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42
241화 그쪽 말고 이쪽 공주님
레오볼드는 치료소의 안락한 독방에 누워 있었다.
밖에서는 갑자기 들어온 영주 때문에 하녀들이 이리 뛰고 저리 설치고 난리였다.
“당장 침대보를 새것으로… 예? 이미 들어와 계시다고요?”
“절대 안정을 요하는 상황입니다. 치료는 제가 할 테니 다들 목소리를 낮추세요.”
아르마가 나서자 비로소 소동이 일단락되었다.
레오볼드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프로잔 후작령으로 연결되는 통신구에 손을 얹었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지만 가신 중 한 명이 등장하더니 곧장 프로잔 후작과 연결되었다.
“무슨 일이오? 이쪽은 난리가 아니라서, 가급적 용건은 짧았으면 좋겠소.”
레오볼드가 백작 작위를 승계한 후로 프로잔 후작의 대우는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아무리 소국의 귀족이라도 백작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
레오볼드는 천천히 말했다.
“제국의 황제 폐하를 암살한 흉수를 처단했습니다.”
대답은 한참 뒤에 나왔다.
“지금 뭐라고 했소? 흉수를 처단했다고?”
“그렇습니다. 자이움 제국의 제식기를 타고 있던 우드엘프더군요. 귀를 자르긴 했지만 우드엘프는 아무래도 인간과 다르지요.”
“대체 어떻게… 정말 놀랍군. 그러니까, 황도의 경비를 뚫고 폐하를 암살한 자가 거기까지 갔단 말 아니오? 증거는 있소?”
“엉망진창이 된 골리앗과 엘프의 시체가 그 증거입니다. 지금은 온도를 차갑게 해서 보관해 두었지요.”
“크낙스시여…….”
아무래도 장난은 아닌 모양이었다.
프로잔 후작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반다스 백작이 허튼 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라 일단 그게 사실이라고 가정하기로 했다.
“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놈은 폐하를 습격한 후 곧장 남하했다는 건가?”
“갈리스토와 바그란을 거친 것으로 보입니다. 덕분에 두 왕국은 지금 난리가 났지요.”
“우리도 그렇소. 그나저나 경의 몸은 어떻소? 그 괴물을 상대했다면 멀쩡하진 않을 텐데…….”
“다행히 제국이 힘을 많이 빼둔 덕분인지 그렇게 강하진 않았습니다. 저도 많이 다쳤습니다만 치명상은 아닙니다.”
“…….”
그 미친놈을 약간의 부상만 입고 죽였다고?
프로잔 후작은 비록 황궁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수십 명의 기사와 마법사가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처소가 완전히 박살 났으며 왕족 수십 명의 목숨도 함께 날아갔다고 한다.
자이움 제국 성립 후 최악의 재앙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반다스 백작은 그 근원을 해치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지치고 다쳤다고 해도 하이 나이트가 상대가 안 될 정도의 괴물이었다. 그런 놈을 죽였다니…….’
어쩌면 갈리스토와 바그란을 거치면서 흉수가 크게 다쳤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이 나이트에 비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기사를 제법 보유하고 있으니까.
‘이런 걸 나에게 말한다는 건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인가…….’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나 외에 이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소?”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는 각하의 의지에 달렸죠.”
이거다.
프로잔 후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제가 암살된 것은 그에겐 각별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황제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과 흉수에 대한 분노를 표해야겠지만 그 후에는 권력암투에 들어가야 한다.
그때 무기가 될 수 있는 건 황제를 암살한 흉수의 신병이었다.
증인이 워낙 많아 골리앗 하나만 확보해도 되겠지만 시체까지 있다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게 있다면 앞으로 그에게 많은 힘이 실리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주 부드럽게 변했다.
“레오볼드 경. 경은 전에 바그란의 왕궁에서 나와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소.”
“재산보다는 인재가 더 중요하다고 말이지요.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좋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흉수의 신병과 골리앗을 넘겨받는 대가로 뭘 해주면 되겠소?”
“대단한 건 아닙니다. 우선 이올린 공주를 데려가주셨으면 합니다.”
“이 시국에 왜 그녀를… 그렇군. 바그란을 집어삼키려는 계획이군.”
“정상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올린 공주는 후작 각하의 아내가 될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꼭 지금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달리 말하면 지금이어도 큰 상관은 없겠지요.”
프로잔 후작의 힘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자이움은 워낙 개판이라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고.
다만 걸리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선왕에겐 어린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와 혼인할 생각이오? 크로이츠 백작은 어쩌고?”
“뭔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바그란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고 그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델라 공주를 옹립한 후에는 섭정으로서 충실할 계획입니다.”
“선두에서 돌진하는 맹장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모사가 쪽이었군. 바그란의 영주들이 이올린 공주 쪽에 섰을 때 다 쳐낸다라… 다른 조건도 있소?”
“자이움이 갈리스토에서 당분간 손을 떼었으면 합니다.”
“그건 갈리스토를 치겠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정확히는 그렇게 만들어야지요.”
“이거, 내가 감당하지 못할 사람과 손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구려.”
“소국의 귀족이 아무리 해도 제국의 대귀족에게 비하겠습니까? 그리고 제게는 끈이 있습니다.”
“하긴 경은 크로이츠 백작과 맺어질 예정이었지…….”
프로잔 후작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갈리스토 왕국 따위가 어떻게 되든 큰 상관이 없었고 그건 크로이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참에 반다스 백작과 확고한 동맹을 형성해서 자이움 내부에서 권력암투에 들어가는 게 훨씬 나았다.
그의 목표는 대공이기 때문이다.
제국에서도 딱 1명밖에 없는 자리이고 현재는 무능한 황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황족을 축출하고 대공위에 올라 독립적인 세력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크로이츠 백작이야 군부의 총사령관을 꿈꾸는 관계로 그와 부딪힐 일이 없었다.
따라서 셋이 손을 잡는 것은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어차피 갈리스토 쪽에는 당분간 신경을 쓰지 못할 거요. 혹여나 누가 개입을 지시한다면 나와 크로이츠 백작이 책임지고 막도록 하겠소.”
“그거면 충분합니다. 필요하신 것은 알테마호를 통해 보내겠습니다.”
“혹시 크로이츠 백작과 그런 약속도 했소? 언제고 영지에 들를 것이라는…….”
“초대를 받긴 했습니다.”
“그때 내 영지에도 들러주면 좋겠소. 공사가 다망한 건 알지만 꼭 초대하고 싶소.”
“글쎄요, 결혼식을 할 예정이라 확답을 드리기가 어렵겠군요.”
“신방이 거기에 차려지는 거였소? 이거 미안하오.”
“그래도 각하를 뵐 시간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건 기분 좋게 들리는군. 아마 경이 참석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국 전체의 호사가들이 난리가 날 거요. 경은 상당한 인기가 있거든.”
황제를 암살한 흉수를 처치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안 그래도 높은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것이다.
하지만 레오볼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크로이츠 백작께서 울타리를 쳐주시겠죠. 아무튼 그때 뵙겠습니다.”
대화가 종료되었고 프로잔 후작은 크로이츠 백작령과 연결된 통신구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참 궁금했다.
* * *
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여러 국가의 왕족이 한꺼번에 사망하면서 아스테라 대륙 동부는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건 평범한 암살이 아니었다.
상당수의 국가는 왕가가 붕괴될 지경에 처했고 그 와중에 다수의 기사를 잃어 전력을 대거 상실한 곳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겹쳐지는 바람에 날이 밝자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사례가 속출했다.
왕족 다수가 사망한 국가가 많아 대처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흉수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커져갔지만 크게 의미 있지는 않았다.
―대체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하면 편하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보나마나 엘브랑데겠지. 우리의 눈을 피해 강력한 기사를 잠입시킬 곳이라면 거기밖에 없소.
―이 빌어먹을 귀쟁이 놈들이…….
―복수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엘브랑데에 복수가 가능하기는 하나?
―일단은 내부수습에 힘씁시다. 어떻게든 왕가를 일으켜 세워야 하오.
당연하지만 내부 수습이 잘 되지는 않았다.
권력의 축이 흔들리면 온갖 것들이 달려들기 마련인데 완전히 무너졌으니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각국의 유력한 귀족이 살아남은 왕족을 지원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또 암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흉수는 엘프라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내부의 소행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자이움 제국에서 이번 흉수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진상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프로잔 후작의 명의였다.
“흉수는 최대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본국의 제식 골리앗을 썼고 신체까지 손상했소. 그러나 귀를 잘랐어도 엘프 특유의 신체는 사라지지 않았소. 여기, 흉수의 시체와 골리앗이 있소, 모두 와서 침을 뱉으시오! 그리고 우리가 누구에게 당했는가를 상기하시오!”
흉수의 시체는 저온으로 유지되는 투명한 관에 넣어져 전시되었고 골리앗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도의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몰려가 관과 골리앗에 침을 뱉었다.
“저 귀를 자른 흔적과 깡마른 몰골을 봐라! 역시 귀쟁이가 분명해!”
“놈들을 죽입시다! 좋은 엘프는 죽은 엘프뿐이오!”
“귀쟁이에게 복수를!”
복수의 목소리가 들끓었지만 자이움 제국이 당장 나설 입장은 아니었다.
황제를 포함한 황족 다수가 사망하면서 권력에 크나큰 공백이 생겼던 것이다.
당장 황족의 시신이 너무 많아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그런 가운데 흉수의 신병을 확보한 프로잔 후작에게 힘이 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크로이츠 백작과 함께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최종적으로 흉수를 처치한 반다스 백작에 대해 자랑하기 바빴다.
“물론 본국의 하이 나이트들이 놈의 힘을 빼놓았음이 분명합니다. 허나 마지막에 목을 친 것은 반다스 백작입니다.”
그를 둘러싼 귀족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이 나이트 수십 명이 달려들었어도 상대가 안 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힘을 많이 빼놓지 않았겠습니까? 또 갈리스토나 바그란도 피해를 입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힘을 계속 소모한 거겠죠.”
“그 작은 나라에 엄청난 기사가 있었군요… 가만, 전에 에밀 경을 사로잡은 그 기사인가요?”
프로잔 후작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당시엔 자숙하라는 의미에서 징계를 내렸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오히려 상을 줘야겠더군요. 그에게서 살아난 것이 보통 일은 아니지요.”
“어머, 어머. 하이 나이트조차 능가하는 기사님이라니.”
“그분… 가족이 없고 홀몸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부유대륙과 은광으로 돈을 상당히 많이 벌었죠.”
“아! 그분이셨군요.”
프로잔 후작은 곧 크로이츠라는 혹이 생길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적당히 반다스 백작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고 귀족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뒤늦게 황도로 올라온 크로이츠 백작은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했기 때문이다.
프로잔 후작의 추종자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황도에서 그의 영향력도 상승했다.
대공과 여러 공작에게 비견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후작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황제를 시해한 흉수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것이 여러 귀족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준 것이다.
거기에 더해 당장 반다스 백작을 황도로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를 직접 불러서 당시 정황을 들어 봐야 합니다. 오우거 다리 짚는 식의 진상 조사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도 그러고 싶지만 바그란의 내부사정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바그란 3세를 비롯한 왕족이 다수 사망했는데 그럴 겨를이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백작 본인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최소 며칠간은 요양을 해야 하니 부르기는 힘들 겁니다.
―아쉽군. 제국 작위를 내릴 기회였는데.
바그란 같은 소왕국의 작위와 제국의 작위는 위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난다.
그런 점에서 다들 반다스 백작이 아쉽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상처를 회복하고 비행선을 통해 왕도 로제론으로 올라갈 채비를 꾸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부유대륙에서 복귀한 발가드와 지온, 그리고 루시아가 있었다.
“타운젠트 후작이라… 겁도 없이 이올린 공주와 손을 잡았단 말이지.”
“흐음, 그냥 죽이면 안 되오? 영주의 그 배라면 암살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텐데.”
“아스테라 전체를 불태울 수 있다며? 저 귀쟁이 놈들에게도 한 방씩 쏴주고 시작하자고.”
레오볼드는 일단 죽이고 시작하자는 둘을 쳐다봤다.
“나쁜 의견은 아니지만 왕도를 접수하기 위해선 사람들이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해.”
“무슨 인정?”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 된다 그 말이야. 왕족도 아닌 놈이 왕이 된다고 설치면 죽일 사람이 너무 많아져. 비효율적이지.”
발가드는 흐음,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놈들도 다 죽이면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건 영주의 선택이겠지. 그나저나 아델라는 누구요? 공주라곤 이올린뿐인 줄 알았는데.”
“13살짜리 꼬마 아가씨야. 이올린과 달리 성격은 차분하지.”
지온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꼬마 아가씨와 맺어져서 바그란을 집어삼키겠다는 계획인가?”
“아니, 난 아델라에겐 관심 없어. 잘 키워서 좋은 곳에 보내야지.”
“그때까지는 섭정으로서 바그란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계획이군. 그걸 두고 보지 못하는 영주들은 차례차례 쳐내고.”
“1년이면 충분할 거야.”
발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소. 누굴 죽여야 되는지만 내게 말하시오.”
“갈리스토에서 시비를 걸어올 테니까 그땐 둘에게 맡기지.”
갈리스토는 이번 사태에서 그렇게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소수의 국가 중 하나였다.
왕이 사망한 건 맞는데 유력한 후계자가 살아남아서 승계 작업이 쉬웠던 것이다.
귀족들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후계자를 지원하기로 한 것 같으니 별 탈 없이 이쪽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쌓인 감정이 많으니까.
레오볼드는 계류장으로 내려오는 알테마호를 쳐다봤다.
“슬슬 공주님을 만나러 가보자고.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사실 이올린은 레오볼드가 비행선을 타고 오다 사고가 나서 죽길 바랐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바그란 3세와 루아드 왕자가 사망한 후 왕도 로제론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이올린과 아델라가 살아남았지만 둘에겐 계승권이 없었다.
다른 대영주가 그것을 걸고 넘어지면 언제든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올린을 옹립하기로 한 타운젠트 후작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도 그 부분이었다.
“반다스 그놈이 이번 일을 곱게 넘어갈 리가 없어. 어떻게든 시비를 걸 테니 이올린 공주님께 권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는 왕족을 보호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올린 공주와 혼인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올린 본인이야 질색을 했지만 로제론 시민들의 눈에는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로제론은 권력의 부재로 말미암아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차기 국왕은 이올린이 유력했지만 정작 그녀는 외국의 귀족과 혼인을 할 예정이었다.
일부 귀족들이 그 점을 물고 늘어졌고 이올린 본인은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타운젠트 후작의 힘은 필요했지만 그와 결혼을 하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프로잔 후작의 품에 안겨 바그란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타운젠트 후작은 가신과 왕도의 일부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았다.
“나를 이올린 공주님의 부군으로 인정한다면 그대들과 권력을 나누겠소.”
상당수의 귀족들은 타운젠트 후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바그란의 대영주이고 홀몸이라 이올린 공주와 이어지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누군가가 이 혼란을 종식시켜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레오볼드 반다스 백작이 비행선을 타고 나타났다.
그는 타운젠트 후작 측의 경계심 어린 시선 속에서 왕가의 무덤에 참배를 마친 후 이올린이 아니라 아델라 공주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얼마나 심려가 많으십니까. 지금부터는 이 레오볼드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배, 백작을 뵈어요.”
언니에게 밀려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했던 아델라 입장에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지원군이 아닐 수 없었다.
13살이라고 하지만 알건 다 아는 나이였고 그녀도 눈이 있었다.
다 늙어 왜소한 타운젠트 후작보다는 젊고 든든해 보이는 반다스 백작 쪽에 호감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더군다나 그에겐 여러 타이틀이 있었다.
―최초로 부유대륙에 상륙한 자.
―사그리스 은광에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도록 만든 자.
―청어를 대량으로 잡아들이고 해적군도를 토벌한 자.
―란티스와 갈리스토 연합군을 토벌하고 마침내 백작위에 오른 자.
의외로 이번 사태의 범인을 죽인 것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어디까지나 자이움 내부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려지겠지만 다들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거기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무튼 레오볼드는 모두의 시선이 이올린에게 쏠린 틈을 타 아델라 공주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3살의 공주는 언니가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백작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건 다른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타운젠트 후작보다는 반다스 백작 쪽이 힘이 있지.
―서부가 동부보다는 발전되었지만 반다스 백작 쪽은 제국과 연줄도 있거든. 미래가 창창하다는 거야.
―개인적인 무력도 반다스 백작이 압도하지 않나? 그 란티스 백작과 기사들을 혼자서 찍어 눌렀다며?
―해적군도를 혼자서 토벌한 건도 있지.
―그런데 목과 어깨의 상처는 언제 생긴 거지? 저번에 왕도에 들렀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글세…….
의구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이올린은 타운젠트 후작에게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아델라를 보호하고 나선 거죠? 그 꼬맹이에게 뭐가 있다고?”
“저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타운젠트 후작이 보기에 계승권의 유력주자는 이올린뿐이었다.
동생이 언니를 제치고 계승권을 가지는 것은 어지간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유력자들의 인식도 그러했다.
아델라에게 특별한 능력이나 지원군이 없는 이상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반다스 백작이 그녀에게 붙으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올린은 그가 자신에게 붙는 그림을 상상했는데 그게 엇나가게 생겼다.
“차기 국왕은 나라고요. 나, 이올린 바그란! 그러면 적당히 숙이고 들어와야 될 텐데 왜 고집을 피우는 거죠? 설마 아델라를 밀겠다는 건가요?”
그녀가 부리는 히스테리에는 레오볼드가 아델라에게 값나가는 장신구와 드레스를 선물했다는 이유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속하녀들까지 붙어서 시중을 드니 요즘 아델라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그에 반해 이올린은 죽을 맛이었다.
타운젠트 후작이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해도 인상이 펴지질 않았다.
젊고 유능한 귀족이 아니라 돈을 쓰기 싫어하는 음흉한 능구렁이가 붙었으니 배알이 뒤틀리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프로잔 후작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올린은 냉큼 그에게 반다스 백작의 만행을 고자질했지만 어째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렇습니까? 공주껜 죄송하지만 자이움 내부도 그리 조용한 건 아닌지라…….”
“정 그러시다면 직접 방문하셔서 위엄을 보여주세요.”
“그럴 작정입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공주님을 모시려 합니다.”
“…네?”
징징거리던 이올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저, 저를 데, 데려간다고요? 왜, 왜……?”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인지라… 약혼녀를 너무 홀로 두는 것도 좋지 않다는 여론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공주님을 제 영지로 모실까 합니다.”
“아, 아니…….”
“그럼 조만간 뵙겠습니다. 참, 반다스 백작에게 흉수를 제압한 용맹이 정말 훌륭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럼.”
“…….”
대화가 끊겼고 이올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프로잔 후작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고?
거기에 이번 사태의 흉수가 반다스 백작에게 제압당했다고?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