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284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84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니, 등산하느라 흘린 땀인데 상황 때문에 서늘하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X 됐으니까.
‘비행기 사고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정리… 정리부터.’
내가 박문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아볼 방법이 전무했다.
…이미 박문대는 원룸을 다 빼고 소지품까지 정리한 상태였으니까.
부모님 성함과 연령만 확인이 가능했는데, 혹시 몰라 거주 지역과 이름, 성으로 기사도 몇 번 검색을 돌려봤으나 아무 사고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큰 화제가 되지는 않을 만한 흔한 사건….’
교통사고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지 않나. 그러니 나도 누군가 그렇게 오해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가령 류청우.
-내가 교통사고 후유증 이야기 꺼낸 게… 배부른 소리 같았겠구나.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크고, 아니라고 해도 증명할 놈은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확률을 뚫고, 완전히 새로운 사고가 원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X발, 비행기 멀쩡하게 잘만 타고 다니고 스카이다이빙까지 했지.
“…….”
망할.
나는 아직도 입에 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물을 삼켰다.
수통의 물은 거의 비었다. 손목에 찬 전자시계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대답까지 지체 중인 시간이.
-똑딱.
‘변명이… 합리적으로 쓸 만한 게, 없다.’
사실상 진퇴양난이다.
교통사고와 화재, 류청우 사고에 대한 과민반응까지 모든 게 너무 ‘류건우’의 스토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니까.
그리고 어느 쪽이든, 이미 사실로 확인한 내용을 아니라고 해봤자 안 통한다.
‘지금 이놈도 거의 확신했어.’
저건 내 말과 행동, 박문대의 과거까지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는 것을 다 파악하고 몇 번 되새김질해 본 뒤에 꺼낸 이야기다.
나는 천천히 수통을 닫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류건우와 박문대.
-똑딱.
“…….”
그래.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설을 세우면, 하나 끌어낼 게 있긴 한가.
‘기억상실증에다 정신과 질병 하나 더 더하면 돼.’
바로 박문대가 류건우의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했다는 정신병리학적 설명.
‘류건우’에게 매우 큰 도움을 받아 감정적 교류가 많았기에,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혼동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로 변명하는 순간 그대로 병원행 아니냐.’
활동 중단 급이다. 이건… X발, 차라리 상태창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수준이다.
‘아니, 남한테 안 보이는 상태창 같은 게 있다는 설명을 하자고? 무슨 개소리야.’
이건 망상증 정도로만 오해받으면 다행일 거다.
‘어느 쪽이든 정신과 엔딩만 보이는군.’
다 기각.
-똑딱.
이 와중에도 시간은 가고 있다.
류청우는 안 봐도 아직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시선이 느껴지는 게 무슨 카운트다운이 따로 없다.
‘이 새끼 일부러 정상까지 데리고 왔구나.’
체력도 바닥났고, 다른 놈들도 없고, 상황을 무마할 다른 요소가 없는 데까지 몰아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머릿속에 딱히 기가 막힌 대책은 안 떠오른다.
‘X발, 떠오를 리가 있나.’
다 막혔구만.
-똑딱.
안 되겠다. 일단 지른다.
나는 ‘비행기 사고는 기억 안 났고, 그냥 폭발로 인한 불과 이동 중 사고라는 어렴풋한 이미지만 남아 오해를….’로 시작하는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라도 해보려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다른 놈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당사자다.
“말하기 곤란하면 어쩔 수 없지.”
“……!”
“내키면 말해줘.”
류청우가 평온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수통을 가방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가볍게 등을 돌렸다.
“그럼 내려갈까?”
“…….”
그걸로 끝이었다. 류청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입을 닥치고 놈을 따라 산 아래로 걸어갔다.
그러나 긴장감은 여전했다. 답변이 딜레이됐을 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게다가 이제 바로 대답하지 못한 이유까지 생각해 내야 한다.
‘미치겠네.’
그렇게 X나게 불편한 숙소 방 생활이 시작되었다.
* * *
그리고 며칠 후.
“너… 뭐 해?”
새벽 2시. 물을 마시러 나온 배세진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넘어질 뻔한 뒤 꺼낸 소리다.
“잠이 안 와서요.”
“그럼… 들어가서 누워 있으면 되잖아.”
“별로 안 내킵니다.”
배세진은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보았고, 나는 놈의 시선을 외면했다.
꼭 내가 자기랑 바통 터치한 꼴이니 기가 막히게 웃기긴 하겠군.
그러나 이 상황에 방에 들어가서 속 편하게 동시 취침할 만큼 신경 줄 굵은 놈이 있을지 궁금하다.
룸메이트에게 인생의 모순점을 오목조목 지적당한 뒤 답변까지 시간 말미를 받은 상황이라니.
그리고 며칠 동안 해당 화제를 언급도 안 하는 불길한 평온함이라니.
‘무슨 태풍의 눈도 아니고.’
차라리 저 미친놈이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며 깽판 치는 놈이 낫겠다. 대체 무슨 생각 중이지?
‘망할.’
나는 한숨을 참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래도 거실에서 아예 자버리면 너무 티가 나니, 머리가 좀 더 식어서 둔해지면 들어갈 생각이었다.
‘머리만 대면 잘 수준으로 시간 끄는 게 통하더라고.’
하지만 배세진은 좀 다른 생각을 한 것 같다.
놈이 오묘한 표정으로 내 꼴을 보더니, 뭔가 깨달은 얼굴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약간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박문대, 너 나랑 그… 방 바꿀래?”
야.
“아니, 내 방을 쓰기 싫다는 건 아니고 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까!”
“…….”
속 보이는군.
나는 좀 고민하다가, 한숨을 참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바꿀 생각은 없는데요.”
“…그래?”
“예. 뭐, 있다 보면 괜찮아지겠죠.”
괜찮아져야만 한다.
이 상태 그대로 서먹해진 다음에 컴백하고 컨텐츠 촬영하면 또 박살이다. 썸머 패키지의 악몽이 이렇게 빌드업되는 꼴일 뿐이지.
‘그러니까 해결을 보긴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류청우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나는 머리를 소파 위로 받쳤다. 입맛이 썼다.
배세진이 나온 목적대로 물을 한 잔 마시더니, 슬그머니 옆으로 왔다.
“큼, 류청우… 괜찮은 애잖아.”
“……예. 저도 알죠.”
“어, 그렇지. 너도! 괜찮은 애고!”
“…….”
누구 하나 깨겠다, 이놈아.
배세진은 귀가 벌게진 채로 볼륨을 낮추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야 좀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서로 안 맞는 사람도 있지만… 너희는 별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
“그냥 걔한테 불편한 점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 거실에 나와 있지 말고.”
나는 약간 뜸을 들인 다음, 피식 웃었다.
“경험에서 나온 조언 같은데요.”
“그래.”
화들짝 놀랄 줄 알았는데, 배세진은 의외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거실이 더 편해서 그런 건데, 넌 별로 거실이 편한 것 같지도 않아서.”
“…….”
“청우랑 잘 지내고 싶은 거잖아. 그러면 걔는… 좀 무던한 애니까, 그냥 말하면 들어.”
미안하지만 반대 상황이다. 그놈이 나를 불편해하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말해봤자 이놈한테 이해하기 난감한 상황만 들이미는 꼴이다.
그냥 잘 말해서 돌려보내자.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
“큼, 뭐, 그랬다면 다행이지. 잘 자라.”
“예. 형도 잘 주무세요.”
배세진은 어깨를 쫙 편 채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건 해결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형 노릇 했다 이건가.’
그걸 보고 있으니 희한하게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나는 웃다가, 문득 배세진이 말한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류청우는 그냥 말하면 듣는다…라.’
“…….”
나는 거실에 누워서 생각을 복기했다.
이번에는 ‘내가 해도 이상하지 않을 해명’을 찾는 데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대신 초점을 맞춘 것은 ‘류청우가 무엇을 들으려 했던 건지’다.
놈이 이 질문을 하기까지 겪은 일련의 일들을 시간순으로 정렬해서, 틀을 맞춰본다.
“…….”
그리고 몇 시간 뒤.
“후.”
결론이 나왔다.
좀 웃기다만, 배세진의 형 노릇은 정말 통했다.
나는 그날 녹음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류청우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 * *
내가 한 제안은 간단했다.
-목요일 아침에 운동 어떠세요.
-아침에?
-예. 저희 그때만 시간이 되던데요.
이제 시간을 컴백 준비하는 것에 다 쓰느라, 몸 관리는 주로 식단과 빠르고 격렬한 칼로리 소모성 루틴으로 돌아간다.
예상대로 느긋하게 운동할 시간은 없다는 뜻인데, 이 제안은 내가 일주일에 얼마 없는 식사 겸 쉬는 시간을 운동에 써버리겠다는 의미지.
류청우는 좀 의아하다는 눈치였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지.
그리고 약속 시간이 되어 운동을 나온 지금, 놈은 약간 놀란 것 같았다.
“여기로 괜찮겠어?”
“그럼요.”
바로 지난 몇 주간 지겹게 왔던 그 등산로였기 때문이다.
“가시죠.”
더 말할 시간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훅.”
이제 초여름에 가까워서 산은 더 더워졌다.
아침에 등산하는 사람은 있을 법했는데, 날씨 덕에 인원이 빠지며 여전히 한산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엿들을 놈이 없을 테니까.’
내가 발을 멈춘 것은 사람이 거의 없어진 산 중턱이었다.
물론 발을 멈춘 게 인적이 없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음?”
“말씀대로 정상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여기서 보는 게 가장 좋던데요.”
“아, 그래?”
류청우는 좀 멋쩍어 보였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울창해졌네.”
“그러게요.”
나는 잠시 장단을 맞춰 절경에 시선을 준 다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시간을 쟀다.
‘이쯤 왔으면 짐작했겠지.’
본인이 내게 질문했던 바로 루트로 오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줬으니까.
아니, 애초에 갑자기 내가 운동을 제안한 시점에서부터 짐작했을 것이다.
‘본인이 지적한 모순점에 대한 해답.’
아니나 다를까, 류청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만큼 정황에 딱 떨어지는 변명이 떠올라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생긴 게 아니다.
내가 지난밤에 배세진의 말을 듣고 떠올린 건 다른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없고… 해야 할 말은 있습니다.”
바로 당위성이다.
류청우에겐 이 의문에 대해 답변을 받을 만한 당위성이 있었다.
‘이놈은 내가 부모님 사고가 생각나는 것 때문에 자기한테 지랄하는 거라 납득하고 넘어갔었어.’
이후로도 갑자기 기억이 났다며 ‘류건우’를 찾는 내 행동에 반발 없이 협조했다. 단순히 본인이 친척이라 알 수도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내가 거기까지 오는 동안 했던 이유와 설명이 다 안 맞는 상황인 것이다.
‘안 빡친 게 용할 지경이야.’
이놈은 뭘 캐낸 게 아니었다. 휘말리다 보니 기만적으로 보이는 모순점을 눈치챈 것뿐이지.
‘솔직히, 여기서 적당한 변명 찾았어도 또 모순점이 나오는 순간 끝이고….’
그쯤 되면 그룹이고 나발이고 눈이 뒤집어져서 날 손절해도 이상할 건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이놈은… 상황을 다 파악하고도 꽤 오랫동안 타이밍 잡을 때까지 입 다물고 기다렸다.
아마 내가 체력과 멘탈을 회복할 시기까지.
‘굳이 정상에서 말했던 것도, 그냥 운동 좀 하며 리프레시한 뒤에 조용히 말해보자 이거였겠지….’
이건 악의도 참견도 아니었다.
그러니 최소한, 리셋이니 상태창이니 하는 비현실성을 제거한 진심만이라도 알려줘야겠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게 납득이 되냐는 별개겠다만.’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납득 될만한 설명은 없다. 그러니 사람이 X발 양심 있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나는 한숨을 쉰 다음, 천천히 말했다.
“형.”
“응.”
“지금… 말과 상황이 안 맞아 보일 수 있다는 건 아는데요.”
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내가 더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뺐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제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
“뭘… 설명을 하려고 해도, 저도 별로 이해가 가는 상황이 아니라… 아, 정신적 문제 아닙니다. 절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거나 동일시하는 건 아니고.”
이 새끼는 까딱하면 가장 선량한 의도로 날 정신병원에 보내버릴 새끼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목 뒤를 쓸었다.
“그냥… 저는 저 그대로 행동한 겁니다.”
류청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저는 부모님의 사고 때문에 교통사고와 화재가 불편한 게 맞습니다. 물론 형은 썸머 패키지 때 제가 사실도 아닌 이유를 대고 지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잠깐.”
류청우가 좀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문대야.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난 널 못 믿겠다거나 추궁하려는 게 아니야.”
뭐?
“썸머 패키지 때? 누구든 그때 널 보면 절대 그 고통이 꾸며낸 거라고 할 순 없을 거야. 네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 안 해.”
나는 멍하니 놈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넌 네가 죽을 뻔하면서 내 목숨을 구해줬잖아.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그렇지?”
그건….
“생명의 은인에게 말이 안 맞는다고 화낼 사람이 어딨겠어.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류청우는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거야. 문대야.”
“…….”
“지금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