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47
147화 새로운 차르
러시아 전역의 폭동이 잦아들었다.
일견 미하일로프 부총리의 호소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유지하가 모스크바에 왔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으며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눴다.
“친애하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흡혈귀 보르첸코는 사망했고 배신자 드미트리는 구속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을 압박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러시아의 친구로서, 또한 동반자로서 이번 사태를 도우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외국의 정치인일 뿐입니다만 항상 러시아를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디 제 선의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오오오!”
“러시아의 친구!”
“환영해요!”
러시아인들은 웃통을 흔들며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어떤 여성들은 속옷까지 벗어 들고 흔들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동에 타국의 정치인이, 그것도 수장이 개입한다니?
하지만 러시아와 유지하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고 매우 질기기까지 했다.
만약 그가 러시아 국적을 가졌었다면 당장 대통령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유지하는 시민들에게 호소는 했으되 공식적인 자리엔 나타나지 않았다.
통치권은 어디까지나 미하일로프 부총리에게 있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물론 시위대가 잠잠해진 것은 유지하가 어떤 방식으로든 러시아에 일으킬 변화를 기대해서였다.
―잔인한 흡혈귀들보다는 우리 사정을 이해해 주는 외국의 귀공자가 훨씬 낫다.
―비록 러시아인은 아니지만 명예시민이잖아? 어떻게든 개입해서 썩은 돼지들을 숙청해 줄 거야.
유지하가 그런 기대에 부응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모스크바에 등장한 뒤로 미하일로프 부총리의 지시에 상당한 힘이 붙은 것은 사실이었다.
―모든 병력은 원래 부대로 복귀하라. 지금 복귀한다면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겠다.
―지금부터 상황은 근위대와 경찰이 통제한다.
조치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혼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위의 근본 원인인 기득권은 여전하고 일부 극우파 시위대가 난리를 치는 등 불안요소가 남아 있지만 나라가 쪼개지는 위기는 막았다.
내부의 분위기가 일단락되자 미하일로프 부총리는 협상을 위해 곧장 브뤼셀의 나토 본부에 외교부 차관을 파견했다.
각국 정상들이 기다리는 자리에 차관 따위가 가봐야 별 볼 일 없지만 진짜는 관료들과 동행하는 유지하였다.
그가 이번 사태를 중재하러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서는 친구가 진짜 친구지.
―이젠 친구가 아니라 가족이야. 이대로 러시아에 눌러앉아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걸.
―그런데 한국과 인류연합은 어떻게 하지?
―알아서 하겠지 뭐.
한국인들은 대통령이 언제 저기 갔냐며 궁금해했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다.
EU 정상들이 그를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용기가 퍽 가상하다 싶었던 것이다.
―몇 년간 하도 욕하고 싸워서 영원히 볼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만나긴 하는구나…….
―EU 정상회의도 열린다던데 종전하는 조건으로 거기에서 연설시키는 거 아니냐?
무슨 요구를 하건 간에 유지하가 순순히 받아들일 일은 없어 보였다.
그라는 인간은 장애물이 있으면 돌파하는 게 아니라 땅 자체를 엎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EU 전체와 미국이고 보면 이번만큼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명분도 그쪽에 있으니 더더욱.
유지하가 탄 전용기가 브뤼셀 자반템 공항에 착륙했다.
* * *
외교는 수많은 의전 절차로 이뤄진 국제 의례다.
당사자의 직급에 따라 적용되는 의전이 엄격히 정해져 있으며 이를 외면하면 외교를 모른다는 비판을 받기 쉽다.
그런 면에서 유지하는 국제 외교계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아왔다.
대부분의 의전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만 그랬다면 소탈하다는 평으로 끝이었겠지만 상대국 정상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바람에 미친놈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지하 특유의 의전 생략은 모든 국가에 똑같이 적용되었고 다들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나토 본부에 들어서자 수많은 기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진촬영도, 처음 본부에 발을 디디는 정상에 대한 기자회견도 없었다.
미군 장교들이 그를 안내했고 그는 곧장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볼드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마리 르펜 프랑스 대통령등 EU의 국가 수장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정상회의 전에는 이런저런 절차가 있기 마련이지만 유지하를 의식해서인지 대부분 생략되었다.
진행을 맡은 사무총장이 마이크를 통통 두드렸다.
“회의에 앞서 러시아 측에선 의사결정을 유지하 한국 대통령에 일임하겠다고 전해 왔습니다. 이는 미하일로프 러시아 부총리의 결정입니다.”
“외교를 타국의 정치인에게 맡긴다고요? 대체 어디까지 추해질지 모르겠군요, 러시아는.”
마리 르펜 대통령이 한껏 비아냥거렸고 유지하가 그녀를 무시한 채 말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나는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들의 주장을 갖고 왔습니다. 양측은 즉각 전투를 중지하고 부대의 위치를 72시간 이전으로 돌릴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럴 때 당신이 잘 하는 말이 있죠. 거절하겠습니다.”
버나드 윌슨 영국 총리가 가볍게 말하자 잔잔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아무래도 이 상황이 즐거운 모양이다.
몇 년간 계속된 금수조치에 고통받았으니 이런 작은 여흥이라도 있어야지.
유지하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럼 여기 있을 필요는 없겠군요.”
중재하러 온 주제에 대놓고 싸움을 거는 이 화법은 그 누구도 익숙하지 않았다.
몇 명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자 볼드윈 대통령이 나섰다.
“이 자리는 양측의 전투를 중단하고 전후처리를 의논하기 위함이니 불필요한 마찰은 삼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전투의 원인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조사가 있어야겠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러시아 포병부대의 선공이 확실합니다.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이 인간이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는데……?
수장들은 뭔가 수상하다는 눈빛을 교환했지만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볼드윈 대통령이 조건을 열거했다.
“양측의 국경선에 배치된 시설과 모든 장비를 한 달 이전으로 복구합니다. 이는 러시아가 에스토니아의 감독하에 시행합니다.”
“또한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에 30억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프랑스와 폴란드에는 10억 달러를 보상합니다. 이는 정전협상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당치도 않군요. 거절하겠습니다.”
“…….”
잠시 침묵이 회의장을 감쌌다.
이 사람은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모르는 게 아닐까?
욱한 마리 르펜 대통령이 뭐라고 쏘아붙이려 했을 때 볼드윈 대통령이 눈으로 그녀를 제지하고 물었다.
“거절하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정전하는데도 조건이 필요합니까? 확전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러시아가 확전을 택하지 않는 걸 감사히 여기고 아무 조건 없이 정전에 응해라 그 말입니까?”
“정확합니다.”
“미친 소리!”
더는 못 참겠는지 마리 르펜 대통령이 일어서서 삿대질을 해댔다.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습니다. 러시아는 중재를 거부했어요. 우리 군은 이대로 러시아의 영토에 들어갈 겁니다.”
“대신 러시아로부터 핵찜질을 당하는 건 각오해야겠죠.”
유지하의 비아냥에 마리 르펜 대통령이 이를 악물었다.
“러시아가 무사할 줄 압니까? 최소한 도시 다섯 개는 날아갈 겁니다.”
“안 날아갑니다. 내가 러시아 방공군에 공여한 아이언 빔이 몇 개인데. 아마 여러분들이 아는 숫자에 3을 곱하면 될 겁니다.”
“뭐라고요? 당신…….”
이제 유지하는 부들거리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상처 입은 친구를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드론모함도 잠깐 빌려줘야겠죠. 참고로 말하자면 드론모함은 2기가 더 있습니다. 합하면 캘리버 드론을 60기, 컴뱃 워커를 100대 가까이 탑재하죠.”
“설마 그걸 쓰겠다는…….”
“컴뱃 워커 부대가 영토에서 돌아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일본은 제대로 대처를 못 했는데 유럽은 어떨지 궁금하군요.”
“…….”
이쯤 되면 미쳤다는 말조차 모자란다.
“방금 그 말 취소하시오!”
“3차 세계대전이라도 일으켜 보겠다는 겁니까?”
수장들이 흥분해 떠들어댔고 볼드윈 대통령은 눈을 감았다.
어째 좋게 흘러가나 했는데 기어코…….
회의장 분위기가 폭발 직전에 이르자 사무총장은 마이크를 꺼버렸다.
그럼에도 유지하의 발언은 또렷하게 들렸다.
“기회를 줄 때 잡으십시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내 제안은 여기에서 끝입니다. 만약 나를 일어나게 만든다면, 뒤는 당신들의 책임입니다.”
회의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자 볼드윈 대통령이 물었다.
“…그런 협박이 언제까지 먹히리라 생각합니까?”
“먹히지 않을 때까진 계속되겠죠. 내 입장은 이렇습니다. 러시아의 선공은 인정합니다. 에스토니아에도 보상을 할 겁니다. 하지만 나토에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이상입니다.”
“우리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합니까?”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다시 전투가 시작되겠죠. 러시아는 분노를 표출할 곳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까스로 진정시켰지만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죠. 그걸 유럽이 받아내겠다면 뭐 나쁘지 않겠군요.”
발언을 끝까지 들은 볼드윈 대통령이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우리와 전쟁을 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가 원하는 건 평화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던 자유입니다. 다만 내 조건은 변하지 않으니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치킨 게임이다.
개인이나 기업 규모에서는 종종 일어나지만 국가 규모에서, 그것도 미국을 상대로 들이댈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볼드윈 대통령은 수차례 유지하와 시선을 교환하고 마음속에서 저울질했다.
‘유럽은 중요하지만 서유럽이 침공당한 것은 아니다…….’
에스토니아는 나토 회원국이지만 구 소련의 일부였고 지금도 러시아의 영향력을 짙게 받고 있었다.
대단한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니니 양측의 군을 물리고 적당히 보상금을 지급하면 되는 일이었다.
유럽이 반발하겠지만 그쯤이야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었다.
유지하와 러시아에게서 금수조치를 당한다면 그들이 기댈 곳은 미국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유 대통령과 싸우면 안 돼.’
만약 전쟁을 한다면 그것은 한국과 인류연합, 그리고 러시아를 지워 버릴 각오를 하고 난 후여야 했다.
겨우 에스토니아 건으로 핵전쟁을 치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아직 받아낼 게 많이 남았으니까…….’
유럽 입장에서야 어차피 틀어진 이상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계산일지 몰라도 미국은 아니었다.
아이언 빔에 들어가는 크리스탈부터 해서 도입해야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번에 등장한 공중항모만 해도 전략적 가치는 별로 없다고 여겨졌지만 DARPA등 연구기관의 판단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여기선 적당히 넘어가야겠군.’
그는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에 10억 달러를 지급한다. 그리고 부총리 명의로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진상규명위원회에 장성급 국방무관을 파견하여 최대한 협조한다. 어떻습니까?”
유지하가 고개를 끄덕인 반면 유럽의 정상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하지만 나토의 주력이 미국이며, 유럽은 미국 없이 아무것도 아니란 것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마리 르펜 프랑스 대통령은 잔뜩 화가 나 소리를 질러댔다.
“도저히 믿을 수 없군요! 당신들 야합한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화가 나는 건 다른 정상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볼드윈 대통령은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회의장을 나간 뒤였다.
유지하가 느긋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전쟁을 원한다면 언제든 선전포고 하십시오. 피하지 않겠습니다.”
EU의 정상들이 그를 미친놈 쳐다보듯 했다.
“최소한 말은 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이래서야 히틀러 이후 최악의 독재자라는 악명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의 대통령이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하다니, 차르라도 꿈꾸는 거 아닙니까?”
온갖 비아냥이 쏟아졌지만 유지하에겐 잠꼬대처럼 들릴 뿐이었다.
한편 먼저 떠난 볼드윈 대통령은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경호원들이 막아섰지만 그가 손을 저었다.
“아아, 놔두게. 누가 보낸 건지 알 것 같으니.”
여성은 다름 아닌 안드로이드였다.
새로운 모델인지 실제 인간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군중 속에 숨어서 선동도 가능하겠는데?
볼드윈 대통령이 그 기술력에 놀라는 와중에 여성이 작은 수정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아이언 빔에 들어가는 크리스탈이다.
이걸 준다는 건 제조법을 알려 준다는 뜻인가?
안드로이드가 꾸벅 고개를 숙이곤 떠났다.
“내 참. 보답은 확실히 한다 이건가?”
그의 입장을 거들어 준 것으로 아이언 빔을 양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마치 이제 아이언 빔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는 몇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수많은 기술을 쏟아냈다.
앞으로 어떤 게 나올지는 그 외에 아무도 모른다.
다만 너무 늦기 전에 본색을 드러냈으면 했다.
‘차라리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이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군.’
현 상황에선 그게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그럼 최악은?
볼드윈 대통령은 고개를 흔들고는 차에 올라탔다.
* * *
붉은 광장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들은 미하일로프 부총리가 아니라 외국인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
유지하.
러시아의 친구이자 이해자, 그리고 동반자.
어떤 수식어를 동원해도 그가 이뤄낸 성과를 완벽히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러시아군의 실수를 커버했고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지켜 주었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이렇게 발표했을 뿐이었다.
“나의 작은 노력으로 러시아와의 우애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다.
그 간단한 발언이 수많은 러시아인의 심금을 울렸다.
생각해 보면 러시아인들은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푸틴 대통령에 의한 장기간의 독재, 서방권의 경계어린 시선, 기득권의 횡포, 답보상태인 경제 등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지하가 등장했다.
그는 약속만 믿고 러시아에 많은 것을 내주었다.
비록 결과물이 밑바닥까지 내려가진 못했지만 그건 기득권의 잘못이지 그의 탓이라고 할 순 없었다.
이만큼 러시아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러시아인들의 눈에 유지하는 한국인의 대통령이 아니라 러시아 국적을 가진 잘생긴 청년처럼 보였다.
“유지하! 유지하!”
예전에 잠시 그를 잃었던 한국인들이 그의 복귀를 확인하자마자 외쳤던 것처럼.
붉은 광장이 그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유지하는 최소한의 수행원조차 거느리지 않고 붉은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악수와 포옹, 때로는 키스가 이어졌다.
여자만 키스한 게 아니었다는 건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채로 크렘린궁에 들어섰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붉은 융단이 그림처럼 깔려 있었고 미하일로프 부총리가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집무실은 이쪽입니다.”
그가 슬쩍 비켜 주자 유지하가 웃으며 앞서길 권했다.
“앞으로 러시아의 지도자가 되실 분이신데 제가 먼저 올라가서야 되겠습니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경비를 맡은 근위대 병사들과 좌우에 도열한 관료들, 그리고 수많은 장성들은 누가 진정한 러시아의 지도자인지 알고 있었다.
새로운 차르가 붉은 계단을 올랐다.
그는 러시아인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러시아인이었다.
유지하가 미하일로프 부총리와 함께 집무실에 들러 푸틴 전 대통령의 유서를 낭독하고 있을 때.
태양계 안으로 어떤 물체가 날아들었다.
에테르 폭풍에 휩쓸린 이 물체는 지구의 공전궤도로 빠르게 접근했다.
스타필드가 쏘아 올린 정찰위성 수십 개가 접근을 포착하고 경보를 울렸다.
테라섬에서 요양하는 척 업무를 보고 있던 아르마가 보고했다.
「확인되지 않은 선지자의 유물입니다. 초속 55km로 지구에 낙하합니다. 좌표는 서부유럽… 비스케이만으로 추정됩니다.」
선지자도 지구에 유물을 던지는 것에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유지하는 미하일로프 부총리와 회담을 나누다가 불안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건…….’
에테르 감응력이 전신에 경고를 보냈다.
옅은 사이코키네시스 필드가 느껴졌다.
저건 평범한 선지자의 유물이 아니었다.
‘플레이그 코쿤.’
유지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쪽은 이제 메가시티를 지을 땅을 준비한 참인데.
그런데 군단이 아니라 한 놈만 오는 이유는 무얼까?
유지하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플레이그의 유생체를 담은 코쿤이 대기를 불태우며 바다에 착수했다.
거대한 쓰나미가 일어나 프랑스의 해안가를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