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ation of the Shilohan Butterfly RAW novel - Chapter 1
01. 사랑스러운 아이
세상살이가 퍽퍽해지면 낭만이란 건 휴지 조각으로 변한다. 코흘리개인 차온이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얘기였다. 차온은 보름 보육원의 독방을 제 안방처럼 드나드는 소녀였다. 독방 단골이 된 이유는 태도 불량이었다. 요약하자면 말썽을 이상한 방식으로 부린다는 거였다. 왜 1 더하기 1이 2가 되느냐 꼬치꼬치 캐묻는 건 다반사고 수다쟁이에 왈가닥 같은 면이 문제란다.
“날씨가 사랑스러워요.”
사랑스럽다는 말을 오만 데 갖다 붙이는 게 차온의 입버릇이었다. 구멍 난 레깅스, 캐릭터 프린트가 희미해진 티셔츠도 사랑스럽다는 별종이었다. 단체가 개인보다 우선인 보육원 입장에선 차온처럼 톡 튀는 별종이야말로 골칫거리였다. 밥벌이는 바라지도 않으니 사고나 치지 말라는 원장의 단골 멘트는 대체로 차온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원장님.”
“차온. 규칙 지켜야지. 들어가자 하면 들어가는 거야.”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영 다루기 어려운 아이니만큼 원장이 나서서 일대일 특별 케이스로 관리하는 중이었다. 나름 체계를 갖춘 보육원이라고 홍보하기 위해 매주 빼지 않던 보여 주기식 산책이 30분 전에 끝났다. 재깍 안으로 들어가야 함에도 차온은 늑장을 부렸다.
꼬부랑 철사로 휘감긴 담에 올라타 아래쪽 구경에 신이 났다. 하도 허리를 구부리는 바람에 차온의 청바지가 철사에 걸렸다. 신물 난 원장은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차온의 뒤에 섰다.
“누가 지나간다고?”
원장은 차온이 무얼 눈알 빠질세라 보는지 알고 있었다. 노란 안전모를 쓰고 좌우로 줄지어 가는 행렬이 보였다.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원장은 몰래 가래침을 담에 뱉었다. 차온은 잡지에서 본 우주 정비사 같다며 감탄했지만, 원장은 안전모를 쓴 작업부의 임금이 쥐꼬리란 것부터 떠올렸다.
“저기 새로 광산 생겼다더니. 거기 작업하시러 가는 분들이구나.”
“저도 저기에 끼고 싶어요.”
“온아.”
“네?”
“그럼 온이는 평생 UT에 가지 못할 텐데?”
귀에 딱지가 앉게 말한 UT 행성을 들먹이니 차온의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차온이 몸서리치게 좋아하는 주제였다.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아직 저한테 그쪽은 가망 없다는 걸 모르는 나이였다. 하물며 상류층이 돈을 다발로 줘도 못 구하는 게 UT 행성으로 가는 티켓이었다. 어른들 눈 밖에 나서 입양도 그른 차온이 갈 리 만무했다.
“원장님. 그럼 저 사람들은 UT에 가지 못해요?”
“대개는 그렇지.”
“저는 갈 수 있고요?”
“그럼.”
“왜요?”
아뿔싸. 질문을 보따리로 이고 다니는 아가씨인 걸 깜빡했다. 저 밑바닥 인생처럼 되지 말라는 소리에 보따리가 열린 모양이었다. 차온은 브레이크 없는 주둥아리를 가졌다. 실랑이는 길면 길수록 손해였다. 원장은 차온의 등을 성의 없이 두들겼다.
“온이가 착하게 굴면 갈 수 있지.”
설탕 발린 말에 넘어간 차온은 좋다고 뛰어다녔다. 차온이 뛸 때마다 황색 먼지가 풀썩거렸다. 원장의 주름살이 깊어질 만했다.
현재 보름 보육원은 반값으로 후려쳐 내놔도 팔리지 않는 곳에 지어졌다. AVRTA. 속칭 아바리라고 부르는 광산이 보육원에서 4km 떨어진 곳에 생겼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보름 보육원에 사는 애들의 절반은 거기로 보내질 터다. 게다가 누가 뭐래도 그중 1순위로 가게 될 애는 차온이었다. 말했다시피 뒷배는커녕 입양도 텄으니 말이다.
원장은 우는 애를 달래려고 부도 수표를 남발했다. 잘만 하면 UT에 갈 거야. 그러니까 꽁해 있지 말고 얼굴 펴야지. 어서 자라나 우리 보육원의 모범이 되렴. 그러나 부도 수표 남발도 열 살이 넘어가면 먹히지 않는다. 배은망덕한 놈들.
* * *
보름 보육원에 살면 미용실을 갈 필요가 없었다. 월말마다 구식 바리캉을 든 원장이 전원 귀밑 3cm로 싹둑 잘라줬다. 그래서 월말이 돌아오면 나이순으로 마당에 줄을 섰다. 그리고 월말이 돌아오면 차온은 거품을 물었다. 귀밑까지 자르는 머리 스타일이 촌스럽다는 이유였다. 몇 해째 차온은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아직 못 찾았어요?”
“네. 화장실에두…….”
“지가 갈 데가 여기밖에 더 있어? 좀 있으면 올 거예요.”
질질 길러서 고전 영화 배우처럼 묶음 머리가 하고 싶단다. 그러다 잡히면 머리를 사수하려고 바닥에 드러누웠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비안전지대 어른들은 녹록지 않았다. 머릿니라도 생기면 곤란했다. 짧게 깎아 관리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혹시라도 밥때를 놓칠까 봐 군말 없이 서 있는 또래 좀 보아라. 그러나 차온은 어르고 타일러도 그때뿐이었다.
“괜히 받았어. 안 그래도 출신이 그래서 받아 주기 싫었는데…….”
“온이가 그 애죠?”
AVRTA 광산 근처는 작업자 외엔 출입 금지였다. 더욱이 작업자조차 장비를 갖추고서 들어가는 위험 지역이었다. 광산 근처에 변이 짐승이 출몰하는 걸 생각하면 여기가 아이를 키울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AVRTA 광산이 생긴다고 확정되면 주민들은 땅을 팔고 안전한 지역으로 이사 가기를 바랐으나, 땅값은 줘도 안 가질 만큼 바닥을 친 후라 눌러앉을 수밖에 없다.
“그러게. 받아 주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차온은 적당한 키에 코도 오뚝하니 예쁘장했다. 다만 출신이 문제였다. 보육원에서 출신 따지는 게 웃긴다고 하겠지만 여기도 여기 나름의 계급이 존재했다.
광산 56번 근방에서 작업자도 아닌 갓난아기가 살아남았다. 어미도 아비도 누군지 모른다. 이 보육원 저 보육원을 전전한 차온은 기어코 지원금도 없는 보름 보육원의 문턱을 넘었다. 원장은 남들한텐 아기가 잘못이 있냐며 큰소리 떵떵 쳤지만, 차온이 반골 기질이 보일 때마다 아차 싶었다.
“찾았습니다!”
아무리 지원금 없는 보육원이라도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만에 하나 애들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경리 일을 보는 직원이 이 잡듯 뒤지고 온 모양이었다. 직원에게 멱살 잡혀 끌려 온 차온이 울상을 지었다.
“차온.”
“온아. 머리 많이 안 깎을게.”
건성으로 달래봤자 씨알도 안 먹혔다. 어제오늘 당해본 게 아니었다. 차온은 딱따구리처럼 고개를 앞뒤로 흔들었다. 머릿니는 없다며 열변을 토했다.
“기를래요! 영화배우처럼 머리를 길러서 위로 묶고 싶어요.”
“나중에 네가 어른 되면 지지든 볶든 신경 안 쓴다. 거기 팔 잡으세요.”
구시대 유물인 TV가 시내 성당에 있었다. 견학 삼아 성당에 놀러 가 영화 한 편을 보여 줬더니만, 가당치 않게도 광산 작업자 1순위인 차온이 배우를 꿈꿨다.
그때부터 배우가 된답시고 기행을 벌였다. 제 딴엔 노력이지만 보육원 입장에선 기행이었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지만 반대는 안 했다. 반대하면 저 물건은 시시콜콜 물어 댈 사이즈라고 원장에게 한 소리씩들 보탰다. 원장도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어른 셋이 버둥거리는 차온의 몸을 잡았다. 그때 막 입소한 다섯 살짜리 애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척 보면 척이라고. 원장은 애 걸음걸이만 봐도 진단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원장님. 머리 아파요.”
“약은?”
“안 먹었어요.”
“먹고 자렴. 가벼운 감기일 거야.”
하지만 원장의 표정은 저거 명줄이 갈 데까지 갔다는 표정이었다. 아이가 대자로 넘어져도 신경 쓰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직원 중 하나가 혀를 찼다.
“뒷산에 자리 하나 더 마련해 둬야겠군요.”
“이래서 비안전지대에서 못 살겠다니까. 내가 애 안 낳는 이유 알겠지.”
AVRTA 광산이 생긴다고 공표가 나자마자 주민들이 이사를 감행하는 데에는 악취, 오염, 치안 등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노인과 아이는 방호복을 일상생활에서 입고 다닐 수 없으니 미리 죽을 날을 받아놨다고 봐야 했다.
“옳지. 다 잘랐다.”
원장은 바리캉을 쓰기 전에 차온의 머리를 가위로 정리했다. 차온은 데굴데굴 구르며 악을 질렀다. 기운이 황소를 때려잡을 만큼 팔팔했다.
이러니 불길하단 거다. 소화시킨 거라곤 영양바밖에 없는 꼬맹이가 힘이 좀 좋아야지. 여기는 말 많고 탈 많은 비안전지대였다. 약 먹은 파리처럼 픽픽 쓰러지는 게 대수일까. 재수 없으면 변이 짐승에게 물려 가기도 했다. 차온이 별종이든 아니든 사람 심리가 그랬다. 원장은 괜히 심사가 틀어질 때마다 차온의 출신을 문제 삼았다.
차온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거울을 찾았다. 머리 길이가 3cm보다 짧은지 어쩐지 확인하는 눈치였다. 원장은 빈말로라도 단발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바짝 깎았다. 상태를 확인한 차온의 눈에 실망이 비쳤다.
“못생겼어. 하나도 사랑스럽지 않아요.”
그놈의 사랑 타령. 원장은 사랑의 ‘사’ 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이 났다. 이미 머리 꼴을 돌릴 순 없었다. 주기적으로 겪는 차온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두 사랑해 보도록 노력할게요.”
결격 사유가 없었더라면 입양을 백번 가고도 남을 아이였다. 하지만 여긴 동정이 사치인 동네였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입양 문의 차 연락드린다는 사람도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안전지대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 빼고는 짐 취급이었다. 차온의 사정은 안타까웠다. 그러나 안타까운 게 밥 먹여 주진 않았다.
* * *
보육원 고참이 된 차온은 말수가 줄었다. 그래도 발표를 시키면 곧잘 준비해 만점을 받았다. 원장은 갈수록 딱 부러진다며 칭찬했지만, 매일 같이 따로 불러내 배우의 꿈은 접었느냐고 물었다.
보육원의 목표는 이도 저도 아닌 떨거지를 하루빨리 취직시키는 거였다. 사실 말만 취직이지 떨거지답게 광산으로 가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보육원 졸업을 앞둔 아이는 백이면 백 3급, 2급 도시의 취직자리를 원했다. 비안전지대는 보호자 없이 되는 게 없었다. 보육원이 주선해 주는 취직자리가 최선인 셈이었다.
“자. 여기가 UT입니다.”
UT 행성은 인류 최대의 관심사였다. 80층짜리 고층 건물을 우후죽순 짓고 있는 거리, 자동 세척되는 대리석 바닥, 시범 운영되고 있는 비행 자동차, 선택받은 인류의 보금자리.
차온은 선전용 사진 몇 장에 마음을 빼앗겼다. 있어 보이는 것에 관심 가질 나이였다. 선생은 이번에 정반대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비안전지대보다 낙후된 곳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아파트는 비둘기 똥에 의해 부식되었고, 구시대의 물건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의 모습은 콩트 같았다. 배우일 게 틀림없는 여자가 바퀴벌레를 스낵처럼 먹었다.
아이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선생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수업의 목적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비가입국의 일상입니다. 그들은 우주로 나가면 사람이 죽는다는 멍청한 말을 아직도 믿고 있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무려 수억 명이랍니다.”
AVRTA 광물은 지구로 떨어진 유성에서 발견했다. 연일 언론에서 AVRTA 광물이 바닥 난 지구의 연료를 대체할 신소재라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광물은 한정적이었고 세계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AVRTA 광산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나라와 아닌 나라로 나뉘었다. 아닌 나라의 수가 적었다. 가입국은 신소재의 출연에 힘입어 비약적인 기술의 성장이란 쾌거를 얻었다.
십수 년이 지나고 신시대에 대한 광기가 식을 즈음이었다. 사태를 지켜보던 비가입국이 AVRTA 광산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비가입국이 소수이자 약자인 시대였다. 비록 AVRTA 광산 부작용인 변이 짐승과 사막화는 내부에서도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였지만, 언론 보도조차 부작용을 비안전지대만의 문제로 돌리곤 했다.
그로 인하여 계층이 뚜렷하게 나뉘었고 전 세계적으로 빈부 격차, 정보 격차가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보안군 때문에 시위도 여의치 않았다. 기대 수명이 짧은 비안전지대는 인구수마저 줄어드는 판이었다.
“여러분도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좋은 곳으로 입양 갈 수 있을 거예요.”
고로 입양이 아니고서야 비안전지대 탈출은 꿈도 못 꾼다는 소리였다. 사정이 이럴진대 UT 행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차온은 수업 내용을 필기하다 말고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매주 오는 이야기 선생은 까칠하게 답했다.
“질문 있니?”
“그렇게 좋은 곳이면 다 같이 떠나면 되지 않을까요?”
“온아.”
“네.”
“지구가 UT보다 약 1.8배 더 크단다. 게다가 UT는 매년 쓸 수 있는 자원의 양이 한정되어 있어. 모두를 데려갈 순 없지.”
“그러면 아끼면서 살면 되잖아요.”
수업 시간에 미꾸라지가 끼어들었다. 번번이 황당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선생은 수업 분위기가 해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소리에 무게를 잡았다.
“온아.”
“네.”
“온이는 광산에서 일하고 싶니?”
“거기서는 뭘 하는데요?”
수업에 참관한 원장이 손으로 엑스 표를 만들었다. 차온에게 질문은 금지였다. 혼을 내도 기가 죽기는커녕 가물철 잡초처럼 억세졌다. 그래도 원장의 제스처 덕분에 수업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한 귀로 흘려듣자는 선생의 태도도 효과적이었다. 멍석을 깔아줘도 질문 못 하는 바보가 무더기로 생기니 말이다.
* * *
원장이 구박하든 말든 차온은 열심히 살았다. 공용어는 기본이고, 구시대의 잔재로 여겨지는 외국어 두세 개를 원어민 수준까지 구사했다. 하지만 콩알만 한 로봇으로 통역이 가능한 시대에 차온의 능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원장은 차온이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예산 낭비라며 혀를 찼다. 여러 번 입양될 기회가 있었지만, 원장과 면담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온을 데려가지 않으려 했다. 그게 무려 열네 살까지 반복됐다. 차온은 입양 갈 나이의 마지노선이라는 열다섯 살을 앞두고 있었다. 복장 터진다는 말이 딱 맞아 들었다.
하루는 직접 원장실에 찾아간 적도 있었다. 지난 시험의 성적표와 밤새 번역한 책을 든 채였다. 차온은 보육원의 마스코트 같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원장실로 들어갔다. 휴식 시간인지 원장은 맥주 캔을 따고 있었다.
“차온?”
“안녕하세요.”
원장실에 밥 먹듯이 출근 도장 찍는 건 차온밖에 없었다. 차온은 무거운 걸음을 뗐다. 플라스틱 커버로 된 서류철을 원장의 책상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이게 뭐니?”
“지난 시험 성적표랑 제가 번역한 책이에요.”
“그런데?”
차온은 새침하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원장은 맥주 캔을 따다 말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저는 입양 가기 충분해요.”
“글쎄.”
“얼굴도 예쁘구요.”
“그래?”
원장은 차온이 꺼내 놓은 비장의 카드를 도로 엎어두었다. 조롱하듯 맥주 캔을 들고 웃기만 했다.
“차온.”
“네?”
“열아홉이 되면 나가야 되는 것, 알고 있지?”
“물론이죠.”
“요 앞에 괜찮은 햄버거 가게가 있단다. 너 햄버거 먹어 봤니?”
“아니요.”
“맛이 끝내줘. 영양바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지.”
끼니는 하루 두 번, 시큼한 영양바로 때웠다. 명절엔 보육원에도 떡이 들어오긴 했으나 그건 직원부터 챙겨 주는 게 관례였다. 아이들 몫으로 얼마나 남느냐는 전적으로 원장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 말하나 마나 미운털 박힌 차온은 거기서 열외였다.
식자재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바람에 어지간한 식당은 등급이 있는 도시 내에 들어가서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나마 비안전지대에 있는 대기업의 프랜차이즈들은 도시로부터 재료를 공급받아 식사다운 식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웬만한 노동자의 한 달 봉급 값이었다. 그런 곳은 비안전지대의 관리인이나 출장 겸 내려오는 도시 사람이 주 고객층이었다.
“가게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3급 내 도시로 가고 싶어요.”
“왜?”
원장은 관심 없는 표정으로 식은 맥주가 맥주냐는 볼멘소리를 했다. 애가 탄 차온은 호랑이 로고가 그려진 맥주를 노려보았다.
“월급을 더 많이 주니까요. 당연하잖아요.”
“당연하지 않지.”
차온은 아무도 봐 주지 않는 성적표의 끄트머리를 접었다가 폈다. 원장은 차온을 치기 어린 애송이로 볼 뿐이었다.
복어 독 같은 원장의 주둥이가 열렸다. 보육원에서 자란 덕에 고생도 모르고 살면서. 보육원을 나가게 되면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해 도둑질할지도 모른다면서. 은혜도 모르는 얍삽한 놈이란 말만 빼고 잔소리는 10분가량 계속됐다.
“차온.”
“네.”
“보육원 밖은 지옥이야. 나가 보면 네 생각보다 더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 거다.”
차온은 성적표를 접다 말고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그건 원장의 말이 맞았다. 보육원 내에서도 씨가 마른 평등이 바깥이라고 지켜질 리 있겠는가.
“저는 어떻게 해야 원장님 마음에 들 수 있어요?”
원장은 한 수 굽히고 들어오는 차온을 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금세 태도를 바꿔 낙동강 오리알 보듯 차온을 바라봤다. 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쉬운 것 하나 없는 원장이 차온의 뒤를 봐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차온의 출생 배경도 문제가 많았다.
예쁘장한 얼굴 탓에 차온이 탐나서 보육원에 문의를 넣은 부부가 몇 있긴 했다. 그러나 광산 근처에서 태어난 아이여도 괜찮냐고 묻자마자 서둘러 손을 털었다. 보름 보육원에 문의하는 부부의 팔 할이 불법적으로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부류였다. 불법을 저지르면서 입양한 고아의 병 수발이나 들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나가 봐. 상담 시간은 끝이야.”
마음에 드는 애가 되어 보겠다고 구슬려봐도 원장의 태도는 시베리아 저리 가라였다. 차온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이 가져온 성적표와 번역물을 챙겨 원장실을 나갔다. 나오는 길에 허리 숙여 인사까지 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차온의 걸음이 느릿해졌다. 무거운 마음을 지탱할 만한 기운이 없었다.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도시 취직자리는커녕 동네 햄버거 가게도 간당간당한 형편이었다.
괜찮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다.
차온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나온 사탕 껍질을 빤히 들여다봤다. 성탄절 날, 성당 TV에서 구시대의 영화를 틀어준 적이 있었다. 제목이 유치찬란한 흑백 영화였다. 내용도 12세 미만 영화답게 촌스러웠다.
하지만 흑백 영화 안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있었다. 저마다 원하는 꿈이 있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았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소리로는 용을 써서 3급 도시에 가도 죽 쑤어서 개 주는 꼴이라고 그랬다. 뒷배가 없으면 광산에서 일하느니 못한 월급을 받는다고 들었다.
게다가 근방에 있는 3급 도시는 검문을 거치고 들어가야 했다. 원장의 추천서나 양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피 검사부터 가족관계증명서까지. 내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다.
“망했네.”
하지만 실망은 밥도 월급도 주지 않는다. 방으로 돌아간 차온은 머리를 싸매고 앉아 새로운 탈출 계획을 준비했다. 버스를 태워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버스를 몰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려면 6년 정도 남았다. 그동안 치사해도 원장에게 아부를 떨어 취직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게 나았다. 자존심 세운답시고 산 입에 거미줄 칠 수 없었다.
어떻게 아부를 떨어야 원장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하루가 다 갔다. 다들 자리를 펴고 눕는데 차온만 책상에 앉아 한숨을 늘어놓았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침울할 때였다. 자리를 편다고 북적거리던 룸메이트 일곱은 벌써 꿈나라행이었다.
차온은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물은 보육원에서 정해준 양 만큼만 마실 수 있지만, 부엌에 직원이 어제 먹다 남긴 물이 남아 있었다.
룸메이트 일곱 중 다섯은 고자질쟁이였다. 차온에 관한 거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못 믿는 원장의 성질머리 때문에 고자질쟁이가 올해 셋에서 다섯으로 늘었다. 그런데 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벌떡 일어날 고자질쟁이들이 쥐 죽은 듯 자고 있었다.
이유 없이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구두쇠 원장이 난방 값을 아끼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차온은 옷장에서 단추가 빨간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그러면 그렇지. 문을 닫고 나온 차온은 복도 쪽 창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부엌 옆에 세운 가벽 뒤, 원장실과 이어진 복도였다. 그 복도로 이어진 위층 계단은 7세 미만 아이들이 쓰는 방과 이어졌다. 거기서 두둑,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원장은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불시에 쳐들어와 방 안을 이 잡듯 뒤지곤 했다. 술, 담배, 면으로 된 양말 등. 혹시 자신의 기호품을 훔쳐서 숨기진 않았는지 감시했다.
그 소리인가 싶지만 새벽이었다. 원장의 급습은 밤 10시 이후엔 없었다. 두두둑, 쿵, 소리가 커졌다. 원장에게 들키면 도둑 누명을 쓰기 딱 좋았지만, 한번 자리 잡은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천천히 발을 떼었다. 차온은 계단을 네 발 자세로 기어서 올라갔다. 계단 위에서 나는 기척은 거침이 없었다. 쿵, 쿵, 육중한 물체가 바닥을 찧는 소리였다. 차온은 쭈뼛쭈뼛 주위를 살폈다. 복도에 쌀 포대 같은 인영이 쓰러져 있었다. 사람 얼굴을 분간 못 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원장님?”
구시대의 영화 중에는 공포물도 있었다. 성당에서 틀어주면 반 이상이 졸도할 정도로 인기 없었지만, 영화광인 차온은 재미가 있건 없건 결말까지 봐야 직성이 풀렸다. 공포물에서는 시체를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본보기처럼 죽는다. 일종의 규칙 같은 거였다.
어둠에 적응한 눈을 끔뻑이자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됐다. 복도에 쓰러진 건 원장뿐만이 아니었다. 엎드려 널브러진 직원 두엇까지 함께였다. 원장실에서 보았던 맥주 캔이 직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안 자네.”
그때 손전등 빛이 차온을 비췄다. 손전등을 든 남자는 수납장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었다. 반응이 없자 남자는 장난치듯이 손전등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수납장 위에서 내려왔다.
쓰윽 스치듯 보았다. 남자는 까만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고개를 폭 숙였다가, 이왕 들킨 마당에 얼굴이나 확인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남자는 원장을 기절시킨 범인일 거다. 나중에 원장이 물었을 때 얼버무리지 않으려면 봐 둔 게 있어야 했다. 까만 셔츠에 청바지. 버튼이 두 개인 손전등.
“누구세요?”
과묵한 남자가 걸어와 차온의 앞에 섰다. 남자는 차온의 머리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료한지 손전등을 손가락으로 잡고 휘휘 돌렸다. 남자가 헛손질해 떨어트리면 머리가 된통 깨질 것 같았다. 파리 같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다. 차온은 양손을 번쩍 들었다. 손전등 빛 때문에 눈이 시렸다.
당신을 해칠 의사가 없다, 라는 항복의 의미라고 영화에서 배웠다. 하지만 남자는 항복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작게 감탄사를 뱉고 손전등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차온은 양손을 든 채로 뒷걸음질 쳤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계단으로 슬금슬금 갔다.
옥탑 창문으로 시퍼런 달빛이 들고 있었다. 차온은 눈치 싸움을 하며 계단 앞까지 섰다. 남자는 딴 꿍꿍이가 있는지 방관 중이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차온은 숨을 헙, 들이마셨다. 계단 난간에 남자가 등을 기대고 있었다. 발소리 없이 차온의 코앞으로 이동한 셈이었다. 게다가 총을 들고, 하얀 가면을 썼다. 민무늬 가면은 남자의 눈과 콧등을 간신히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강건한 턱선과 회색의 머리칼을 가졌다. 한 손은 난간에, 한 손에는 차온을 겨눈 총이 있었다.
“신고하지 않아요.”
어쭙잖은 모형이 아니라 쏘면 죽는 총이었다. 방아쇠까지 하얀 걸 보니 신식 총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장신의 남자와 싸워서 이길 거란 가망도 없고. 신고라는 건 무사히 놔 달라는 어설픈 협박이었지만, 가소롭다는 듯 웃은 남자는 총구로 턱을 긁었다.
“김진양은 금고를 어디에 뒀을까.”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상냥한 편이었다. 가면에 난 구멍으로 진한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머리부터 눈동자까지 평범과 거리가 멀었다. 강도질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혼혈인가.
“김진양이 누군데요.”
“왼쪽에서 첫 번째.”
차온은 쓰러진 인영 중 왼쪽에서 첫 번째를 확인했다. 누가 보아도 원장의 실루엣이었다.
“원장님 금고는 몰라요.”
“기대도 안 했어.”
생존 가능성이 바닥을 치는 중이었다. 차온은 머리를 굴려 원장의 금고가 있을 법한 곳을 추측해 보려 했지만, 총기 든 강도한테 추측성 이야기를 해봤자 역효과만 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모른다는 답을 하면 죽일 것 같아 차온은 차선책을 내놓았다.
“찾아볼게요.”
차온에게 관심을 끊고 총기를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갸웃거렸다.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차온을 쳐다봤다.
“그래야 살려줄 거잖아요.”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웃은 남자가 가면을 살짝 고쳐 썼다.
“첩자가 되겠다고?”
남자는 말수가 적었다. 그리고 차온에게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차온은 팔이 저려 손을 내렸다. 남자는 그것까지 봐줬다.
“이름은.”
첩자가 되겠냐고 묻더니만 바로 면접에 들어갔다.
“차온이라고 하는데요.”
“차, 온. 외자?”
“네.”
사람 셋을 쓰러트린 남자가 정상인처럼 묻고 답하는 게 무서웠다. 차온은 우람한 원장의 등을 보며 한숨 쉬었다. 맥주로 찌운 덩칫값도 못 하고.
“여기서 죽을 수 없어요.”
차온의 말에 남자는 맞장구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래. 자기는 죽을 수 없다고 하지.”
“전 진짜로요.”
“그래, 그래.”
“진짜 죽으면 안 돼요.”
별 모양의 전구를 매단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싶었다. 보육원의 트리는 톱밥으로 만든 별과 장신구를 달았다. 그게 죽으면 안 되는 이유였다. 성탄절에 오색 전구를 달 수 있는 트리를 가지기 전까지 죽을 수 없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남자의 입매가 무척 무심하게 보였다. 차온은 이 거래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일 생각은 없는지 남자는 총구가 바닥을 향하도록 총을 쥐었다.
“손 내밀어 볼까.”
“네?”
초록색 알약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차온은 용케 그 손톱만 한 알약을 받았다. 남자는 차온의 손에 든 알약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에 타서 먹여 봐.”
“그럼……. 죽나요?”
차온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것은 상대 쪽이었다. 남자는 난간에 기대어 몸이 흔들리도록 웃어 젖혔다.
“죽길 바라서.”
“아니요. 안 죽었음 좋겠어요.”
“왜. 잘해 줘?”
“아니요. 취직해야 하는데 원장님이 죽으면 곤란해요.”
“취직?”
“안전하게 여기를 탈출해야 하니까요.”
그때 원장이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았다. 차온은 알약과 범인을 번갈아 보았다.
“진짜 그냥 자나 보네요?”
“그러게. 신기하다.”
“어떤 게요?”
“이 시설 전체에 수면 가스를 뿌려 뒀는데……. 넌 지금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잖아.”
원장은 출신이 수상쩍어서 입양 못 간다는 소리를 밥 먹듯이 했다. 우연의 우연일 뿐인데 괜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차온은 지금 느끼는 이 비참함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원장의 말마따나 하자 있는 별종이 된 기분이었다.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어 겉으로 그 감정의 동요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약효가 안 받는 사람도 있더라. 가스 떨어질 시간 됐네. 가야겠다.”
손목시계를 유심히 본 남자는 난간에 기댄 허리를 폈다.
“전 그냥 살려 주는 거예요? 내가 다 불어 버리면 어쩌려고.”
“얻고 싶은 게 있다면 물고, 아니다 싶으면 뱉어. 애 달래고 채근할 만큼 필사적인 일도 아니야.”
일부러 차온은 도발하듯 물었다. 수다가 지겨운 듯 남자는 채찍 대신 당근을 흔들었다. 살려줄 테니 재지 말고 물어보란다. 차온이 아는 어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나가 죽으라고만 했다.
차온은 시키는 대로 하면 보상을 준다는 말에 관심이 생겼다. 대답이 없자 남자는 거리낌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싫으면 말라는 식이었다. 차온은 멀어지는 남자의 팔을 힘없이 잡아당겼다.
“그럼…….”
짐작한 것보다 키가 컸다.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차온을 올려다보았다. 총기를 눈앞에 두고도 머리 굴리던 배짱은 내다 팔았다. 차온은 아랫입술을 물고 핥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성공하면, 영상을 볼 수 있는 기기.”
남자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대답 없이 웃고는 갈 길을 갔다. 그는 총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문을 열었다. 성탄절을 앞둔 새벽의 공기가 열린 문을 타고서 들어왔다.
차온은 등 근육이 선명한 까만 셔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꽤 오래 남자의 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닷물처럼 새파란 새벽으로 나아가기 직전. 어쩌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회색의 눈이 건조하게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남자는 예의 바른 강도인 양 문까지 잠그고 떠났다. 남자가 떠나고 남은 건 알약과 복도에 쓰러진 사람 셋이었다. 신은 한쪽 창문을 닫을 때, 다른 쪽 창문을 열어주신다고 했다. 이건 기회였다. 신식 총과 수면 가스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다 얻어 낼 게 많을 것이었다. 인원 미달로 자리가 나면 취직시켜 준다는 원장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차온은 기꺼이 첩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비안전지대는 하다 하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벽체 뼈대만 버티고 선 집을 보면 사람이 살기엔 그른 것 같지만, 거기서도 다달이 월세를 받는 집주인이 있다는 소문은 소문이 아니었다.
비안전지대에선 집도 절도 없으면 개보다 못하게 살았다. 차온은 밤낮 계산기를 두드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 사람답게 살 방법은 원장의 눈에 들어 좋은 입양 자리를 얻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보육원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 애를 받아 주었다며, 그것만으로 감지덕지하라는 사람에게 잘 보여 봤자 무용지물일 것이다. 결국 살길은 보육원 밖에서 찾아야 했다.
차온은 손에 든 알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만에 하나 이 약이 사람을 죽이는 약이라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만약 죽일 생각이었다면 수면 가스를 푼 날에 실행했겠지. 남자는 원장의 금고를 아느냐고 물었다. 신무기까지 들고 있는 양반이 주머니가 비어서 보육원을 터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사정일까.
“차온?”
“제가 할게요.”
원장의 비서나 다름없는 직원의 지시를 열댓 번 넘게 무시했다. 아무리 변두리 보육원이어도 위계질서를 모르는 애를 고아랍시고 계속 봐줄 리는 없었다. 차온은 순진한 척 눈망울을 반짝였다. 직원의 손에 든 쟁반 접시를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거품이 잔뜩 낀 맥주와 마른안주 거리가 올려져 있었다. 이 변두리 구역에서는 저 정도면 만찬이었다. 차온은 쟁반 위에 올려진 마른안주가 오징어란 것도 몰랐다.
“이제야 점수 좀 따 보려고?”
비아냥거리는 직원의 말에도 차온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적극적인 태도에 당황한 직원은 고민하다가 차온에게 쟁반을 들려 주었다. 어차피 아이 하나를 불러 들고 가라고 시키려던 참이었다. 직원은 월급도 적으면서 야근에 술 심부름까지 시킨다고 투덜거렸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 가리지 않고 성질부터 내는 원장 때문에 여러 번 애를 먹었다.
직원은 습관처럼 담뱃갑이 든 코트 안쪽 주머니를 훑었다가, 쟁반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차온에게 싸늘히 물었다.
“왜.”
“저기.”
차온은 천진난만한 손짓으로 맥주를 가리켰다.
“이건 물 같은 거죠?”
직원은 한숨으로 답답한 가슴을 축이며 대답했다.
“그래, 뭐, 대충 그런 거지. 그나저나 얼른 가라. 더 늦으면 성질내시니까.”
“네.”
보육원에서 말 안 듣기로는 1등을 놓치지 않던 차온이 거짓말처럼 고분고분했다. 직원은 보육원 내 흡연 구역으로 연결된 뒷문을 어깨로 밀쳤다. 녹물이 묻어 나는 문짝이 겨우겨우 열렸다. 고쳐 달라고 한 지가 다섯 달이 넘었다. 하지만 고쳐주겠노라 약속한 원장은 문이 삭는 지경에 와도 깜깜무소식이었다. 하기야 이 보육원에 안 그런 게 있냐마는.
봤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하필 와도 네가 왔냐며 구시렁대는 원장이 맥주잔을 놓지 못했다. 알약이 꼬르륵 잠수한 맥주를 반이나 마셨다. 원장은 심부름을 마쳤음에도 나가지 않고 미적거리는 차온을 바라봤다. 어금니 사이에 낀 마른안주를 빼내느라 인상이 험악해졌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았어?”
취직자리를 달라는 줄 아는지 원장의 목소리에 심술이 꼈다. 차온은 얌전히 서서 손가락으로 숫자를 셌다. 그 이상 행동에 대해 원장이 한 소리 하려는 찰나였다. 불벼락이 떨어지기 직전 차온은 빳빳하던 고개를 숙였다.
원장실을 나가는 동안, 저게 피를 토하고 죽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하지만 기우였나 보다. 원장은 맥주에 보약이라도 탄 것처럼 팔팔했다. 좌우지간 죽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애정은 한 톨도 없지만, 이 창창한 나이에 살인자가 되고픈 마음은 없었다. 보안 군인에게 끌려가면 실험체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더욱이 비안전지대에 사는 고아니까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얀 가면을 쓴 남자가 시켰다고 해봤자 공범임을 자백하는 꼴밖에 더 될까. 정체 모를 강도와 협력한 이상 차온은 철저히 모른 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죽지 않으니 됐지.
차온은 티끌만 한 양심을 알약에 넣어 소멸시켜 버렸다. 설령 남자가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손을 잡는 게 이득이었다. 보상을 줄지 안 줄지는 모르지만, 수면 가스까지 써서 잠입한 남자에게 밉보여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차온은 빈 쟁반을 개수대에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물을 틀었다.
불순물을 걸러 주는 거름망의 수명이 다했나 보다. 차온의 마음처럼 누리끼리한 흙탕물이 콸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돌연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남 일처럼 초연하던 가슴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목적을 위해 상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그 선을 줄넘기 넘듯 넘어 버린 느낌이었다.
상황이 이렇고, 원장이 저렇고. 가져다 댈 핑계는 많지만 어쩐지 자기 자신이 너무 구렸다. 차온은 문득 회색의 남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가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 동아줄일까. 아니면 스쳐 지나가는 허망한 바람 같은 것일까.
상관없다.
차온은 아랫배에 뭉쳐있는 감정을 빠르게 지워 갔다. 바깥으로 나간다면, 달에 50이라도 받으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얻으면 이러지 않아도 됐다.
방으로 돌아간 차온은 책상 밑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차온은 상상 속에서 보일러를 켜고, 라면을 끓이고, 가족의 옆자리에 누웠다. 무섭다고 하자 가족이 입 모아 괜찮다고 말했다. 요즘 세상에 이 정도는 비정한 축에도 들지 못한다고. 그 마지막 말을 차온은 애써 곱씹고 또 곱씹었다.
* * *
파이트 클럽은 핵전쟁을 극도로 두려워한 노인이 만든 지하 벙커를 현 소유주 입맛대로 개조한 곳이었다. 노인이 죽기 전까지 병적으로 관리해 방음 설비와 수도관 위생이 끝내줬다.
마약에 도박까지 겸하고 있어, 클럽 사장의 초대장이 없으면 입구에서 돌려보냈다. 소위 말하는 진상도 드물었다. 여차하면 총을 쏜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경비에게 나를 홀대하느냐고 묻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클럽은 까다로운 입장 과정에 비해 서비스가 열악했다. 수억의 금을 쌓아 놓는 양 행세하여 기대를 했더니만 복싱 링 세워진 퀴퀴한 지하실이 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파이트 클럽치고 주문할 수 있는 음식이 다양하긴 하나 그 명성에 비해 시설이 낡고 누추한 건 사실이었다. 돈을 다발로 쥐여 주고 구경 온 손님은 지하 공기가 텁텁하니 청정기를 틀라며 호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님의 컴플레인 수는 줄어들었다. 복싱 링에 예약된 경기를 하나둘 보다 보면 불평이 쏙 들어갈 만큼 몰입하게 된다. 대략 싸움 판에 돈 거는 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참여한 파이터가 죽어서 실려 나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천장에 달린 주황색 전등은 오로지 정중앙만을 밝히고 있었다. 안전 바 없는 복싱 링에서 사내 둘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이었다.
복싱 링 앞에는 6인용 소파와 철제 의자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A에게 일백만 원을 걸면 그 금액에 해당하는 영수증을 파이트 클럽에서 끊어 줬다. 손님은 그 영수증을 쥐고 의자에 착석해 싸움을 구경했다.
만일 응원하던 A가 이기면 판돈이 다섯 배로 불어난다. 주먹질 하나에 판돈이 달라지는 맛을 끊지 못하는 손님이 더러 있지만, 그래도 파이터로 예약된 사람이 거기서 거기인지라 어지간히 심심하지 않고서야 매주 출석 도장을 찍진 않았다.
“저거야?”
남자끼리 치고받는 것에 침 튀기며 돈 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정해진 장사라 나중 가면 돈을 버는 재미도 크게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 비안전지대의 터줏대감 격인 펑크가 방문한 건 클럽에 물건이 나타났다는 연락 때문이었다.
사실상 말만 데스 매치이지 사람 목숨을 빚처럼 달아 둔 클럽에서 링 위에 올라갈 파이터는 재화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손님의 돈을 뽑아내야 할 파이터를 죽게 놔둘 클럽이 아니었다. 그런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인 파이터가 이 판을 쓸고 다닌다는 거였다. 꼭 와서 봐 달라는 연락에 친목 도모 차원으로 왔다.
클럽 사장의 자신감이 대단했다. 그리고 과연 이 시시한 판에서 독보적인 신인이긴 했다.
처음에는 클럽에서 음지 장사에 눈을 뜬 것인가 했다. 신인 용병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파이터의 때가 묻지 않은 얼굴이었다. 왼쪽 뺨에 그려진 문신이 독특하긴 했다. 그래도 저 얼굴을 주먹질 말고 모델 일에나 써먹지 싶었다.
회색의 눈동자는 최근 여러 인종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혼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단지 별의별 변태가 다 다니는 이 비안전지대에서 다른 쪽으로 생각이 안 들기가 쉽지 않은 용모였다. 하지만 신입이 링 위에 올라가면서부터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클럽에서 매출도 올릴 겸 신입에 대한 소문을 여러 군데 퍼트렸는지 구경꾼들이 평상시의 두 배로 왔다. 펑크 조직의 수장인 용현은 턱을 긁으며 경기에 집중했다. 큰 거래 세 건을 물리고 온 만큼 기대를 걸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신입의 외모를 봤을 때부터 김이 빠진 상태였다.
눈요깃거리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 맥주를 들이켜는 순간이었다.
“컥……!”
사실 신입의 몸이 날렵하진 않았다. 둔중한 몸놀림은 어울리지 않게 긴 팔다리 때문이었다. 힘으로 때려눕히는 스타일의 싸움을 보여 주길 기대했으나 신입이 쓰는 건 능숙한 보안 군인의 기술이었다.
“어디서 훈련받았나 본데.”
구경꾼들의 눈빛이 달라진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얼굴만 좀 생기면 뭐 하냐고 비웃던 이들이 자세를 달리 하고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신입은 달려온 상대의 목을 정확하게 내리누르고 팔 안쪽에 끼워 넣었다. 신입은 목을 조르기 쉽게 무릎을 굽혔다.
신입의 근육이 선 팔에 얼굴이 끼었다. 피가 몰려 빨개진 얼굴이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입으로 숫자를 세는 신입이 상대의 숨을 차단하고 있었다.
상대의 버둥거림이 점차 약해질 즈음이었다. 데스 매치라지만 저 파이터를 사서 링 위에서 돈 아깝지 않을 때까지 굴려야 하는 주인은 속이 탈 것이었다. 쪽도 못 쓰고 팔 안쪽에 잡힐 때부터 이미 가치는 하락했으나, 시체는 어디 쓸 데도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뛰게 생겼다.
구경하던 펑크 조직원 몇몇은 신입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비안전지대서 조직에 몸 담그지 않은 놈이 몸도 기술도 좋았다. 용현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상대의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팔을 풀지 않는 신입을 유심히 바라봤다. 조직원들 걱정이 뭔지는 알지만, 만일 저게 타고난 거라면 최상의 물건이었다. 용현은 가만히 손을 들었다. 링 밑에서 내기에 건 영수증을 걷고 있던 직원이 용현 쪽으로 잽싸게 다가왔다.
“예, 예.”
“쟤. 언제부터 여기 와 있었어?”
“온 지는 한 일주일 됐습니다. 연승하길래 운이 좋은 놈인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라 군부대 같은 데서 훈련받은 놈인가 봅니다.”
“지 입으로 그렇게 말해?”
“아니요. 저희끼리 추측하기로는…….”
“일로 데려와 봐.”
어차피 시합은 금세 마무리되는 추세였다. 신입은 숨이 끊어진 상대의 단추를 여며주는 엽기 행각을 벌였다. 용현은 신입을 보고 히죽 웃었다. 직원이 다가가 말을 걸자 보수를 챙겨 받으려고 손을 내밀던 신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만한 몸짓이나 눈빛이나. 보안 군인 특유의 냄새가 폴폴 풍겼다.
용현은 링 위에서 점프하듯 내려오는 신입을 위아래로 훑었다. 비안전지대에서 특히 꺼리는 게 저런 군인 때가 묻은 남자였다. 여기는 무장하지 않고 오는 군인이 개죽음을 당하는 동네였다.
보안 군인이 차마 신경 쓰지 않는 비안전지대의 법은 각 구역의 조직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살인이 벌어져도 조직원끼리 모여 합의를 보고 끝날 정도니, 법의 심판이 필요한 민간인들은 재판소 대신 조직에게 뒷돈을 주고 일을 해결 봤다.
정의와 안전을 책임진다던 보안 군인은 3급 이내의 도시에서만 볼 수 있었다. 조직의 밥줄인 비안전지대에서 일개 군인이 돌아다녀 봤자 얻을 게 없을 터였다. 용현은 가까이 온 신입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우리 잘생긴 형씨. 군인 출신이네?”
신입은 부정하지 않았다. 싸움 때문에 과열된 주변 열기가 식지 않고 있었다. 후끈해진 지하 벙커 때문인지 신입은 까만 러닝셔츠만 건성으로 걸쳤다. 보면 볼수록 정의 내리기 어려운 생김새였다. 선이 고운 입술을 보면 온실 속에서 자란 도시 사람 같은데도 저 눈빛이나 몸뚱어리는 파이트 클럽에 최적이었다.
보안 군인들 배때기를 쑤시고 다닌다는 게 자랑인 뒷골목 조직이 펑크를 제외하고도 세 곳이나 참관했다. 하지만 신입은 군인이면 어쩔 테냐는 태도로 용현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 패기가 마음에 든 용현은 요것 보라며 웃었다.
“아,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좀 해 봐.”
용현의 부하가 날카로운 단도를 슬쩍 신입에게 보였다. 신입은 곧게 턱을 들어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거친 숨을 흘리고 용현의 앞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경고했음에도 투우처럼 다가오는 신입 때문에 칼을 빼 들기 직전이었다. 용현의 눈에는 흥미가 빚어낸 감정이 걸렸다. 어차피 용현이 죽으면 여기서 저 신입이 살아 나가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용현의 흥미가 최고조에 다다른 때였다. 신입이 뻗은 손은 아까부터 자신을 향해 침을 짝짝 뱉던 조직원의 목으로 떠났다. 악력이 상당한지 무리 없이 조직원의 목을 잡아 벽으로 몰아세웠다. 조직원의 왼손에 있던 칼은 곧바로 제압당하여 신입이 가로챘다. 조직원이 실핏줄 터진 눈알로 용현을 쳐다봤다. 용현은 카페에 온 양 느긋하게 앉아 돌아가는 꼴을 지켜봤다.
“크, 어어…….”
조직원이 발로 신입의 정강이를 수차례 때렸지만, 이쪽은 꿈쩍도 안 하는 프로였다. 특기가 한 번에 급소를 잡아 통제하는 방식인가 보다. 보안 군인이 자주 쓰는 방식이었다. 용현은 신입에게 관심이 생기려 했다. 신입이 의도한 판에 놀아나는 기분이 들지만 말이다. 제 조직원의 숨이 꺼억 넘어가자 용현은 기 싸움을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만, 그만. 좀 봐줘라, 야.”
용현의 말이 끝나자 단숨에 힘을 푼다. 죽다 살아난 조직원이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며 헐떡거렸다. 훈련된 보안 군인이 무슨 복을 잡겠다고 여기 지하에서 썩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3분의 2 정도 확률로 첩자는 아니리라고 확신했다.
화려한 몸하고 전투 방식이야 배우면 는다. 관록 있는 첩자라면 군인 티를 숨겼을 터다. 무엇보다 저 신입은 나이가 스물도 되지 않아 보였다. 하고 많은 땅 중에 비안전지대로 터를 잡은 사정이야 없으면 섭한 동네고.
“만으로 열여덟?”
신입은 비웃듯 입술을 꽉 물고 웃었다.
“스물입니다.”
가입국에 들어가면서부터 일상생활에서도 만 나이를 쓰자고 한 지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용현같이 변두리 사람들은 아직 한국식 나이가 더 익숙했다.
만으로 스물. 보안 군인이 첩자를 보낸다면 요령 있는 서른 중반의 남자를 보냈을 거다. 이건 보안 군인 시험에서 탈락하고 앙심을 품은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3분의 1 확률이지만, 저게 첩자라서 먹음직스러운 걸지도 모르고. 하지만 바겐세일로 나온 사냥개를 구매하지 않고 떠나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다.
용현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클럽 지배인을 불렀다. 멀리서 지켜보던 직원은 부리나케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이 신입 좀 사고 싶은데.”
용현의 조직원은 하나같이 불만이 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른 조직들 눈도 있는데 수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반박하는 건 조직의 위신을 까먹는 일이었다. 어쨌든 펑크는 이 근방에 있는 그 어떤 조직보다 위세를 떨치고 있는 쪽이니 힘 좀 쓴다는 사람마다 입단하고 싶다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었다. 그런데 보안 군인 냄새 풍기는 애송이가 클럽에서 스카웃 당한 게 알려지면 항의도 만만찮을 터였다.
용현은 이 바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운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 첩자를 미끼로 쓰든, 복날 용 개로 쓰든, 승리의 여신이 있으니 매사에 도박하듯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컸다. 용현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손깍지를 끼며 물었다.
“식구 된 기념으로 이름 좀 압시다.”
신입은 버벅거림 없이 예의를 차렸다. 용현의 실실거리는 웃음에 밀리지 않았다.
“이시열입니다.”
AVRTA 광산으로 가는 것보다 나은 선택지긴 하지만 보안 군인은 돈이 안 된다. 하는 일은 고되고 보수는 짜기 마련이다. 그러하니 중간에 탈주를 하거나 열악한 군의 비리 상태를 보고 실망하여 차라리 돈이라도 많이 주는 뒷골목 조직에 입단하곤 했다.
비안전지대에서는 그런 루트를 타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용현은 시열이란 남자에게서 다른 것을 봤다. 얘는 잘하면 금이고 못하면 똥값도 안 되는 도박이었다.
용현은 낄낄거리며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를 꺼내면서 내밀자 시열은 거부하는 바 없이 그를 받았다. 시열이 입에 담배를 물자 조직원 한 명이 능숙하게 불을 붙여 주었다. 연기를 빠는 폼이 자연스러웠다. 엘리트 군인 같으면서도 천박한 면이 몸에 밴 양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조직 물을 갈고 싶었는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용현은 뒤에 선 조직원들에게 기분 풀라며 눈을 찡긋거렸다. 담배를 가죽 소파에 비벼끄고 시열에게 물었다.
“우린 다들 가명을 쓰거든? 우리 조직 이름이 펑크인 것도, 내 가명이 펑크여서야.”
킬러, 베어,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버리고 용현의 자식이 되라는 의미에서 가명을 썼다. 영국풍이든 인도풍이든 마음대로 쓰라고 하다 보니 별 신기한 이름들이 다 튀어나왔다. 시열은 용현의 말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하얀 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담배를 입에서 빼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너는 뭐로 할래.”
“시답잖은 것도 괜찮습니까?”
“물론.”
달링. 신입의 유창한 발음이 용현의 신경을 긁었다. 클럽이 시끄러워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경계심에 불을 태우던 조직원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각자 자기가 지은 가명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달링은 상대방 목을 졸라 죽이는 파이터와 어울리지 않았다. 허허, 기가 찬 듯 웃은 용현은 개의치 않는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열은 펑크 잠입에 성공했다는 연락을 보냈다. 하지만 펑크의 수장이 떠보고 재고 있다는 얘기는 붙이지 않았다. 비안전지대 47구역에서 터를 잡고 있는 펑크는 이미 47구역뿐만 아니라, 45구역, 46구역, 48구역, 49구역까지 영향력을 뻗는 중이었다. 그만한 수완과 눈치 없이 다섯 구역을 손에 넣고 쥐락펴락할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열은 캐비닛 앞에 서 있는 클럽 직원을 보고 싱긋 웃었다.
“마지막이라고 마중 나와준 겁니까?”
뒷돈을 받아서 데스 매치에 오르게 해 주고, 따로 몸값까지 받아 챙겨 제법 지갑이 두둑할 터다. 그런데 직원의 표정이 시원치 않았다.
“너 진짜 보안 군인하고 관련 있는 그런 거냐?”
시열은 낄낄 웃으며 캐비닛을 열어 개켜 둔 반팔을 꺼냈다. 예상대로 용현은 쉽지 않은 상대였다. 제 부하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말 많고 탈 많은 펑크에서 한솥밥 먹게 생겼다. 하지만 쓰다 버린 패가 된 직원은 주머니가 궁한 모양이었다. 탐욕으로 눈알이 번들거렸다.
“욕심도. 그러다 주머니가 내 좆보다 불룩해지겠어요.”
“뭐?”
캐비닛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동시에 직원의 얼굴 옆으로 그의 손이 옮겨왔다. 그 손이 목으로 가면 저승사자 옷이 깜장인지 하양인지 알 수 있을 거다. 직원은 그의 경기를 빠짐없이 관람한 팬 중의 팬이었다. 움푹 파인 캐비닛을 보고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시열의 손이 직원의 머리통 위에 얹혔다. 고양이를 쓰다듬듯 그의 손이 멈추지 않고 직원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나한테도 돈 받고 저기서도 돈 받고. 주머니 열 개를 파둬도 모자라는 거 아는데.”
“야…….”
“돈 받으면 질문할 권리도 사라지는 겁니다. 정 묻고 싶으면 환불해 주고. 그럼 알려 줄 테니까.”
데스 매치 직원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비틀어 캐비닛에서 겨우 빠져나갔다. 직원은 문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어차피 펑크에 들어가도 며칠 못 버티고 죽을 거다. 미친 새끼.”
개입해봤자 제 목숨이 아까운 짓일 게 뻔하니 펑크에게 달려가 진실을 말하지는 않을 거다. 시열은 담담히 문이 고장 난 캐비닛을 열고 손목시계를 꺼냈다.
손목시계 왼쪽의 동그란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하얀 점이 생겼다. 기대 않던 보름 보육원 원장 김진양의 신호가 잡혔다. 시열은 웃으며 혀를 찼다. 보육원의 첩자가 할지 말지 저도 궁금하던 차였다. 결과적으로 승리의 여신이 그 애의 손을 들어 준 셈이었다.
수면 가스를 마시고도 성미가 괄던 얼굴이 캐비닛 위로 떠올랐다. 정체 모를 세상. 종잡을 수 없는 인간들. 손목시계를 채운 시열은 기억 속에서 불필요한 정보를 지워 냈다. 사람은 그에게 관심 없는 주제였다.
* * *
사기를 당했다. 차온은 연말 시험을 보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학교는 도시에 사는 청소년에게 허락된 곳이고, 의무 교육이란 건 부모 있는 애들한테나 통하는 말이었다. 보름 보육원은 자체적으로 교육하고 시험을 치렀다. 그마저도 사정이 여의찮으면 2년에 한 번씩 했다.
연말마다 치러지는 시험을 보고 산타가 준 영양바 두 개를 먹으면 한 해가 저물었다. 보름 보육원 내에서 기분 내기 용으로 치르는 시험이었다. 진심으로 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름 보육원 고참 중에서 성적 좋다고 도시로 간 사례도 없었다. 차온만이 아랑곳하지 않고 만점의 신화를 기록하는 별종이었다.
열넷이면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라는 걸 책에서 봤다. 영화에서 보니 구시대에는 고아든 거지든 학교를 가라고 권고해 줬던 듯했다. 요즘은 학교가 없어서 못 갔다. 비안전지대에 사는 청소년의 건강을 믿을 수 없다며 도시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서고, 비안전지대에 학교를 차려도 내려오겠다는 고학력자가 없었다. 나라에서 지원을 받아도 가르칠 사람이 없으니 학교는 문을 닫았다.
제일 먼저 시험을 끝내고 영양바 두 개를 받은 차온은 방으로 들어가 대자로 누웠다. 좁은 방에 이불을 여러 겹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일곱 명의 아이들이 누워 지냈다. 방에서 가장 연장자인 차온은 이불 빨래까지 도맡았다. 차온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꽃무늬 이불을 덮었다. 노란 먼지가 낀 창문을 멍하게 바라보며 영양바를 먹었다.
도시에는 영양바에 단맛을 추가하기도 한단다. 비안전지대에 공급되는 영양바는 시큼한 맛이 진했다. 이것도 없어 못 먹는 애가 다수니까 산타께 감사하란다. 니미럴.
“사기꾼.”
원장은 여전히 고아를 구박하며 살고 있었다. 지병이 생긴 것도 아니고 삶이 고달파 보이지도 않는다. 지난주에 정부에서 광부로 들일 아이가 필요하다는 말이 돌았다. 원장은 냉큼 나이가 찬 아이를 내줄 정도로 머리 계산도 빨리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리곤 야무지게 타 먹은 지원금으로 맥주를 한 궤짝 샀다.
원장에게 알약을 먹이고 한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차온은 하얀 가면을 자신의 망상쯤으로 격하시켰다. 미치광이가 모조 총을 들고 연극을 했던 것이라고. 우연히 원장은 술에 취해 잠이 들었고 애들도 곯아떨어져 있던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하얀 가면을 고발하고팠다.
차온은 영양바 하나를 말끔히 먹어 치웠다. 남은 하나는 서랍에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애들이 들어와 시끄러워지기 전에 처리해놓아야 속이 편안했다.
책상 서랍을 연 순간이었다. 차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길쭉하고 하얀 막대가 차온의 서랍에 들어 있었다. 이 방의 연장자라는 이유로 빨래를 맡은 건 차온이었다. 빨랫방망이를 쥔 사람은 책상 서랍을 혼자 썼다. 서랍 열쇠는 차온의 바지 주머니에 있었다. 이 서랍 안에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건 차온뿐이란 얘기였다.
차온은 떨리는 손으로 막대를 들어 올렸다. 버튼이 많은 줄넘기 손잡이처럼 생겼다. 조심스레 엄지손톱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다.
“우아.”
허공에 네모난 화면이 떠올랐다. 막대기에 있는 방향표 버튼으로 화면을 좌우로 조절할 수 있었다. 차온 같은 초보자도 알기 쉽게 몇 년도의 영상물을 원하느냐는 질문이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설마 싶었다. 차온은 근래 성당에 가서 인상 깊게 본 영화의 개봉 연도인 1957년을 말했다.
1957년. 기계는 차온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혹시 라는 영화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차온은 감격에 차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기는 차온의 손을 통해 소리를 전달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까만 화면이 마음을 울렸다. 주인공의 대사가 귓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명화 같은 풍경이 차온의 혼을 영화 속으로 끌고 갔다.
사랑을 잃고 삶이 실망스러울지라도 주인공은 내일을 꿈꿨다. 이래서 영화가 좋았다. 아무도 해 주지 않는 말을 그녀에게 속삭였다. 포기하지 마. 넌 가치 있는 아이야.
“포기하지 않을게요.”
불행의 소낙비에 젖은 마음을 비틀어 짜고 말렸다. 빨랫줄에 널어 둔 마음이 누더기일지라도 차온은 내일을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