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이건 스포츠가 아니다
오늘날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전쟁이라는 걸 각인시킨 영상들은 대부분 종군 기자들이 촬영한 것이다.
가끔은 군에서 사기 진작을 위해 뿌리거나 유출되는 경우도 있지만 전쟁 전체를 중계하는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그러나 메가시티에선 떡하니 그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초대형 전광판에 어스 플릿의 모습이 나타났다.
심지어 구석에는 미국 함대와 대도시의 거리까지 비춰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미국과 전쟁을 한다는 건 방송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함대가 동원된 것은 몰랐던 터라 깜짝 놀랐다.
“저거 섬 앞바다에 있는 거야?”
“지형을 보니까 그런가 본데. 완전히 밀집 대형이네.”
“하나, 둘, 셋… 총 42척이네. 근데 맨 앞의 저 배는 뭐지?”
“크다…….”
메가시티 시민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면역이 되어 있었지만 다른 군함의 몇 배나 되는 덩치를 가진 배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체감으로는 제럴드 포드급 항공모함과 맞먹는다는 서울함보다 더 큰 것 같았다.
그 거대한 배를 필두로 40여 척의 군함이 바다에 당당히 정박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전부 우주선인데 왜 바다에 내려왔지?
선두의 서울급은 물론이고 기존의 어스 플릿 소속 함선도 개수에 개수를 거친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현재에 와서는 가스터빈까지 삭제되었고 핵융합로가 탑재되었다.
수중이든 우주든 환경을 가리지 않고 초장기간 동안 활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어스 플릿이 왜 바다에 있을까?
설마 미국의 함대에 정정당당하게 맞서기 위해서?
일부 사람들은 전쟁에서 무슨 낭만을 찾는 거냐며 투덜거렸지만 유지하의 의도는 달랐다.
그는 미국의 완전한 항복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최상의 상태에서 정정당당하게 맞붙어서 박살을 낼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 인류연합이 외계인의 침략을 묘사한 SF 영화처럼 우주선을 동원해 미국의 백악관을 박살내고 미 함대를 손 쓸 새도 없이 격멸한다 치자.
당장은 고위 관료들이 사망하고 미군이 붕괴될지도 모르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의 생각을 바꾸기는 힘들다.
아무래도 외계인에게 당했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을 테니까.
―우주에서 빔으로 공격하다니 치사하다!
―바다에 내려왔다면, 우리의 항공모함과 잠수함과 싸웠다면 절대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아직도 인류연합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이 전력을 다한다면 인류연합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따라서 그런 인식을 바꾸고 미국을 항복시키기 위해선 그들이 내놓은 모든 전력을 정면에서 깨부술 필요성이 있었다.
그걸 위한 것이 바로 어스 플릿이다.
동등한 위치에서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고 미군의 전력을 삭제해 나간다.
최종적으로는 미군이 투사 가능한 대부분의 전력을 없애고 북미 대륙에 당당히 상륙할 계획이었다.
이 중계는 인류연합이 미국을 꺾고 지구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스포츠의 형식을 빌어서.
실제 현장을 촬영한 건 아니고 CG로 영상을 제작해 내보내는 것이지만 현장감만큼은 엄청났다.
메가시티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이 영상이 송출되었고 수십 개 국가로 퍼졌다.
다들 전쟁을 중계한다는 발상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흥미를 배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미국과 인류연합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이 질문의 근본적인 해답이 곧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 이기든 미래는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승자가 확정되면 당분간은 조용해질 것 같았다.
막상 전쟁이 끝나면 거대한 후유증으로 전 세계가 정신을 못 차리겠지만.
아무튼 이 중계는 하와이에 존재하는 인도-태평양 사령부도 보고 있었다.
미 해군 장성들은 상황통제실 모니터에 나타난 CG 영상을 보고 어처구니없어 했다.
“정찰기 한 번 안 날리고 우리 함대의 위치를 완벽하게 묘사해 놨군.”
아무리 해상도가 높은 정찰위성을 쓴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영역이다.
이는 인류연합에 레이더 외의 다른 탐지수단이 있다는 증거였다.
한 참모는 잠수함의 위치를 확인하곤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연안에 착저해 있는 시울프급 3대의 위치까지 정확히 찾아냈습니다. 사령관님, 작전 중지를 건의합니다.”
잠수함의 위치가 드러났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통합전투사령부에서 입안한 작전 대부분이 쓸모없다는 얘기도 된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펜타곤에서 연락이 왔네. 이번 전쟁은, 절대 중지하거나 피할 수 없다고.”
“막대한 피해가 날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사람들이 그걸 원하니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번 전쟁에서 미국의 힘을 보여 주길 원했다.
여기에서 물러나더라도 그건 폭탄의 기폭시점을 뒤로 미루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카드를 다 보여 주고 시작할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군인은 정치인의 실패를 책임지는 법이니까.
이번 작전을 총괄하는 해리그 제독은 전 함대에 지시를 내렸다.
“전 함대의 제군들에게 알린다. 우리의 목표는 인류연합의 함대를 격멸하는 것이다. 가능성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낮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꿀꺽.
누군가가 삼킨 마른침에 해리그 제독은 자신도 모르게 군모를 벗고 반백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건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몸이 약해서는 아닐 것이다.
“자잘한 계획 따위는 필요 없다. 상대는 거의 외계인에 가까우니까. 개함별로 어스 플릿의 움직임에 대응하고 하프늄2 탄두도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저 외계인의 기술을 쓰는 놈들에게 미국의 힘을 보여 주자. 신이시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기도가 끝나고 함대별로 태평양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펜타곤의 군사 전문가들은 100% 패배하는 그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미 해군은 눈과 귀가 가려졌고 인류연합의 함대는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어마어마한 전력 차는 도저히 승산을 높게 쳐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한다.
초강대국 미국이 생긴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신생국가에 무릎을 꿇고 항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류연합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그들을 배척하는 사람들 또한 많은 게 현실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누가 옳았는지 가려질 것이다.
* * *
바다에서 해전이 펼쳐질 때면 정보참모들이 적 함대의 구체적인 항해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쓰곤 한다.
평소의 미국이었다면 정찰위성과 정찰기를 동원해 먼저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눈과 귀가 거의 가려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함대의 정보참모들이 애를 쓸 필요는 없었는데, 인류연합이 전광판을 통해 함대의 경로를 내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 영상을 찍어 바깥으로 유출했고 함대의 참모들이 입수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1분 정도였다.
덕분에 태평양 함대는 어스 플릿이 일직선으로 북미 대륙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8시간 후 미드웨이 환초 부근에서 인류연합의 함대와 조우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방위는 약 275도, 거리는 950마일.”
몇 년 전만 해도 950마일 거리에서 조우했다고는 표현하지는 않는다.
거의 1,500km가 넘어가는데 이 정도면 미국의 공격도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인류연합의 무기체계가 대두되고 각국이 이를 따라잡으려 애쓰면서 극초음속 대함미사일의 스펙이 많이 올라갔다.
국방비에 엄청난 돈을 투자한 것이 슬슬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강대국들의 표준적인 교전거리는 1,000km로 늘어났고 미국은 거의 1,500km에 달했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함재기의 작전반경과 대함미사일의 사거리를 따져보면 그 정도에서 전투가 시작된다는 게 맞을 것이다.
정찰위성이 있다면 그걸 더 늘릴 수가 있으나 그렇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해리그 제독은 서서히 접근해 오는 인류연합의 함대를 노려보며 참모들에게 물었다.
“저쪽 드론이 분당 몇 대 사출되는지 알고 있나?”
“거의 동시에 사출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함체가 순식간에 변형되어서 탑재된 드론을 한꺼번에 사출하지. 우리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말벌 네 놈을 하늘에 띄울 때 말이야.”
제럴드 포드급 항공모함은 전시 집중 임무에 들어가면 하루에 최대 250소티를 띄울 수 있다.
함재기를 250번 날릴 수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4대를 날릴 수 있으므로 효율적이긴 한데 문제는 대기 시간이 길다는 것이다.
이함한 함재기는 그대로 작전에 투입되는 게 아니라 급유부터 받아야 한다.
무게를 최대한 줄이고 이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중임무에 들어간 항공모함 주위 상공은 대기하고 있는 전투기로 가득하다.
항공모함이 괜히 말벌집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미 해군이 그렇게 온갖 노력을 하고 있을 때 어스 플릿은 매우 간단하게 전력을 투사한다.
한 군사전문가는 이렇게 평했을 정도였다.
“인류연합은 버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버튼만 누르면 10초 안에 무인기가 사출됩니다. 1분 안에 수십 대를 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항공모함에서 함재기가 이함할 때는 최대 4대씩 가능하지만 착함은 1대씩만 가능하다.
그에 반해 어스 플릿의 드론모함은 한꺼번에 드론을 수납한다.
그 모든 것이 무인으로 이뤄지다 보니 효율성에서는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미사일에서도 적을 포착하고 추적하기 위한 각종 센서와 탐지 수단의 성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실제 뜯어 본 건 아니지만 어스 플릿에서 발사한 미사일의 궤도와 명중률을 추적해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요약하면 인류연합의 무기체계는 미 해군에 비해서 최소 수십 년은 앞서 있었다.
군사 전문가들이 괜히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와 아메리카 원주민 예를 든 게 아니었다.
해리그 제독은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인류연합의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뭔지 아나? 효율이야. 그의 시선에서 우리 항모전단은 돈 잡아먹는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네.”
귀를 열고 듣던 참모들이 반박했다.
“확실히 인류연합은 효율적입니다. 생산수단을 인공지능이 독점하고 인간은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그래서야 인간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인공지능의 노예가 아닙니다.”
“글세…….”
해리그 제독은 좀 다르게 생각했다.
유지하 대통령이 효율을 강조하는 이유는 플레이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 위기만 벗어난다면, 그는 더 이상 인공지능을 앞세운 독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젠가 발언한 바 있다.
일각에선 그런 언급 자체가 독재자의 전형적인 기만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그 어떤 독재자라도 영원불멸의 권력을 꿈꾼다. 유지하도 예외는 아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미국을 무릎 꿇리고 패권을 손에 넣는다면 돌변할 것이다.
대부분의 독재자가 그래 왔으므로 유지하도 그럴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유지하의 독재가 그들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유지하는 자신의 사상을 대중에 주입시키려 하지 않는다.
보통의 독재자는 자신의 우상화 작업에 공을 들이기 마련인데 메가시티에선 그런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메가시티의 분위기도 대단히 자유로웠다.
대표적으로 메가시티 퍼시픽을 보면 이건 인종의 용광로라고 할 정도로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많은 사람이 모인 만큼 인종 차별도 있고 때로는 폭력 사태도 일어나지만 분위기 자체는 상당히 느슨했다.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시민들에게 간섭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 범죄란 것도 상식적인 수준이어서 메가시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유지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관리자일지도 모른다. 플레이그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방어시설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들을 몰아넣다 보니 다소 강압적인 수단이 필요해진 것이다.
최근 정치학계의 연구도 이런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유지하가 외계인이나 예지자가 아니라 이런 사태를 이미 겪어 본 사람이라는 것.
―그가 미래에서 왔다고 하면 이 모든 의문이 해결된다. 꿈이란 것도 자신이 겪은 것을 얘기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미래의 인류는 플레이그에게 멸망당했나? 만약 그가 미래에서 왔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했는가?
무수한 논의가 이어졌지만 미 정부는 이를 관심 있게 듣지 않았다.
당장 일자리를 비롯한 현안 해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최근 유지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건 그가 가진 힘과도 관련이 있었다.
―더 이상 유지하를 외면하긴 힘들다. 현실적으로 그의 패권을 인정해 주고 팔로워가 되는 게 낫다.
―미국이 인정하진 않을 테니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바람이라면, 그 충돌이 가급적 피해 없이 끝났으면 한다.
아쉽게도 피해가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대규모의 사상자가 예약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류연합은 완전한 무인함대를 끌고 나왔지만 미국은 수백 척의 군함에 15만 명에 육박하는 병력을 동원했다.
심지어 해군 행정당국에선 만 단위의 관을 준비해 놓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만한 피해를 각오하고 부딪치려는 것이다.
해리그 제독은 그런 움직임 자체를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군인이고, 명령에 따라 싸워야 한다.
그게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함대는 곧장 전진해 미드웨이 환초 부근에 도착했다.
약 2,000km거리에 인류연합의 어스 플릿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교의 인원들은 밀집대형으로 정박해 있는 함대를 보곤 혀를 내둘렀다.
“지나치게 몰려 있는데? 하프늄탄 한 방이면 20%가 날아가겠어.”
“한 방도 안 맞을 자신이 있나 봅니다.”
“젠장, 성인이 어린애와 싸우는 것 같군. 정찰기 내보내. 위치부터 확인해야지.”
이륙한 조기경보기에서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왔다.
해리그 제독이 지시를 내렸다.
“만났으니 인사해야겠지. 함재기들 이함시키게.”
넓은 갑판이 이륙 준비로 분주해졌다.
* * *
전투는 7함대의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전투기들이 극초음속 대함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수십 기의 슈퍼호넷이 일제히 AGM 283 슈퍼애로우를 쏘았고 이들은 순식간에 마하 15를 돌파하며 곧장 어스 플릿에 접근했다.
함대 본부에선 이 공격으로 어스 플릿이 제대로 된 타격을 입진 않겠지만 최소한 밀집대형을 풀고 산개하리라 생각했다.
AGM이 워낙 복잡한 비행 궤적을 가지는 만큼 요격하기가 극히 까다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어스 플릿은 미사일이 지근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다가 별안간 트랜스폼으로 레일건 포신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투투퉁 쏘아댔다.
함대 본부에선 어스 플릿이 레일건을 쏜 것을 알고는 허탈해했다.
“겨우 레일건으로 AGM을 요격하겠다고?”
“아무리 어스 플릿이라도 너무하는 거 아닌가?”
그들의 상식에서 레일건으로는 절대 AGM을 요격할 수 없었다.
대응 시간이 너무 짧은 데다가 정확도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레일건이 대함 공격용 무기로 각광을 받는 것은 무시무시한 사거리와 연사 속도였지 정확도가 아니었다.
또한 AGM의 복잡한 비행 궤도도 요격을 어렵게 만든다.
실시간으로 위치를 추적하지 않는 한 약간의 딜레이는 있기 마련이고 그 짧은 시간 동안 AGM은 수 킬로미터를 비행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탐지 수단으로는 AGM을 포착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조차도 아이언 빔 이전에는 자국의 미사일을 요격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어스 플릿은 그걸 해냈다.
수십 발의 레일건 탄자는 어스 플릿을 향해 쇄도하는 수십 발의 AGM의 탄두에 정확히 명중했다.
시커와 탄두가 통째로 관통당한 미사일은 조금 더 비행하긴 했지만 결국 목표를 추적하지 못하고 바다에 우수수 떨어졌다.
함대 본부가 이를 알아낸 건 공교롭게도 메가시티의 전광판을 통해서였다.
1분 후 정확히 AGM이 레일건 탄자에 요격당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CG영상이지만 구도 자체는 레이더로 파악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함교가 무거운 침묵에 휩싸인 것과 달리 전광판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보다 못한 참모들이 짧게 투덜거렸다.
“저 중에는 미국인도 있을 텐데.”
“더 이상 미국인이 아니라고 봐야겠죠. 그들은 인류연합의 시민입니다.”
해리그 제독은 긴장감에 모자를 벗었다.
“적 함대가 레일건으로 AGM을 무력화시켰다. 대함미사일 요격을 준비하라.”
“요격 시스템 가동합니다.”
얼마 후 어스 플릿의 통합화력함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말벌들이 쏜 미사일과 정확히 같은 숫자에 비슷한 속도였다.
태평양 함대는 일제히 산개에 들어갔고 대공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미 해군의 함대는 어스 플릿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대공 미사일은 복잡한 비행궤도를 추적하지 못하고 빗나갔고 요격에 성공한 것은 몇 발에 불과했다.
수십 척의 이지스 구축함이 2단계로 아이언 빔을 가동했으나 일부 미사일은 그것마저 뚫고 들어왔다.
푸른 하늘에 선명한 레이저가 그어지는 가운데 5발의 미사일이 함대 방공망을 뚫고 5km 안까지 접근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초.
미리 가동된 CIWS가 불을 뿜었지만 대응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지스 구축함 DDG-152 상공에서 하프늄2 탄두가 기폭되었다.
순간 구축함이 통째로 증발하며 주변의 군함들이 균형을 잃고 밀려났다.
몇 개의 높은 파도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함대를 순차적으로 타격했다.
현대 군함의 복원력은 대단했지만 순간적으로 전투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리그 제독을 포함한 참모들조차 균형을 잃고 쓰러질 정도였으니.
“젠장! 이때 공격했다면 우린 완전히 끝장났겠군.”
그러나 어스 플릿은 무자비하게 약점을 쑤시진 않았다.
한 차례 미사일을 발사한 뒤엔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게 미국인들을 더 열받게 했다.
“봐주면서 싸운다 이거냐?”
“해치워! 해치워 버려!”
메가시티에서 송출한 화면을 공짜로 구경하던 미국인들이 주먹을 치켜올렸다.
현장에선 수백 명의 군인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는데 그들은 스포츠 경기처럼 환호하고 있었다.
해리그 제독은 하와이에서 공군의 스트라이크 패키지가 출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00대가 넘는 전폭기와 호위기, 그리고 각종 지원기가 투입되는 엄청난 규모의 공습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구조선과 그에 대비되어 주먹을 치켜드는 미국인들이었다.
인류연합의 시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인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가?
‘이건 스포츠가 아니란 말이다! 이 얼간이들아!’
그러나 구석의 전광판에 비친 미국인들의 환호성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 자체에 열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