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41
240화 사태를 수습하는 방법
타인의 영혼을 흡수하는 과정은 신기하면서도 거북한 경험이었다.
레오볼드는 들어와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한 몸에 여러 개의 영혼을 가지게 된 부작용이리라.
시야가 흐려졌고 오른쪽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그의 왼팔에 자리하고 있던 케인이 감탄하듯 말했다.
―한 몸에 무려 네 개의 영혼…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 역시 당신께서는 라사의 대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카이로스처럼 온갖 약물에 절여지고 마법진이 새겨진 자들도 두 개의 영혼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생명체가 지닌 한계에 가깝다.
하지만 레오볼드는 자신의 것에다 소신 케인의 영혼, 그리고 그라키에스와 카이로스의 영혼까지 흡수했음에도 약간의 부작용 외에는 멀쩡했다.
‘시끄럽다 케인, 네 할 일을 해라.’
―물론입죠… 이제 저들을 엘드그라실의 가지로 인도하겠습니다…….
―그아아아!
―이,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두 영혼이 뭐라 절규하며 발버둥 쳤지만 레오볼드는 무시했다.
영혼인도자 케인이 권능을 사용하자 레오볼드의 정수리에서 밝은 빛이 뿜어지더니 어딘가로 길게 이어졌다.
엘드그라실의 가지가 위치한 곳이었다.
본체에 흡수되었다면 자아가 희미해져 곤죽이 되었겠지만 가지에 갇혔기 때문인지 의외로 멀쩡했다.
―영혼의 인도가 끝났습니다, 라사의 대리인이시여…….
“후우…….”
레오볼드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을 떴다.
두 영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는 아르마에게 지시를 내렸다.
“에테르 레이저 약하게 한 방만 쏴줘.”
「괜찮을까요? 그냥 옮기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드래곤의 영혼을 가진 미친놈과 싸우면서 멀쩡하다는 게 말이 되나. 면피용 흉터 정도는 만들어 둬야지.”
그 흉터는 훈장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그의 적에게 완벽하진 않다는 방심을 심어줄 것이다.
“못생긴 얼굴 더 못생겨지면 안 되니까 목과 어깨로 참아줘.”
「마스터의 얼굴은 못생긴 건 아니에요.」
“잘생겼다고는 안 하는군.”
시덥지 않은 대화가 끝난 후 하늘에서 에테르 레이저 한 줄기가 내리꽂혔다.
골리앗 딩고는 레이저 폭격에 들썩거리더니 흰 연기를 뿜으면서 주저앉았다.
‘이제 적당히 자고 있으면 되겠지…….’
남은 일정은 아르마가 알아서 진행해 줄 것이다.
레오볼드는 어깨가 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눈을 감았다.
체내의 바이오칩과 연동된 생체기관에서 피부 손상을 감지하고 진통제를 주입했다.
한편 그랜든은 숨어 있긴 했지만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소한 영주의 목숨은 건져야 할 게 아닌가?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영주를 구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둘이서 육박전을 벌이는가 싶더니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게 아닌가?
‘마법인가, 저 살인마가 마법을 쓴 것인가.’
우세를 점했던 레오볼드의 골리앗은 그 마법 한 방에 움직임을 정지하고 주저앉았다.
그랜든이 움찔하며 뛰쳐나가기 전 아르마가 먼저 행동했다.
“영주께서 의식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가서 의료실로 모시도록 하세요.”
“예!”
그녀가 부리는 시종들이 우르르 달려가 골리앗에서 레오볼드를 끄집어내었다.
뒤늦게 달려간 그랜든을 위시한 기사들은 눈을 감은 레오볼드의 상처를 발견하고 광분했다.
“이런, 화상을 입으셨어!”
“호흡이 불규칙하다!”
아르마는 침착하게 더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들것에 영주님을 눕히고 포션을 헝겊에 적셔서 상처에 덮으세요. 치료소로 데려가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치료소는 영지 곳곳에 마련된 공용시설로, 식물학과 약학을 공부한 치료사들이 교대로 상주하고 있었다.
영지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으며 이는 반다스 백작령이 타 영지와 차별되는 점이기도 했다.
레오볼드가 들것에 실려 가자 그랜든은 안절부절 못하며 아르마의 소매를 잡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영주께선 괜찮으십니까?”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일단 저 골리앗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는 죽은 것 같은데 끄집어내고 보호해야겠지요.”
“살인마의 시체를 왜 보호해야 합니까?”
“황제께서 변을 당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골리앗과 기사의 시체를 내놓으라고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건…….”
확실히 그녀의 말에는 논리가 있었다.
그랜든은 납득하고 휘하 병력을 불러 모았다.
아르마가 지나가며 말했다.
“영주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든 병력이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요. 그건 비행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왕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겠죠.”
설마 비행선을 왕도에 보내겠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그랜든은 아르마의 속뜻을 생각해 보다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왕가가 멸망한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인가?’
한때 근위기사였던 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시야를 달리해 보면 아니었다.
저 괴물 같던 영주가 치명상을 입고 제국의 황제가 암살당할 정도의 상대인데 바그란 왕가가 멀쩡할 것까진 않았다.
최소 왕족 다수가 사망한 것은 확정적이었고 어쩌면 후대를 이을 자가 없을 수도 있었다.
바그란의 왕궁은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랜든은 표정을 굳히고 연달아 지시를 내렸다.
“엘윈 경, 즉시 병력을 소집해서 비행선을 띄울 준비를 하시오. 카티나 경은 예정대로 도시를 돌면서 순찰을 진행하도록 하고.”
“대장님, 비행선을 띄우겠다는 뜻은…….”
“아무래도 로제론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소. 누군가가 가봐야겠지. 그리고 침입자의 시신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도록 하시오.”
영주의 생존이 확인되었으니 왕가와 면식이 있는 자신이 가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랜든은 왕도가 있는 서쪽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싶었지만 그걸 바라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한편 전투 직전 세틀러호에서 발사된 하프늄 탄두 미사일이 대륙을 가로질러 목표를 포착했다.
* * *
세틀러호에서 발사된 미사일은 TNT 환산 200킬로톤을 위력을 가진 탄두에 초속 9km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이는 세틀러호에 있는 수많은 미사일 중에서는 가장 위력이 낮고 느린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테라 대륙을 횡단해 목표를 찾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미사일에 입력된 좌표는 엘브랑데의 수도 메데아의 외각에 위치한 비밀 연구소였다.
아무런 레이더도 방공망도 없었던 터라 미사일은 손쉽게 지정된 좌표로 날아들었다.
최후의 회피기동이 시작되었지만 연구소 일대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미사일이 기폭되자 대폭발이 일어났다.
상공에 거대한 화구가 생겨나더니 전술핵과 맞먹는 충격파가 핵심시설 몇 동을 순식간에 갈아 버렸다.
방사능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끔찍한 위력에 연구 인력은 삭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연구소 일대가 증발했지만 엘브랑데 상부에선 꽤 시간이 지난 뒤에 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감시망이란 에테르 추적 시스템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엘드그라실로 조성한 숲에서 살고 있어서 대부분의 자연재해는 무효였고 에테르만 잘 감시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평소에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고 지금까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하프늄을 탑재한 미사일은 그런 재난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연구소가 증발한 뒤 3시간 만에 대의회에 그 소식이 날아들었다.
“121연구소가 증발했습니다! 대부분의 시설이 사라졌고 관련 인력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
대의회의 의원들은 정보국 요원 앞에서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하고 차분히 설명해 보라.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연구소가 깔끔하게 사라졌습니다! 마법을 허가해 주신다면…….”
“허가한다.”
요원은 이매진 레코드 마법을 이용해 자신이 본 것을 펼쳐 보였다.
연구소 대신 거대한 크레이터만 있는 것을 본 의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구소는 어디 가고 구덩이만 있는 건가?”
“다른 장소에서 찍어온 게 아닌가?”
그들은 변화를 몰랐고 또 싫어했기에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대한 반응이 매우 느렸다.
숲에 처박혀서 별다른 재난도 위험도 없이 200년 이상을 살다 보니 모든 일에 느리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아닙니다! 누군가가 연구소를 공격한 게 틀림없습니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손이 그제야 굳어졌고 눈이 부릅떠졌다.
“공격? 대체 어떤 놈이?”
“설마 자이움이 간 크게도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발동했단 말인가?”
요원은 기겁하곤 즉각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현장에서 에테르는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폭발한 후에야 에테르가 어지러워졌지만 그 전에는 추적 시스템도 조용했다.
의원들은 그제야 심각성을 가지고 회의에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회의는 아니었다.
“121연구소가 대체 뭐 하는 곳이지?”
“우리 영토에 연구소가 한 두 곳인가…….”
즉각 직원들을 불러 자료를 뒤져야겠지만 의원들은 귀찮아졌다.
“어디의 연구소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부 소행이 아니라니 보나마나 마법 실험이겠지.”
“멍청한 놈들, 위험한 마법을 다루면 좀 조심을 했어야지.”
당연하게도 블랙 드래곤의 영혼을 카이로스와 융합시키는 실험은 존재 자체가 극비여서 아는 자가 극히 적었다.
연구소 자체도 흑마법을 주요 연구 과제로 삼고 있었기에 더더욱 비밀리에 취급되었다.
121연구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들 중 아침에 깨어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엘브랑데 행정부가 사태를 파악하게 된 것은 무려 하루가 지나서였다.
제국에 존재하는 세 명의 재상 중 하나이자 텔리스 가문의 지도자인 켈로디안은 121연구소가 괴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쳐 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게 왜 지금에서야 내 귀에 들어오느냔 말이다……! 정보국 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기에.”
요원들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걸 듣고도 그냥 넘겨 버렸다고? 빌어먹을 늙은이들…….”
아무리 기밀이고 관할이 아니라지만 연구소가 박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직원들을 닦달해서 자료를 찾아봐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재상인 그로서도 대의회에 함부로 간섭할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대가문끼리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혀를 차며 즉각 현장에 요원들을 파견했다.
자세한 정보가 날아들었고 관련자들이 대부분 알게 되었다.
―흑마법 연구소가 폭발했다고? 그것도 에테르 흔적 없이?
―미리 말하겠지만 미티어 스트라이크는 아니다. 자이움의 공격은 없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선 안 됩니다. 자이움이 아니면 누가 그곳을 공격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발동했다면 여러 곳을 동시다발적으로 타격했을 것이다. 121연구소 한 곳만 공격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아스테라의 양대 제국은 미티어 스트라이크 마법을 서로의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 여러 곳에 지정해 두고 있었다.
한번 마법이 발동되면 멈추는 건 어려웠고 이는 곧 공멸을 뜻한다.
미티어 스트라이크 마법의 특성상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분노한 자들마저도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은 현장에 직접 가본 뒤 충격에 빠져들었다.
연구소 전체가 깔끔하게 날아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드래곤의 뼈도 없었다.
“이상하다… 영혼이 빠져나갔더라도 드래곤본이 부서질 리 없는데…….”
“폭발이 있었다 하니 토사에 묻힌 게 아니겠습니까? 찾아보도록 하죠.”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자료가 깡그리 날아갔는데…….”
“카이로스부터의 연락은 없었나?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지?”
통신구로 이리저리 연락을 하고 있던 요원이 켈로디안에게 와서 보고했다.
“현재 자이움의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이스트하트 왕국 여러 곳이 쑥대밭이 되었답니다.”
“그건 희소식이군. 바그란의 그놈은? 물론 죽었겠지?”
바그란의 그놈이란 레오볼드 반다스를 뜻하는 것이다.
존재감도 희미한 인간 왕국의 일개 소귀족에게 관심이 있을 리 없지만 최근 그의 행보는 엘브랑데의 주요 수뇌부도 알 지경이 되었다.
부유대륙 상륙과 리빙메탈 유출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그가 더 커지기 전에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켈로디안은 그걸 승낙했다.
그런데 요원은 뜻밖의 말을 전했다.
“치명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는 소문이 영지에 퍼져 있습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카이로스 그놈이 지친 게 컸겠지.”
사실 카이로스는 제국 입성 전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라키에스라는 거대한 영혼을 엘프의 육체에 가두었으니 온갖 부작용은 예상했던 바였고 자이움의 기사들과 싸우면서 그게 훨씬 악화되었다.
갈리스토와 바그란을 거치고 난 후였으니 거의 죽어가는 상태였을 것이다.
켈로디안은 이쯤 해서 사태를 덮기로 했다.
연구 자료와 인력을 잃긴 했지만 대단한 건 아니었고 무엇보다 인간 측에 타격을 준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속속 들어오는 정보에 의하면 이스트하트 동맹은 물론이고 10여 개가 넘는 왕국의 수뇌부가 몰살당했다고 한다.
엘브랑데 전체가 축제 분위기인데 함부로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덮기로 하지. 그나저나 드래곤본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누가 빼돌린 게 아닌지 철저히 추적해!”
영혼이 빠져나갔더라도 드래곤본은 매우 중요한 소재였다.
아다만티움과 맞먹을 정도로 단단하고 가벼워서 골리앗의 장갑판을 만들기에 딱인데 그게 행방 불명이 된 것이다.
엘프들은 직접 땅을 파는 대신 자치령에서 인간과 수인을 불러와 작업을 지시했다.
수백 명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땅을 파헤쳤으나 드래곤본은 나오지 않았다.
“에잉, 또 어느 놈이 빼돌렸군.”
보나마나 냄새를 맡은 의원 몇 명이 작당을 했겠지.
켈로디안은 혀를 차며 사건 자체를 묻어 버렸다.
작업에 동원된 수백 명은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맨발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121연구소가 증발한 사건은 완전히 묻혀 버렸으나 대륙의 혼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아… 아아…….”
이올린은 넋을 잃고 폐허가 된 왕궁을 바라봤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종들이 비명을 질렀고 기사들의 그리브 소리가 들렸다.
그 이후로는 줄곧 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나와 보니 이 꼴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시체가 즐비했고 곳곳의 바닥에는 피로 된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그녀는 문득 피냄새를 느끼고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올린은 정신없이 바닥을 기며 누군가를 찾았다.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아델라…….”
살아 있길 바랐으나 눈물 젖은 눈에 보인 것은 차디찬 시체뿐이었다.
그녀는 바그란 3세와 루아드 왕자의 시체를 껴안고 서럽게 울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이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이다.
서럽게 우는 그녀에게 누군가가 달려왔다.
“공주님, 공주님! 이런! 살아계셨군요!”
누군가 해서 보니 수석집무관 콘래드 자작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이올린의 눈이 커졌다.
“콘래드 경!”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 이런…….”
왕가의 멸망을 확인한 콘래드의 얼굴이 참혹하게 굳어졌다.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우는 이올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갑자기 출현한 정체불명의 골리앗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정체불명의 골리앗! 혹시 그게 반다스 그놈의 소행인가요?”
콘래드는 딱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반다스 백작에 대한 증오가 깊은 건 이해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좀 접어 두어야 하지 않겠나 싶었던 것이다.
“공주님, 저 또한 바그란의 신하로서 지금의 상황에 참담함을 느끼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아 있어선 안 됩니다. 바그란 왕가에 살아남은 사람은 공주님과 아델라 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델라, 아델라는 살아 있었군요! 어디 있죠?”
“집무국의 안전한 곳에서 보호를 받고 계십니다. 공주님이 하셔야 할 건 대영주들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순간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던 이올린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왜 대영주들에게 기대야 한다는 거죠? 그들이 아무것도 못했기에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 아닌가요?”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공주님…….”
처연한 수석집무관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 세계로 이끌었다.
근위기사 대부분이 사망했고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문관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그들도 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뜻한다.
바그란 왕궁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공주와 귀족 몇 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당장 폐허를 치우고 왕족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만 해도 큰 난관이었다.
그 과정에서 외세가 개입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고 자칫 잘못하면 왕가까지 위험에 처할 수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갈리스토.
이올린은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럼 누구를…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할까요?”
“노여움은 있으시겠지만 반다스 백작 쪽이… 란티스시가 그나마 가깝습니다.”
“그놈은 안 돼요!”
뾰족한 비명에 콘래드 자작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다면 서부의 대영주 중 한 명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가능하면 프로잔 후작께 연락을 해보세요.”
“죄송합니다만 자이움 제국도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황제께서 암살을 당하셨다는 불명확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황제께서…….”
상황이 그렇다면 프로잔 후작의 도움은 바라기가 힘들 것이다.
그나마 남은 건 레이선 타운젠트 후작인데 이올린은 그가 싫었다.
그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평소 이올린을 탐내 왕가와 적지 않은 갈등을 빚어왔다.
아무리 후작이고 서부의 대영주라고는 하나 50대에 꽃다운 공주와 두 번째 혼인을 치르겠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밖에 없었다.
다른 영주는 뿔새를 타고 달려온다 해도 최소 며칠은 걸릴 거리였고 프로잔 후작령은 더 멀었다.
그나마 반다스 백작령이 가깝지만 이올린은 죽어도 그와 손잡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일단 타운젠트 후작에게 연락을 해보세요.”
설마 프로잔 후작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 낙담한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둘은 고개를 들었고 이올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저 비행선은 알테마호 아닌가요? 왕가 소유 맞죠?”
“얼마 전에 왕자 저하께서 반다스 백작에게 소유권을 이전하셨습니다…….”
그렇다는 건?
이올린 공주는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설마 반다스 백작이 직접 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