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ruction of the Fortress RAW novel - Chapter 68
68
第十四章 돈명(沌鳴) (3)
마군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는 혈천성주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두 손은 뒷목을 움켜잡은 채 약간은 졸린 듯한 눈으로 혈천성주를 쳐다보면서 웃는다.
“왜 남의 애들은 건드리고 그래?”
마군이 불쾌한 듯 말했다.
“한참 어린 줄 알았는데 저만한 애들이 있었나?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늙어서 불어터졌군.”
“후후후! 성주, 말조심하시지.”
“말조심? 마군, 죽고 싶나?”
“당신 따위에게 죽을 이 마군으로 보이는가? 나이를 먹더니 눈이 더 침침해진 모양이군.”
두 사람은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마군…… 후후!”
“성주, 조바심내지 마시오. 언젠가 내 친히 죽여드릴 날이 올 것이니.”
“하하하! 좋아, 기대하지.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
“생각보다 빨리 올 거요. 원래 인생이 그런 거 아니오?”
“말해봐, 검왕은 왜 졸졸 쫓아다니는 거야? 놈이 살아있으면 뭘 어쩌려고?”
“그걸…… 말해줄 이유가 있나?”
“좋아. 그럼 꺼져.”
“성주…….”
“두말 않겠다. 꺼지던가, 뒈지던가. 왜? 날 죽일 기회가 너무 빨리 찾아왔나? 원래 인생이 그런 거야.”
혈천성주가 마군을 노려봤다.
마군은 눈을 지그시 뜨고 혈천성주를 쳐다봤다. 여전히 두 손은 뒷목을 움켜잡은 채,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올려놓고 비스듬히 의자에 앉은 채.
두 사람 사이로 음습한 한기가 흘렀다.
극히 드물지만…… 혈천성주가 혈천성의 비밀세력인 역외자(域外者)들을 데리고 다닐 때가 있다.
혈천성주 단신으로는 승패를 장담하지 못할 때, 혈천성의 안위가 걸린 문제일 때…… 한 마디로 혈천성주가 조력자로 믿고 동반시킨 자들이다.
역외자의 무공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페허만 남았다.
삶은 없다. 오직 죽음과 폐허만 남는다.
혈천성은 역외자에게 특정한 명칭을 줄 수도 있다. 듣기 그럴듯한 별호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역외자는 어떠한 명칭도 거부한다.
역외자는 역외자일 뿐이다.
역(域)은 인간의 영역을 의미한다. 그러니 역외란 인간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들 말을 빌리면 축생의 세계에서 사는 축생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그렇게 평가한다.
마군은 자신과 혈천성주 사이에 흐르는 음습한 기운에서 모골이 쭈뼛 서는 전율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그를 긴장시키는 기운은 흔치 않다.
스읏!
좌수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혈천성주를 지나쳐서 마군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포위됐습니다.”
그의 음성은 너무 낮아서 가까이에 있는 혈천성주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마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좌수비마가 혈천성주에게 읍해 보인 후, 되돌아갔다.
마군이 혈천성주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성주, 이놈은 말이오. 성질이 지랄 같아서 누가 기분 나쁜 소리를 하면 먼저 들이받고 보지.”
“그런 놈이 오래 살지는 못해.”
“그런가…….”
마군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 마군은 허공에 신형을 띄웠다. 그리고 혈천성주를 향해 한 줄기 핏빛 섬광을 쏘아냈다.
쒜에엑!
섬광이 번쩍 터졌다가 사라졌다.
진구량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군이 움직일 때, 그도 움직였다. 마군이 섬광을 쏘아낼 때, 그도 혈광을 쏘아냈다. 섬광이 사라질 때, 혈광도 사라졌다.
가각!
허공에서 뼈를 긁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 사이, 마군의 수하들은 재빨리 거리를 좁혀와 오행검진(五行劍陣)을 펼쳤다.
마군을 보호함도, 혈천성주를 공격할 목적도 아니다.
그들은 두 사람의 싸움은 도외시하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보호검진을 펼쳤다.
츠으으읏!
다섯 사람의 진기가 이어지면서 오행검진이 서기를 발산한다.
이제 그들은 단단한 옹벽이 되었다.
혈천성주가 그런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저놈들, 저걸로 버틸 모양인데 될 것 같아?”
스읏!
마군이 검을 들어 올렸다.
일차 격전에서 그는 그 어떤 독보다도 지독한 혈무기를 쏘아냈다.
혈천성주는 혈무기를 받아냈다. 검왕 이외에는 받아낸 사람이 없는데, 이번에 또 생겼다.
혈천성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선 뜨거운 맛은 봐야 하니까. 맛만 보여주지.”
슷!
혈천성주가 혈광도를 들어 올렸다. 순간,
취이이익!
사방에서 뱀 떼 수천 마리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실제로 지축까지 흔들렸다.
예고가 심상치 않다.
‘길보다 흉이 많겠군.’
마군의 표정에 그늘이 덮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혈천성주는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 수하들도 퇴각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게다. 그리고 자신은 퇴각명령을 내릴 수 없다. 그 빌어먹을…… 검왕이란 놈의 낯짝을 보기 전까지는.
쉬이잇!
무엇인가 다가온다. 흘러온다. 하지만 무엇이 다가온다는 느낌이 없다. 땅만 여전히 흔들린다. 그리고,
휘이잉! 파라라라락!
갑자기 오행검진 정면에서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아니, 돌개바람 수준이 아니다. 바람이 워낙 거세서 폭풍, 강풍, 용권풍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꽈아아아악!
바람이 오행검진을 쥐어짠다.
“끄으윽!”
“꺽!”
오행검진을 펼치고 있던 다섯 명이 폐부에서 쥐어짜 내는 듯한 비명을 쏟아냈다.
휘루루루룽!
돌개바람은 그들에게 살짝 고통만 안겨준 채 유유히 사라져 갔다.
혈천성주가 혈광도에 진기를 불어넣으면서 말했다.
“후후후! 저들은 검성 성주를 노리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겨우 저까짓 오행검진 따위로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검을 거둬라. 죽이진 않으마.”
“후후후! 후후후후!”
마군이 잔소(殘笑)를 흘리면서 검을 내렸다.
“그렇게 절박한 이유가 뭐냐?”
혈천성주가 대뜸 물었다.
“저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면 상대가 안 된다는 것도 알았을 게고…… 그런데도 저따위 검진을 펼쳐서 대항한다는 것은 죽어도 찍소리는 내겠다는 것인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꺼지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뭘까?”
“…….”
마군은 묵묵히 혈천성주를 쏘아봤다.
“이유는 분명하지. 검왕, 그놈을 보겠다는 것인데. 그놈이 살아있다는 것도 눈치 깠을 것이고…… 그런데도 굳이 놈의 얼굴을 확인해야겠다는 것은…… 그만큼 놈의 죽음을 확신했다는 뜻이겠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놈이라고.”
“할 말 다했으면 가라.”
“저놈들 중 한 놈 먼저 보내줄까?”
“…….”
“마군, 너. 말조심하는 법 좀 배워야겠어. 어느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놈부터 싹둑 잘라줄게.”
“…….”
마군은 침묵했다.
혈천성주는 농담삼아 말하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다. 그가 여기서 어떠한 말이라도 한 마디만 한다면 그는 여지없이 수하들 중 한 명을 척살할 게다.
역외자, 그들이 이토록 강했다니.
지금은 패배는 혈천성주가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혈천성주는 패하는 자리에 서 있지 않는다. 그는 이기는 자리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늙은 구렁이는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놓고 있다. 이길 준비를 끝내놓고 몸만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이번 경우는 역외자가 비책이다.
“마군, 네놈이 검왕 낯짝을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일에 거치적거리니 한 서른 장쯤 뒤로 물러서 있어. 저놈들도 포함해서.”
마군은 두말 없이 몸을 돌려세웠다.
그가 걸어간다.
마군의 수하들은 지금 마군이 어떤 심정인지 누구보다도 잘 헤아린다. 무공으로는 결코 양보하지 않을 적수에게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는 기분일 게다.
혈천성주는 마군 무리가 모두 물러선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버럭 노성을 질렀다.
“뭐해!”
유화아가 음악오귀가 땅 위로 올라섰다.
그들이 원래 있던 자리, 대장간에 섰다.
그들은 운공조식 도중, 땅 위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격전이 어떻게 끝났는지 안다.
마군이 일단 물러섰다.
유화아와 음악오귀는 이제 자신들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다.
혈천성주는 자신들을 어떻게든 이용해서 검왕을 끌어내려고 할 것이다.
검왕도 그렇지…… 이들이 그렇게 보고 싶다면 잠시 얼굴만 보여주면 될 것을.
마군과 그의 수하들은 검왕의 상대가 안 된다.
단지 짐작이 아니다. 마군과 그의 수하들은 마공관에서 검왕과 부딪쳤고, 수하 중 태반이 죽어 나가는 치욕을 당했다. 마군 자신도 부상을 당했고.
그때 그 일은 마공관을 찾았던 마인들의 입을 통해서, 또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중원 전역에 알려졌다.
그 일은 검왕이 마공관의 마서를 독차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검왕이 어떻게 십마를 그리 쉽게 무너트릴 수 있단 말인가.
검왕의 무공이 그 정도라면 혈천성주 역시 상대가 안 된다.
검왕이 이들을 무서워할 리 없다. 반대로 이들이 검왕을 두려워해야 한다.
도대체 검왕의 꿍꿍이가 뭔가.
어쨌든 혈천성주는 자신들을 몰아칠 게다.
츠으으읏!
음악오귀는 지하에서 땅 위로 올라서는 중간에도 마신천강기를 풀지 않았다.
어떤 공격이든 한 번은 막아준다.
유화아도 투살진기를 풀지 않았다. 그녀가 일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마신천강기에 둘러싸인 보람이 없다.
밖은 방패요, 그녀는 창이다.
“좋아, 씨! 뭐든지 해봐! 할 수 있는 게 뭐든…….”
자신 있게 중얼거리던 일귀의 음성이 점점 안으로 잦아들었다.
땅 위로 올라서니…… 이거 심상치 않다!
“뭐, 뭐야?”
“이게 지금…… 성주, 뭐하자는 겁니까!”
삼귀와 사귀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성주는 대답이 없다. 대신 회회문사가 대장간 문지방에 어깨를 기댄 채 말했다.
“검왕을 보고 싶은데, 볼 방법이 있어야지.”
“그래서? 그래서 우릴 불태워버리겠다는 거요!”
오귀가 버럭 고함쳤다.
그렇다. 불, 불이다!
그들이 올라선 땅은 온통 기름 범벅이다. 대장간 전체가 검은 기름으로 번들거린다.
땅만 기름이 아니다. 지붕도, 벽도…… 기름 아닌 곳이 없다.
“누가 불태운다고 했나? 이곳은 원래 대장간이니까…… 사고로 불이 날 수는 있겠네.”
그때, 그의 말을 들은 듯한 사내가 횃불을 들고 나타났다.
“너, 너 이 새끼!”
일귀가 그를 보고 버럭 노성을 질렀다.
그는 대장간 주인이다. 거지다. 일귀에게 제압당했던…… 하지만 지금은 그가 횃불을 들고 있다.
“나도 이게 본심은 아니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는 마.”
그는 빙긋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대장간 한가운데 휙 던져 버렸다.
화라라라락!
대장간이 불에 탄다.
새빨간 화마가 대장간 전체를 집어삼키는 데는 그야말로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기름이 불길을 잡아끄는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사람이 아무리 빨라도 기름이 잡아끄는 불보다 빠를 수는 없다.
음악오귀와 유화아는 한순간에 불바다 속에 잠겼다. 불이 집어삼켜 버렸다.
“후후후! 검왕, 어디 낯짝 좀 보자.”
혈천성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마군도 혈천성주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지만, 할 수 있다고 해도 하지 않았을 게다. 혈천성주의 행동은 자신의 뜻과 일치하니까.
그가 수하들에게 명했다.
“곧 나타날 게다. 긴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