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40
239화 피를 원하는 자
카이로스는 골리앗에 탄 채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피의 웅덩이와 잔해, 그리고 시체뿐이었다.
블랙 드래곤의 힘은 쓰지도 않았지만 그를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 어디의 용병단이라든가 대단한 위명을 가진 기사단이 등장하긴 했지만 인간과 별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었다.
“네놈! 살인마나 다름없구나! 대체 우리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억하심정이라… 억하심정이라고!”
카캉!
리빙메탈로 만들어진 검이 강철제 대검을 몰아붙였다.
기사는 무차별적으로 몰아붙이는 카이로스에게 대응하지 못하고 연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왜 서로 검격을 교환하는데 이쪽의 무기만 파손될까?
그리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기어코 기사의 검이 날아가 버렸다.
카이로스는 그가 탄 골리앗의 복부에 검을 들이댔다.
“내 이름은 카이로스. 인간의 손에 모든 것을 잃은 남자다.”
“뭘… 우리가 뭘 어쨌기에…….”
“너희는 내 가족과, 친구와, 모든 것을 죽였다. 나는 그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맹세했다. 지상에서 인간 놈들을 살려두지 않겠다고.”
“그런 이유로 이 학살이 용납될 거라 생각하느냐…….”
“누가 나를 심판하겠는가! 나는 카이로스란 말이다!”
대검이 골리앗의 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기사는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천천히 목이 잘리며 사망하고 말았다.
카이로스는 검을 뽑아 들여다봤다.
거기엔 진득한 피가 묻어 있었다.
“피… 내 어머니의 몸에도 이런 피가 묻어 있었지…….”
의식 없는 어머니를 붙들고 맹세한 바 있었다.
피 한 방울당 인간 100명을 죽이겠다고.
그는 공포에 질린 병사들을 바라봤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공포에 질리는가. 나약한 인간들이군.”
쿵!
골리앗이 한 병사를 그대로 밟았다.
피가 냇가를 이룬 땅에 선명한 자욱이 생겨났다.
병사들은 그 참상을 보고 울듯 말듯 했다.
개중에는 무릎을 꿇고 비는 자들까지 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카이로스는 그들을 비웃듯 유쾌하게 웃으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넓은 정원은 피로 물들었다.
“내 아버지도 살려달라고 하셨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칼로 배를 찌르는 것으로 대답했다…….”
바닥에 흐르는 피에서 비릿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카이로스는 가슴속 어딘가에서 살인의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흑마법으로 뽑아낸 블랙 드래곤의 영혼이었다.
―더, 더, 나는 더 많은 영혼을 원한다.
“원한다면 주도록 하지. 피의 호수에서 헤엄치도록 만들어 주겠다.”
자연스레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자이움 제국.
카이로스의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의 행각은 의외로 발각되지 않았다.
파괴한 곳이 접경지대 근처의 자그마한 소왕국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송두리째 무너졌더라도 자이움의 귀족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궁만 골라서 파괴한다는 소식이 자이움에 날아들었다.
카이로스는 인간 모두를 증오하고 죽이려 했지만 대의회의 지시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병사 수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는 왕족 하나를 죽이는 게 훨씬 효율이 좋기도 했다.
그렇게 자이움 제국으로 진입한 카이로스는 자신이 죽인 시체를 일으켜 군단을 만들어 냈다.
“일어나라, 영혼을 잃은 망자들이여. 너희들의 적이 저기에 있도다!”
블랙 드래곤의 흑마법이 펼쳐지자 국경지대의 도시 하나가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다.
망자 하나가 일어서면 열 명의 인간이 망자가 되었고 도시 하나가 삼켜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자이움의 군대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카이로스는 그렇게 자이움의 시선을 돌리고 뿔새를 이용해 단숨에 황도로 진격했다.
갑자기 창궐한 언데드 군대를 막아내기도 바쁜데 수상쩍은 인간 하나를 검문할 병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제국의 황도에선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아공간이 열리며 골리앗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황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골리앗에 익숙한 사람들은 무슨 행사이겠거니 여겼지만 아니었다.
대검이 휘둘러지자 수십 명의 목숨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아아아악!”
고상한 건축물이 동강났고 허공에 진득한 피가 뿌려졌다.
사람들은 그제야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다.
카이로스는 닥치는 대로 대검을 휘둘렀다.
“우리가 흘린 피 한 방울에 네놈들 100명의 목숨을 받아가겠다!”
시민들은 영문을 모른 채 죽어갔고 급히 경비대가 출동했지만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피의 폭풍이 몰아치는 와중에 황도의 경비대장은 황궁을 비롯한 제국군에 연락했고 몇 대의 골리앗이 나섰다.
황도에 상주하는 기사들인 만큼 실력이 미천할 리 없건만 카이로스 앞에서는 나무인형과 비슷한 신세였다.
에테르가 실린 일격에 장갑판이 치즈 자르듯 잘려나갔고 두꺼운 복부가 단숨에 꿰뚫렸다.
불운한 한 골리앗은 허리가 완전히 절단되어 바닥에 주인의 피를 흩뿌렸다.
이건 일방적인 학살극에 불과했다.
하이 나이트가 나섰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카이로스는 마지막으로 쓰러진 골리앗의 복부를 밟아 박살냈다.
“헉, 헉…….”
거침 숨소리가 조종석을 가득 채웠다.
블랙 드래곤의 영혼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엘프였다.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것은 자이움에 진입할 때부터 바닥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 없었다.
피에 대한 갈망과 복수심이 그의 생명력을 불태워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죽인다… 죽인다…….”
이대로라면 인간 왕국들을 박살내기 전에 그의 생명이 다하게 되겠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대의회는 인간들에게 큰 타격을 입힌 것으로 만족할 것이고 그는 복수를 이룬 후 눈을 감을 테니까.
카이로스는 핏발 선 눈으로 저 멀리 어둠 속에 솟아 있는 황궁을 바라봤다.
제국의 황제와 수백 명이라면 남은 핏값을 받아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 * *
늦은 밤, 반다스 백작령.
레오볼드는 집무실에 서 있다가 쿵쿵하는 소리를 들었다.
경비대장 그랜든이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자 그가 당황한 안색으로 쓰러질듯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여,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제국 황제께서 암살되었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입장에서 어려운 건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레오볼드는 다년간 이런 상황을 자주 겪은 숙련된 연기자였다.
그는 순간 휘청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암살이라니, 암살이라니! 제국의 황제께서 사망하셨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크로이츠 백작령에서 연락이 들어오더니 황제가 피살되었다는 한마디를 전하고는 끊는 게 아니겠습니까?”
“보통 일이 아니군. 영지에 경계령을 발동하시오. 시민들에겐 알리지 말고, 핵심 관료와 병사들만 준비시키시오.”
“예!”
“그리고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도록 골리앗을 대기하라 이르시오. 경은 지시를 내린 후 곧장 회의실로 오도록 하고.”
“지금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그랜든이 바람처럼 사라졌고 레오볼드는 천천히 회의실로 향했다.
사실 그는 이번 사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비리 위성이 카이로스를 추적하고 있었고 그의 행적이 시야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때마침 카이로스는 바그란의 로제론에 잠입한 상태였다.
자이움 제국에서 혈투를 벌인 까닭인지 다치고 지쳤지만 움직임은 아직까지 생생했다.
곧 루아드 왕자를 포함한 왕족이 사망할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하지만 당신들은 신생 바그란에 필요하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루아드 왕자는 가급적 살리고 싶었다.
그는 호인이었고 매사에 사리가 깊었다.
직할령에 과도하게 세금을 매기지도 않았고 백성들로부턴 명군은 아니더라도 평범하게 바그란을 이끌 재목으로 여겨졌다.
요즘은 평범하기만 해도 칭송을 받는 시대다.
하지만 앞으로 레오볼드가 이끌 바그란에 에테르 혈통은 필요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에테르 혈통을 무기로 권력을 쥔 자들이 설 자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죽어야 한다. 에테르 혈통을 가진 자의 대표로서.’
그가 죽으면 남은 왕족이 바그란을 이끌기 위해 나서겠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국력에서 앞서는 갈리스토 왕국이나 서부의 귀족들이 접시와 나이프를 들이댈 것이고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레오볼드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다.
‘원래는 이럴 계획이 아니었지만…….’
아르마의 로드맵에 의하면 루아드 왕자는 갈리스토 왕국과의 전쟁으로 권력을 잃고 방랑의 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엘브랑데가 미친 살인마를 투입하면서 계획이 약간 틀어졌다.
전체적인 로드맵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레오볼드로선 불쾌한 게 사실이었다.
‘최소 수천 명이 사망하고 인간 측이 본격적으로 분열되겠지. 그러니 너희들도 비슷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눈에는 눈, 피에는 피.
설령 그걸 알지 못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다.
“아르마, 폭격하기 좋은 후보지를 몇 곳 골라놔. 가능하면 수뇌부 쪽이 좋겠지.”
「후보지를 10곳 선정하겠습니다.」
레오볼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 짧은 시간에 카슨 행정관과 그랜든, 카티나, 엘윈, 불토른, 스테피나 등 영지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연락망을 맡은 엘윈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만 제국의 황제가 피살되었습니다. 예,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황궁은 불타고 있으며 황도 전체가 뒤집어진 상황입니다.”
“맙소사…….”
“신이시여…….”
레오볼드가 계속하라고 눈짓하자 엘윈은 물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흉수의 정체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자이움의 제식 골리앗을 타고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도처에 등장하기 시작한 언데드 군단도 그의 소행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만 확실치 않습니다.”
제국의 상황을 알아낸 것만 해도 기적적인데 통신구 몇 개 가지고 참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싶었다.
엘윈은 그런 기특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착잡한 어조로 보고를 이어나갔다.
“뒤집어진 것은 제국뿐만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접경지대의 여러 왕국이 화마에 휩싸였고 다수가 이를 확인했습니다. 아마 갈리스토 왕국도 비슷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미르, 이미르는 어떻게 되었는가!”
불토른이 애타게 물었지만 엘윈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르 공화국은 이스트하트 지역도 아닌 데다 다른 국가와 친교를 수립한 것도 아니라서 깜깜무소식이었다.
레오볼드가 입을 열었다.
“갈리스토가 당했다면 우리도 곧이겠군.”
그때 그랜든이 벌떡 일어섰다.
“영주님, 즉시 대피하십시오. 흉수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영주님을 노릴 가능성이 큽니다.”
“맞아요. 저희가 막겠습니다. 영주님은 아르마 양과 함께 피신하시는 게 어떨까요?”
스테피나마저 그렇게 말했지만 레오볼드는 고개를 저었다.
“영주가 영지를 버리고 어딜 간단 말이오? 내가 있을 곳은 여기요.”
다들 약간 감격했지만 그랜든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주님! 고집을 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이번 일의 배후를 지목할 수 있다면 단 하나, 엘브랑데일 겁니다. 그들이 영주님을 그냥 둘 리가 없습니다!”
그때 왕도와 연락하려 애쓰고 있던 엘윈이 고개를 떨구었다.
“왕궁이 당한 것 같습니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마침내 여기까지 왔군…….”
이제 그랜든은 거의 발작할 지경이 되어 레오볼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영주님, 영주님만 계시면 이 영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대피하십시오. 저희들이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경의 뜻은 잘 알겠소.”
레오볼드는 그의 손등을 두드리곤 일어섰다.
“그러나 놈이 나를 목표로 한 이상 꼴사납게 도망갈 수는 없는 법이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소?”
“제국이 당했습니다!”
“입장이 다르지. 제국은 기습당했고, 나는 아니오. 이제부터 영주로서 그대들에게 지시를 내리겠소.”
검이 테이블에 꽂혔고 다들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부터 내려지는 지시는 영지를 떠나지 않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모든 병력은 교대로 대기하도록 하고 관료들도 비상근무에 들어가시오. 모든 병력과 물자는 즉각 출동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출 것이며 연락망도 유지하시오. 그리고 치안대를 편성해 영지 내에 쓸데없는 소문이 나도는 것을 방지하시오.”
“…….”
다들 어리둥절해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영주의 지시는 전투에 대비하는 게 아닌 그 이후를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랜든은 의문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레오볼드가 재차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손님이 왔는데 나가 봐야 하지 않겠소? 마침 소리가 들리는군.”
다들 이것만은 안 된다고, 영주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란티스 백작령을 일거에 함락시킨 영주의 전투력은 물론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가 제국보다 강한 건 아니지 않은가?
아스테라 대륙의 동부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그 괴물에게 덤벼들었다간 결말은 뻔했다.
그랜든을 위시한 기사들이 억지로라도 그를 만류하려는데 갑자기 큰 충격이 퍼져나갔다.
쿵!
사람들이 휘청거렸다.
무거운 뭔가가 바닥에 착지한 듯했다.
레오볼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그의 뒤만 쳐다봤다.
아르마가 문을 삐걱 열고 들어와 인사한 후 말했다.
“지시는 다 들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각자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한다면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단순히 전속하녀가 아니라 영주의 최측근이자 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다들 억지로 납득하곤 일어섰다.
* * *
레오볼드는 딩고에 탄 채 앞을 바라봤다.
어두운 밤, 전신을 피로 물들인 골리앗 한대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녀석의 상태는 극히 좋지 않았다.
팔 하나는 보이지 않았고 다리 관절에 고장이 났는지 어깨가 비스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포한 에테르가 주변으로 잔잔히 퍼지고 있었다.
골리앗의 조종석 자체가 에테르를 1차적으로 밀폐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그의 앞에서 맹렬한 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지금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카이로스라는 자아가 아니라 블랙 드래곤 그라키에스에 가까울 것이다.
그 증거로 아르마가 흑마법 경고를 퍼트리고 있었다.
「광역저주가 퍼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어 저항의지를 무너뜨리는 저주입니다.」
생각보다 괜찮은 전략을 선택한 것 같지만 실수가 하나 있다.
레오볼드는 그딴 게 안 먹히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처음 보게 되는군, 살인마. 지난 며칠 동안 몇 명을 죽였지?”
“네놈은 평생 먹은 빵의 개수를 기억하나?”
“기억한다. 3,076개지.”
“…….”
대답하지 못할 줄 알고 비웃으려 했던 카이로스는 잠깐 당황했다.
그렇지.
눈앞의 놈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가 눈먼 반쪽짜리 잡종 엘프에게 들은 바, 지닌 무력은 엘븐 나이트를 초월하고 해적군도를 단신으로 박살낸 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카이로스는 그를 능가하는 괴물이었다.
생명의 불꽃은 꺼져가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마지막 목표인 그를 죽일 수 있다면.
“내 이름은 카이로스.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자다.”
“누가 그 권리를 부여했지?”
“인간에게 죽은 내 가족과 친구,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의 피.”
“나는 그 피와 전혀 관계가 없는데 어떡하지?”
카이로스는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 대륙에 발을 디디고 사는 이상 관계가 없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혹시 이계에서 온 용사란 소문 들어봤나? 그게 내 별명인데.”
“…빵의 개수도 그렇고 살고 싶어서 희한한 변명을 다 대는구나.”
“진짜야. 나는 너희의 은원과 전혀 관계가 없어. 하지만 이 싸움을 피할 생각도 없지.”
“잘 생각했다.”
자세를 낮추는 카이로스에게 레오볼드가 말을 건넸다.
“블랙 드래곤 그라키에스의 영혼을 받아들였군.”
“…….”
순간 카이로스가 탑승한 골리앗이 눈에 띌 정도로 꿈틀거렸다.
관절 사이로 격렬한 에테르가 뿜어지더니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죽고 싶으면 계속해라…….”
“한낱 엘프의 몸으로 드래곤의 영혼을 받아들였으니 버틸 수 있을 리 없지. 몸이 시커멓게 잠식된 게 눈에 선하군.”
“닥쳐라…….”
“그라키에스는 곧 네 정신마저 먹어치울 거다. 사실상 시한부 인생을 사는 거지.”
“닥치라고 했다!”
카이로스의 골리앗이 폭발적으로 돌진하며 반으로 쪼개진 대검을 찔렀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어느새 펼쳐진 리빙메탈 방패에 막히고 말았다.
“리빙메탈! 역시 네놈은 도둑이었군!”
“리빙메탈을 엘프의 전유물로 착각하지 마라.”
카이로스가 탄 골리앗은 방패치기 한 방에 바닥을 갈아엎으며 뒤로 쭈욱 밀려났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고장이 났던 터라 구동계에 한계가 왔는지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카이로스는 방금의 충격에 아득해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에테르 충격까지 가하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내면에 숨어 있던 그라키에스의 영혼이 속삭였다.
―나에게 맡겨라… 너의 진정한 힘을 해방시켜라…….
“죽일 수 있겠나, 저놈을 죽일 힘을 줄 수 있냐고!”
―얼마든지.
“그렇다면 나를 가져가라!”
그라키에스의 검은 영혼이 골리앗을 집어삼키려 했을 때였다.
레오볼드는 에테르 하트를 최대한으로 작동시키고 오버 드라이브 모드에 들어갔다.
찬란한 에테르 블레이드가 하늘을 꿰뚫을 정도로 치솟았고 카이로스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봤다.
“에테르 블레이드… 하하, 네놈, 인간이 아니구나.”
“그런 말을 많이 들었지. 그러나 나는 엄연한 인간이다.”
검은 영혼이 골리앗 전체를 감쌌다.
이제 레오볼드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카이로스와 골리앗이 아니라 대전쟁 당시 사망한 그라키에스였다.
―좋다, 이제 죽어라!
블랙 드래곤의 형체가 입을 벌리자 시커먼 브레스가 뿜어져 나갔다.
순간 에테르 블레이드가 브레스를 막아내었고 검은 기운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라키에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돌진해 들어갔다.
드래곤의 주특기인 강력한 육탄전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레오볼드가 탄 골리앗이 에테르 블레이드를 회수하더니 하늘에서 땅까지 긴 선을 그었다.
에테르가 일직선으로 폭발하면서 그라키에스의 방어막을 찢어발겼다.
안에 있던 카이로스가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를 정도의 타격이었다.
“크아아악!”
하마터면 영혼을 잃을 뻔했던 그라키에스는 전신에 방어마법을 둘렀다.
하지만 골리앗의 왼 주먹에 맺힌 에테르는 그것조차 뚫고 들어왔다.
쾅, 쿵, 쾅!
이제 레오볼드는 멈칫거리는 카이로스의 골리앗을 샌드백 치듯 두들기기 시작했다.
한 방에 부품 하나가 떨어져 나갔고 두 방에 장갑판이 푹 파였다.
그리고 황금의 주먹이 복부를 깊숙이 강타하자 카이로스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크허억…….”
그라키에스는 어느새 의식을 잃었고 심층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카이로스의 자아가 끄집어 올려졌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뒷걸음질 치려 애썼다.
“강… 하구나… 하지만 그 힘이… 너희 종족을 지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나는 그들을 지키러 온 게 아니다.”
“그… 럼?”
“청소하러 온 거지. 피를 원하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다.”
“그게… 무슨 말…….”
레오볼드는 아르마에게 지시했다.
‘미사일 발사해. 좌표는 흑마법 연구기관.’
「하프늄 탄두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원래 레오볼드는 이 행성에서 가급적 미사일 같은 무기를 쓰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상대가 흑마법 같은 위험한 것을 꺼낸다면 이쪽도 마냥 좋은 방법으로 대할 순 없었다.
최소한 이번에 그라키에스를 끄집어내고 카이로스에게 집어넣은 놈들은 죽어야 한다.
해적군도에 위치한 세틀러호에서 미사일 한 발이 발사되었다.
이온 추진기가 가동되며 미사일이 마하 30의 속도로 대륙을 가로질렀다.
카이로스는 하늘 저 너머에서 별똥별을 목격했다.
골리앗이 성큼 다가서며 그의 시야를 막았다.
“미안하지만 내 먹이가 되어줘야겠다. 마침 좋은 걸 얻었거든.”
레오볼드가 골리앗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왼팔에 맺힌 힘을 느낀 카이로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 영혼은 케인의… 안 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