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114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114화
* * *
“선생님.”
비틀거리며 가게를 나서는 민철을 서준이 붙잡았다. 민철이 휘청거리며 고개를 돌아봤다.
“예?”
“선생님은 아마 오늘 일 기억 못 하실 겁니다.”
박민철이 푸흐흐- 웃었다.
“사장님. 제가 술 먹으면서 취한 적은 많은데요…… 딸꾹! 지금도 물론 취했고. 근데 필름은 끊겨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삼천 살! 그리고 이백만 원! 전부 다 기억할 겁니다.”
“못 하실 겁니다.”
“할 건데…….”
서준이 자박자박 박민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그가 놓고 간 브리프 케이스를 쥐여 줬다.
“아? 이걸 놓고 갈 뻔했네. 고맙습니다. 이거 아내가 선물해 준 거라 잊으면 큰일 나걸랑요.”
“별말씀을요.”
딸꾹!
“그럼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선생님.”
“예?”
“선생님은 좋은 의사십니다.”
“제가요? 아닌데…….”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살아 보니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더군요. 언제든지 처한 환경에 따라 악해질 수 있죠. 그건 저도 예외는 아니고요.”
“5,678명.”
“그게 뭐죠?”
“선생님이 살린 환자들입니다. 최소한 이들에게 선생님은 좋은 의사시겠죠.”
“……저도 모르는 걸 사장님께서 알고 계시는군요.”
“삼천 년을 넘게 살다 보니 이런저런 능력들이 생기더군요.”
민철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그 능력으로 이번 회차 로또 번호나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죄송합니다. 그랬다가는 절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에게 발각될 것 같네요. 대신 선생님께서 필요로 하는 다른 걸 드리겠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거요? 뭐가 있으려나. 아! 차? 차 괜찮네. 저도 삼각별 한번…….”
“4,322명.”
“그건 또 뭡니까? 내 테이블에서 죽어 간 사람들 수인가?”
“아뇨.”
“그럼 뭡니까?”
“그건 선생님께서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성격이 급해서 그런 건 못 기다리는데…….”
“그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선생님은 오늘 일 기억 못 하실 거라고요. 기억이 없으니 급할 것도 없겠지요.”
민철이 낄낄 웃었다.
“그건 맞네요. 기억이 없으면 급할 것도 없겠어요. 하실 말씀은 다 하셨나요?”
“네.”
“그럼 진짜로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툭툭.
박민철이 검지로 제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삼천 살하고 이백만 원. 기억할 겁니다.”
박민철이 비틀비틀 가게를 걸어 나갔다.
* * *
과거 외상외과는 언제나 인력 부족에 시달렸다.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냐면 외상외과로 지원하는 전공의들이 전무할 정도였다.
전공의가 없으니 전문의는 어떻게 있겠는가?
물론 이는 옛말이 되었다. 격변 이후 외상외과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예과생 및 수련의와 전공의 중에서 병역 의무가 있거나 혹은 죄를 지은 이들에 한해서 모두 외상외과로 돌려 버렸다.
인권 탄압은 물론이거니와 직업 선택의 자유조차 박탈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당시는 전 세계가 위협받던 시기였다.
이 이종족과의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르는 암울한 시대이기도 했고.
그 덕에 외상외과 전문의는 늘어났다.
정세가 차차 안정됨에 따라 더블 보드를 따서 진로를 바꾸는 의사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박민철의 외상외과에도 김우진을 포함한 실력 있는 서전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뭐예요?”
“……지금 당장 들어갈 선생님들이 없어요.”
“최 선생 있잖아요.”
“지금 막 응급실에서 트랜스퍼 받고 이머전시(응급수술) 들어가셨습니다…….”
“그럼 우 선생은?”
“우 선생님도…….”
“박 선생 있지 않나? 박 선생 오프인 걸로 아는데.”
“박 선생님도 급히 콜 받고 수술 들어가셨습니다. 지금 집도 가능하신 선생님이 교수님밖에 없으세요.”
교수실에서 어제 못 다 쓴 사직서를 끄적거리고 있던 박민철은 뜻밖의 부름을 받았다.
수술실에 들어갈 집도의가 없다는 것.
게이트 폭발이라든가, 몬스터 출몰로 인해 환자가 갑자기 몰려들면 이런 일이 있을 순 있겠지만 평상시 집도의가 없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박민철의 당혹스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수술에 들어갈 상태가 아니었다. 사실 고경수 경관의 수술을 집도한 것도 미루다, 미루다 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수술실에 들어간다?
증상이 나타난다면 엄한 사람을 잡게 될 것이었다.
“정형외과 이 선생하고 신경외과 조 선생이 더블 보드 전문의예요. 이 선생하고 조 선생한테…….”
“……이미 여쭤봤습니다. 이 선생님은 수술 들어가셨고 조 선생님은 지금 세미나 가셨습니다.”
박민철은 실소를 흘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꼼짝없이 자신이 집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 * *
수술대 앞에 선 박민철은 왠지 수백, 수천 번 보아 오던 수술대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탈칵-!
그건 무영등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수술실의 무영등이 차갑게 느껴졌다.
“교수님, 환자 잠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민철이 입을 열었다.
“메스.”
스르르륵-.
‘뭐지?’
이상했다. 늘 가르던 살가죽인데 오늘은 걸리적거리는 게 없이 쓱 잘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손은 여전히 안정적이었다.
“오 선생, 아미네이비(견인기)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치이이익!
전기칼이 매끄럽게 복부를 갈랐다.
‘갈비뼈는 괜찮고, 폐가 문제군.’
수술대에 있는 환자는 일용직 잡부였다. 건설 현장에 오르다가 추락을 했고 하필이면 복부부터 떨어져 긴장성 기흉이 왔다.
급하게 흉관 삽입을 통해 시간은 벌었지만 문제는 흉막 사이의 폐가 찢어졌다는 점이었다.
그 모습에 어시로 선 선생이 탄식을 흘렸다. 봉합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건 박민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든 민철은 루프(확대경)를 벗었다. 희한하리만치 장기 내의 세포들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두 손은 여전히 떨림도 없다. 오히려 더 나아가 신경 마디마디를 컨트롤할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능하다.’
처음 민철이 판단한 환자의 상태는 절제술밖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충분히 가능해 보인 것이다.
“교, 교수님?”
어시가 그를 불렀다. 민철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절제술 대신 봉합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스퍼(집게).”
민철의 요구에 수술실의 의료진들이 경악했다. 이 환자는 아무리 봐도 봉합술을 할 환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봉합을 하려 한다.
“교수님, 이 환자는…….”
오죽하면 어시가 수술실에서의 금기를 깰 정도였다. 어시를 힐끔거린 민철이 말했다.
“그래스퍼.”
“…….”
어시는 입술을 악 깨물었고 보조하던 간호 선생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민철의 수술을 지켜봤다.
10분.
긴장이 환희로 바뀌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0분이었다.
* * *
수술 대기실.
수술실 문이 열리며 민철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까까머리 남자아이였다.
그 뒤로 남루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자의 아내이리라.
“선생님, 어떻게 됐나요?”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그럼 생명에는…….”
“당연히 지장 없으십니다. 곧 깨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손을 맞잡고 연신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에 민철은 환히 웃었다. 환하게 웃을 수 있어서 기뻤다.
수술이 잘못됐다면 웃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이 순간이 한 사람의 서전으로서는 가장 보람찬 순간이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렸지만 살려 낸 건 한 사람만이 아니다.
그와 인과를 맺고 있는 모든 이들, 그의 죽음에 슬퍼하고 아파할 이들, 그들의 마음까지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보람이었다. 그리고…….
‘사직이라.’
민철은 문득 아까 끄적거리고 있던 사직서가 떠올랐다.
난 수술실을 떠나고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까?
메스를 놓고 그 대신 낚싯대를 들고 살 수 있을까?
‘손만 괜찮다면…….’
오늘은 여태 했던 수술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다.
온 신경 세포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느낌, 그래서 환자의 미세한 혈관 조직 하나하나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루프 없이도 훤히 보이는 조직들…….
이 감각들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손만 괜찮아진다면…….’
그렇다면 다시 느낄 수 있을 텐데.
민철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의국으로 돌아갔다.
* * *
민철은 팔짱을 낀 채 책상의 사직서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 종이 한 장에는 수험생 시절부터 시작된 자신의 지난한 35년 세월이 담겨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35년의 세월은 꾸역꾸역 담아 낼 수 있었지만 선뜻 내기가 망설여졌다.
이걸 낸다면 자신의 35년 세월은 이 종이 한 장과 함께 사라질 테니 말이다.
‘쉬울 줄 알았는데…….’
아내에게 허락을 받을 때만 해도 쉽다고 생각했다. 사직서를 쓰고 낸다.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런데 상황이 닥치니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환갑이 다 된 나이인데도 마음이 곧지 못한 모양이다.
고민을 이어 가던 민철은 사직서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고 퇴근부터 했다.
산책을 하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정처없이 걷던 민철이 멈춰 섰다. 어느 가게 앞이었다. 우두커니 선 채 잠시 고민하던 민철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한산하네.’
어제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던 것 같은데 오늘은 한산하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또 오셨네요.”
“아…… 네. 너무 자주 오죠?”
“자주 오시면 저희야 좋죠.”
자리를 잡은 민철이 이내 주문을 했다. 그가 시킨 건 맥주와 고추장 삼겹살이었다.
안주와 술은 금방 나왔다. 삼겹살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서준에게 민철이 말했다.
“저기, 사장님.”
“네?”
“제가 어제 혹시 실수한 건 없나요?”
“실수요?”
“이상하게 필름이 끊겨서요. 혹시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하나 있긴 했네요.”
“어떤…….”
“기억 못 하시는 거요.”
“예?”
서준이 생긋 웃었다.
“기억하신다더니 못 하시는 모양이군요.”
“이거 아무래도 술김에 큰 실수를 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죄송은요.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으니 환불해 드릴까요?”
“환불이요?”
“어제 여기서 카드 긁은 거 문자로 안 갔나요?”
“제가 문자 확인은 잘 안 해서요. 잠시만…….”
메시지함을 확인하던 민철이 이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Web발신]XX카드 6*0*승인
박*철
2,000,000원 일시불
09/27 02:33
술 한잔해요
이걸 왜 못 봤지?
아니, 그걸 떠나서 무슨 깡으로 이백을 일시불로 긁은 거지? 이 미친놈…… 미친 새끼!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근데 이백씩이나 긁고 간 거 보면 제가 무슨 큰 실수를 해서 긁고 간 것 같은데…… 집기를 부쉈다거나 가게에 무슨 큰 피해를 줬다거나…….”
“그런 건 없으셨습니다. 이백은 앞으로 오게 될 고 경사님의 술값이라고 긁고 가신 거고요.”
“아…….”
“환불해 드릴까요?”
민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필름이 끊겨서 기억에는 없지만 왜 그 환자분 술값을 대신 냈는지 알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