭툭 치는 손이 느껴졌다.
“문대야, 저기.”
“후우, 뭘…….”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서 놈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
시야에는, 한낮의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구불거리는 산과 산성,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가는 하천과 빼곡한 건물 단지.
알록달록한 봄의 도시였다.
휙.
바람이 불었다. 산 공기가 코를 휘몰고 간다.
보기 좋았다.
“괜찮지?”
류청우가 느긋하게 말했다.
“더 올라갈 건 없어. 여기까지가 제일 잘 보이더라. …양궁 그만두고 이쪽 일 준비하면서 매일 올랐는데, 그때 알았어.”
“…….”
나는 풍경을 보면서, 난간에 걸터 섰다.
‘정상에 갈 생각이 아니었단 말이지.’
이거 참.
“어때? 좀 동기부여도 되고… 좋지 않아? 그냥 운동보다는. 나는 그랬거든.”
“네. 됩니다.”
나는 확답했다. 확보된 루트, 예상한 고난, 확실한 보상.
내 취향은 아니다만, 등산도 나쁘지 않은 취미일지도 모르겠다.
“음, 다행이네.”
나는 놈과 그렇게 난간에 기대어서 산 아래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충분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류청우는 입을 열었다.
“슬슬 내려갈까?”
“그러죠.”
기분이 썩 상쾌했다.
나는 스트레칭을 하려다가, 결국 등산로를 봤을 때부터 떠오르던 말을 내놨다.
“형.”
“응?”
“다 좋은데, 저는 무산소 근육운동을 해야 했는데요.”
“아.”
등산로 보자마자 거절하면 안 믿고 분위기 X 될 것 같아서 말을 안 했을 뿐이다.
류청우는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오르막이니까… 근력을 쓰긴 했을 거야.”
“…….”
합리화 한번 전문적이군. 알겠다.
나는 하산하며 특별한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그리고 류청우의 ‘가끔 뛰러 오자’는 말에 동의했다.
‘운동 강도도 적절하고, 룸메이트 된 김에 좀 해보는 것도 좋겠지.’
* * *
그렇게 방 바꾸기 2주 후.
우리뿐만 아니라, 새로 바뀐 방 주인들은 다 자신의 상황에 나름대로 적응했다.
“드실래요?”
“어, 그래.”
가령 배세진은 의외로 거실에 칩거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제 낮에만 차유진을 피해 나오는 정도다.
“밤에 좀 시끄럽긴 한데, 귀마개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어!”
배세진이 화색이 되어서 말한 적이 있다. 의외로 차유진은 룸메이트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잘 존중한다고.
‘미국인이라 그런가.’
물론 그것도 한계가 있다.
“가끔 게임이나 뭐 동영상만 같이 봐주면 잘 때는 조용히….”
나는 담담히 현실을 알려주었다.
“그거 오래 못 가요.”
“뭐?”
“말 거는 게 안 통하면 곧 어깨를 흔들 겁니다.”
“…….”
“야행성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배세진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방을 보았다.
그리고 나 홀로 독방이 걸린 놈은…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잘살고 있다.
“이야, 문대 청우 형이랑 절친 다 됐네~ 내일도 운동 가는 거지?”
오늘은 이 방인가. 나는 류청우의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을 하는 큰세진에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뭐… 룸메이트니까 겸사겸사. 가고 싶으면 너도 가든가.”
“에이~ 내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지! 운동 잘하셔요~”
“…….”
큰세진은 굳이 다른 말을 더 붙이진 않았으나, 무슨 뜻인진 모를 수가 없었다.
‘이 기회에 분위기를 아예 바꿔놓으라는 거지.’
그놈의 썸머 패키지 촬영 때 류청우에 대한 내 태도가 X 같았던 걸 아직도 되새김질하는 놈들이 있어서 말이다.
이번 룸메이트 배정 두고도 괜히 긁는 말 하는 것 같던데, 간신히 뭉쳐놓은 팬덤에 이런 불씨를 남겨둘 필요는 없다.
‘그냥 봐도 편해 보여야 해.’
어차피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마당에 동기부여까지 해주는 놈들이다.
나는 큰세진에게 손을 흔들고 씻으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등산로.
“오늘은 정상까지 오를래? 그냥 시험 삼아서.”
류청우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올라오는 동안 말이 없더니, 저걸 생각한 모양이지.
‘하긴, 한 번쯤은 올라봐도 괜찮겠지.’
느긋하게 야외로 운동 올 수 있는 기간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젠 정말 컴백 준비에 다시 매진해야 할 구간이다.
나는 남은 체력을 계산해본 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좋아.”
그리고 우리는 오후 4시. 어정쩡한 시간에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경사가 더 가팔라져서 굳이 뛰진 않았기에 할 만했다.
그렇게 사십 분쯤 더 올랐을 때.
정상이 보였다.
“후.”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류청우는 약간 더 속도를 내서 정상 표지까지 한 템포로 이동했다.
“후, 오랜만이네.”
류청우는 표지 옆의 나무 울타리를 잡고 섰고, 나도 그 옆에서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등산 첫날 류청우가 했던 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확실히, 거기가 더 잘 보이는 것 같긴, 합니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중턱에서 봤던 것만큼 근사하진 않았다. 물론 높은 만큼 압도감은 있다만.
“그래.”
류청우는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배낭에서 물을 꺼내서 마셨다.
나도 마찬가지로 내 것을 꺼내서 마시며, 잠시 평화로운 침묵이 흘렀다.
음, 확실히 전보다 편해졌는데.
“…….”
“문대야.”
“예.”
“뭐 좀 물어봐도 괜찮을까.”
“예, 뭐. 하시죠.”
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류청우는 풍경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작년 추석 때 가족 비디오 보고 말했던 그 사람, 문중에 몇 번 더 물어봤었어.”
“…!”
“그, ‘류건우’ 씨.”
물 마시다 사레들릴 뻔했다.
나는 얼른 물통을 내리고 가설을 세웠다.
‘설마 위치를 알았나?’
“혹시 행방이…?”
“음, 아니.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었어. 그냥… 그분의 과거사를 좀 듣게 됐을 뿐이야.”
“…….”
“본인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친가 쪽 여행에서 사고를 당하셨는데, 교통사고에 화재까지 겹쳤었나 봐.”
류청우는 한 번 쉬더니, 인위적일 만큼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전자가… 내가 후유증이 생기게 된 그 교통사고 같아.”
X발.
나는 별로 달갑지 않은 화제에 다시 물이나 들이켰다.
‘문중 놈들은 행방을 모르겠으면 그냥 모르겠다고 하고 끝낼 것이지.’
이런 걸 대체 왜… 돌겠네.
하지만 류청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문대야, 그거 알아?”
뭘.
“…너희 부모님, 교통사고가 아니야. 비행기 사고셨어.”
“…….”
뭐라고?
“사실 작년에 기사가 나가려다가 회사에서 막았어. 너한테 충격일 수 있으니까 나와만 잠깐 상의했고. 네가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거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넌… 교통사고와 화재 상황에 트라우마가 있지. 비행기가 아니라.”
류청우는 어느새 풍경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네가 찾던 류건우의 이야기야.”
“…….”
“문대야. 넌 대체 누굴 찾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