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68
267화 그를 죽이는 방법
발가드는 협곡 밖의 골리앗 부대를 바라봤다.
100대 이상의 대단한 규모였지만 긴장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알테마의 챔피언이고 그가 타고 있는 것은 드워프 명장들이 만든 골리앗 알비온이기 때문이다.
현 아스테라에서 알비온 이상의 출력을 자랑하는 골리앗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오볼드 전용기로 제작되고 있는 괴물을 제외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놈은 단언컨대 대전쟁 당시에 등장했어도 모든 신과 드래곤을 씹어 먹을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3개의 초고출력 코어를 동기화시켜 에테르를 뽑아내는 무지막지한 녀석이니.
‘그리고 왕은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알테마와 동급, 그 이상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머리 뒤의 헤일로야 대전쟁 당시에도 꽤 보였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언뜻 느껴지는 에테르는 전율을 일게 했다.
‘진짜 신이 되려 하는가? 그런 사람이 알테마는 왜 되살리려 하지?’
전력이 될 수 있는 존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레오볼드는 그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아스테라 전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데 알테마가 왜 필요하겠는가.
다만 첫 번째로 탄생한 드래곤이라는 특수성이 그의 구미를 당기게 했을 수는 있었다.
‘창조신 라사가 최초로 만든 드래곤이란 전설이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연결점을 찾을 것이란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지.’
사실 레오볼드가 알테마의 영혼을 모으려 하는 것은 마르그레타의 노트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녀의 노트엔 대전쟁 당시의 여러 기록이 존재했는데 그중 알테마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누군가가 남긴 것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알테마의 목적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창조신 라사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방법과 수단은 모르지만 당시 드래곤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던 모양이었다.
아웃사이더였던 지갈레온은 전혀 모르는 눈치이고 말이다.
‘라사를 소환하려는 목적은 이계의 마왕들을 쓸어 버리려는 것인가… 무서워서 숨어 버리는 것을 택한 귀쟁이들과는 정반대되는 판단이군.’
레오볼드와 목적이 겹치지만 완벽히 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창조신 라사와 그가 찾는 선지자가 같은 존재라는 건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
또한 레오볼드는 선지자에게 뭔가 부탁하려 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만나고 싶어 하는 것뿐이던데… 지구라는 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광신도 비슷하게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발가드가 판단하기에 알테마의 부활은 확정적이었다.
육체까지 부활한다는 건 아니지만 엘드그라실의 가지로 이것저것 하는 걸 보면 영혼을 모으는 건 가능한 것 같았다.
그녀가 부활한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의 계약은 알테마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봉사하는 것… 그러니 왕과 목적이 대치될 때에는 마냥 따를 수는 없다…….’
다행히 둘의 목적이 일치한다면 좋겠지만 다를 확률도 높았다.
결국 발가드는 알테마를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알테마의 힘이 레오볼드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내게 새로운 생명을 준 알테마에 대한 보답이겠지. 하지만 그 전에…….’
그람 제국의 후예에 대한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이 얼간이들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세 가문으로 나뉘어 헐뜯고 있었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바그란은 그나마 쉽게 제압이 가능했지만 갈리스토의 그람 가문은 상당한 권력을 가졌고 그람 왕국에 이르면 아예 왕족이었다.
그들을 통합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선조 된 자로서 내가 뿌린 씨는 내가 거두겠다.’
뿌린 기억도 없고 방계이긴 하지만 엄연히 그람이라는 성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 성에 잉크칠을 하는 놈들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놈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겠지.’
발가드는 에테르 하트를 가동시키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알비온에 엷은 황금의 기운이 서리더니 뿔과 발톱, 그리고 꼬리에 무형의 칼날이 생성되었다.
이 에테르 블레이드는 레오볼드의 것에 비하면 하찮아 보이지만 대전쟁 당시 무수한 적을 찢어발긴 일등공신이었다.
‘무기는 필요 없다. 내 몸 자체가 바로 무기다!’
에테르를 터트리자 알테마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오오오오!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거센 굉음에 갈리스토군이 움찔거렸지만 여기까지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자이움의 하이 나이트까지 참전한 마당에 밀렸다간 국왕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두려웠던 것이다.
“후퇴는 없다! 두려움조차도 가지지 마라!”
“우리는 이긴다! 그람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갈리스토를 위하여!”
골리앗들이 협곡으로 몰려들자 발가드 그람은 크게 분노했다.
이 잡것들이 감히 그람이라는 성을 들먹여?
알비온의 등에 달린 날개가 짧게 퍼덕이더니 골리앗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점프력을 선보이며 날아올랐다.
쿵!
낙하하는 충격파에 휩쓸린 골리앗들이 마치 종이처럼 날아갔다.
발가드는 주변의 골리앗을 마구 공격하며 소리쳤다.
“내 이름은 발가드 그람이다! 감히 그람이라는 성을 쓰는 놈들은 튀어나와라! 죽여 주마!”
골리앗의 중장갑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그의 주위로 수십 대의 골리앗이 몰려들었다.
* * *
“뭐……? 모조리 파괴? 100대 전부가……?”
“예… 보고에 의하면 한 기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팔커스 2세는 힘이 빠져서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의 문관들이 황급히 부축했으나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대신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건 절대 무너지면 안 되는 부대였어… 전부 정예였단 말이다…….”
그의 말대로 남부에 모인 100대의 골리앗은 갈리스토 전역에서 끌어모은 최정예 기사들이 조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이움의 하이 나이트까지 다수 동원되었기에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되는 부대였다.
그런데 그게 단 한 기의 골리앗에 의해 증발했단다.
팔커스 2세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는지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반다스 그놈의 짓이군… 틀림없어. 반다스 그놈이 약속을 깨고 전장에 나타난 게야…….”
문관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가까스로 한 명이 나섰다.
“실례지만 전하. 반다스 국왕은 이번 전투에 없었습니다. 그는 어제만 해도 로제론에서 자이움의 특사를 맞았습니다.”
팔커스 2세의 목이 획 돌아갔다.
“자이움? 설마 평화를 종용한 건 아니겠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 괴물 같은 골리앗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내 기사들은 누구와 싸운 거냔 말이다!”
“마지막으로 확인이 된 건 발가드 그람이라는 이름과… 이 한 장의 기록입니다.”
팔커스 2세는 기록 마법에 나타난 드래곤 형상의 골리앗을 보느라 그람이라는 성은 신경 쓰지도 못했다.
“대체 뭔가 이건? 드래곤인가? 아니, 지갈레온이라는 놈보다는 확실히 작아.”
“드래곤의 전투 방법을 따라하는 골리앗으로 추정이 됩니다.”
“궁내에선 대전쟁 당시에 활약했던 알비온이라는 골리앗과 닮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팔커스 2세는 그를 미친놈 쳐다보듯 했다.
“대전쟁 세대의 골리앗이라고? 그건 허풍선이들의 전설일 뿐이야.”
“하오나 전하, 발가드 그람이라는 이름은 그람 가문의 먼 선조입니다. 그람 제국의 황족이자 알테마의 챔피언이었던 기사 말입니다.”
나름 논리를 갖춘 발언이었지만 분노한 왕에겐 핑계로 들릴 뿐이었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전투에서 진 놈들이 전설 핑계나 대고 있군! 이제 골리앗 100대가 날아갔는데 뭘로 그놈들을 막을 건가? 대공께선 연락을 기다리고 계시는데!”
팔커스 2세의 횡설수설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갈리스토군이 대패하자 전황은 바그란 쪽으로 확 기울었다.
이번에 날아간 100대의 골리앗은 팔커스 2세의 말마따나 갈리스토의 최정예였다.
헤이스톤 연락소는 위치상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요지였고 거기에 정예병력을 털어 넣었는데 깔끔하게 증발하고 나니 남은 병력이 별로 없었다.
350대의 골리앗이 건재하지만 대부분 정규 출력도 내지 못하는 구세대 기종이라 대단한 기대는 할 수 없었다.
한편 갈리스토 내의 그람 후작가에선 이번 전투에서 대활약한 발가드 그람이라는 이름에 주목했다.
“정말 발가드 그람인가?”
“예. 탑승기는 드래곤 형상의 알비온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전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알테마의 챔피언이라…….”
그람 후작은 창가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대전쟁 당시의 기록은 대부분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에 활약한 주요 가문은 전설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람 후작가는 당시 제국에서 편찬한 연대기를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왕가에서 적발하면 쉽게 넘어가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뿌리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과거 그람 제국의 영광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년 전, 우리 가문은 그람 제국을 통치했었다. 아스테라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저 엘프들마저도 우리를 인정했었지. 하지만 지금의 그람 가문은… 몰락했다.”
“각하께선 갈리스토의 공신이시며 또한 수도방어 사령관이십니다. 그리고 뭇 귀족의 귀감이 되시지 않습니까?”
그람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해야 갈리스토의 일개 귀족일 뿐이지. 그람의 직계도 아닌 방계를 떠받들던 자가 떨어져 나와 세운 근본도 없는 국가란 말이네.”
“각하, 그 말씀은…….”
부관들은 주위를 쳐다보며 듣는 자가 없는지 경계했다.
후작의 방금 발언은 왕의 귀에 흘러들어가는 날에는 그냥 넘어가진 못할 것이다.
물론 그람 가문의 위세가 있으니만큼 함부로 처분할 순 없겠지만 왕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런데 그람 후작은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번 전쟁은 진 거나 다름이 없어.”
“하지만 각하, 국내엔 아직 300기가 넘는 골리앗이 있습니다. 수도의 방어 시스템도 건재하고요.”
“다 허울 좋은 깡통일 뿐이야. 단적으로 묻겠네. 그 300대의 골리앗으로 이 알비온을 막을 수 있겠나? 알테마의 챔피언에게 대적이 가능한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갈리스토의 자랑인 에테르 캐논 시스템은 내 소관이지. 그리고 바그란이 쳐들어오면 난… 그걸 작동시키지 않을 거네.”
“각하!”
갑작스런 폭탄발언에 부관들이 입을 쩍 벌렸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반역이었다.
그람 후작은 결심이 선 듯 말했다.
“반다스 왕과 지갈레온이라는 드래곤은 나서지도 않았네. 우린 판그랄 대공의 지원을 받고서도 이 모양이지. 신의 유물은 도난당했다고 하던가? 아스테라 판테온들께서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게 분명해.”
“그러면 항복하잔 말씀이십니까?”
“전쟁은 끝났네. 이 나라는 그람 황족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 일어나게 될 걸세. 과거 전 대륙을 호령했던 그람 제국을 다시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
이쯤 되면 망상인지 진담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갈리스토가 바그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갈리스토의 뒤엔 판그랄 대공이, 그의 뒤에는 자이움 제국이 있었다.
반다스 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한편 자이움 황궁에선 더 심각하고 무거운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새로이 황제에 즉위한 바라크는 판그랄 대공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약속대로 전장에 나서지 않았고 지갈레온도 내보내지 않았소. 그런데도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동원해야 한다고? 이치에 맞지 않소.”
“폐하, 여기에서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장차 자이움을 넘볼 것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놈이 바그란과 갈리스토 선에서 만족할 것 같습니까? 폐하께선 놈이 왜 그동안 숨겨 놨던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고 생각하십니까?”
비장의 무기란 발가드 그람과 알비온이었다.
대전쟁을 다루는 몇 안 되는 역사서에서나 가끔 볼 수 있었던 전설적인 이름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바라크 황제를 비롯한 다수 귀족들은 그 사실을 부정했지만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발가드 본인이 맞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과거의 인물이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율스런 전투력을 봐선 부정하긴 힘들었다.
판그랄 대공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반다스 왕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라크 황제는 회의적이었다.
“특사의 말에 의하면 그는 갈리스토로 만족한다고 했소. 그러니 이쯤 해서 덮읍시다. 어차피 자이움의 충성스런 신하인데 두 명이 하나가 되었다 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요.”
대공은 황제의 어이없는 현실 인식에 넌더리가 났다.
그놈이 갈리스토로 만족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필시 황제는 알테마의 챔피언이라는 후광에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갈리스토를 흡수한 다음에는 내 차례다. 그렇게 되기 전에 놈을 죽이겠다.’
당장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발동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레오볼드가 약속을 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브랑데와 달리 자이움의 광역살상마법 가동 절차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의 의지만으로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겠지.’
예를 들면 크로이츠 백작이라든가…….
반다스의 반려인 그녀는 황제의 복귀 명령에도 불구하고 바그란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핵심 병력 또한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영지엔 가신들뿐이었다.
‘크로이츠의 영지를 친다면 반다스 그놈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터.’
사업적인 관계 운운하지만 여자가 침대에서 베개를 눈물로 적시면 버틸 남자 없다는 게 고금의 진리였다.
‘여자를 미끼로 놈의 행동을 끌어낸다. 그리고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로제론에 처박는다.’
번화한 도시라 점령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강해서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러니 부숴 버릴 수밖에.
판그랄 대공은 자신을 부르는 황제의 말도 무시하고 통신을 끊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순 없었다.
그가 살 수 있는 길은 레오볼드 반다스를 죽이는 것뿐이었다.
* * *
신의 유물을 훔친 델피나는 곧장 바그란의 왕궁으로 향했다.
녹턴을 품은 그녀에게 거칠 것은 거의 없었다.
전쟁 중이라 삼엄한 경비도 허무하게 뚫렸고 그녀는 로제론의 번화가를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그러나 막상 왕궁에 잠입하려 시도하니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미쳤어… 무슨 마법을 이렇게 깔아 둔 거야?’
밖에서 느껴지는 에테르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물론 그녀는 그런 마법에 구애받지 않는 녹턴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그레타를 호위하듯 같이 외출한 레오볼드를 보고 임무를 포기해야 했다.
‘저 헤일로… 마법도 속임수도 아냐. 신격을 가졌다는 증거야.’
반다스 마을 해안에서 만났을 때에도 괴물이었는데 이제는 건드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에테르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했다.
로제론의 시민들이 홀린 듯 그에게 길을 비켰고 무릎을 꿇었다.
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델피나는 그와 시선이 마주친 후 임무를 포기하고 말았다.
‘황녀를 죽이는 것보단 내 목숨이 더 중요해.’
그런데 마르그레타의 표정이 좋아 보이는 건 왜일까?
놀랍게도 그녀는 레오볼드의 곁에 있으면서 즐거운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인간 왕국에 사로잡힌 비운의 황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델피나는 그녀에게 이를 갈았다.
‘내 동족은 안식을 취할 땅도 못 찾아서 방랑하고 있는데 당신이란 사람은 황족이 되어서…….’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이 증오스러웠다.
그녀의 모든 것을 망친 다음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튀어나갔다간 오히려 자신이 교수대에 걸릴 판이었다.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돼…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가능성은 낮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해볼 수밖에.
델피나는 황녀를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엘브랑데로 돌아왔다.
뜻밖에도 드리즈덴은 그녀를 책망하지 않았다.
“황녀를 죽이는 건 실패했군. 하긴 티렌델이 있는 이상 기대하지도 않았네.”
“…티렌델이 아니라 레오볼드 그자가 문제예요. 신격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한데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래서 우리가 테라호크의 유물을 구한 게 아니겠는가? 내게 넘기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시계를 건네주었다.
거래를 한 이상 그녀도, 그녀의 동족도, 미래까지도 드리즈덴의 손에 맡겨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늙어 빠진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내가 지정하는 연구소로 오게.”
엘브랑데 외곽에 위치한 비밀연구소에서 테라호크의 영혼과 접촉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유리관에 등장한 하얀 에테르 덩어리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드리즈덴의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레오볼드 반다스. 우리가 찾는 자의 이름이다. 시간과 공간의 관리자여, 그의 정확한 나이는 얼마인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이곳에 들어온 지 53년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이곳? 무슨 의미인가? 여기 아스테라 대륙을 뜻하는 건가?”
―아스테라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공간의 작은 대륙일 뿐이다…….
“그 너머는 신들의 영역이란 거군.”
여기에 드워프가 있었다면 하늘 너머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가설이 맞았다며 기뻐했겠지만 드리즈덴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하늘 너머는 범접해서는 안 될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 레오볼드 반다스란 자의 나이가 53세 맞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여기에 온 지 53년이 지났다는 것뿐이다…….
“그 전에는 어디에 있었지? 나이는 몇이고?”
나이를 계속 물어보는 것은 인간일 것으로 짐작되므로 그의 어린 시절로 델피나를 보내 죽이기 위함이다.
신과 드래곤의 챔피언조차 수명 문제는 어찌할 수가 없었고 드리즈덴에게 인간의 수명은 극히 짧다는 게 상식화되어 있었다.
래오볼드도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레오볼드는 에테르 문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왔고 현재 나이는 125세에 가까웠다.
드리즈덴은 그걸 모른 채 어린 시절이 언제인지만 연거푸 물었지만 테라호크의 영혼은 답을 거부했다.
“53년 전에는 뭘 했는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는 거군. 시계를 그 이전으로 돌릴 수 있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공간은 나의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 엘드그라실의 힘을 빌린다 해도 몇 개월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몇 개를 더 물어봤지만 나오는 정보가 없었다.
이래서야 시간과 공간의 신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만 아스테라의 신들이란 원래 이렇다.
그래서 그들을 못미더워한 엘프가 수호자를 자처한 게 아니겠는가.
드리즈덴은 고민 끝에 델피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네만 자네가 가줘야겠네.”
“53년하고도 몇 개월 전으로 말이죠? 어린 시절이라는 확신도 없는데 괜찮은 건가요?”
“자네가 실패하면 남은 방법이 몇 개 없어. 그를 죽여야 아스테라가 평화롭고 풍요로울 수 있네.”
몇 개 없는 방법이란 전면전과 미티어 샤워, 그리고 세상의 파멸일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 전에 레오볼드를 죽일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해봐야 한다는 게 드리즈덴의 판단이었다.
델피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섀도우 엘프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엘브랑데에 정착할 수 있는 쥐꼬리만 한 가능성을 잡을 것인가, 이대로 인간들에게 쓸려 나갈 것인가는 그녀의 선택에 달렸다.
“좋아요. 과거로 가서 그를 죽이고 오죠.”
“잘 생각했네. 그럼, 여기에 들어가게.”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영혼의 샘이었다.
옷을 벗고 들어가 있으려니 샘과 주변에 황금빛 에테르가 채워졌다.
연구실 전체가 웅웅거리며 빛을 토해냈다.
델피나는 눈을 감고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지러워…….’
토악질을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자 눈꺼풀에 아른거리던 빛이 사라졌다.
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생전 처음 보는 공간이 그녀를 반겼다.