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92
191화 인류를 위하여
군단타격함대가 명왕성을 향해 떠났을 때.
메가시티 퍼시픽에선 기묘한 화합이 이루어졌다.
최고평의회의 배성민 의원과 여타 정치인들의 비밀 회동이다.
이들은 인공지능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온갖 수고를 들였다.
장소로는 지난 정전 이후 아직 복구되지 않은 곳을 골랐고 가면과 가발을 이용해 드론과 안드로이드의 렌즈에 띄지 않게 했다.
덕분에 요즘 신경이 날카로워 온갖 강압적인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대통령에게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케네스 오스본 의원은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공간을 둘러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용케 이런 곳을 골랐군.”
“요즘은 이런 곳이 늘어났습니다. 지진 때 입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탓이겠죠.”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이렇다는 건 루시아의 관리에도 한계가 왔다는 뜻일 겁니다.”
“즉, 루시아나 유지하나 전능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번 플레이그 퀸 사건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회동 참석자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들은 인류연합의 중추인 메가시티 퍼시픽의 1구역에서 사는 이들로, 각각 최고평의회와 여러 정치단체의 수장을 맡고 있었다.
인종 구성은 대부분 백인으로 그중에서도 영미계가 주류였다.
배성민이 거의 유일한 동양계였는데 이것이 회동의 정체성을 말해 준다.
사실 인류연합엔 이들 외에도 WASP를 기반으로 하는 백인이 상당히 많았다.
애초에 유지하가 요구한 각종 조건에 백인들이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용히 지내며 인류연합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권력을 탈취하는 게 가능하다였다.
단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유지하 대통령이 변심해 시민들의 신뢰를 잃을 것.
―루시아로 통칭되는 강인공지능이 타격을 입어 오류를 드러낼 것.
―외부에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가 생겨나 빈틈이 생길 것.
하나도 아니고 세 개의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어찌해 볼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니 10년 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근에 생긴 일련의 변화는 이 결사대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유지하 대통령은 황제 놀음으로 시민들의 신뢰를 잃고 있으며.
강인공지능은 지진과 해일로 본체에 타격을 입었는지 각종 오류를 뿜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플레이그 퀸이 나타났다.
다른 것보다 세 번째가 결정적이었다.
플레이그 퀸이 바로 유지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들은 사이커가 워낙 많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고 인류연합 사회에 금방 퍼져 나갔다.
이제 일부 시민들은 유지하가 사태의 원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에 유지하가 에테르 기반 기술을 가져온 게 잘못이다.
―유지하만 없으면 문제도 없다.
물론 그를 내준다고 해서 플레이그가 순순히 물러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사이커들이 목격한 거대한 규모의 플레이그 군단은 시민들의 이성을 앗아갔다.
―통합우주군이 그 괴물들을 이길 수 있을까? 아무래도 불가능하지 않을지…….
―소규모 함대는 찍어 눌렀지만 플레이그 퀸이 직접 왔다. 대통령도 당황해서 두문분출하고 있지 않나.
일부 시민들의 시선에서 유지하 대통령이란 기껏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류를 한 곳에 모아놓고 제대로 대처도 못할뿐더러 용기 있게 나서지도 못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거기에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황금궁전을 비롯한 각종 황제 즉위 준비가 큰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이 원한 건 능수능란하게 일을 처리하는 완벽한 통치자이지 황제가 되고자 하는 얼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런 요소들로 인해 현재는 성전기사단이 활약하기 위한 최고의 상황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성전기사단은 영미권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의 이권을 되찾기 위한 세력이다.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지만 그들은 바로 그것이 지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류에게 다시 종교를, 재산을 쌓을 기회를, 감시당하지 않을 자유를.
―우리에겐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 같은 고독한 황제가 아니라 친근한 정치인이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인류연합이 세워지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들이 메가시티 시스템과 유지하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플레이그가 박멸되었을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플레이그 퀸이 직접 행차했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계획서를 살펴본 오스본 의원이 말했다.
“짧게 요약하면 우리의 계획은 대통령을 사로잡아서 우주괴물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에테르까지 회수하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장받느냐는 이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인류연합의 힘으로는 플레이그에게 대항하기 힘들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표는 유지하를 확보하여 플레이그 퀸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그는 자작극에 능하고 죽은 척이 특기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 우리의 공격에서 벗어날지 모릅니다.”
“이미 외부에서 협력자들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의원님.”
그 협력자들이란 개인화기로 무장한 자경단이다.
숫자는 얼마 안 되고 컴뱃 워커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메가시티가 셧다운된다는 전제 하에서는 상당한 쓸모가 있었다.
플레이그 퀸이라면 메가시티를 셧다운시킬 능력은 충분히 있겠지.
“사이커들이 퀸과 대화하여 그 기회를 만들어 줄 겁니다.”
플레이그 퀸은 유지하조차 능가하는 사이커로서 개개인에게 대화를 걸어올 수도 있음이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사이커는 그녀의 의식을 접하고 대화를 거부하겠지만 성전기사단의 기사들은 좀 다르다.
그들은 플레이그 퀸에게 이쪽의 의사를 계획을 전달하고 메가시티를 전복시킬 기회를 요구하게 된다.
누구에겐 그것이 배신으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통령이 정치를 잘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나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배 의원.”
“…물론 그렇죠.”
참석자들이 배성민 의원을 쳐다봤다.
유지하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복심으로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그조차 이런 회의에 참석할 정도니 대통령이 얼마나 신임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
성전기사단이 이런 일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서 나온 정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부에선 대통령의 자작극일지도 모른다며 경계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수장인 오스본 의원은 웃어넘겼다.
“대통령의 특기가 자작극이고 취미가 공갈협박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플레이그 퀸이 출현해 그를 궁지에 몬 것도 오스본 의원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플레이그 퀸까지 조종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점은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됩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이미 짜였고 실행과 인선만 남았다.
오스본 의원은 미리 짜둔 정부 인선표를 꺼냈다.
어째 계획서보다 더 길고 자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는 기대에 찬 시선을 무시하지 않고 인선을 발표해 나갔다.
“대통령에 케레스 오스본, 관리국 국장으로 하비 레티그, 메가시티 퍼시픽 시장으로 하워드 레이먼드…….”
여러 명의 인선이 확정되는 가운데 배성민의 차례가 왔다.
오스본 의원이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배 의원은 원래대로 비서실장을 맡아 나를 보좌해 주길 바랍니다. 10년 넘게 비서실장을 했으니 역량에 대해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성심껏 보좌하겠습니다.”
배성민 의원이 성전기사단 단원들에게 고개를 숙이자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인류연합 전체가 자신들 손에 들어온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유지하와 아르마의 계획이었다.
플레이그 퀸과 둥지의 출현은 예상외였지만 그것조차 계획을 바꾸진 못했다.
‘기다려라, 너희가 모든 것을 쥐었다고 생각했을 때 반격이 시작될 테니까.’
배신자들을 죽이고 나면 인류연합은 새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명왕성 주역에 나타난 플레이그를 박멸하는 게 먼저겠지만 그건 배성민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대통령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인류연합을 존속시키는 게 그의 목표였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표정을 오해한 의원들이 일제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한 잔 합시다. 모든 것은 인류를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누구 마음대로 인류를 입에 올리는가.
배성민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새겨졌다.
* * *
현재 통합우주군은 지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통합우주군 자체에선 활발하게 통신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지구와는 도통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각 우주기지와 함대를 컨트롤하는 만큼 당장 큰 문제는 없었으나 병력의 혼란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갑작스레 군단타격함대에 합류하게 된 군인들은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군단타격함대는 뭐고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다.
―내 가족들은 어떻게 된 거지? 우린 뭘 하게 되는 거야?
―요즘 대통령한테서 안 좋은 소문이 들리던데 설마 우리를…….
고위 장교들은 그나마 체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조차 당혹감을 감추진 못했다.
최소한의 설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때 함대의 모든 스크린에 유지하 대통령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척이나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선명했다.
함대의 전 병력이 그를 바라봤다.
“통합우주군의 장병 여러분, 대통령입니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느라 대단히 수고가 많습니다. 그 노고를 치하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해줄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적인 플레이그를 박멸하는 겁니다.”
“모두 플레이그 퀸의 존재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현재 그녀는 명왕성 주역에 위치해 있으며, 명왕성과 위성 카론을 침식해 힘을 비축하는 중입니다.”
유지하의 얼굴이 한쪽으로 비켜나며 명왕성과 카론의 모습이 보였다.
선명한 붉은 구름과 함께 지각이 쩍쩍 갈라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구름 주위로 수많은 플레이그 개체가 벌떼처럼 몰려 있었다.
그걸 목격한 장병들의 입에서 하나같이 끔찍하다는 소리가 나왔다.
“젠장, 완전히 행성을 잡아먹는 괴물이잖아.”
“명왕성은 행성이 아닌데…….”
“하여튼 끔찍한 건 맞잖아.”
유지하 대통령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 상황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으며 여러분은 플레이그와 최후의 일전을 치르고 지구로 귀환하면 됩니다.”
“인류연합의 대통령으로서, 여러분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군단타격함대와 함께 명왕성 주역에 가십시오. 훈련받은 대로 플레이그 퀸과 둥지를 파괴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임무는 끝납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통합우주군의 모든 장병들에게. 무운을 빕니다.”
그것으로 메시지는 끝이었다.
장병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지만 일단 내용이 정리는 된 듯했다.
“그러니까… 명왕성 주역에 가서 플레이그 본대하고 싸우라 이거지?”
“다 좋은데 대통령은 안 오나 모르겠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파일럿으로 활동하긴 무리인가 보지.”
“근데 최후의 명령은 뭐지? 대통령 관두기라도 하나?”
“황제가 되겠다는 사람이 그럴 리가. 근위군 창설할 거니 통합우주군에 내리는 명령은 마지막이라는 소리겠지.”
“그때가 되면 국명도 인류제국으로 바뀔걸?”
“인류제국은 얼어 죽을.”
“자자, 전 장병에게 알린다.”
인공지능에게서 지시를 받은 장성들이 함 내의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대통령의 의중이 의문스럽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동안 세뇌에 가깝게 교육받은 적이 눈앞에 있었다.
일단 그들부터 해치우자는 주장이 장성들 사이에서 힘을 얻었다.
―우리는 군단타격함대의 규모나 임무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괴물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통합우주군은 인공지능의 통제 아래에서 전투하는 훈련을 해왔다.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우리는 명왕성으로 가서 싸우기만 하면 된다.
―그 빌어먹을 플레이그 퀸과 둥지를 박살내고 지구로 복귀하면 된다. 여러분들은 가족이나 연인의 품속에서 쉴 수 있을 것이다.
긴 기다림이 있었다.
통합우주군의 장병들은 긴장 속에서 훈련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 훈련의 결과를 맞이할 때가 왔다.
장병들은 도망칠 곳도 안식할 곳도 없음을 깨달았다.
휴식은 명왕성 주역에서의 전투 이후로 잡혀 있었으며 인공지능은 그 유명한 10분 단위의 스케줄을 장병들에게 적용했다.
덕분에 광속의 10% 속도로 명왕성으로 향하고 있는 군단타격함대의 장병들은 도통 쉴 여유가 없었다.
“젠장, 사람이 너무 없어! 어이! 락 볼트 점검 좀 도와줘야겠어!”
“함장이 전달한다. 어설트 아머의 비행데이터 조정 건으로 추가 작업이 필요하니 호명하는 파일럿들은 격납고에 전원 집합할 수 있도록.”
수많은 군인과 워커, 안드로이드가 함 내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워낙 바쁘다 보니 전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냐는 빠르게 복도를 걷다가 창가에 기대어 있는 유진을 발견했다.
그는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우리는 초속 3만 킬로미터로 우주공간을 여행하는 중입니다. 신기하죠?”
“잠깐만, 뭐? 광속의 10%라고?”
소냐는 그와 마찬가지로 창가에 달라붙어 바깥을 내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뭔가 특별한 광경이 펼쳐져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그저 수십 척의 전투함이 보일 뿐.
“움직이는 거 맞아? 정박해 있는 것 같은데.”
“모든 게 에테르 역장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테르로 만든 공간 속을 질주하는 거죠.”
“전함에도 그런 기능은 없잖아.”
“그 사람이 숨겨놨던 뭔가가 있는 거겠죠.”
“하긴. 외계인이라고 해도 아무도 안 놀랄 거야, 아마.”
그 사람이란 유지하 대통령을 의미한다.
유진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소냐의 심정적인 아버지.
둘은 어떤 면에선 남매라고 할 수 있었고 같은 편대에서 훈련하다 보니 꽤 친해진 상태였다.
로저스 대위는 그런 둘을 보며 연애하냐며 놀렸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소냐가 유지하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는 모르지만 유진은 자신에게 부성애를 갈구하는 소냐를 애처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과거 그의 유전자를 이용해 태어난 자식들도 부성애를 갈구했을까?
‘나 같은 놈 바라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라.’
그게 유진이 하고픈 말이었지만 소냐는 모르는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중위는 어떻게 생각해?”
“뭘 말입니까?”
“플레이그 퀸인가 하는 존재가 우리 아빠를 필요로 한다는 거.”
“죄송하지만 저는 외동입니다.”
“일단 그런 걸로 가정하고 얘기를 해보자고. 아들이니까 뭐라도 들었을 거잖아.”
“글쎄요… 별로 사이가 좋진 않아서. 우주로 올라온 뒤에는 한 번도 연락을 못 받았거든요.”
“한국인은 정이라던데 매정한 부자지간이네.”
“그 소린 어디서 들었습니까?”
“어렸을 때 먹었던 과자에 적혀 있던데.”
“아. 그 초코과자.”
둘은 잠시 말문을 잊었다.
소냐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이제 곧 플레이그와 싸우겠네. 중위는 싸움이 끝나면 뭘 하고 싶어?”
“여행이나 할까 합니다.”
“여행?”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아주 긴 여정이 될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긴 여행은 무슨. 지구 한 바퀴 도는 데 몇 시간도 안 걸리잖아.”
유진은 웃으며 말을 아꼈다.
목적지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소냐는 우울한 눈을 하곤 말했다.
“사실 난 떠나기 전에 아빠한테 연락을 하고 싶었거든. 이제 싸우러 가니까 잘 다녀오라고 따뜻한 한마디만 들으면 족했어. 그런데…….”
“통신이 끊겼군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도 아빠가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나는 유전자를 이어받은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거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유진은 위로해 줄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선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안 될 것이다.
정체를 밝히면 글쎄, 안 그래도 안구에 가득찬 물기가 흘러내릴지도 모르겠다.
소냐는 훌쩍거리다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부하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고 추하네 나.”
“만약 아버지가 지금 모습을 봤다면 한마디 하셨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울보로 키운 기억은 없는데, 라고요.”
“…….”
소냐는 멍하니 있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
“아뇨. 저한테는 자격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 봐.”
“왜냐면…….”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정체를 밝혀 봐야 그녀에게 도움될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잠깐 동안은 기쁘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게 나았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긴.”
소냐는 할 일이 많다며 바삐 걸어갔다.
유진은 복도에 서서 루시아의 보고를 들었다.
「현재 명왕성과 카론은 중심핵이 드러난 상태로 강렬한 레드 클라우드에 휩싸여 있습니다.」
「둥지의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으며 수많은 플레이그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본 함대는 약 30시간 후 전투 준비가 끝나며 43시간 후에는 명왕성 주역에 진입할 예정입니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
플레이그 퀸은 한 달의 말미를 주었지만 유진으로선 그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군단타격함대엔 에테르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플레이그 몰래 이동이 가능하다.
태양계를 가로질러 곧장 타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막을 순 없다.’
플레이그 퀸에게 무슨 계획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 함대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함 세틀러호는 본격적인 전투함은 아니지만 거대한 에테르 역장으로 함대 전체를 기동시킬 수 있었고 적재한 반응탄의 숫자도 상상을 초월했다.
200척에 육박하는 전함과 전투순양함은 수십 기의 어설트 아머를 탑재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제대로 훈련받은 파일럿은 아니지만 빈약한 둥지와 플레이그 퀸을 파괴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25년 전 우리는 패배했다. 하지만 이제는 승리할 것이다.’
유진은 25년 동안 걸어온 길을 되새겼다.
동해에 떨어진 후 식물인간에서 벗어나 재벌 행세를 하다 마침내 한국의 대통령이 되어 벌인 수많은 만행들.
많은 사람을 기만했고 때로는 입에 담기 힘든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도 두려움도 없다.’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그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하여.’
유진은 그 한 문장을 속으로 삼켰다.
언젠가 지구로 돌아올 수 있다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인류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