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69
268화 2048 그리고 2053
델피나는 주위를 둘러보곤 당황했다.
‘뭐야 이거…….’
넓은 바다나 푸른 초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눈에 익은 풍경이어야 할 것 아닌가?
주변에는 온통 쇳덩이뿐이었고 창밖을 내다보니 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빛의 화살 수천 발을 쏘는 것 같았다.
‘대체 여긴 뭐 하는… 나 손발이 없구나.’
그녀는 자신이 육체가 없는 영혼 상태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육체를 가진 상태로 차원과 시간의 벽을 넘는 건 엘드그라실과 신격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이곳에서 레오볼드를 어떻게 찾지?’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낯익은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도처에 정체불명의 재질로 만들어진 상자와 이상한 장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상자 가까이 다가가서 글자를 읽어 보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이건 대체 어디의 언어야?’
최소한 아스테라는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그의 출신지인 이계임이 분명하겠지.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짙은 파란색의 작업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모자를 쓱 들어 올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창고 정리 좀 해놓으라고?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야?”
군단타격함대는 명실공히 인류연합 최강의 함대였지만 갑자기 임무가 내려지는 바람에 제대로 갖춰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워커조차 수량이 부족해 다들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함대의 모든 기능은 명왕성 주역에 전개된 플레이그 퀸의 둥지를 파괴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 외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워커 몇 대쯤은…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추운 거야…….”
근처에 있는 영혼 상태인 델피나의 영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들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불청객의 몸에 쑥 들어갔다.
몸을 완전히 장악하는 건 무리였지만 동물을 통제하는 식으로 움직일 순 있었다.
‘하하… 성공.’
영혼이 동화되자 원래 주인의 기억이 그녀에게 흘러들어왔다.
거대하고 큰 성에서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살다가 군인이 되어 어떤 함대에 들어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군단타격함대? 배 안이란 소리야?’
무슨 놈의 배가 이렇게 쇳덩이로만 가득한지 모를 일이었다.
델피나는 목을 가다듬고 소리를 내었다.
“아아, 음… 안녕하세요. 저는… 어라?”
분명 그녀는 대륙공용어로 인사를 했는데 들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언어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델피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레오볼드… 원래 이름이 유지하라고 했지. 아무튼 그놈만 죽이면 돼. 여기 어디쯤에 있을 텐데…….’
교국이 가르쳐준 정보였다.
드리즈덴의 유혹에 넘어가 그런 중요한 정보를 가르쳐주다니 정말 바보들이 아닐 수 없었다.
‘군단타격함대라… 다른 배에 있으면 곤란한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문에 다가서자 자동으로 쑥 열렸다.
‘신기하네… 에테르로 작동하는 건가?’
엘브랑데에도 이런 식의 문은 있지만 창고로 짐작되는 곳에 쓸 정도로 보편화되진 않았다.
복도로 나가 보니 이런 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슨 배가 이렇게 커?’
복도라는 건 결국 배 함급을 벗어나지 못한다.
엘브랑데에서 가장 큰 비행선에 있는 복도도 10미터가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온갖 장비와 구조물로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인 복도는 쭉 뻗어 있었고 매우 깔끔해 보였다.
조심조심 밖으로 나가자 누군가가 그녀를 손짓으로 불렀다.
“리사, 리사! 창고 정리는 끝났어?”
“아… 아뇨. 지금 하려고 했어요.”
“그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함교로 가지. 배선팀이 다른 곳에 투입되어서 우리가 포설을 해야 돼.”
뭘 어쩐다고?
델피나는 대답할 시간도 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배 안은 엄청나게 넓었다.
몇 분이나 뛰고 걷는데도 함교가 보일 생각을 않았다.
그에 반해 사람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이종족도 전혀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교국에선 이계에 인간밖에 살지 않는다고 했어. 자세히 보면 피부색만 좀 다를 뿐, 다 같은 인간들이야.’
여기엔 엘프가 전혀 없는 걸까?
아무튼 그녀는 함교 근처로 끌려가 케이블을 끌게 되었다.
단순한 줄인 줄 알았는데 굵기가 팔뚝만 한, 어이없게 크고 무거운 줄이었다.
누군가가 사람들 앞에 나와 소리쳤다.
“곧 전투가 시작된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전에 화기관제 케이블 포설을 끝내는 거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젖 먹던 힘까지 다해야 할 거야!”
델피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등 마는 둥 하며 구석을 바라봤다.
짧은 경고음이 나더니 구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함대 감속 준비. 메인 부스터 역분사 시작합니다. 5, 4, 3…….」
잠시 후 배가 흔들거리더니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줄어들었다.
델피나는 사람들을 제치고 창가에 달라붙었다.
놀랍게도 시커먼 공간이 그녀를 반겼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야…….’
보이는 건 온통 검은색뿐인 희한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원래 주인의 기억을 통해 이 공간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우주.
지구라는 곳을 벗어나 인류가 마침내 도달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20년 전만 해도 우주는 인류에게 자신을 거의 내어주지 않았지만 단 한 명으로 인해 달라졌다고 한다.
그는 바로 유지하였다.
‘군인이라고 했는데 에테르 공학자를 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그녀는 구경을 그만두고 사람들 틈에 끼어 연설을 들었다.
목표인 유지하가 어디에 있는지 듣고 싶었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몸으로는 어려울 것 같으니 다른 몸을 찾아봐야겠어.’
그는 델피나를 전혀 모를 테니 밤에 찾아가서 슥삭 해버리면 될 것이다.
먹잇감을 찾는 그녀의 귀에 큰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경고. 둥지에서 막대한 에테르 감지. 플레이그 함대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현 시간부로 A1함대로 명명.」
함대라서 바다를 떠다니는 배나 비행선을 생각했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폐허 같은 곳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괴물이 튀어나오더니 뭉치는 게 아닌가.
얼핏 작은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하나의 크기가 수백 미터를 넘어가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어째 플레이그의 모습이 그녀가 아는 무엇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악마들 아니야? 저렇게 크다고?’
마계의 악마들.
최근 아스테라에선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200년 전만 해도 잊을 만하면 나타났던 게 악마들이었다.
그리고 마왕.
현 엘브랑데의 모든 방침은 마왕이 현세에 강림하는 것을 막으려는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멍청한 인간들이 그걸 모르기 때문에 엘프들이 이렇게 고생한다는 게 드리즈덴을 포함한 현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아무튼 창밖으로 보이는 악마들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덩치와 규모를 자랑했다.
‘만약 저놈들 중 하나만 아스테라에 온다면…….’
과연 그걸 막을 수 있을까?
악마의 힘은 덩치에 비례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10여 년 전 아스테라에 등장해 난동을 부린 마왕이라고 해도 저 중 가장 작은 놈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군단타격함대라는 건 저놈들과 싸우기 위한 건가?’
유지하 대통령이 만든, 인류연합 최후의 보루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레오볼드는 자신의 세계에서 이런 괴물들과 싸우다가 아스테라로 온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델피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 지금 그가 보인 힘은 아주 일부에 불과할 뿐이잖아?’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숨기고 있는 걸까?
델피나는 리사에게서 벗어나 함교의 인원에 스며들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수많은 골리앗 비슷한 기계인형들이 배를 떠나는 게 보였다.
「3편대, 사출 준비 완료, 준비되는 대로 사출 시작.」
「화기관제 시스템 온라인, 전투사관 예측 시작.」
「레이저 일제 발사.」
수많은 빛줄기가 함대에서 뿜어져 나갔다.
하나하나가 비행선 함대의 에테르 캐논 사격을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델피나는 플레이그 함대에서 방어막이 펼쳐지며 막는 것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전투의 스케일은 아스테라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 강해… 어떻게 이런 것과 싸우란 거야?’
여기 있는 배들 중 한 척만 와도 아스테라 전체를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교황의 말에 의하면 레오볼드도 여기에 올 때 커다란 배를 한 척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델피나는 고민 끝에 자신이 레오볼드를 찾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배에 있는 사람만 해도 엄청난데 함대 전체를 뒤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다른 배로 어떻게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운이 좋아 그를 찾았다고 해도 죽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돌아가야… 돌아가고 나면 어떻게 하지?’
드리즈덴이 준 임무는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제 돌아가고 나면 사실을 실토하든가 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정보를 드리즈덴 그놈에게 순순히 알려 줄 순 없지.’
그녀만이 알고 있는 정보인 만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협상하겠다고 레오볼드를 찾아가는 건 바보짓이겠지만.
‘좋아… 이제 아스테라로 돌아가야지.’
테라호크라는 신의 힘을 써서 얻은 것치고는 초라한 성과였다.
하지만 레오볼드가 왔다는 이계가 어떤 곳이며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단편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적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를 포함한 섀도우 엘프 전체는 그의 적이었다.
굽히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동안 쌓인 증오가 장난이 아니었다.
레오볼드는 과연 섀도우 엘프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성격이면 다 죽일지도 몰라…….’
델피나는 그와 적대한 것을 후회하며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에테르 하트를 가동시키자 여기에 왔을 때처럼 현기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영혼의 샘이 느껴지자마자 녹턴의 권능을 발휘해 어디론가 튀었다.
기다리고 있던 드리즈덴은 그녀가 말도 없이 사라지자 깜짝 놀랐다.
“뭐, 뭐냐? 갑자기 왜?”
황급히 병력을 풀어 수색 지시를 내렸지만 델피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최소한의 설명도 없이 도망가다니! 이래서 회색 종자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섀도우 엘프 전체의 운명이 그에게 달린 것을 뻔히 알 텐데 이런 행동을 보이다니 뭔가 이상했다.
대체 뭘 보고 왔기에 말도 없이 도망간 걸까?
* * *
“갑자기 그림은 왜 그리는 거지?”
“기억력에 자신이 없나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그리는 것일 수도 있고요.”
델피나는 아스테라로 돌아오자마자 녹턴의 권능을 사용해 연구소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바이오칩을 통한 위치 추적이 시작되었고 아르마가 그녀의 행적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 달아나 동족이 있는 곳으로 가는가 싶었는데 한적한 숲에 숨어서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내용은 그녀가 체험한 과거에 대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림 실력이 형편없군. 대체 뭘 그리는지조차 모르겠어.”
“전함 클래스의 자재창고… 로 보이네요.”
레오볼드는 한참 후에야 그게 창고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전함일까?”
“차원의 벽을 뚫은 다음엔 몇 개월이 고작이고 마스터 가까이에 떨어졌을 테니 군단타격함대 소속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군단타격함대라…….”
과거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2048년 플레이그 퀸이 명왕성 주역에 나타나서 둥지를 꾸렸을 당시 유지하는 군단타격함대를 조직했다.
그들이 준비를 끝내기 전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와해시키고자 한 것이다.
거기까진 성공했고 마침내 플레이그 퀸까지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스테라에 오고 나니 단지 그녀를 다른 차원으로 보내 버렸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은 그 플레이그 퀸도 나처럼 어디 이상한 곳에 가서 이를 갈며 힘을 키우고 있을지도 모르지.”
“루시아는 제가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레오볼드가 가장 우려하는 것이라면 루시아가 어떤 식으로든 원래의 플레이그 퀸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열쇠를 내놓으라고 닦달한 걸 보면 워프게이트 없이 차원을 뚫는 재주까지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영혼이 차원을 뚫는 건 비교적 쉽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테라호크의 권능을 분석한 결과 신격에서 알고리즘과 유사한 패턴이 관측되었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레오볼드는 그녀를 쳐다봤다.
“신격이 알고리즘이란 소리야?”
“98% 정도… 데이터의 흐름과 에테르의 흐름이 매우 유사합니다.”
“그 정도면 거의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아르마는 예전에도 에테르 회로가 반도체와 다르지 않다고 종종 말해 왔다.
현 시점에서 속단하기엔 이르지만, 신격이 일종의 인공지능이라고 가정해도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세밀하게 분석하려면 신격이 더 깨어날 필요성이 있고 말이야. 안 그래?”
“특히 엘브랑데와 신성교국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에테르에 관해 많은 것을 아는 아르마이지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신격의 권능에 대해서는 다소 약한 편이었다.
권능을 완전히 분석하기 위해선 접촉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고 지금처럼 측정기를 가동해 원거리에서 분석해도 충분했다.
둘이 쑥덕대는 사이에 델피나는 몇 장의 그림을 완성했다.
“저건 명왕성 주역에서 첫 전투를 벌였을 때군.”
워낙 급하게 조직된 터라 타격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부족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아르마가 통제한 덕분에 항행과 전투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단지 승무원들의 고생이 심했을 뿐.
“그 광경을 봤다면 마스터의 암살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 이제 고민하기 시작하겠죠.”
아르마의 말대로 델피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 정보를 가지고 레오볼드와 접촉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고 이 정보를 비싸게 사줄 곳이 어디인가 생각하는 거겠지.
“신성교국밖에 없을 거야.”
애초에 레오볼드가 이계에서 왔다는 걸 알아차린 세력도 그쪽이었으니까.
“필요가 없어지면 적당히 죽이려 했는데 계속해서 필요성을 어필하는군. 당분간은 이대로 놔두는 게 좋겠어.”
델피나는 분명 위험한 존재지만 이쪽이 통제 가능하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이대로 가면 아스테라 판테온의 권능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겠네요.”
“엘븐 판테온 쪽은 어때?”
“마르그레타의 노트를 통해 신격의 존재 여부를 검증하는 단계입니다. 엘드그라실은 확실히 신이 맞고 그녀의 성인 루스텔 또한 신입니다. 하지만 에일리드는 모르겠네요.”
아직 분석할 게 많은 모양이다.
사실 아스테라의 신은 전지전능과는 거리가 멀고 제한적인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초월자에 가까웠다.
따라서 아르마가 권능을 모조리 분석해낸다면 대부분의 신을 내려다보게 된다.
그녀가 그 정도라면 주인인 레오볼드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델피나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교국이 정보를 얻으면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대단한 행동은 하지 못할 겁니다. 죄다 추측인 데다 섀도우 엘프는 믿지 못할 종족으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스터의 정체를 확정짓고 대륙에 퍼트릴 순 있겠죠.”
“별로 위험한 건 아니군.”
레오볼드에게 영향을 줄 만한 사람은 대부분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교국이 성녀를 통해 캐내는 정보는 그냥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르마에 의하면 지금 지구는 2053년이라고 한다.
“확실해?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가 신생 개척선단과 함께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것이 2048년이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성녀의 힘도 갈수록 강해져서 최근에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들린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2048년이라고 했다는군요.”
“…정확히 상황이 어떤지 좀 말해 봐.”
아르마는 여태까지 신성교국의 정보를 캐낸 결과를 말해 주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그야말로 엉망이란다.
“우리가 떠난 뒤 모든 메가시티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퍼시픽 정도만 제외하면 대부분 내전이 터졌고 군단타격함대가 복귀한 후로 더 심해졌습니다.”
“메가시티 여러 곳이 나눠가질 수 있도록 해뒀을 텐데.”
군단타격함대뿐만 아니라 기존 우주 플랫폼과 여러 함대도 소유권이 나눠져 있다.
중추가 되는 퍼시픽과 한반도에 존재하는 여러 메가시티가 많은 전력을 가지게 되겠지만 40%를 넘지는 않았다.
퍼시픽을 위주로 해서 혼란을 수습하고 기존에 버려두었던 땅을 수복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레오볼드와 아르마가 동시에 사라지면서 여러 메가시티가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과하게 힘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메가시티 아메리카와 도이치가 마스터를 비판하며 연합 창설에 들어갔습니다. 메가시티 만주를 비롯한 여러 곳이 호응한 상황이고 퍼시픽은 고립된 상황입니다.”
“노스와 사우스를 제외하면 그렇다는 이야기지?”
“네. 퍼시픽과 노스, 그리고 사우스는 한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위치가 한반도와 북태평양인지라 무척 가깝다.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지구는 레오볼드의 부재를 기회로 권력의 재편성을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바였다.
아르마의 통제가 없는 이상 혼란은 당연한 일이고 각 메가시티가 독자적인 행동을 시작한 것도 예측대로였다.
하지만 아메리카를 주축으로 해서 9개나 되는 메가시티가 유지하라는 이름에 낙인을 찍을 줄은 몰랐다.
“70억을 버린 최악의 학살자, 자신만 살겠다고 도망간 비열한 권력자, 그리고 과도하게 메가시티를 억압한 잔혹한 독재자 등으로 부르고 있네요.”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별로 와닿지가 않아.”
유지하가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먹은 욕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단어가 그의 이름 앞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씁쓸한 것은 나름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한 조치였음에도 저들은 그걸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메가시티를 제외한 피해가 너무 커서 그렇다.
최종적으로 12개의 메가시티에 12억의 인구가 수용되었다.
나머지 70억은 그냥 버려졌다는 소리다.
수년 동안 태양계에 플레이그가 나타난 게 수백 번이 넘었고 이는 엄청난 피해를 야기했다.
당시 어스 플릿에서 최대한 요격했지만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수많은 도시가 파괴되었고 2045년에 이르면 탄소배출량이 10년 전의 1/5 수준으로 내려갔다는 통계가 나왔을 정도였다.
“그 증오가 모였습니다. 남은 정치인들은 마스터에 대한 증오를 모아 자신들의 권력에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적이 강하고 증오스러울수록 권력 집중도는 높아지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목표는 뭐야?”
“지구를 통일하는 것입니다. 메가시티 퍼시픽과 노스, 사우드만 흡수하면 나머지는 시간문제에 불과하니까요.”
“배성민 의원이 일처리를 잘못한 모양이군.”
하기야 그 혼란 속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평의회 의장에 올라선 것만 해도 대단하다 할 수 있겠다.
레오볼드는 태양계를 떠나면서 앞으로 인류가 적당히 치고받되 그래도 미래를 향하여, 우주를 향하여 전진하길 바랐다.
하지만 인류는 플레이그가 사라진 뒤 우주개발에 힘쓰기는커녕 유지하라는 이름에 증오를 모음으로써 권력 확대에만 힘쓰고 있었다.
3개의 메가시티를 제외하면 대체로 그런 분위기였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게 그들이 택한 미래니까.”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아직은 아냐.”
수차례 말해왔듯 여기에서 할 일이 아직 남았다.
지구로 복귀하는 것은 가능성을 제쳐둔다 하더라도 모든 일을 끝낸 다음이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지구를 그대로 놔두는 게 옳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게 그들의 선택이니까 말이야. 안 그래?”
“저는 마스터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레오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그녀의 보고를 들었다.
헤이스톤 협곡에서 발가드가 100대에 가까운 골리앗을 몰살시킨 덕분에 전쟁의 결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재 갈리스토는 전쟁 수행 의지를 상실한 상태이며 그람 후작이 항복할 의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수도 입성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자이움은 어때?”
“황제가 다시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아마 이쯤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자고 할 가능성이 큽니다.”
“나도 적당히 마무리를 짓고 싶지만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예를 들면 판그랄 대공.
이번 전쟁에서 그는 손해만 보았으므로 뭔가 만회하고 싶을 것이다.
때마침 카밀라의 영지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겠지만 그게 레오볼드가 판 함정인 건 모를 것이다.
남은 건 두 땅을 한꺼번에 집어삼키고 황제에게 사면장을 내미는 일이었다.
“슬슬 갈리스토를 접수하러 가보자고. 함대 내보내.”
레오볼드는 직할령에서 출항을 준비하는 비행선 함대를 지켜봤다.
군단타격함대에 비하면 참 초라하지만 앞으로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