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ruction of the Fortress RAW novel - Chapter 159
159
第三十二章 배신(背信) (4)
음악오귀가 상처를 치료한다. 유화아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공조식을 취한다.
사방에 적이 있지만,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치료에만 전념한다.
화천도 운공조식을 취한다. 비록 꿋꿋하게 서 있기는 하지만 살포시 눈을 감고 있다.
정적이 흐른다.
“적벽검문을 방문했는데, 날 반겨주는 건 싸늘한 주검뿐이더라고.”
“남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건 못된 습관이란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고치는 게 좋겠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동경했는데 말이야.”
“정말로 누군가를 동경하게 되면 삶과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지.”
“검문 사람으로 산 사람을 보기는 처음이야. 검왕이나 못난 아비는 그렇다 치고.”
“누강을 아직도 아비로 인정하는군.”
“인정하는 건 아냐. 한때의 인연이 그렇다는 거지.”
“후후후!”
“검문 사람치고 그 사람들 빼고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때? 존장 노릇 제대로 해줄 수 있어?”
“결국 돈 달라는 소리군.”
“돈 좀 주면 어때서? 반말할 때만 필요한 게 존장은 아니잖아? 줄 건 주면서 이야기하자고.”
“많은 돈은 어디다 쓰게?”
“내가 알아서 쓸게, 주기만 해.”
“주지.”
누산이 흔쾌하게 대답했다.
누미가 뜻밖이라는 듯 누산을 쳐다봤다. 누산에게서 돈을 끄집어내기가 무척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단, 우리를 놔주는 조건이다.”
“그건 안 돼. 정말 돈을 줄지 어떻게 알고.”
“원하는 만큼, 필요할 때마다 준다.”
“원하는 만큼, 필요할 때마다?”
“하루 말미만 주면 어떤 금액이든 마련해 준다.”
“진심이네?”
“허허! 존장이 아랫사람 놓고 장난할까.”
“살려주기는 할게. 하지만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 돼. 쟤들…… 아무래도 신경쓰이거든.”
누미가 유화아를 힐끔 눈짓하며 말했다.
“눈에 보이는 곳…… 그곳을 내 장원으로 하지. 내 장원에 틀어박혀서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됐나?”
“그 정도는 뭐.”
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미와 혈루마옥 무인들은 누산 일행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산을 내려갔다.
누산은 누미에게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장원이 어디에 있다고 설명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간다.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혈루마옥의 모든 것이 누미 손에 쥐어지고 있다.
무인들에 이어서 정보까지 장악하고 있다.
누산은 밤이 깃들 때까지 가마에 편안히 누워있었다. 그러나 사방에 어둠이 덮이자…… 스르륵! 그의 신형이 안개처럼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누산은 눈앞에 서 있는 인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살아있었더냐?”
누산의 물음 속에는 온갖 감정이 섞여 나왔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 다 살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검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촌장도?”
검왕은 고개만 끄덕였다.
“음! 천만다행이구나. 누미, 저것을 어떻게 통제할지 답답했는데.”
검왕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촌장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나서지는 못합니다.”
“뭐라고? 왜?”
“촌장과 증평주 모두…… 나설 수 없는 입장입니다. 만약 나선다면 혈오에게 잡힙니다.”
“음!”
누산이 침음했다.
혈오는 현음자의 안배를 무력화시켰다. 혈오만 없었다면 현음자의 뜻대로 이루어졌을 일들인데.
혈오가 모든 승리를 쟁취해갔다.
그 힘은…… 혈오가 부린 능력은…… 혈루마옥 모든 무인들에게 용된다. 혈루마옥을 잡기 위해서 만든 모든 안배까지 흡수한다. 모든 힘을 다 갖는다.
혈오를 잡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혈루마옥과 차단되어야만 한다.
혈루마옥과는 옷깃도 스치지 않은 사람, 오직 그런 사람만이 혈오를 잡을 수 있다.
촌장과 증평주는 잡지 못한다.
검왕도 이 부분에서는 제외된다. 검왕은 과거 혈루마옥과 접전을 많이 벌였다. 비록 다른 신분으로 싸웠지만……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혈루마옥의 온기(溫氣)를 받아들였다.
마공관의 무공들도 소용되지 않는다.
음악오귀와 유화아는 혈루마옥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 무공이 통하지 않았다.
이 땅의 힘을 혈오에게 빼앗겨서인가?
어쩌면 마공관 무공 전체가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혈루마옥 무인들에게가 아니라 혈오에게.
혈루마옥과 상관없고, 마공관의 무학들과도 상관없고, 그러면서도 굉장히 강한 고수.
‘그렇다면…….’
누산은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적벽검문과 유지자문은 끊임없이 혈루마옥과 접전을 벌여왔다. 그러니 제외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순수한 중원 무학만이 빛을 발하는데, 이들 중에는 혈루마옥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없다.
혈오를 제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더 이상 싸움을 할 수가 없다.
혈루마옥을 멸살하기 위해서 혈오를 탄생시켰는데, 그 혈오가 혈루마옥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다. 아니, 혈오가 혈루마옥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혈오는 이제 갓난아기일 뿐이다.
그 아이가 성장하면…… 청년이 되면…… 무림은 암흑기로 접어든다.
누산은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생각해냈다.
마치 고구마 줄기를 캐내듯이 꼬리 하나를 잡으니 다른 부분들까지 줄줄이 생각되었다.
누산이 답답한 표정으로 검왕을 쳐다봤다.
“그럼 누미에게 전 재산을 주라고 밀마를 남긴 것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시간이 필요한 건 저들일 텐데. 촌장이 살아있다면 차라리 지금 결판내는 것이…….”
“촌장과 증평주, 혈오의 영향을 깊게 받았어요. 그들이 이곳에 나타나면 틀림없이 혈오의 촉수에 걸려들 겁니다.”
“음! 세상에 요물이 태어났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검왕이 말했다.
“일단 중원을 초토화시켜야겠습니다.”
“뭐라고? 왜?”
“저들이 가져갈 것, 그걸 먼저 없애는 겁니다.”
“가져갈 것을 없앤다.”
“누미가 숙부님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중원의 재건이 될 겁니다. 있는 것을 지키는 것보다는 새로 만드는 것을 부수는 쪽이 훨씬 수월합니다.”
“그럼 중원을 어떻게……?”
“누미가 인정할 수 있게끔 확실하게 부숴야죠.”
검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이귀가 숨을 거뒀다.
사귀와 오귀가 죽을 힘을 다해서 치료해보았지만 생명을 돌이키기에는 상처가 너무 깊었다.
일귀는 양팔을 잃었다.
화천의 공격을 일개 산도적들이 그 정도로 막아낸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일 게다. 예전 같으면 일수에 모두 나가떨어질 허접한 무인들이었으니까.
“이놈!”
일귀가 이귀의 죽음을 보고 노성을 터트렸다.
이귀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분노, 절규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지 않는다.
이귀를 잃었다.
산속의 새벽을 싸늘하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을 청하지만 그래도 새벽녘이 되면 한기에 눈을 뜨게 된다.
삼귀가 눈을 떴을 때, 일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해냈다.
일귀가 누워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삼귀는 호들갑스럽게 난리 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누워서 일귀가 누워있던 자리만 쳐다봤다.
일귀는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떠나갔다.
양팔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고열에 시달린 텐데, 그 몸을 해가지고 조용히 사라져 갔다.
이귀만 죽지 않았어도 일귀는 끝까지 버텼을 게다.
“대형이 가버렸네.”
삼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사귀와 오귀가 삼귀의 말을 들었을 텐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깨어있고, 일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다른 때 같으면 일귀를 찾기 위해서 부산을 떨었을 게다.
지금은 조용히 가게 내버려둔다. 자신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자신들 역시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라리 지금 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누워있기만 했다.
시종들이 아침 요깃거리로 연한 죽을 만들었다.
누산은 일녀삼남과 마주 앉아서 시종이 가져온 아침을 음미하듯 먹었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너희들에게까지 숨기지 않겠다. 검왕이 살아있다.”
“…….”
유화아와 음악삼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들었다.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고.
“검왕이 말하더구나. 중원을 파괴시키겠다고.”
그 말에는 유화아와 음악삼귀도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중원을 파괴시키겠다니. 검왕이 고수라는 점은 알지만 그럴 만한 세력은 없는데.
“혼자서 그 일이 가능한가요?”
결국 유화아가 되물었다.
“불가능하지. 그래서 검왕을 도와줄 생각이다.”
“중원을 파괴시키는 데 일조하시겠다고요?”
“그것도 누미가 파괴하기 전에 먼저 파괴해야 하니, 무척 서둘러야 한다.”
“하!”
오귀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누산이 지금 한 말 속에는 유화아와 음악삼귀도 한몫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명령 아닌 명령이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중원을 파괴시키겠다니. 왜? 그러면 혈루마옥과 다를 게 뭐가 있다고? 천하제일의 마인이라도 되겠다는 것인가?
“지금부터 보름, 보름 안에 중원을 초토화시킨다.”
“왜 보름이죠? 그게 가능하기는 하고요?”
“보름 후, 누미가 자금을 말해올 게다. 중원을 손아귀에 쥘 완벽한 계획을 짜놓고.”
“그럼?”
“돈은 준다. 하지만 그 돈으로 할 게 없게 만들 생각이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텅 빈 종이만 내놓을 생각이다. 무주공산이라고 해도 좋고.”
“정말…… 하실 생각이네요?”
유화아가 여전히 크게 뜬 눈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중원을 정복하는 게 아니다. 파괴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뿌리를 뽑아야 한다. 무인이란 무인은 모두 죽여야 하며, 문파란 문파는 모두 소멸시켜야 한다.
누산은 그 일을 보름 안에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천하제일 거부 누산이요, 천하제일 무인 검왕이라지만…… 적벽검문이 존재하고, 유지자문까지 가세해도 불가능한 일인데.
누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편안하게 죽을 먹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죽을 먹을 수 없었다. 먹을 생각이 무엇인가? 머릿속에 하얗게 텅 비어 버렸다.
누산 일행이 기련산을 내려간 후, 마지막으로 검왕이 남았다.
그도 헤어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
“서장(西藏)을 부탁합니다.”
“그쪽만 해결되면 되겠나?”
“가능합니다.”
“알았네. 잠시 동안 휴전하기로 하지. 허허! 혈오. 그놈이 날 잡을 줄이야.”
촌장이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정말 보름 안에 중원을 말살할 수 있어?”
증평주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불가능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불가능합니다. 누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럼?”
“후후! 중원에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 검왕에게 친구라면…… 누굴까?”
증평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왕은 조용히 손을 들어서 옆에 서 있는 마군을 가리켰다.
“십마가 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검성 성주의 수족이고, 다른 한 명은 혈천성의 주인입니다. 그들이 움직여 준다면 보름 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검왕이 마군을 쳐다봤다.
마군 쌍첨수괴 도군악이 말했다.
“나 혼자라면 기꺼이 하겠다. 하지만 알다시피 난 주인이 있는 몸이라.”
검왕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만나볼 생각입니다. 만나봐야죠.”
검왕의 머릿속에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