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350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350화
귀국길, 나는 곧바로 현실을 깨달았다.
‘언제 말하냐.’
시간이 없다.
지금은 원하면 눈치껏 유동적으로 시간 뺄 수 있는 투어 시즌이 아니었다.
심하면 분 단위로 스케줄이 짜인 활동 초창기지.
‘지금은 외출도 힘든데 무슨.’
이 미친 스케줄 중에 선아현과 따로 각 잡고 둘이서만 대화할 타이밍이 오겠는가.
하지만 답은 쉽게 찾았다.
“내 방 쓰면 되지?”
“…!”
“나 독방이잖아~ 스케줄 끝나고 밤에 이야기해!”
그렇지.
마침 숙소에서 독방 쓰는 놈이 사정을 다 아는 놈이었다. 굳이 나가서 자리 만들지 않아도 되겠군.
“물론 세진이도 잠은 자야 하니까~ 이야기 길어지면 내가 네 방 쓴… 문대문대? 듣고 있지?”
“어 고맙다.”
나는 비행기에서 몇 가지 일정 시간을 조율한 뒤,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따로 선아현을 부르기로…….
“일단 나도 있을게. 아현이가 아무리 친구를 좋아해도 분위기는 조성하고 준비도 해야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거야~”
맞는 말이다.
안 그래도 선아현은 나와 큰세진이 본인에게만 공유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점을 신경 쓰는 것 같았으니 다른 당사자도 남겨두자.
나는 그날 공항에서 직행한 광고 촬영장에서 선아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현아.”
“으응?”
“촬영 끝나고 숙소 가면 나랑 이세진이랑 같이 밤에 이야기 좀 할 생각….”
“으응! 다, 당연히!”
“어, 그래.”
본인이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덕분에 약속은 순식간에 잡혔다.
그렇게 일단 (몸은) 동갑인 셋이 큰세진의 독방 소파에 둘러앉았다는 이야기다.
“자, 다들 편하게 앉으세요~”
“아, 으응…!”
“…….”
이 자식은 무슨 수로 본인 캐릭터 인형 열 몇 점을 침대 코앞에 두고 잘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신경 줄이 쇠로 됐나?
어쨌든, 나는 인형 대가리들을 등지고 고개를 돌려 선아현을 쳐다보았다.
선아현은 긴장한 것 같았으나 그 이상으로 기대 중인 것도 같았다.
‘눈이 번쩍거리는데.’
아니, 그럴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밀은… 맞긴 하지.
그렇다. 당장 작년만 해도 이렇게 대놓고 말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흠.”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우선… 혹시 최근에 상황상 좀 소외되는 느낌이 들었다면 미안하다.”
“아, 아니야…! 당연히, 으응, 나한테 말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일하느라, 그런 거니까….”
“…?”
잠깐.
나는 큰세진은 돌아보았다. 놈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그 와중에 선아현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계속한다.
“내, 내가 대화를, 잘 이끌어가거나… 업무적으로,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잖아……. 으응, 쉽게 공유할 수 없다고, 생각해….”
“…….”
야, 이거.
아무래도 선아현은 나와 큰세진이 무슨 거창하고 복잡한 물밑 업무라도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본인이 충분히 믿음직스럽지가 않아서 그룹 일인데도 공유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나는 순간 최근 선아현의 행적을 돌아보다가, 침음을 참았다.
‘그래서… 그렇게 나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거였나.’
이제야 퍼즐이 딱 들어맞는다.
‘망할.’
꼬였군.
나는 미간을 누르려던 손에 힘을 줘 내렸다.
‘이건… 내가 매몰된 탓이다.’
이놈의 비밀 때문에 류청우부터 큰세진까지 사건이 터지다 보니 그쪽으로 뇌가 고정된 것이다.
나한테 뭘 듣고 싶어 한다면 당연히 내 비밀일 것이라고 말이다.
“…….”
그래. 그렇다면 다시 말해… 선아현에겐 굳이 내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
‘짐작도 못 하는 놈이야.’
대충 레이블이나 언론 문제 꺼내 들면서 적당한 거짓말로 얼버무려도 될 타이밍이다.
선아현은 그걸로 넘어가 주겠지.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가?’
나는 주먹을 쥐었다.
그래놓고 앞으로 시스템 관련 일 처리할 때마다 또 이놈 빼놓고 할 텐데, 저놈 입장에서는 더 속은 기분이 들지 않나?
그럴 거면 차라리 말을 말았어야지.
‘그쯤 되면 기만질 작작하라고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차라리 일 관련 문제는 아닌데, 개인적인 일이라 말하지 못하겠다고 깔끔히 하는 게 맞다. 서로 오해가 있던 거니까.
선아현이 좀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만, 어쨌건 일은 거기서 정리되겠지.
‘…문제는.’
내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웃기지만.
“…….”
나는 반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일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네가 일 못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으응?”
“그냥 내 문제야.”
나는 침을 삼켰다. 어쩐지 좀 기분이 고양된다.
“내가 원래 박문대가 아니었는데, 박문대로 살고 있는 거라서.”
“……??”
“그걸 떠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까 쉬쉬하던 거지.”
“…으응?”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큰세진에게 말했듯이, 선아현에게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눈 떠보니까 남의 몸이더라고.”
그래도 한번 말해봤다고 더 정리된 어투로 문장이 나오긴 하는데….
‘…이거 정말, 맨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긴 하군.’
“그래서 내 눈에는 일종의 홀로그램처럼….”
“푸흐흡!”
“…한 번만 더 웃으면 내보낸다.”
“어어? 내 방인데 문대가 나가야… 죄송합니다. 그 인형은 팬분께 받은 겁니다, 문대 님 자중하세요.”
술이 간절한 위기 구간을 몇 번 오긴 했으나, 어쨌든 큰 라인은 잡아서 무사히 넘겼다.
‘골드 2나 청려 이야기는 나중에 필요하면 하고.’
아예 힌트도 없었던 놈에게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큰세진에게 몇 번의 보충 설명을 받으며,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잘 지내고 있다.”
“…….”
끝마치긴 했는데… 반응이 없군.
좀 다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워낙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쉽게 말 못 했어. 이놈한테는 반쯤 들킨 거기도 하고.”
“맞아. 내가 또 워낙 눈치가 빠르잖아~ 박문대는 아무한테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내가 다 알아낸 거라니까?”
“…….”
그리고 고개를 들자, 선아현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녀석은 몇 번 나와 큰세진을 돌아보더니 살짝 시선을 내렸다.
“…그, 그렇구나.”
“그래.”
그리고 침묵이 흐른다.
“…….”
“…….”
생각보다… 길게.
‘…왜.’
질문도 안 하는 거지.
목 뒤로 식은땀이 맺힐 때쯤.
선아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을 거는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큰세진이다.
“…저, 저기. 세진이도 이 이야기를 전에 다 들은, 거지…?”
“맞아. 오래된 건 아니고… 몇 달도 안 됐어.”
“어, 어떻게… 생각했어? 처음에, 듣고.”
“음?”
큰세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문대가 굳이 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는 없잖아?”
“…!”
“내가 지금까지 봐온 문대가 있으니까… 그냥 그렇구나 했지.”
“…….”
큰세진의 말에 선아현이 고개를 다시 숙였다.
‘무슨 생각인 거지.’
왜 나한테 내용에 대해 질문하지도 않고 저러고 있는 거지. 아니, 물론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긴… 하다만.
나는 혀를 물었다.
‘쓸데없이 과한 추측 그만둬라.’
먼저 이야기 들은 놈 생각이 당연히 궁금할 수도 있지.
그래도….
나는 몇 번 손을 폈다 쥐다가, 그냥 놓고 입을 열었다.
“믿기 힘들면…….”
하지만 이 문장은 끝마쳐지지 않았다.
선아현이 대답했기 때문이다.
“…아, 아니야. 믿어.”
“…!”
녀석은 고개를 들더니, 약간 질린 안색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응……. 마, 맞아. 문대가 이런 일로,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당연히 알아.”
“…….”
“히, 힘들었, 겠어……. 문대야.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어쩐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몇 번 목을 가다듬은 뒤에야 차분하게 답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잘됐잖아. 그럼 된 거지.”
“으응…….”
선아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도… 혹시 힘들면, 이야기해 줘.”
“문대 엄청 든든하겠는데? 백업이 둘이야~ 아, 청우 형도 좀 알지.”
“……처, 청우 형도…?”
“아, 그 형은 좀 가족 사정이 있더라고….”
나는 큰세진이 설명하는 것을 선아현이 열심히 경청하는 것을 확인했다.
놈의 얼굴에는 집중력이 돌아와 있다.
“…….”
괜찮게… 끝난 건가.
큰세진은 설명을 끝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괜히 때부터 동갑즈가 아니네. 결국 문대 사정 다 아는 건 우리 둘뿐이잖아~ 잘해라 문대야.”
나도 결국 웃긴 했다. 그리고 좀 고민하다가, 선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잘 부탁한다, 아현아.”
선아현은 약간 떨리는 손으로 맞잡았다.
좀 차가웠으나, 힘이 있었다.
“…으응!”
그리고 그 대답을 할 때, 녀석의 눈에서 보인 것은 분명 기쁨이었다.
그걸로 됐다.
다음 날에도 특별히 선아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나는… 다소 안도했던 것 같다.
* * *
그리고 며칠 후.
약간 독특한 스케줄 하나가 돌아왔다.
“음, 내일이 우리 연희대 가는 날이구나.”
“오우!”
근 2년 만에 돌아온 대학 축제 스케줄이었다.
작년에 워낙 몸값이 뛰어서 그렇지, 데뷔 때부터 한 번씩은 꾸준히 가긴 했다.
출신에 데뷔곡부터 음원이 잘돼서 일반 대학생들도 듣고 즐길 수 있을 수준의 대중 인지도는 됐거든.
그리고 대학 축제 공연은 꽤 재밌는 행사라 다들 반응이 괜찮았다.
“오~ 오랜만이네요. 재밌겠는데요?”
“그러게. 거기가 야외 공연장이지?”
덕분에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몇 분 지나자 아예 대학 자체에 관한 이야기까지 흘러갔다. 뭐, 차 안에서 잡담하다 보면 늘 그렇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청강이라도 해보고 싶긴 해.”
“그렇군요. 저는 일과 병행하기 위해 사이버 대학교를 이수 중인 것을 후회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선택지에 대한 호기심은 있습니다.”
그리고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장학금 있었는데 한국 왔어요. 정말 대단해요!”
“와.”
“그건 정말 대단하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김래빈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까.
“왜 그랬는데.”
“음, 춤 재밌어서? [그냥 있잖아요, 그러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보란 듯이 잘됐으니 장학금 걷어찼다고 뭐라 하기도 그렇군.
아득바득 장학금 유지하면서 데이터팔이로 생활금 충당해 온 나도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직업을 가진 판에 말이다.
“형! 형은 대학 갈 생각 가졌어요?”
“딱히.”
굳이 두 번은 안 가고 싶다.
그 생각을 하자 강제로 두 번 가야 하는… 이번에야말로 현역으로 가게 될지도 모를 뭔가가 떠올랐으나 일단 그만뒀다.
‘후…….’
금메달리스트와 외국인이 부럽군.
“OK~ 우리 캠퍼스만 구경해요! 몰래 하면 가능해요!”
“뭐… 시간 되면.”
나는 말도 안 되는 차유진의 말을 들으면서도 꽤 희한한 기분으로 스케줄 목록의 대학 축제를 확인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문대문대, 여기가 졸업한 대학이지?”
“…어.”
차유진이 뒷자리에서 내 어깨를 두들기는 것을 그만두자 큰세진이 숙덕인 말이다.
여기가 내가 다닌 대학이거든.
‘이 몸으론 처음인가.’
굳이 여기 갈 일이 없었단 말이지.
그리고 이 소속사에서야 대학 행사는 그냥 페이 세게 부르고 다른 행사랑 거리 가까운 곳을 선착순으로 넣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학교가 제일 돈을 크고 빠르게 부른 모양이다.
‘애들 등록금 한번 시원하게 쓰네.’
돈도 많은 새끼들이 매해 등록금은 그렇게 올려대더니.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스케줄을 넘겼다. 옆에서 큰세진이 나를 끼운 채로 굳이 반대편에 앉은 선아현에게 숙덕였다.
“아현아현~ 여기 문대가 다니던 대학이래.”
“……그. 그렇구나.”
선아현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기분이, …어때?”
“…뭐, 그냥 그렇지.”
나는 피식 웃었다.
“졸업한 지도 오래됐고, 캠퍼스도 한번 갈아엎어서 솔직히 그렇게 감흥은 없어.”
큰세진이 씩 웃었다.
“알겠습니다. 큰형님.”
“…….”
그만해라 새끼야.
“크흐흐흡….”
나는 큰세진이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는 것을 들으며, 한숨을 참았다. 선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 어쨌든 무대만 잘하면 되는 거지.’
간만의 한국 행사였다. 나는 목을 꺾었다.
우리가 맡은 역할은 엔딩.
시간만 허락한다면, 앵콜을 서너 번은 부를 수 있는 포지션이었다.
‘그걸 다 채울 여유 시간은… 없을 것 같다만.’
하지만 늘 그렇듯이, 세상일은 꼭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