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291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291화
* * *
시멜리스는 이제 101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했다.
그런 시멜리스는 마을에서 주술사라 불렸다.
샤머니즘적인 의미에서의 주술사는 아니었다.
탁월한 재담으로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해서 주술사라 불렸다.
그리고 시멜리스는 지금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마을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음…… 어떻게 됐을까.”
“얼른 알려 주세요!”
“설마 죽진 않았죠?”
“주인공인데 지금 죽으면 안 돼요!”
“맞아. 지금 죽으면 할아버지랑 마루가 너무 불쌍해!”
“바보. 할아버지 안 죽었으니까 여기 있는 거잖아.”
시멜리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테니의 말처럼 내가 안 죽었으니 여기 있을 수 있었단다. 그리고 내가 안 죽을 수 있었던 건 마루 덕이었지.”
“역시!”
“어떻게 된 건데요?”
“악당들이 치사하게 기습 공격을 했단다.”
“비겁해!”
“악당들 나빠!”
“그리고 마루와 할아버지의 친구들을 포위했지.”
“도망칠 곳은 없었어요?”
“있었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단다.”
“그럼 악당들하고 싸운 거예요?”
시멜리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894 고지.
“으으…….”
시멜리스의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리듬감 있게 부딪혔다.
생전 처음 겪는 추위였다. 누군가가 얼마나 춥냐고 묻는다면 뼛골까지 시릴 만큼 추웠다고 대답할 만큼의 맹추위다.
불이라도 피운다면 좀 나으련만, 적습을 대비해 불도 피울 수 없었다.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시멜리스의 머리 위로 모포가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마루 상병님.”
“싸우기도 전에 먼저 얼어 죽겠다.”
피식 웃은 시멜리스의 마루가 참호 속으로 들어왔다.
“이건 뭡니까?”
시멜리스가 모포를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병사 한 명에게 지급된 모포는 한 장이었다.
마루가 본인의 모포를 내준 게 아니라면 또 한 장을 받아 왔다는 말이 된다.
“미군 애들이 불쌍하다고 주더라.”
“설마 오늘 저녁도 그겁니까?”
시멜리스가 마루가 손에 들고 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접시 위에는 김치와 떡진 밥이 있었다.
“어때. 초호화 저녁이지?”
시멜리스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마루는 접시를 탄약 상자 위에 올렸다.
“너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먹을 겁니다.”
숟가락을 꺼낸 시멜리스는 먼저 밥을 한 숟갈 떴다. 식어 버린 밥은 돌덩이와 같은 식감이었다. 하지만 더 곤욕인 건 김치였다.
“웁!”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시멜리스가 헛구역질을 했다.
이 김치란 음식은 보급이 부실할 때마다 단골 메뉴로 나오는 음식인데, 몇 번을 먹어도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전쟁 중에 음식 가릴 처지인가?
시멜리스는 꾸역꾸역 밥과 김치를 입에 넣었다.
마루보다 먼저 식사를 끝마친 시멜리스가 참호 벽에 등을 기댔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히 떠 있었다. 별을 보니 집 생각이 간절했다.
집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루가 문득 물었다.
“시멜리스, 너는 돌아가면 뭐 할 거냐?”
“음…… 딱히 생각해 본 게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일 돕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커피 농장 하신다고 했었지?”
“예. 상병님은 돌아가면 뭐 하실 겁니까?”
“난 돌아가면 바로 청혼부터 할 거다.”
그렇게 말한 마루가 앞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어때?”
“우와…… 엄청 예쁩니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설마 상병님 여자 친구분이십니까?”
“그럼 엄마겠냐?”
“미인이시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돌아가면 딴 놈이 채 가기 전에 청혼부터 해야지. 그다음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딸 낳고 오순도순 잘 사는 거고.”
시멜리스는 소박한 꿈이나마 가지고 있는 선임이 문득 부러워졌다.
귀국하면 막막한 본인과는 다르게 구체적인 미래 계획이 있는 셈 아닌가.
“상병님은 훌륭한 아버지가 되실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황제 폐하께 훈장 받은 군인이 얼마나 되겠어? 자식들도 엄청 자랑스러워할걸?”
시멜리스는 작게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선임은 전공을 인정받아 황제 폐하께 훈장을 하사받았었다.
“근데 돌아가려면 일단 이 지긋지긋한 전쟁부터 끝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끝나긴 하겠습니까?”
“당연하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아니겠냐.”
“도저히 상상이 안 가지 말입니다.”
시멜리스가 오기 전부터 이 작은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현재 진행형이다. 당장 엊그제만 하더라도 피아가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던가?
‘그런데 이 나라에 전쟁이 없어진다라…….’
역시 쉬이 상상이 안 간다.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끝날 거다. 이 나라를 위해서도 그래야만 하고. 그리고 애들은 또 뭔 죄냐?”
마루의 말에 시멜리스는 얼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반 년 전쯤일까?
행군하며 한 마을에 주둔한 적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순박하고 다정했다. 특히 아이들이 그러했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던 아이들은 이내 마음을 열고 에티오피아군에게 다가왔다.
아이들은 많은 걸 가르쳐 줬다. 김치라는 단어도 아이들을 통해 알게 됐다.
사흘 간 주둔하며 아이들과 강에서 함께 목욕도 할 만큼 가까워졌다.
하지만 군대란 진군을 하기 마련.
아무것도 준 게 없는 에티오피아군인데도, 이제 가 봐야 한다는 말에 뭐가 그리 서러운지 울며불며 매달리던 아이들.
그런 아이들과 다음을 기약하며 부대는 진군을 서둘렀다.
그리고 3주 뒤.
철수 명령이 떨어져 퇴각하던 중에 그 마을을 지나쳤다.
그리고 보았다.
장대에 목이 매달린 시체들과 까맣게 그을린 시체들을.
그중에는 시멜리스와 함께 웃고 떠들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비극은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끝까지 싸워야만 하고.
그때였다.
탕!
갑자기 들려온 총성에 시멜리스는 허둥지둥 철모를 고쳐 썼다.
“적이다!”
타타타탕!
타타탕!
894 고지에 우레와 같은 총성이 가득 울려 퍼졌다.
적의 기습에 주춤하던 아군은 이내 맹렬한 반격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쒸이이이익!
적진에서 조명탄이 쏘아졌다.
그리고 환하게 밝혀진 고지.
“…….”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던 시멜리스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런 시멜리스의 동공에는 수백의 인민군복이 물결치고 있었다.
* * *
접전이 계속되며 전투는 난전으로 치달았다.
“죽어!”
“으아아악!”
“크억!”
여기저기 들리는 비명.
귀가 먹먹했다. 하지만 먹먹해진 귀를 퍽퍽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막 인민군 하나가 참호를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시멜리스는 서둘러 총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
하지만 그새 총알이 다 떨어진 건지 소총에서 공허한 소리만 들려왔다.
“으아아아!”
그걸 본 인민군이 악을 써 대며 총검을 찔러 왔다.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한 인민군의 모습에 시멜리스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허리를 뒤로 뺐다.
후웅!
아슬아슬하게 인민군의 총검이 비껴 갔다.
힘을 과하게 실었던 걸까?
인민군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시멜리스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들고 있던 소총을 있는 힘껏 내지른 것이다.
푸욱-!
살가죽을 헤집는 감촉과 함께 내장의 물컹한 감촉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덥썩!
적군이 부릅뜬 눈으로 시멜리스의 얼굴을 밀어냈다. 시멜리스는 그럴수록 손에 힘을 주었다.
“커헉!”
한 움큼 피를 토한 적이 파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헉헉!”
시체를 발로 차 밀어뜨린 시멜리스는 가쁜 숨을 골랐다.
“퇴각하라!”
호각 소리와 함께 들린 소대장의 외침에 시멜리스는 반색했다.
시멜리스의 소대가 아직까지 이 고지에서 적과 난전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후방에 있는 2, 3소대의 원활한 전투 준비를 위해서였다.
타 소대가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시멜리스가 속한 1소대가 남아 응전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참호와 고지의 이점으로 대대급 병력을 상대로도 잘 버텨 냈었다.
하지만 전투가 난전으로 치달으면서 참호와 고지의 이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대로는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퇴각 자체를 못할 참이었다. 그런 중에 들려온 퇴각 소리였으니 반가울 수밖에.
시멜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그때였다.
“탄통! 누가 탄통 좀 가져와!”
익숙한 목소리.
마루였다.
기관총 진지에서 기관총으로 소대원들을 엄호하던 마루는 탄이 바닥난 건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인민군의 총을 주워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탄통!”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퇴각하고 싶었다. 어차피 퇴각 명령이 떨어지기도 했고.
하지만 홀로 악전고투를 벌이는 마루를 두고 퇴각하자니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멜리스는 철모를 깊게 눌러 쓰고 마루가 있는 기관총 진지로 몸을 날렸다.
두두두두-!
타타탕!
타탕! 탕!
머리 위로 총알이 빗발쳤다.
“시멜리스?”
“헉헉! 여기서 뭐 하십니까?”
“보면 모르겠냐?”
버럭 소리친 마루가 시멜리스가 가져온 탄통을 빠른 속도로 교체하고 기관총을 잡았다.
두두두두두두-.
파죽지세로 기관총 진지를 향해 달려오던 인민군들이 허수아비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전부 퇴각하고 있습니다! 퇴각 명령 못 들으셨습니까?”
마루가 기관총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시발, 나 빼고 퇴각하려 했다 이 거지?”
“지금이라도 퇴각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인마! 가자.”
기관총을 번쩍 든 마루가 시멜리스를 뒤따랐다.
타탕!
탕!
총성에 등줄기가 오싹오싹했지만 다행히 총에 맞는 불상사는 없었다.
그때 왼쪽으로 길을 우회하고 있는 인민군이 눈에 들어왔다.
저대로라면 퇴각한 소대원들이 후미를 따라잡힐 게 불 보듯 뻔한 상황.
그 순간 마루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어디 가십니까!”
“먼저 가!”
“무슨 말이십니까!”
“저 새끼들 안 막으면 소대원들 다 죽어!”
그렇게 소리친 마루가 품속에서 사진 한 장과 우편을 꺼냈다.
사진은 아까 본 마루의 여자 친구였고, 우편은…….
“시멜리스, 잘 들어. 이거 들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가. 알아듣겠어?”
“하, 하지만…….”
“너보다 빨리 뒤질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먼저 가!”
시멜리스가 망설이자 마루가 버럭 소리쳤다.
“너까지 죽을래? 얼른 가라고!”
“…….”
“야! 이 새끼야, 얼른 가라니까!”
“바로 오셔야 됩니다!”
“알았어, 짜샤.”
시멜리스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두두두두두-!
등 뒤로 기관총 소리와.
으악!
적들의 비명 소리.
“커억!”
안타까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시멜리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수 없었다.
* * *
“할아버지,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요?”
시멜리스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뒤로 마루를 볼 수는 없었단다.”
“마루는 죽은 거예요?”
“음, 글쎄. 어떻게 됐을까?”
시멜리스의 역질문에 대한 대답은 뜬금없는 데서 들려왔다.
“마루는 아직 한국에 있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