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ruction of the Fortress RAW novel - Chapter 206
206
第四十二章 화화(火火) (1)
유화아는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동굴은 암묵적으로 접근 금지 구역이다. 검왕이 들어갔으니 다른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검왕이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굴 속으로 왜 들어갔겠는가.
검왕은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폐관 수련이 되었든, 무림 정세를 분석하는 것이든, 아니면 단순히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동굴을 찾았더라도…… 혼자 있고 싶어한다.
현재, 검왕은 혈루마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인이다.
방법을 찾아도 검왕이 찾아야 하고, 포기를 해도 검왕이 포기를 해야 한다.
일단 검왕의 의사가 중요하다.
검왕은 어떤 선택을 할까? 검왕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다른 사람들은 그 결정에 토를 달지 못한다.
검왕이 싸우자고 하든, 포기하자고 하든…… 그 모든 결정 뒤에는 죽음이 담보된다. 현재 상황에서는 죽음을 담보로 잡히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결국은 모두 죽음이다.
검왕이 생각할 것, 얻어야 할 것은 죽음을 담보로 해서 최대한 성과를 얻어내야 한다는 거다. 죽음이 무의미해서는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동굴은 금역이 되었다.
동굴을 금역으로 선포한 사람은 없지만, 당연히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인식한다.
유화아는 그런 곳을 들어섰다.
투살진기가 경련을 일으킨다.
완벽한 이완, 철저한 이완 속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투살진기다. 그러니 투살진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모를까 일어난 이상은 한 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투살진기는 일어난다.
완벽한 이완 속에서 또렷하게 정신을 유지한다.
헌데 또 경련이 일어난다. 투살진기를 수련한 이래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이다.
유화아는 투살진기 경련의 원인으로 검왕을 떠올렸다.
검왕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유일한 원인이다. 검왕만 아니면 마음이 어지러울 이유가 없다.
검왕, 검성 제이령.
검왕의 마음속에는 검성 제이령이 들어차 있다. 단순히 마음을 점령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예 제이령에 대한 생각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다.
유화아는 단단한 바위틈에 스며들고 싶다.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검왕만 생각하면 격정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일어난다.
검왕이…… 좋다.
그래서 동굴을 찾았다.
검왕과 연정(戀情)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다. 투살진기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경련은 곧 검왕의 신변에 모종의 이상이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치달았다.
검왕을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다.
‘너무 컴컴해.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뭘 하는 거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부좌를 틀고 단정하게 앉아서 소검을 가슴에 겨눈다.
일격에 숨을 끊어야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절명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그대로 영원히 이승을 떠날 수도 있다.
아니, 가능성으로 치자면 그쪽이 훨씬 높다.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겨우 천분지 일에 불과하다.
그런 가능성을 세 번이나 넘어섰다는 것은 기적이다.
두 번째 절명에서는 회생하지 못할 뻔 했다. 화천의 일격이 너무 치명적이라서 되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원한 죽음이 내려앉았다.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천운이라고 할까?
그 순간에 혈천성주가 묘수를 부렸다. 비록 마법, 사악한 술법일망정 한 줄기 숨이 돌아오는 데는 성공했다.
두 번은 생각대로 소생했고, 한 번은 천운이 도왔다.
그런 일을 또다시 하려고 한다.
혈영마공의 정수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혈영마공 따위는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정작 깨닫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게 있다. 유기(有氣)의 정수다.
유기를 이끌어내는 도구로 혈영마공을 쓰는 것이다.
검왕은 소검을 가슴에 댔다. 그리고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미세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가면 못 와.”
어둠 속에서 잔잔한 울림이 일어났다.
검왕은 그 울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차분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군 일, 고맙다.”
“마공관의 마서, 내게 양보해 주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원래 내 물건이 아냐.”
“언제부터……?”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고?”
“…….”
“언제부터였더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몽환적이었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 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술 취한 사람을 내버려두고 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
“난 항상 술이 문제야. 술에 너무 취해서 정신을 차릴 수 있어야지. 좌우지간 술에 잔뜩 취한 날부터 여기 있었어. 넌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그럴 수 있어야지. 결국 네가 돌아올 곳은 여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왔네?”
“외로웠겠구나.”
“외로웠지. 무척 외로웠어.”
“고생했다.”
“호호! 네가 누웠던 곳에 누워봤는데…… 누워서 시커먼 천장을 보니 더 외로워. 그때 생각했지. 아! 이 사람…… 이런 곳에서 혼자 죽어갈 때 정말 외로웠겠구나.”
사박! 사박!
어둠 속에서 치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이 걸어온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걸어오는 느낌만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화화사령공. 깨어날지 죽을지 모를 바보 같은 무공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외로움.”
“알고 있었나?”
“몰랐어. 얼마 전에 알았어.”
십마 중에 제이령 사람이 있다. 그들이 연락을 취했을 게고, 그제야 알았을 것이다.
상관없다. 화화사령공은 무공 명칭을 안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진기 운용방법을 안다고 해도 천분지 일의 가능성에 목숨을 걸 사람은 없다.
“차라리 몰랐을 때가 좋았지. 알고 나니 더 견딜 수 없네.”
사박! 사박!
여인이 등 뒤로 바짝 다가섰다.
“죽지 않을 수는 없는 거야?”
“…….”
“화화사령공, 한 번도 힘들어 하는 공부잖아. 한 번만 성공해도 천운이라고 하잖아. 그걸 또 해?”
검왕은 이어지는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검을 잡고 있는 손에 조그만 미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린다고 해도 듣지 않을 거지?”
“우린 항상 서로에게 힘든 말만 하는구나.”
“그러게.”
두 사람의 인연은 선연으로 시작했다. 참 좋은 관계로. 하지만 비극으로 끝났다.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결국은 비극을 벗어나지 못한다.
검왕도 알고 제이령도 안다.
검왕은 제이령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놓지 못했다.
제이령은 검왕에게 선택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거부당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놓지 못한다.
제이령은 혈루마옥을 벗어날 수 없다. 검왕도 혈루마옥과 공존하지 못한다. 혈루마옥이라는 장애물은 두 사람의 관계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안 될 줄 알면서,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다렸어. 역시 안 되네. 그래도 나와 말하니 좋지?”
“그래. 좋구나.”
“갈게.”
“고맙다. 배웅해줘서.”
“잘 가. 살아나면…… 만날 수 있으면 만나고.”
검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투살진기가 흔들린다.
사박! 사박!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
제이령은 존재를 숨기지 않는다.
유화아는 너무 뜻밖의 상황에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자신이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이, 검왕과 제이령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이…… 마치 못 볼 것을 훔쳐본 사람처럼 여겨져서 괜히 심장이 뛰었다.
사박! 사박……!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그녀 앞에서 멈췄다.
제이령이 걸음을 멈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식한다.
“유화아?”
“제이령이시죠?”
“아! 호호호! 놀랍네. 강남제일미녀 유화아가 검왕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거야?”
“아뇨. 전 검왕을 가슴에 품은 적이…….”
사박!
제이령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난 괜찮은데. 검왕과는 어차피 헤어진 사이이고. 중원 천지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어요.”
“유화아, 당신. 검왕에 대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잖아.”
“…….”
“당신은 숨기고자 하나 투살진기가 반응하니까. 불안하면 투살진기가 흔들리니까. 그래서 금역이나 다름없는 이곳도 한달음에 넘어선 것 아닌가?”
“휴우! 맞아요.”
유화아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십 년 묶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속이 편안했다.
“안에 들어가 봐. 검왕 저 사람…… 이번에 죽으면 못 돌아와. 그러니 말릴 수 있으면 말려보고.”
“말리지 못했나요?”
“난 안 되네.”
“제이령이 안 되는 걸 저라고 되겠어요?”
“호호호! 난 지나간 사람이고, 당신은 지금 검왕 옆에 사람이니까. 내 말은 안 들어도 당신 말은 들을 수 있을 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이령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바로 옆에서 잠시 멈추고 말했다.
“혈루마옥에는 촌장 밑에 양장이 있어. 이미 알고 있는 증평주, 녹천주가 양장인데…… 이 양장을 만나면 무조건 피해. 마신천강기가 방패 역할을 하고 투살진기가 창 역할을 한다는 발상은 좋은데…… 두 사람에게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야.”
“촌장을 만나면요?”
“도망갈 수도 없지. 호호호!”
제이령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지나갔다.
검왕이 있다.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아직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다.
“오늘은 손님이 많군.”
검왕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오면서 제이령을 만났어요.”
“두 사람의 대화, 들었다.”
“헌데 저 여자, 왜 제겐 꼬박꼬박 반말이죠?”
“그러게.”
“제가 만만한가 봐요.”
“그런가?”
“저 여자 말이 사실이에요?”
“……?”
“저 여자는 지나간 여자고, 지금 검왕 곁에 있는 여자는 저라는 거 말예요.”
“후후후!”
“그럴 줄 알았어요. 웃음으로 얼버무릴 줄 알았다고요.”
“…….”
“어떻게 죽으려고요?”
유화아는 검왕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검왕은 가슴에 소검을 대고 있다. 하지만 빛 한 점 들지 않은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숨소리가 고르고 음성이 평온하니 아직은 안심이 된다.
“글쎄…….”
검왕이 대답했다.
“오늘은 대답도 잘 해주시네. 다른 때는 무시하기 일쑤더니. 그래도 고맙네요. 꼬박꼬박 대꾸도 해주시고.”
“…….”
“피잇! 또 말이 없어. 헌데…… 안 죽으면 안 돼요? 나도 말을 들었는데, 화화사령공인가 뭔가 하는 거…… 그거 뛰어나다는 것은 아는데…….”
유화아의 음성은 안으로 잦아들어 갔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아서 억지로 말을 삼켜버렸다.
검왕은 대답이 없다.
“제이령이 저라면 말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역시 안 되는 거죠?”
“…….”
“검왕?”
“…….”
“검왕!”
검왕은 대답이 없다.
그녀는 급히 투살진기를 끌어올렸다.
오오!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람 기척이 감지되지 않는다. 대신 서늘한 무엇…… 축축하고 습한 것들…… 죽음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검왕은 이미 죽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