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54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54화
* * *
벨테브레이가 장검으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말했다.
“내가, 내가…… 졌다! 날 욕보이지 말고 깔끔하게 죽여라!”
“하아…… 이번이 몇 번째지?”
“뭐가 말이냐!”
“날 처치하겠다고 찾아온 거 말이다.”
“143번…… 아니, 145번…… 아니, 146번인가? 아! 생각났다! 148번째다!”
“후우…… 그래, 148번째면 이제 알아듣다 못해 귀에 딱지 앉을 때가 되지 않았나? 죽이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라.”
“난 용사다! 용사는 물러서지 않는다! 절대 도망치지도 않아!”
“이건 어떤 용사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짓이다.”
“어떤 용사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곰곰이 생각하던 벨테브레이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후…… 역시 마왕이로군. 내게 순간적으로 심마를 심다니 말이야. 하지만 어림없다! 주신께서 날 보호하고 계신 이상은 더더욱!”
“그 주신의 실체를 알면 놀랄 텐데.”
“신성모독이다! 용서치 않겠다! 이야아아압!”
벨테브레이가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서준은 가볍게 그의 공격들을 회피했다. 그러고는 벨테브레이가 제 풀에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헉헉! 헉헉헉!”
몇 날 며칠 동안 검을 휘둘러 대던 벨테브레이가 결국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풀썩 쓰러졌다.
그에 서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바보가 따로 없군.”
* * *
“말씀드리는 순간, 마왕 김철준 씨가 파훼에 성공했습니다! 결계에 가려져 있던 12-K98 게이트의 모습이 훤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김철준! 김철준! 김철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에 서준은 고개를 들었다.
땀을 한가득 흘린 김철준이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봐! 이봐, 마왕!”
“음? 아, 그래.”
“대체 정신을 얻다 팔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이럴 때 내 케탈란의 검이 수중에 있었다면 바로 그대를 베었을 텐데 말이지. 그대도 알다시피 내 케탈란의 검은…….”
“내 손에 박살이 났지.”
“……그건 츠룬크의 도끼였어!”
“아니. 정확히 83번째 날 찾아왔을 때 케탈란의 검도 박살 났다. 아주 산산조각이 났지.”
“그럼 헤디우스의 방패는 몇 번째였는데?”
“97번째.”
“그럼 미르쿠스의 단검은?”
“122번째.”
“젠장……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맞나 보네.”
“근데 왜 불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뭘?”
“왜 결계를 제거한 건가?”
서준은 주저앉은 채로 한 손을 번쩍 들고 있는 김철준을 바라보며 답했다.
“옛날에 만난 어떤 바보가 생각났거든.”
“바보?”
“안 될 걸 알면서도 계속 도전하는 바보 말이다.”
“흠…… 틀린 말은 아니긴 하군. 저런 결계는 나 정도 되는 용사가 아니라면 파훼하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 그렇지 않나?”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박연은 흡족하게 웃었다.
“아무튼 다 봤으면 이제 가자고. 그 신분증인지 뭔지를 얼른 만들어야지.”
“신분증이란 게 서두른다고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냐.”
“그러니 더 서둘러야지. 조금이라도 빨리 신분증을 만들려면.”
“그러게 진작 좀 만들어 두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으면 이런 귀찮은 일도 없었을 것을.”
“그때는 내 운명의 사랑을 지구에서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
“…….”
“그래서 말인데 말이 나온 김에 묻지.”
“또 뭔데.”
“지구에서는 청혼을 어떻게 하지?”
서준은 의아했다.
박연이 만나는 사람이 있었던가?
고민 끝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박연이었다. 요새는 가끔 두식과 만나기도 하지만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청…… 혼은 또 왜 묻는 거지?”
“왜는. 그대가 알지 모르겠지만 대륙의 평민들은 보통 청혼을 할 때 꽃반지 하나로 때운다. 좀 있는 부농의 경우에는 신부 집에 소나 말, 철제 농기구 따위를 주며 청혼을 하지.”
“…….”
“그리고 귀족들은 성대한 파티를 열어서 만인이 모인 연회장에서 공개적으로 청혼을 한다. 여기서도 혹시 그런가 싶어서 묻는 거다.”
“여기서는 그런 식으로 청혼을 했다가는…….”
서준은 말을 맺지 못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박연 때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서는 비슷하게 청혼을 했던 것 같군.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모양이야. 그럼 청혼은 어디서 하는 게 좋으려나. 여긴 연회장 같은 게 따로 없어 보이니 일단은…….”
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이라희와 함께할 장밋빛 날들을 꿈꾸며 아들딸 계획에, 손자손녀 계획까지 세워 버린 박연에게는 어떤 말인들 무의미할 터였다.
* * *
황태수의 사무실.
“사장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수하의 말에,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편히 쉬고 있던 황태수가 피식 하고 웃었다.
“네 눈에도 그래 보이냐?”
“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있지. 오죽 좋은 일이면 내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날이 없었다고 생각될 정도겠냐.”
“도대체 뭔데 그러십니까? 저한테도 귀띔 좀 해 주십쇼.”
“크크크. 요새는 안 보이잖아.”
“안 보여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됐어. 넌 모르는 게 약이다. 그나저나 요즘 수고들 많았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아닙니다. 사장님 덕에 훨씬 수월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황태수 장학 재단은 신의 한 수였다.
그 덕에 12구역에서만큼은 황태수의 인기가 꽤 치솟았다. 이런저런 비즈니스도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하는 편이었고.
“그래? 그럼 다행이고.”
“사장님, 이러다 정말로 시의원에 출마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의원은 무슨…….”
황태수는 손을 내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출마하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부하의 말처럼 길 가다 마주치는 주민들마다 시의원 출마를 적극 추천했었다.
물론 그때마다 ‘나는 지역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직한 사업가가 되겠다’라고 말했었던 황태수였지만…….
‘시의원이라…… 크흐흐흐.’
왜, 옛말에 그런 말도 있다잖는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그래. 왕후장상의 씨도 따로 있는 게 아닌데 시의원 씨가 따로 있겠어? 나도 잘만 하면 시의회 들어가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 흐흐흐.’
절로 상상이 됐다.
고풍스럽고 멋들어진 집무실 안.
책상에는 명패가 놓여 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시청 직원이 들어온다.
-의원님, 박 의원님 오셨습니다.
-얼른 들어오시라 해요.
-여! 황 의원!
-제가 찾아뵀어야 하는 건데 송구스럽습니다.
-아닐세. 자네 바쁜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가 찾아와야지.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일전에 말한 공천권.
-예.
-자네만 한 적임자가 없다는 게 당내 지도부의 판단일세.
-그럼……?
-축하하네. 허허허허.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는…… 다 황 의원 능력이지. 앞으로 잘해 보게. 허허허.
한참 망상의 나래를 펼지던 그때.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군.”
“말했잖냐. 요새는 안 보여서…… 허억! 사, 사장님 오셨습니까?”
황태수는 부하에게 나가라고 말한 뒤 얼른 비타오백을 가져왔다.
“바뀌었군.”
“예?”
“원래는 박카스였잖나.”
“박카스로 드릴까요?”
“괜찮다. 바빠 보이니 용건만 간단히 하지.”
바라던 바입니다.
……라는 말은 감히 뱉을 수가 없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혹시 신분증 좀 만들 수 있겠나?”
“신분증이요?”
그때.
사무실 구경에 여념이 없던 박연이 말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신분증이란 게 꼭 필요하다더군. 혼인신고라는 것도 해야 하고.”
“이분은……?”
“가게 직원이다.”
무덤덤하게 설명했지만 황태수는 절대 평범한 가게 직원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애당초 평범하지 않은 인간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평범할 수가 있겠는가?
‘홍콩이나 도쿄에는 각성자들만 상대하는 킬러들이 있다던데 혹시 그런 부류인가? 아니면 미신고 각성자? 근데 결혼을 하기 위해서란 건 무슨 뜻이지? 은유적인 표현 같은데…….’
추측을 하던 황태수는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쫓아냈다.
이 바닥에서 호기심은 명줄을 단축시키는 촉진제와 같았다.
“여기 이분 걸 만드시려는 것 맞지요?”
“맞다.”
“일단 신분증을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외모도 누가 보더라도 한국인이고 한국말도 유창하게 잘하시니 말입니다.”
“그래? 의외군.”
격변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됐다.
그리고 사회 혼란 속에서 그들의 사망신고나 실종 신고를 하기란 쉽지 않았고.
덕분에 남는 신분증이 꽤 있었다.
“다만 페이가 좀 셉니다.”
“얼마지?”
“제가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지난달 같은 경우에는 삼억 정도가 소요됐습니다. 물론 수수료 포함해서 말입니다.”
“삼억을 생각하면 되는 건가?”
“지난달 고객 같은 경우에는 중국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쓰시길 원하셨죠.”
“본인의 이름?”
“예. 그런 경우에는 위조 작업까지 들어가야 돼서 페이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삼억이 소요됐죠. 하지만 단순히 기존에 있는 실종자의 것을 쓴다면 일억이면 될 겁니다.”
비타오백을 그새 다 비워 버린 박연이 심통 난 표정으로 말했다.
“듣자 하니 남의 이름을 빌려 살 것인지, 자신의 이름으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 같은데 나는 내 이름으로 살 것이오.”
“박연이 그대의 본명도 아니잖나.”
“하지만 지금껏 박연으로 살아온 데다 서우랑 연준이도 박연으로 알고 있잖나. 게다가 레이디에게도 이미 박연이라 설명했고. 그러니 박연으로 살아야지.”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자 황태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어.’
레이디는 누굴 의미하는 걸까?
킬러들의 수장?
아니면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 조직의 명칭?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입 닥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황태수였다.
이런 생각을 황태수가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서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삼억이면 되는 건가?”
“예!”
“따로 준비할 건?”
“사진이 필요합니다. 신분증에 들어갈 사진이요.”
“준비해서 가져오지.”
“저기……!”
“또 뭐지?”
“어디 박씨를 쓸 건지와 어떤 연 자를 쓸 건지도 말씀을…….”
그 말 한마디에 박연은 한 시간 동안 어떤 본관을 가질지, 또 이름으로는 어떤 연 자를 쓸지 고민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서 그가 선택한 건 밀양 박씨와…….
“이게 좋겠군. 사모할 연(戀). 아주 마음에 들어.”
* * *
예의 석실이었다.
석실의 한가운데에는 두 사람…… 아니, 그저 사람속(人属)에만 포함될 뿐, 전혀 다른 인종일지도 모를 이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지?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냔 말이다.”
붉은 입술이 인상적인 여자가 말했다.
“서둘러서 좋을 건 전혀 없어, 메루트스.”
“느긋해서도 좋을 건 전혀 없을 텐데, 카달란?”
“내가 느긋하게 진행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이쪽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공간이 다른 걸 어쩐단 말인가? 이제 겨우 십 년 기다렸다. 그러니 앞으로 조금만 더…….”
“겨우 십 년? 너는 십 년일지 몰라도 우린 천 년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분들도 슬슬 네가 딴마음을 품은 게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다고!”
“무슨 말이지?”
“진작 끝나고도 남았어야 할 일이 아직까지도 안 끝났으니 모두가 의심을 할 수밖에.”
“하아…… 말했잖나. 게획에 차질이 생겼을 뿐이라고.”
“그 빌어먹을 변수조차 변수로 만들지 말라고 다른 분들이 널 보냈던 것이다!”
“…….”
메루트스란 여자가 카달란이란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말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야. 하카무스가 후임으로 오기 전에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