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very Man From Murim RAW novel - Chapter 164
163화. 스케줄은 이어진다 (3)
고영민은 RD엔터의 사장 앞에 서 있는 것보다 더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느낌을 어디서 느껴 봤었지?’
RD엔터의 사장 앞에서도 당당한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이 정도의 긴장감을 느끼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던 고영민의 뇌리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싸악 사라졌다.
RD엔터는 1년에 한 번 실장급 이상이 배석하는 수익성 검토라고 하는 연례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재작년부터 그 연례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적룡길드의 길드장이 아닌, 그의 장녀이자 차기 길드장에 내정된 사람이었다.
고영민은 홍염의 마녀 흑장미라 불리는 그녀를 고깝게 여겼다.
다이아몬드 수저 물고 태어났을 뿐인데 나이가 어린 여자가 상급자 행세를 하고 다닌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그녀는 결코 잘 태어나서 그 지위를 누리는 것이 아니었다.
짙은 눈화장을 한 그녀의 검붉은 입술이 열릴 때마다 RD엔터의 사장은 진땀을 흘렸다.
“흐음, 그렇군요. 그런데 이 부분은…….”
구구절절 맞는 말로 사람을 후려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카리스마가 실린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고영민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간담은 서늘해졌다.
그때 보았던 그녀의 자세와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의 자세가 너무나 똑같았다.
게다가 수수하지만 화장만 좀 하면 엄청난 미인일 것 같은.
‘자, 잠깐……. 화장 좀 하면?’
연예계에서 몇 년 구르다 보니 화장한 얼굴과 하지 않은 얼굴을 구분하는 능력이 늘었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여자가 바로 그 홍염의 마녀라는 것을!
‘아, 아니! 아가씨가 지금 왜 여기에 계시는 건데요!’
그때.
전에 만났던 윤가인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초코빵 중에서 적룡길드의 VIP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분명 그 VIP는 여자라고 했다.
‘설마?’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아는 척하면, 후환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탁.
그때 김지은이 계약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고영민에게 말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런데 이 부분은…….”
그녀의 입버릇 같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
“우선 이 전속 계약 조항이요. 전속은 좀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계약 기간 5년이요? 하영이가 아이돌 할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앨범만 내는 건데 왜 5년이죠?”
“…….”
“물론 이게 RD엔터에 속한 연예인들에 대한 표준 계약서라는 것은 알지만, 하영이의 경우 좀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김지은은 그 이후로도 조목조목 하나씩 지적했고, 고영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지적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에휴, 탈탈 털렸네.’
고영민은 계약서를 고치면서 이번 계약은 완전 쪽박이라고 생각했지만, 김지은은 웃으며 말했다.
“RD엔터도 남는 게 있어야 음반을 만들겠죠. 음반 만드는 게 애들 장난은 아니니까요.”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고영민은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 정도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니까.
* * *
RD엔터의 1층 카페.
계약을 마친 유순태 가족과 강소 그리고 김지은은 카페에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며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있었다.
“지은 씨, 고마워. 덕분에 문제없이 잘 계약했네.”
유순태의 말에 김지은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계약서를 잘 보는 거야? 단순히 법을 공부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잘 보던데? 마치 십 년은 계약서 보는 공부만 한 것처럼 말이야.”
임소영의 말에 김지은은 움찔했다.
‘하하하. 사모님, 엄청 예리하시네.’
십 년 동안 계약서 보는 공부를 한 게 맞았다. 어릴 때부터 전문가들에게 붙들려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그렇게 보였어요?”
“응.”
난감한 김지은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강소 오빠는 화장실 가신다고 하고는 왜 아직 안 오죠?”
김지은의 말에 임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길을 잃었나?”
그 말에 유순태가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이 길을 잃어버릴 리는 없지.”
그 대화에, 빨대로 우유를 쪽쪽 빨던 유하영은 살짝 고개를 들어 위층 쪽을 보다가 다시 우유를 마셨다.
강소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소가 자신의 행선지를 말하면 안 된다고 했기에 말하지 않을 뿐이었다.
자신은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였으니까.
* * *
고영민은 계약서를 가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가수 3실은 8층에 있었다.
그가 가수 3실에 들어갔을 때,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직원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붙박이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홍 대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갑자기 그의 시야가 반전되면서, 사방은 아무 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방이 온통 새하얀 그 공간에 당황할 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고개를 돌린 그는 낯선 누군가를 발견했다.
“다, 당신은 누굽니까?”
“반갑습니다. 고영민 실장님. 제 이름은…… 알려 드릴만 한 것이 못 되겠군요.”
그녀는 고혹적인 태도로 갑자기 나타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의뢰를 받고 고영민 실장님을 찾았을 뿐이니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뢰?”
“네.”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색기가 짙게 묻어났다.
“오늘 유하영, 그 아이와 계약을 하셨죠?”
“…….”
“아닌 척하셔도 소용없답니다. 의뢰인은 알고 있으니까요.”
“의뢰인이 누구지?”
“그걸 대놓고 물어보시다니! 멍청하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멍청하길 바라신 건가요?”
“…….”
고영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RD엔터의 건물 안이었기에 방심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간의 마법인가?”
“어머? 잘 아시네요. 저는 A급 공간의 마법사랍니다.”
그 말에 그녀가 건물 안에 침입할 수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A급 공간의 마법사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적룡길드의 본사도 아니고, 사업체였기에 상대적으로 보안 수준이 낮았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사전 조사 같은 노력이 필요하고, 금방 경비를 서는 각성자들이 알아차리고 달려올 테니, 그녀의 행동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
“적룡길드의 사업체인 이곳에서 이런 행패라니……. 너무 간이 큰 거 아닌가?”
“물론 그렇죠. 곧 제가 침입한 걸 알아차리겠지만, 위험을 감수할 만큼 이번 계약은 큰 건이니까요. 그러니까 그 많은 돈을 주고 의뢰인이 저를 고용한 거죠.”
“뭘 원하지?”
“계약.”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쪽과 의뢰인이 계약을 하는 거죠.”
그녀는 계약서를 꺼내 내밀었고, 그걸 읽은 고영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계약서는, 유하영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긴다는 일종의 이중 계약이었다.
격변의 시대가 오면서, 마정석 공학은 실생활에 스며들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도장과 계약서다.
마정석 공학의 산물 중 하나인 도장은 찍으면 특유의 오러가 남았고, 또 계약서는 아티펙트라서 위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중 계약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
“하지만 일개 실장인 내가 계약을 한다고 해도 효력은 없을 텐데?”
“아직 대리인 효력이 남아 있잖아요?”
“!”
고영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장이 직접 도장을 찍기에는 바쁘기에 실장에게 대리인 자격을 주어서 법인 도장을 찍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그 효력이 남아 있었다.
고영민은 왜 그녀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RD엔터에 침입해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대리인 효력은 극히 짧은 시간만 주어지는 것이었고, 건물 밖에서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얼른 도장 찍으세요. 죽기 싫으면.”
누군지 모르는 의뢰인이 유하영의 계약서를 노리는 이유가 뭔지 모르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눈앞에 유하영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초코빵으로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지!’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공들인 보물이었다. 그런 보물을 이렇게 뺏길 수는 없었다.
어쨌든 시간만 끌면 되는 일이라 생각한 그는 결심을 굳혔다.
“내가 그걸 줄 거 같아?”
고영민은 굳게 마음먹고 법인 도장을 꺼내 그것을 입에 넣고, 삼켰다.
그리 크지 않은 크기인 덕분에 넘기기 힘들었지만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그걸 본 그녀는 격분했다.
“으아악! 귀찮게 하네! 도장을 삼켜?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처음에 보였던 가증스러운 예의 따위는 이미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그럼 배 째서 도장을 꺼내든지.”
“내가 못할 줄 알고?”
백색의 공간에서 튀어나온 끈이 그의 손발을 결박했다.
그리고 그녀는 손에 검을 들고 고영민에게 다가갔다.
그때.
“컥-!”
순간 그녀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
고영민은 누군가 그녀의 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감히 하영이를 노리다니! 죽여 달라고 발버둥을 치는 군.”
그리고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에 반해서 캐스팅하고자 노력했으니까.
그런데 평소 듣기 좋던 그 목소리에는 짙은 살기가 묻어 있었다.
몸이 저절로 떨렸다.
김지은 앞에서 떨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확실한 죽음의 공포를 주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게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리고.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고영민은 잠이 들어 버렸다.
.
.
.
강소는 쓰러져 잠이 든 고영민을 보았다.
‘좋은 사람이군.’
강소는 RD엔터에 숨어 든 침입자를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고영민이 건물의 시설들을 구경시켜 줬을 때 말이다.
그 칩입자가 유하영과 고영민을 찐득한 눈으로 보고 있음에 강소는 그자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자는 계약을 마친 후, 고영민을 향해 움직였다.
하여 강소는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는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침입자는 옷을 참 민망하게 입은 여자였다.
그녀는 공간을 분리하여 고영민을 가두고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애초에 공간도 접어 버리는 강소였다.
공간을 분리하는 능력 따위 강소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
강소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좀 지켜보기로 했고, 그 와중에 도장을 삼키면서까지 유하영을 보호하려는 고영민을 보았다.
강소는 그를 인정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 끈질김은 인정했지만. 배짱도 있군.’
아무튼 더 이상의 정보를 캐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목을 잡아 고영민을 해하려는 행동을 제지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되니 고영민을 잠들게 했다.
강소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대화가 좀 필요한 것 같군.”
“끅, 끄윽, 너, 너는 누구?”
그 말에 강소는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내 이름은……. 알려 줄 만한 것이 못되어서 말이지.”
그녀는 칼을 들어 자신을 잡은 누군가를 향해 휘둘렀다.
그녀가 각성한 또 다른 능력은 검술이었기에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틈쯤은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쨍그랑.
검을 놓치고 말았다.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내가 얕보인 모양인데.”
“…….”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은 ×됐다고.
‘이 의뢰를 내가 왜 받아서! 의뢰를 받아들인 내가 미친년이었지!’
* * *
강소는 1층 카페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유순태가 그에게 말했고, 강소는 멋쩍게 웃었다.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샌드위치 먹다 말았잖아. 배고프겠다.”
“어서 먹어요.”
“아, 네!”
강소는 다시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유하영이 그에게 주스를 건네주었다.
“오빠. 주스도 먹어.”
“아, 고맙다.”
그 말에 유하영은 방긋 웃었다.
그 미소에 강소 역시 미소 지었다. 유하영이 직접 건네주어서인지 주스가 더욱 달았다.
그때 임소영이 말했다.
“어? 여기 있던 시럽이 어디로 갔지?”
그 말에 강소는 자신이 마시던 주스를 보았다.
“…….”
아무튼, 그랬다.
무림에서 온 배달부 16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