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very Man From Murim RAW novel - Chapter 429
428화. 펑펑 눈이 옵니다 (1)
어비스.
보라색과 붉은색이 섞인 하늘 아래에 고고하게 서 있는 성.
그 성의 깃발이 세찬 바람에 펄럭였다.
그건 왕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드크의 오러가 느껴지지 않는군.”
왕은 중얼거렸다.
그는 이곳 어비스에 처박혀 있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두 번째 인간계로 보낸 이들의 오러 정도는 앉은 자리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건 어비스의 왕 개인이 아닌, 왕의 권좌가 가진 권능이었다.
그 권능이 있기에 어비스의 난폭하고 흉포한 이들을 발아래에 둘 수 있던 것.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지하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섰다.
치지직-!
그 출입문은 결계로 막혀 있어 오직 왕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문을 통과한 그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마침내 멈춘 곳은, 넓은 동굴과 같은 곳.
그 가운데 보이는 건, 커다란 수정 덩어리였다.
보랏빛을 띠는 투명한 수정 안에 있는 건, 바로 왕 그 자신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본체인 것.
그는 이대로 어비스에 처박혀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비스에서 벗어날 방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연구할 수 있는 육체도 없었고, 다른 자의 육체를 뺏는다고 해도 육체에 허락되는 시간 역시 짧았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스스로의 시간을 반복하는 것.
이곳에 본체를 두고 왕은 지금까지 여러 번 시간을 돌려 왔다.
까마득히 오래전의 왕부터, 선선대, 선대,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것은 그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자신의 시간만 돌린다 하여도 시간을 되돌리는 건 그 자체로 부작용이 있었다.
바로, 이전 생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기억하는 건, 시간을 되돌리기 전까지.
그래서 왕은 이전 생을 기록하는 방법을 택했고, 그 기록을 이곳에 보관해 놓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이전 생에서 뭔 짓을 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지만, 이전 생의 자신은 지금 생의 자신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자신의 행동이 미래에 어떤 일을 불러올지 몰랐기에 언제나, 이전의 자신은 이후의 자신에게 욕을 먹었다.
그가 공간의 열쇠를 친우에게 선물했다고 욕하는 선대의 왕은 즉, 이전 생의 자신인 것.
그렇게 계속하여 시간을 돌리고 또 돌리던 와중에 결국 어비스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왕은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그 병 안의 액체가 자신이 찾은 방법으로, 절망의 구슬을 농축하여 만든 비약이다.
왕은 병의 뚜껑을 열고 수정 위에 부었다.
얼마 되지 않은 양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스윽.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수정이 사라졌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어비스에서 벗어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절망의 구슬이 필요하다.’
하지만 왠지 요즘 들어 절망의 구슬의 수급량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것이 왕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이유였다.
“다른 수단을 생각해 봐야겠군.”
* * *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강소는 하늘을 보았다.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하영이가 눈이 올 거라고 하더니, 정말 눈이 오네.”
유순태의 말에 강소가 대기의 기운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폭설이 올 거다.”
강소의 말에 유순태가 머리를 긁적였다.
“대비를 해야겠네.”
죽음이 땅이 만들어지면서 잔뜩 자극받은 대기였다.
죽음의 땅이 정화되었지만 한 번 건드린 대기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기에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섣불리 건드리면 더 큰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강소는 조금씩, 조금씩 대기의 흐름을 회복시키는 중이었다.
그 말은, 이번 겨울에도 눈이 엄청나게 많이 쌓일 거라는 뜻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추운 겨울을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야.”
유순태의 말에 강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크리스마스이브의 ‘따뜻한 크리스마스 콘서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기부하여, 더 많은 어린이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전국의 보육원은 물론이고, 어렵게 사는 어린이들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기부금의 집행은 적룡길드 산하의 복지단체인 RD Welfare Group, 줄여서 RWG에서 맡아 집행했다.
이번 콘서트를 기획한 RD엔터가 적룡길드 산하 엔터 회사였기 때문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적룡길드의 차기 길드장이 될 흑장미 김지은 이사가 집행 후 보고서를 자신에게 제출하라고 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단 1원도 떼먹은 것 없이 전부 아이들의 주거 복지를 위해 쓰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강소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지은 씨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하영과 노민아가 그들의 이름을 걸고 한 자선 공연이었다.
그 이름에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길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근처 식자재 마트에 들어서자 점원이 인사하며 그들을 맞아 주었다.
“네. 안녕하세요.”
강소가 자연스럽게 쇼핑 카트를 끌었고 유순태가 이것저것 필요한 식자재를 집어서 쇼핑 카트에 넣었다.
집에서 쓸 식자재 등이었는데, 폭설로 인해 고립되었을 때를 위한 비상식량 등도 샀다.
카트에 담긴 물건을 계산한 후, 짐은 강소의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제 약국에 가자.”
“알았다.”
그들은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안녕하세요.”
약사의 이름은 박연실.
제법 예쁜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네, 안녕하세요.”
유순태가 약국에 들린 건 임소영에게 미션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순태는 핸드폰의 메모장에 적힌 것을 말했다.
“험험, ‘우리 아이 황금이’ 0단계 주세요.”
“채영이는 잘 크고 있죠?”
“네.”
박연실은 유순태의 둘째 딸 이름이 유채영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 황금이’라는 이름의 제품은 일회용 기저귀였다.
격변의 시대가 시작되고, 공장들이 마수에 의해 파괴되면서 시제품으로 나오는 분유나 기저귀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분유를 만들어 먹이고, 무명천으로 기저귀를 대체하곤 했다.
서서히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아기를 위한 시제품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분유와 기저귀로 장난치는 업자들이 있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자기 아이 먹고 입는 것에 장난치는 건 참을 수 없는 법.
아이들의 사망으로까지 이어지자 결국, 그 업자들은 분노한 부모들에 의해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자업자득이지만, 이 일은 사회의 큰 화두로 떠올랐다.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급감한 인구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말이다.
결국, 각성자 협회와 정부는 분유와 기저귀를 의약품으로 지정했고, 식약처의 철저한 관리를 받도록 했다.
그래서 분유나 기저귀를 사려면 약국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양육 카드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유순태는 지갑에서 아이 양육 카드를 꺼냈고, 약사 박연실은 아이 양육 카드에 쓰여 있는 유채영의 주민등록번호를 시스템에 입력했다.
분유와 기저귀는 의약품 중에서도 특별 관리하는 의약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부 지원 때문이다.
임신을 하면 매달 지원금을 주었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지원금은 양육 지원금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서부터는 현금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지원이었다.
분윳값과 기저귓값의 80퍼센트 지원이나 병원비 전액 지원 등등 격변의 시대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지원 정책들이 많았다.
그건, 인구수를 늘이기 위한 정부의 눈물겨운 노력이기도 했다.
“채영이는 모유 먹죠?”
“네, 완모를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안사람이 모유 수유에 대한 의지가 대단해서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도 아직 분유를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요.”
기저귀는 별 제약 없이 살 수 있지만, 분유는 아무 분유나 먹이지 못했다.
산모가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는 몸 상태인지, 또 아이에게 어떤 영양소가 필요한지 보름에 한 번은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고 처방을 받아야 했다.
“아이 양육 카드 받으시고요.”
“네.”
유순태는 카드를 받아서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소화제하고 반창고 좀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그때 약국에 켜 놓은 TV에서 일기예보를 전하고 있었다.
– 전국적으로 눈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눈은 폭설로 이어질 전망입니다. 모두 폭설에 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지역별 적설량을 보시겠습니다…….
그걸 보며 박연실이 말했다.
“이번에도 어마어마한 폭설이네요.”
“그럼 약국도 닫으셔야겠군요.”
강소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래도 다행히 의약품 중에 썩는 건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건 정말 좋군요. 하하하.”
유순태와 강소는 필요한 것들을 사서 나왔다.
어느새 눈발은 더 굵어졌다.
“서둘러 돌아가야겠다.”
“그러게, 이제 좀 있으면 앞도 보이지 않겠네.”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고, 집에 돌아왔다.
앞에서 몸에 쌓인 눈을 탁탁 털고 들어와, 사 온 물건을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그 사이 유순태는 황진혁과 김지은 그리고 오동수에게 폭설 동안 출근하지 말라고 전화했다.
“다녀오셨어요?”
그때 위에서 임소영이 유채영을 안고 내려왔다.
“다녀왔습니다.”
“응. 나 왔어. 채영이는 잘 자네?”
임소영은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직 하영이가 오지 않아서 걱정이네요.”
지금 유하영은 RD엔터에 있었다.
아침만 해도 폭설이 올 거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유하영이 눈이 내릴 거라고 했지만 그땐, 그냥 눈이 오겠거니 했는데 폭설인 것.
만약 눈이 올 거라는 말을 강소에게 했다면 강소는 유하영을 보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보통 폭설은 1월에 내리지 않나?”
“그건 그렇지.”
유순태는 달력을 보며 말했다.
“아마도 음력이 빨라서 그런 것 같아.”
* * *
RD엔터의 보컬 연습실.
오늘 노민아는 일찍 돌아갔다. 오늘 아빠 생신이라서 생일 파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하영은 혼자서 솔로곡을 연습 중이었다.
그때 차현태가 들어왔다.
“손 선생님.”
“네.”
유하영의 노래를 지도해 주는 보컬 트레이너는 손정식으로, 전에 강소에게 도전했다가 무참히 깨졌던 전적이 있었다.
그 후, 손정식은 강소에게서 노래에 감정을 담는 법을 사사했다.
덕분에 RD엔터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고 또 가장 잘 지도하는 트레이너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차 대리님. 무슨 일이신가요?”
차현태는 퇴근에 대리 직함을 달았기에, 공식적인 호칭이 차현태 대리였다.
“지금 폭설 경보가 내렸습니다.”
“폭설이요?”
보컬 연습실은 방음을 위해 창문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손정식은 연습실 부스 밖으로 나왔고, 유하영 역시 따라 나왔다.
“…….”
바깥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유하영이 외쳤다.
“와! 눈이 온다! 눈이 엄청 많이 와요! 눈사람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에 차현태는 하하 웃었다.
“나중에 같이 만들까요?”
“네!”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오면 집에 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얼른 집에 가야 해요.”
그 말에 손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유하영에게 말했다.
“하영아.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네.”
그들은 서둘러 집에 갈 준비를 했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집에 가려면 차를 이용해야 했으니까.
주차장에서 나가려는데, 경비원이 그들을 막아 세웠다.
“저, 죄송하지만 지금 교통 통제령이 내려졌습니다.”
교통 통제령은 통행하는 것이 시민의 안전에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내리는 행정 명령.
교통 통제령이 내려지면 개인 차량은 물론이고 택시나 버스, 지하철까지 운행이 제한되었다.
“생각보다 눈이 빠른 속도로 쌓여서 그렇다네요.”
차현태는 난감했다.
어쩔 수 없이 RD엔터에서 숙식을 해야 했으니까.
신체 건강한 어른들은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유하영은 아직 6살 아이였다.
부모 없이 폭설 기간 동안 함께 RD엔터에서 함께 숙식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죠?”
그때 유하영이 말했다.
“괜찮아요. 오빠한테 전화하면 돼요.”
무림에서 온 배달부 42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